권태
倦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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倦怠.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온갖 상황에서 자주 찾아오는 감정 중 하나. 가까운 관계의 사람 사이에서도 상당히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며, 매우 즐기던 취미조차도 이게 오면 한 방에 하기 싫어지는 일로 변모하는 무시무시함을 보여준다... 권태감을 자주 느끼는 사람은 작심삼일이나 의지박약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2]
권태감은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도파민이 부족하거나, 지속적으로 도파민에 노출되어 보상중추가 맛이 가 의욕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결과라고 한다. 지나친 자극에 보상중추를 중독시키는 경우나, 비타민 D 등이 부족해서 도파민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 만성적인 권태를 느끼기 쉬워진다.
어떤 일에 한 번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이 뭐가 됐든 간에 하기 싫어진다. 권태감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일을 장기적으로 해야 할 경우 매우 끔찍한 기분을 맛볼 수도 있다. 특히 함부로 끊을 수 없는 대인관계에서 권태감이 오면 매우 치명적인데, 두 사람 다 상황이 끔찍해지기 때문이다.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은 이제 싫증이 난 상대가 자꾸 자신을 상대하려 하니 스트레스를 받고, 상대방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이유 없이 자신을 멀리하는 것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사춘기를 겪는 중고등학교에서는 대인관계에 권태기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학기 말에 상담실 이용이 그전보다 부쩍 늘어난다고 한다.
다만 원래부터 하기 싫었던 일을 갖다가 권태감이 온다는 표현을 쓰는건 부적절하다. 외부 조건이 변해서 싫어진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특히 고등학교 특채로 20세부터 공무원 된 사람이나 일찍 입대한 부사관들처럼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 종사자들이 종종 겪으며 이로써 허황된 계획을 갖고 기계 같은 삶에서 벗어나 사람으로서 자유를 갖겠다든가 원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는가 하는 등의 생각 속에서 과감히 하는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잔혹에서 콜린 윌슨은 욕망의 수확체감의 법칙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은 악하며 충동적으로 쾌락을 지향하지만 처벌때문에 욕망을 억제한다는 사드의 그럴듯한 헛소리를 대놓고 까버린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면 목표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다시 약동하기까지의 공백을 권태라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생물이 노력하는 양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고 그 후엔 기나긴 권태와 또다시 약간의 만족을 위한 기나긴 고난을 행하기 때문에 생의 욕망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계속해서 고뇌의 사이클에 가둬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허무주의적인 가치관을 설명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신은 무료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은 혼자서 따분했다. 그래서 이브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둘이서 따분했다. 다음에는 아담과 이브와 카인과 아벨이 다같이 따라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무료함도 증가하게 되었다. 세계의 인구는 더욱 증가했고 사람들은 집단으로 따분했다. 심심풀이로 높은 탑을 쌓았다. 하지만 탑이 높아질수록 그 또한 따분한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무료함이 세계를 지배했다.'''
위의 이야기처럼 인간이 충동적으로 섹스의 바벨탑을 쌓는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지겨운 것이 되어버린다. 사드 후작 역시 일생을 성적 쾌락을 위해서 비정상적인 행동에 몰두했지만 그럴수록 성적 쾌감은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욕구의 충족이 반복될수록 거기에서 오는 쾌감은 줄어든다.[3] 다만 주기에 따라 줄어드는 속도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를 유념하는 게 중요하다. 또 권태기가 지나간 다음엔 전에 권태감을 느꼈던 것을 다시 찾는 경향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게 '''대인관계'''일 경우 이미 주변 대인관계가 권태기 때 처신을 잘못해서 작살난 상태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시전이나 하고 자빠질수도 있다.
심리학이나 생물학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베버의 법칙 정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이 단어를 이용해 '''X태기'''같은 신조어가 나타났다. 예를들면 블태기는 블로그 활동에 싫증이 났다라는 뜻.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더니스트 이상이 농촌에서 머무르면서 농촌이 단조롭다고 생각하며 권태를 느끼는 내용이다. 역시 이상의 작품답게 의식의 흐름대로 써 있다.
1989년 소설 데뷔작. 한국에서 처음으로 쓴 성심리 묘사 위주의 에로티시즘 장편소설이다.
1. 감정
[image][1]
倦怠.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온갖 상황에서 자주 찾아오는 감정 중 하나. 가까운 관계의 사람 사이에서도 상당히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며, 매우 즐기던 취미조차도 이게 오면 한 방에 하기 싫어지는 일로 변모하는 무시무시함을 보여준다... 권태감을 자주 느끼는 사람은 작심삼일이나 의지박약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2]
권태감은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도파민이 부족하거나, 지속적으로 도파민에 노출되어 보상중추가 맛이 가 의욕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결과라고 한다. 지나친 자극에 보상중추를 중독시키는 경우나, 비타민 D 등이 부족해서 도파민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 만성적인 권태를 느끼기 쉬워진다.
어떤 일에 한 번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이 뭐가 됐든 간에 하기 싫어진다. 권태감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일을 장기적으로 해야 할 경우 매우 끔찍한 기분을 맛볼 수도 있다. 특히 함부로 끊을 수 없는 대인관계에서 권태감이 오면 매우 치명적인데, 두 사람 다 상황이 끔찍해지기 때문이다.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은 이제 싫증이 난 상대가 자꾸 자신을 상대하려 하니 스트레스를 받고, 상대방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이유 없이 자신을 멀리하는 것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사춘기를 겪는 중고등학교에서는 대인관계에 권태기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학기 말에 상담실 이용이 그전보다 부쩍 늘어난다고 한다.
다만 원래부터 하기 싫었던 일을 갖다가 권태감이 온다는 표현을 쓰는건 부적절하다. 외부 조건이 변해서 싫어진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특히 고등학교 특채로 20세부터 공무원 된 사람이나 일찍 입대한 부사관들처럼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 종사자들이 종종 겪으며 이로써 허황된 계획을 갖고 기계 같은 삶에서 벗어나 사람으로서 자유를 갖겠다든가 원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는가 하는 등의 생각 속에서 과감히 하는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잔혹에서 콜린 윌슨은 욕망의 수확체감의 법칙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은 악하며 충동적으로 쾌락을 지향하지만 처벌때문에 욕망을 억제한다는 사드의 그럴듯한 헛소리를 대놓고 까버린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면 목표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다시 약동하기까지의 공백을 권태라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생물이 노력하는 양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고 그 후엔 기나긴 권태와 또다시 약간의 만족을 위한 기나긴 고난을 행하기 때문에 생의 욕망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계속해서 고뇌의 사이클에 가둬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허무주의적인 가치관을 설명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신은 무료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은 혼자서 따분했다. 그래서 이브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둘이서 따분했다. 다음에는 아담과 이브와 카인과 아벨이 다같이 따라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무료함도 증가하게 되었다. 세계의 인구는 더욱 증가했고 사람들은 집단으로 따분했다. 심심풀이로 높은 탑을 쌓았다. 하지만 탑이 높아질수록 그 또한 따분한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무료함이 세계를 지배했다.'''
위의 이야기처럼 인간이 충동적으로 섹스의 바벨탑을 쌓는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지겨운 것이 되어버린다. 사드 후작 역시 일생을 성적 쾌락을 위해서 비정상적인 행동에 몰두했지만 그럴수록 성적 쾌감은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욕구의 충족이 반복될수록 거기에서 오는 쾌감은 줄어든다.[3] 다만 주기에 따라 줄어드는 속도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를 유념하는 게 중요하다. 또 권태기가 지나간 다음엔 전에 권태감을 느꼈던 것을 다시 찾는 경향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게 '''대인관계'''일 경우 이미 주변 대인관계가 권태기 때 처신을 잘못해서 작살난 상태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시전이나 하고 자빠질수도 있다.
심리학이나 생물학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베버의 법칙 정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이 단어를 이용해 '''X태기'''같은 신조어가 나타났다. 예를들면 블태기는 블로그 활동에 싫증이 났다라는 뜻.
2. 이상의 수필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더니스트 이상이 농촌에서 머무르면서 농촌이 단조롭다고 생각하며 권태를 느끼는 내용이다. 역시 이상의 작품답게 의식의 흐름대로 써 있다.
3. 마광수의 소설
1989년 소설 데뷔작. 한국에서 처음으로 쓴 성심리 묘사 위주의 에로티시즘 장편소설이다.
[1] 네모바지 스폰지밥 에피소드 중 하나인 이사간 징징이 에피소드의 장면. 징징이는 스폰지밥과 뚱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해 결국 이사를 결심하고, 자신과 비슷한 오징어들이 사는 도시로 이사한다. 처음엔 좋아하지만 점차 반복적이고 개성 없는 일상에 싫증을 느껴, 결국 에피소드 후반에 다시 비키니 시티로 돌아간다. 에피소드 취지는 개성을 무시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지만, 권태를 느끼기까지의 과정을 표현한 에피소드라고 하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2] 당연한 게, 이 사람들은 뭘 하든 간에 쉽게 싫증을 잘 느끼고 때려치고 다른 일을 찾거나 무기력의 늪에 빠지기 매우 쉬운 유형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동기가 생겨나는 속도도 빠르지만 '''식는 속도는 더 빠르다'''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게 자주 반복되다보면 뭘 해도 제대로 발을 못 붙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지치기 때문에 결국 무기력감에 빠지는것.[3] 쾌감을 행위의 동기로 친다면, 그것이 줄어들수록 그것이 동기로써 기능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