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작가)

 


'''일제강점기의 작가
이상
李箱'''
오른쪽이 이상. 왼쪽은 경성고등공업학교 동기인 원용석이다.
'''본명'''
김해경(金海卿)
'''필명'''
이상(李箱)
'''본관'''
강릉 김씨
'''출생'''
1910년 9월 23일
(음력 8월 20일)
[image] 한성부[1]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사망'''
1937년 4월 17일 (26세)[2]
[image] 일본 제국
도쿄 부 혼고 구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
(현 도쿄 도 분쿄 구 도쿄대학 부속병원)
'''학력'''
신명학교 졸업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3]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4][5]
'''신체'''
168cm, 51kg (1926)
'''직업'''
시인, 소설가, 건축가
'''등단'''
『이상한 가역반응』
''(異常ナ可逆反應, 1931,《조선과 건축》)''
건축무한육면각체
''(建築無限六面角體, 1932)''
'''대표작'''
오감도
''(烏瞰圖, 1934,《조선중앙일보》)''
날개
''(1936,《조광》)''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문학가 이상
2.3. 금홍이
2.4. 일본 유학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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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재학 중이던 시기의 이상.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사진 <추억의 가지가지>에서.[6]
조선총독부 소속 건축기사(공무원)로 일하던 시기의 이상.
시인으로 활동할 당시의 이상.
1936년 흥천사에서의 이상.[7]
출판사 창문사의 사무실에서.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이상은 일제강점기 시기 활동한 한국의 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이다. 1930년대의 선구적인 모더니즘 작가로서, 불과 2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가운데 2000여 점의 시, 소설, 수필을 써냈다. 생전에는 그의 지인들만이 이상을 천재로 평가했으나, 사후에 대중적인 천재로서 평가받게 된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10년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김연창(金演昌)[8]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며, 본관은 강릉 김씨(江陵 金氏)[9]이다. 관련 기사. 거의 태어나자마자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되어 유교적인 가치관과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양어머니(백모)는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구박받던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풀었고 이상을 입양한지 얼마 안되어 자신에게도 아들이 태어나자 이상을 대놓고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10] 백부 또한 어린 조카 김해경을 입양했는데도 아들이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상은 화가를 지망했지만 백부가 "세태가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를 곯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환쟁이는 안 된다"고 반대해서 결국 백부의 바람대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11] 졸업하고[12] 조선총독부 건축 기사가 되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 탓에 이상은 현대화된 도시인의 삶을 살았지만, 보수적인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어 당시 신세대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이 탐탁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로서 본인도 이러한 성향을 많이 고민했는지, 말년에 이상이 도쿄에서 김기림에게 쓴 편지에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요.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라고 쓰기도 하였다.
'이상' 이라는 필명은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하던 당시 한 인부가 김해경을 '긴상(김씨)'라고 불러야 할 것을 김 씨와 이 씨를 헷갈려 실수로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보성고보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 구본웅[13]이 선물로 준 오얏[14]나무(李 : 오얏나무 리)로 만들어진 화구상자(箱 : 상자 상)를 받고 친구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정하게 되었다는 설도 나와 있다. 전자는 이상의 여동생과, 아내였던 변동림이 했던 증언이지만 후자는 보성고보 시절 직접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고 서명한 것이 발견되어 보다 설득력이 높다.

2.2. 문학가 이상


1930년, 조선지에 연재된 장편 소설 12월 12일로 문학계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31년 7월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BOITEUX·BOITEUSE', '공복' 등의 일본어 시들이 수록된 <이상(異狀)한 가역반응> 이라는 첫 시집을 냈다. 그 해 8월 일본어로 쓴 시인 '조감도(鳥瞰圖)' 와 '삼차각설계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같은 해에 백부가 죽자 이상은 친가로 돌아오게 된다. 친부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가난한 전직 이발사였는데 양반이라는 자존심이 강했던 백부의 집에서 자란 이상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친부가족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이상은 이 당시 자신의 모습을 <슬픈 이야기>라는 수필에서 묘사하고 있다.
1932년 '비구(比久)'라는 가명으로 소설 '지도의 암실',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면서 문학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던 차에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던 이상은 1933년 심한 각혈 증세를 겪고,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는다. 폐결핵을 진단받은 이상은 곧바로 건축 기사일을 그만 두었다.

2.3. 금홍이


회사를 그만둔 후 이상은 요양차 갔던 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알게 된다. 요양에서 돌아온 이상은 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금홍을 불러 그녀를 마담 자리에 앉힌 후 금홍과 동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방은 잘 되지 않았고 심심해진 금홍이는 외박을 하는 일이 빈번해진다.[15] 그러자 이상은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났냐며 금홍을 몰아세웠고 이에 금홍은 가출을 하거나 이상을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였는데 이상은 이에 크게 놀랐던 듯하다.[16] 결국 금홍은 몇 번의 가출 끝에 이상의 집을 완전히 나가버리고 다방 <제비>는 폐업한다.
그럼에도 금홍을 퍽 사랑했는지 '이런시'에서 금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시 - 이상

역사(役事)[17]

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18]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 한[19]

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보면 알겠지만 다른 지방에서 기생으로 일하는 금홍의 필연적인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굉장히 단편적인 해석이다. 이상의 다른 문학 작품을 살펴보았을 때, 자아 합일에 대한 갈등을 그려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 시풍을 비판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상의 소설 '날개' 역시 금홍과의 동거 생활에서 얻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주인공(이상 자신)은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아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능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중간에 나오는 '연심이'는 금홍의 실제 이름이다. 이외에도 이상은 사망 직전인 1936년, 금홍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한 '봉별기(逢別記)'라는 단편을 쓰기도 했다. 이 단편이 마음에 들거든 인디밴드 '가을방학'의 '속아도 꿈결'이라는 노래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제비가 폐업한 직후 이상은 다방 제비에 드나들던 문학가들의 추천으로 1934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명사들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박태원의 신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河戎)' 이라는 가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구인회에서 그는 특히 같은 병을 앓고 있던 소설가 김유정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심지어는 동반자살을 권유하기도 했다.(김유정의 거절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20] 한편 이상은 금홍과 헤어지고 다방 <제비>가 망한 후에도 1935년에 다시 인사동에 카페 <학>, 종로 1가에 다방 <69>을 차례로 개업했으나 모두 대차게 말아먹게 된다.[21][22] 경영에 있어서는 천재가 아니었던 듯. 오죽했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냐'''고 하소연했을 정도. 결국 그 사이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가게 된다.

2.4. 일본 유학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193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변동림[23]결혼한 이상은 서구화된 문물에 익숙해지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24] 1937년 어느 날, 무작정 도쿄로 여행을 떠났으나[25], 이내 도쿄에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한다.[26]
하지만 도쿄에 도착한 후 폐결핵이 악화되었고, 새 출발의 발판 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도쿄에 대한 환멸감을 느껴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 이상은 조선에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적힌 편지를 보낸 후 햇빛도 들지 않는 싸구려 방을 얻어서 홀로 은거해 버린다.[27] 그리고 그 직후 도쿄에 온 지 몇 달도 안 된 시기인 1937년 2월, 도쿄에서 불령선인(사상불온혐의)으로 체포되어, 도쿄 니시칸다(西神田) 경시청 경찰서에 구금되었다.[28][29] 그러나 심한 병(폐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됐고,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4월 17일 새벽 4시에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30] 이상의 부고를 듣고 급히 도쿄로 온 변동림이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다가 6.25 전쟁 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유실되었다.[31]
후기 작품인 <종생기>에서는 자신의 최후를 썼다. 작품 속에는 자신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쓰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1937년 음력 3월 3일을 생년과 대입해 보면 실제 사망 일시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세의 귀재 李箱은 그 通生의 대작(終生記) 한 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1937년 丁丑 3月 3日 未時'''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卒하다. 향년 만 25세와 11개월. 오호라! 상심 크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 하나의 李箱 구천을 우러러 호곡하고 이 寒山 一片石을 세우노라. 애인 정희는 그대의 몰후 수삼인의 비첩된 바 있고 오히려 장수하니 지하의 李箱아! 바라건댄 명목하라.

다만 공인된 생년인 1910년 8월 10일과 1937년 3월 3일을 계산하면 25세 11개월이 아니라 26세 6개월이 나오는데, 작품에서 완벽하기로 소문난 이상이 자신의 생몰을 틀린 것은 실제 생년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 이상의 판단 착오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의 임종시 유언은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일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 "멜론이 먹고 싶다"였다고 술회하였다. 다음은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회고한 변동림의 글이다.

나는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닿았다. 동대 병원 입원실로 직행하다. 이상의 입원실, 다다미가 깔린 방들, 그중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상이 거기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크게 뜨다. 반가운 표정이 움직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옆에 앉아 손을 잡다 . 안심하는 듯 눈을 다시 감는다. 나는 긴장해서 슬프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나, 죽어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상은 눈을 떠보다 다시 감는다. 떴다 감았다.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32]

의 메론." 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천필옥[33] 에 메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97쪽 중)

그의 생가는 종로구 통인동(서촌)에 있다. '이상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이상의 생가를 현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 생가에서 이상의 생애와 작품들을 알리고 있다. 이상이 살아생전 지은 시들과 소설, 삽화의 스캔본을 열람할 수 있다. 2018년 12월에 라이엇 게임즈의 후원으로 새롭게 재개관하였다. 관련 기사.
사족으로 대표 시들이 너무 해괴한지라 "그냥 이거 아무 의미없이 휘갈겨 쓰고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라는 소리도 있으나, 학계의 전반적인 반응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이다.[34] 이상은 문학 잡지의 편집자로 일하기도 하였고(구인회의 회지를 그가 편집했다.) 문학가로서의 데뷔작인 12월 12일, 휴업과 사정 등은 평범한 단편 소설이다. 또한 이상이 시를 아무 계산 없이 썼다고 하기에는, 그의 글들이 서로 맞닿아 상통하는 부분이 너무 자명하다. 비록 평소 행동은 좀 괴짜스러웠을지라도, 문학가로서의 이상은 언제나 차분했던 것이다. 다만 이상은 짧은 시간동안 2,000여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자동기술법을 사용하기에는 작업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는 주장도 있다.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제작 '공식'이 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그의 글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계속 시도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항을 겪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그의 비상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증거.

3. 평가


林檎一個ガ墜チタ。地球ハ壞レル程迄痛ンダ。最後

最早如何ナル精神モ發芽シナ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 이상, <최후>

이상은 전문용어와 외국어, 그리고 숫자[35] 및 기호의 남발, 문법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문장, 기존의 언어체계를 무시하는 기법 등, 모더니즘에 입각한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가 쓴 시는 아직까지도 '최신식' 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기 위해 시에서 띄어쓰기를 전혀하지 않는 ‘다다’ 기법을 사용했으나, 알파벳, 불어, 독어와 달리 음절단위의 문장으로 구성된 한국어는 다다이즘 기법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실험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 참고로 이는 이상의 후기시에 대한 설명으로 이상의 시작 초기에 쓴 일본어 시들에서 이상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쓴 방법은 시에 수학기호나 외국어 등을 사용[36]한 것이었다.
또한 성적인 표현을 난해하다할뿐이지 표현하고자 할때는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하였다. [37]
이상은 전위적인 형태의 시로 가장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오감도'가 처음 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독자들의 반발은 매우 거센 반면에[38], 문학계에서는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 듯하다. 심지어 이상의 문체를 따라하는 학파까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삼사문학파[39] 하지만 이상은 백부로부터 유학과 한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이과를 전공했으면서도 고대 물리학 등 계산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서양의 가치관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그의 수필에서 잘 드러난다. 반대로 삼사문학파 동인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신식 문물을 접하며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 이외에는 서로 기본적인 사고의 방식부터 맞지 않아 삼사문학파는 이상의 신드롬을 이어가지 못하고 이상의 부록 현상으로 끝나버렸다. 이에 대해 답답해하던 이상은 서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 도쿄행을 하게 된다.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분열적인 분위기가 서구화, 현대화된 사상과 생활을 염원하였으나 이를 100%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유교적, 전통적인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이상이 일본어를 모국어에 가깝게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국어 작품에도 일본어투가 많이 섞여 들어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상이 쓴 시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거세지만 그가 쓴 수필을 보면 이상이 가진 글에 대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촌여정>과 <권태>라는 작품에는 현대화되고 서구화된 일상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전의 전통적인 자국의 모습을 간직한 시골에서의 일상에 적응을 못하고 권태에 빠진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하였고 간결한 문체를 바탕으로 수능에 출제된 <조춘점묘>는 쉴 틈 없이 꽉막힌 답답한 현대인의 일상을 콘크리트로 사방이 둘러싸여 어디로 가든 같은 모습을 한 빌딩에 비유하면서 그 빌딩의 소유자는 보험회사라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점을 들어 개인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였다.[40] 이상의 수필들은 작가에 대하여 모른 채 단순히 글 자체로만 감상하면 마치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었던 60년대말이나 70년대 작가가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글의 지은이가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자 깜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국문학 전공자들이 더 그렇다고 한다.
이상 본인은 자신이 다방면에서 천재라고 생각했고 그가 남긴 난해한 글들과, 자전적인 소설을 읽어보면 자신이 "천재"라는데에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진 일종의 자칭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상은 주요 공부 분야였던 건축과 문학만이 아니라 그림과 외국어[41] 에도 어느정도 조예가 있었다. 그가 다닌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일제강점기때 경쟁률이 매우 치열했으며, 현재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엘리트 학교였다. 또한 그 학교 내에서 이상은 입학 이후 졸업때까지 수석으로 학업이 탁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등교육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익힌 공부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경제적, 가정적으로도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을 앓는 치명적인 고통을 겪었다.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는 자조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 유래된다.
이상이 디자인 한 작품은 건축잡지인 조선과 건축 1929년판 표지, 소설 날개의 표지 등이 있으며 조선과 건축 1929년 판 표지의 경우 공모전에서 1위로 입상된 것으로 잡지에서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 사용되었다.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고은이 쓴 "이상 평전"이 있는데, 이 평전은 이상에 대한 비하적이고 악의적인 시각을 난해한 문장으로 숨겨놓았다.
위의 평전에 반발해선지 김연수는 그의 소설 '꾿빠이, 이상'에서 죽을 때까지 이상의 시를 연구하며 그의 삶을 쫓아가는[42] '''일흔 살''' 아마추어 이상연구가를 등장시킨다(...). 명백한 디스. 한편 이 기사에서 내일 모레면 칠순이 되는 경제학자 김학은 교수가 수학 이론을 가지고 이상의 시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김연수와 김학은 교수는 이상과 마찬가지로 문과학문과 이과학문을 동시에 연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과 동질감을 느끼는 듯하다.

4. 대중매체에서


2013년 11월 28일 방영된 MBC의 '드라마 페스티벌 - 이상 그 이상'도 이상을 다룬 작품이다.
이상을 중심으로 그가 전 총독부 동료의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이 전개되며, 이상 역은 조승우, 구본웅은 정경호, 이상을 사모한 여인은 박하선이 연기하여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는 소설과 동명의 영화는 이상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해석과 그 뒤에 숨은 비밀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5절에 '날자꾸나 이상'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상의 시 '오감도 제15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스모크'''라는 뮤지컬이 있다. 초연이 2017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진행됐다. 스토리가 지루하고 난해하다는 평이 다수 있었지만, 나름 흥행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프로듀서로는 김수로, 김민종이 참여했다.
팬레터가 이상과 김유정, 그리고 경성 문인 모임 구인회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극 중에는 이상이 모티브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극의 대사와 가사에 그의 작품 구절 일부가 인용되었다.
'훈민정음 암살사건' 등을 쓴 김재희 작가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인 '경성 탐정 이상'을 쓰기도 했다. 이상이 작품의 삽화가가 되어주었던 동료 작가인 '구보' 박태원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서양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진보된 근대사상과 문명, 그리고 근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남아있는 조선의 전통적인 모습과 보수적인 사상이 섞인 모습이 된 일제강점기의 조선을 배경으로, 셜록 홈즈 포지션인 이상과 왓슨 포지션인 구보가 실존했던 순수문학 작가 단체인 구인회[43]의 입단 시험으로서 그곳에 속한 선배작가인 염상섭이 의뢰한 사건을 함께 해결한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베이커가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이 만든 그의 다방 '제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이다.
주로 가상의 사건에 대해 다루는 만큼 가상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지만, 위에서 말한 염상섭이라든지, 이상의 연인이었던 금홍, 같은 구인회에 속한 김유정이나 전형필, 석주명, 엄복동, 권기옥 등 실존 인물들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2020년 11월 5권으로 완결됨 [44]
토리코믹스에서 연재 중인 모던 뱀파이어 슬레이어라는 웹툰에서 뱀파이어들을 물리치는 슬레이어로 등장한다. 일본의 비밀조직 흑룡회가 군과 연계해 경성에 뱀파이어들을 들여와 지옥문을 열 계획을 꾸미고, 그것을 막기위해 이상이 활약하는 것이 주 내용. 박태원김유정 등 구인회의 다른 멤버들도 함께 등장하지만, 아직까지는 큰 활약이 없고 구색맞추기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이상과 활동시대는 겹치지만, 별 접점이 없었던 김내성이 중요한 등장인물로 등장. 그외의 중요 인물은 모두 가상 인물들이다.
작품 내에서 재치있는 말솜씨를 가진, 뻔뻔스럽고 자신감이 강한 바람둥이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젊은 시절의 이상은 놀기를 좋아하고 호탕하면서도 재미있는 언변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다만 겁이 많다든가, 하는 설정은 단순히 극의 재미를 위한 설정인 듯.

5. 여담


  •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을 한 경력이 있으니 공무원 출신이다. 현재의 건축직 혹은 토목직의 선배 공무원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이상까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일을 했으니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까대는 경우가 있는데, 이상은 전체주의군국주의를 매우 혐오한 사람인지라 절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 생계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에서 근무를 했었던 것일 뿐. 사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공무원으로 일했다고 해서 친일파라고 깔 것 같으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사람의 수가 2배로 뻥튀기되어 버린다. 대놓고 위안부나 강제징용자를 모집하러 다닌 게 아닌 이상, 조용히 행정 서류나 끄적이거나 기술직으로만 일했던 사람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한국인일본인들 못지 않게 출세하는 길이 공무원이 되거나[45] 3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학자의 길을 걷는 것 말고는 정확한 출세의 길이 없었다는 것도 고려를 해야 한다.
  • 한일 합병 이후에 태어나, 일생 전체를 일본 국민으로 살았다. 이는 윤동주 등도 마찬가지이다.
  • 이상이 죽기 전 당시 서양화가 길진섭이 이상의 데스 마스크를 떴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길진섭이 1948년 월북해버려 그 진위는 불투명하다. 김연수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르네 클레르의 '유령 서부로 가다'를 잡동사니라며 깠다. '르네 클레르, 똥이나 먹으라지요'라는 부분이 압권.
  • 뉴스에 따르면 이상의 친필 연애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편지는 후일 작가 이현욱[46]최정희에게 보낸, 특이하게 여자가 여자에게 쓴 연애편지로 밝혀졌다. 기사
  • SCP 재단 세계관에서는 SCP-937-KO라는 번호가 붙여진 수석의 원 주인이었다. 이상의 평소행실과 대상의 특성을 비교해보면 꽤 흥미롭다. 수석을 '날개'라고 부른 것과 나중에 '날개'라는 소설이 나오고 거기서 나오는 날개의 의미를 비교하면 더더욱.
  • 그 당시 화가 구본웅과 같이 다니는 것을 그린 만평에서는 옷 잘입는 멋쟁이 '스타일리스트'로 평가됐다. 지금 봐도 옷 맵시나 헤어스타일이 꽤 멋있는 편이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창백한 피부의 퀭한 남자가 꼽추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 서커스단이 들어왔나 착각한 적도 있다.
  • 구본웅은 '친구의 초상'이란 제목으로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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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 x 53cm, 1935년.[47]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상 단편소설 전집의 표지가 이 그림이다. 그리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당시의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음울하면서 묘한 색기가 보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일각에서는 이 그림을 두고 이상과 구본웅의 동성애적 관계를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수능 및 모의고사 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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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48]
2003 수능 언어영역 출제
2009 교육청 모의고사 출제
2003년 수능 언어영역 문제의 경우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문제로 출제되어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본 시는 오감도의 제 4호다. 문제에서 말하는 '윗글'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이다.
위 문제의 답은 1번이다. 사실 보기로 제시된 이상의 시는 볼 필요도 없다(...)[49] 1~5번 보기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고 했으니 그 중 가장 튀는 것(다른 지문과 비교하였을 때 오류가 있는 것)을 찾는 편법으로 풀 수 있다. 특히 3번 보기에선 독자들이 시인을 '미쳤다'고 표현했다 하였고, 5번 보기에선 편집진의 압력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번 보기에선 기존의 언어체계를 불신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주 상식선에서 생각했을 때 이 보기중 적어도 2개가 맞다면 이 시가 1번 보기에서 주장하는, 그 당시 현대시의 주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굳이 헷갈린다면 3번 보기와 헷갈릴 수도 있는데 그때 이 시를 보면 된다.[50] 이런 내용도 없어뵈는 이상한 시가 나왔을 때 일반 독자들에게 '미쳤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만약 1번 보기가 적절했고 정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시였다면 적어도 독자들에게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미쳤다는 소리까지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2009년 7월 교육청 모의고사에서 시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다만 듣기평가 문항이었기에 해설을 들려줄 수 있었고 그 해설을 토대로 문제를 냈다고. 그 외에도 2006년 수능에 수필 '조춘점묘'가 등장했고 2014년 수능 국어영역에서 A,B형 공통문항으로 수필 '권태'가 마지막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소설인 날개(소설)도 한번 나왔다.
  • ebs 지식채널e 에서 나온 간략한 그의 삶 #1#2

  • 기독교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의 시 BOITEUX BOITEUSE 등 여러 곳에서 기독교에 부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6. 작품 목록



[1]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고 난 이후에도 초기 1개월간은 '한성부' 명칭이 유지되었다. 이름이 경성부로 개칭된 것은 1910년 10월 1일 시행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따라서이다.[2] 동반자살(...)하기로 한 김유정보다 3살 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참고로 실제로 동반자살을 하지는 않았고, 김유정은 이상보다 한 달 가량 먼저 사망했다.[3] 동광학교에 입학했으나, 보성고보와 통폐합되었다.[4]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의 전신인 것은 맞으나 당시에는 대학교가 아니고 구제전문학교였으므로 학사 학위는 오해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으로 유명한 경성사범학교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가는 중등학교였(다가 1943년에 전문학교급으로 승격되었)고, 이 중등학교를 졸업하면 갈 수 있는 곳이 고등교육기관인 전문학교(ex. 고등사범학교, 고등상업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학 부설 의학전문부 등)였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일제 강점기의 중등교육기관과 고등교육기관의 차이부터 알아야 한다. 중등교육기관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된 지금과 달리 수업 연한이 중학교(구제)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고, 이때의 고등학교(구제)는 대학 예과 과정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의 본과 과정에 바로 편입, 졸업 후 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 논리대로라면 전문학교도 고등학교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어야 하나 전문학교는 오늘날로 치면 '각종학교' 정도로 경시되었고, 최종 졸업 학력도 전문학교는 정식 학위로도 인정되지 않았다. 전문학교 출신들이 이에 반발하여 나중에야 전문학사 쯤으로 취급해 준 것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고등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인 전문학교 졸업자들은 조선 유일의 학사 수여 기관인 경성제국대학, 좀 더 잘 되면 본토 제국대학 본과에 편입하거나 사립대학 전문학교 코스에 들어가기도 하고, 미국이나 중국 등 타 선진국들의 명문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으며 추천서로 1, 2학년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학사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5] 바로 전의 주석에서 설명한 교명은 일본인 학교 기준이다. 조선인 학교는 내선일체 정책 강화 전까지는 다르게 부르고, 수업 연한도 더 짧게 잡아 불이익을 주곤 했다. 초등교육기관과 중등교육기관을 일본인 학교는 각각 소학교와 중학교(여자중학교), 조선인 학교는 각각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고등여학교)라고 불렀으며 한반도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아예 세워지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조선인 학생들도 본토 구제고등학교에 유학을 갈 수 있었으나 당시 시대상으로는 사실상 (구제고등학교에 비해 경시받던) 전문학교밖에 선택지가 없었고, 이는 조선인의 대학 진학률 저하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손기정 선수처럼 보성전문학교 중간 수료 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편입한다거나 윤동주 시인처럼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한 사례처럼 전문학교 졸업자의 대학 편입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6] 1928년부터 조선인 동기들과 따로 찍어 직접 만든 수제 사진첩이다. 이때 이상과 함께 사진을 찍은 동기들의 옷차림도 비범하다. 유명한 의정부고등학교의 선배 뻘이라 할 수 있다.[7] 당대에 활동하던 문인들과 같이 찍은 사진 속 모습이다. 관련 글. 이상은 멋을 한껏 부릴 것 같은 이미지와 다르게 몸치장과 패션에 무심하였고, 그냥 눈에 보이는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외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계절에 상관없이 흰 구두를 신고 다녔으며, 당시의 여러 사진에도 나오듯 강한 색상의 보헤미안 넥타이는 그의 분신과 같았다.[8] 호적명 김영창(金永昌).#[9] 36세손 "卿" 자 항렬. 前 국회의원 김진구, 김진만 형제의 숙부뻘이다.[10] 이때부터 이상은 여성을 혐오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그가 기누코, 금홍, 변동림과 권순옥 등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을 뿐 아니라, '꾀꼬리 동산'이라는 유사 스와핑을 했던 것도 이때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11] 경성고등공업을 현재의 실업계 고등학교 정도로 인식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당시 ‘고공(高工)’이라고 줄여 부르던 경성고등공업학교는 5개 학과에 모집인원 총 60명, 입시경쟁률은 13 대 1에서 27 대 1까지, 더군다나 한국인의 입학은 매우 어려웠던 (1926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최고 수준의 엘리트 학교였다. 순수학문의 대학과 실용적 학문의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을 분리하여 테크노크라트 엘리트를 양성했던 프랑스식 교육제도를 모방한 제도였다. 동숭동 현재의 한국방송통신대학 자리에 있었다.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합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되었다.[12] 그 해 건축과 졸업생 12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관련 기사.[13] 발레리나 강수진의 외할아버지.[14] 자두의 옛말.[15] 이상과 금홍과 변동림[16] 하루 나는 제목 없이(느닷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 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봉별기(逢別記)>.[17] 규모 큰 토목·건축 공사[18] 일꾼[19][20] 그러나 신기하게도 김유정이 병사한지 18일 후, 이상도 사망했다.[21] 69다방에 있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간판까지 걸고 개업날까지 받아놨는데 아는 사람들은 킬킬대면서, 혹은 민망해하면서 지나가다가 그 중 한 사람이 경찰에 신고를 때려서 영업 허가가 취소됐는데, 이상은 '''" 그걸 누가 말해줘야 알았냐"'''하고 고소해했다는 이야기.[22] 그런데 당시만해도 한국 사람들은 이런 성적인 은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어서 69라 적힌 간판을 보고 대부분 천천히라는 뜻의 일본어 ゆっくり를 말하는 걸로 알았다고 한다.[23] 1916년생(6세 연하). 이상의 아내. 이상 사후 '김향안' 이라는 가명으로 서양화가 김환기와 결혼했으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했다. 김환기 사후에는 사비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했는데, 사설 기념관으로는 국내 최초다. 이상의 자취를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었다. 변동림은 2004년 사망했다. 변동림 역시 이상의 소설에 '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변동림은 이복 언니 변동숙이 있었는데 변동숙은 대한민국의 예술가 구본웅의 계모였다. 그리고 이 구본웅의 딸이 구근모이고, 그 딸이 발레리나 강수진이다.[24] 이상이 도쿄로 떠나기 직전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던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문학은 그만 두겠지요 라고 적기도 하였다.[25] 이미 전에 도쿄에 가 본 적이 있던 변동림과 구본웅은 이상의 도쿄행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새벽 열차를 타고 몰래 도쿄로 갔다고 한다.[26] 막역한 사이였던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 앞머리에 "기림 형, 기어코 동경 왔소. 와 보니 실망이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데로구려."라고 쓴 대목에서 이상이 얼마나 도쿄에 대해서 실망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외로움과 궁핍함이 겹쳐 이상의 마음은 실로 피폐해져 있었다.[27] 이상이 죽기 직전 연거푸 남긴 3편의 문학작품 중에는 '산호 채찍(瑚鞭)을 잃어버렸다'란 구절이 있다. 호편은 이상의 자아를 붙들어주는 도구이자 수단으로 빗대어져 있다.[28] 지금의 치요다 일대. 이상 외에 2·8 독립선언식의 11명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윤창석과 김철수 등이 구금되었던 경찰서로 알려져 있다.[29] 잡힌 이유도 별다른 혐의가 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산발하고 꾀죄죄한 폐인의 모습으로 다니는게 수상쩍어서 그랬다고 한다.[30] 당시 이상을 담당했던 일본인 의사의 말에 의하면,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버려 두었을까? 폐가 형체도 없으니..."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상은 엄청난 골초였다. 하루에 담배를 50개피 피는 것을 자신의 일과라고 표현했을 정도.[31] 18일 전에 폐결핵(+α)으로 숨진 절친 김유정과 합동 영결식을 했으며, 김유정의 형제 및 조카들과 김유정과 친한 사이였던 (후에 월북하는) 소설가 안회남이 영결식을 했다. 김유정의 유해는 화장하여 한강에 뿌리고, 이상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32] Sembikiya 혹은 센비키야 Senbikiya. 일본에서 고급 과일과 과일 디저트를 판매하는 명품 상점 이름. 1834년에 도쿄에 오픈해서 현재까지도 영업하고 있는데, 1910년대에 이미 센비키야의 멜론은 가게 대표 상품이자 당시 고급 과일의 대명사였으며 2019년에도 멜론 한 통이 최소 2만엔(20만원)이다.#[33] '셈비키야(千疋屋)'를 한자 그대로 읽은 것이다.[34] 위와 같은 주장이 맞다고 해도 이상은 김춘수보다 30년 먼저 무의미시를 쓴 셈이다. 어느 쪽이든 연구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35] 참고로 이상의 작품에서 숫자는 하기한 섹드립에 있어서 중요한(?) 노릇을 하는데, 33과 23은 각각 성교(三十三-다리 세 개 에 다리 세 개, 二十三-다리 두 개 에 다리 세 개), 18은 욕, 69는 그 69 맞다.[36] 이때문에 국문학자뿐만이 아니라 수학과와 건축학과에 종사중이었던 사람들이 이상 시문학 연구에 흥미를 갖고 동참한 사례가 많다.[37] 다만 이때문에 하술하듯 고은의 이상 평전에서 그의 문학에 거의 섹드립밖에 없다는 왜곡된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38] 심지어는 작가를 "때려죽이겠다"는 투고까지 있었다고 한다.[39] 1934년 9월 1일 창간된 순문예 동인지. 회원 중에 황순원도 있었다.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던 동인. 창간멤버(신백수·이시우·정현웅·조풍연) 중 조풍연, 정현웅을 제외하면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다고 한다. 참고로 시인들의 동인지였기 때문에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던 황순원도 여기에서는 시를 썼다. 즉,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시인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긴 황순원이 본격적으로 소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37년 이후부터였으니...[40] 일제치하의 지식인이 가지는 고뇌를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41] 이상은 프랑스어로 쓴 시들도 남겼다. 이상은 조선어나 일본어 뿐만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읽고 쓸 줄 알았고, 그가 운영하던 다방에서도 프랑스 신문이나 잡지를 읽곤 하였다.[42] 작품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애마저 이상을 따라한다. 결국 이상이 죽은 병원에서 독약을 마시고 사망[43] 이 작품에서의 구인회는 단순히 작가들의 모임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에 대해 토론하면서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추리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는 단체로, 이러한 활동이 많은 사건을 해결해줘서 경찰 등이 자문이나 의뢰를 하기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활동에 대해 싫어해서 탈퇴하는 이도 존재한다고.[44] 그런데 원래는 1권에서 종료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1권의 마지막 이야기가 셜록 홈즈와 모리어티와의 대결을 모티브로 하고, 이상의 최후를 약간 비틀어 만든 이야기였기 때문. 그러나 인기가 있었던 것 때문인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셜록 홈즈와는 달리 이상은 실존인물이기에 결말은 1권의 마지막 이야기로 이미 정해졌다고 봐야한다.[45] 그나마도 한국인들은 면사무소의 서기나 기술직으로 가는 것으로도 꽤나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던 시대다. 당시에 고위급 공무원의 자리는 일부 친일파 금수저 출신자를 제외하면, 전부 일본인에게만 돌아갔다.[46] 필명 지하련. 임화의 두번째 아내이다. 재미있게도 임화는 이상의 고보 동기였으나, 이들이 교류했다는 흔적은 없다.[47] 실물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며 이따금 근현대미술과 관련한 전시에서 볼 수 있다.[48] 숫자가 좌우 반전이라서 이미지로 인용할 수밖에 없다.[49] 수능이나 SAT 등의 시험에서 볼 수 있는 법칙(?)으로, 주어진 글의 난이도와 문제의 난이도는 서로 반비례한다. 여기서는 지문이 어려우니 문제는 거꾸로 쉬운 것. 비슷한 맥락으로, 한자가 다수 포함된 고전문학의 단어 설명이 부실할 경우 100% 확률로 문학작품을 전혀 안 읽어도 풀 수 있다. 수능에서 한자독해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게다가 이상의 시는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전형적인 시를 해제하는 관점에서 풀 수 있는 게 아니라 국어국문학과의 오랜 연구로 그나마 대부분 풀린 거고 그마저도 오감도는 미해결이다. 그런데 진짜 이상 시로 문제 내면 출제 위원들도 오락가락할 것이다.[50] 배배 꼬고 의미불명의 표현법을 사용한 작품이 보통 당대에 인기가 있고 주류가 되었던 경우는 파블로 피카소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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