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염

 

曁艶[1]
(?~224)
삼국시대 오나라의 신하. 자는 자휴(子休). 오군 출신으로 장온의 수하. 부친과 형은 손권 입장에서는 흉악한 역적에 기대었다고 한다.
인물 품평에 탁월하면서 성격은 정직하고 엄했으며, 맑은 의론을 발표하기 좋아했다. 먼저 주치에게 임명되고 장온이 그를 불러 수하로 삼으니 손권이 선조랑으로 임명했다가 후에 선조상서까지 승진한다.
222년에 당시 낭관의 관소가 혼탁하고 마구 뒤섞여 있어 대부분의 관원들이 알맞게 인선되지 못한 것에 한탄해 착한 자와 사악한 자를 구별하고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하면서 사용하려는 생각을 해 여론을 조장했다. 육손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주거는 그들을 한꺼 번에 보충하기는 어려우니 일단은 공으로 허물을 덮은 다음 서서히 능력있는 자들을 뽑아 그들을 대신해야 한다고 말했으나[2] 글염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행동에 들어간 글염은 백관들을 탄핵하고 삼서의 관리를 엄밀하게 선발해 대부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폄하해 낮은 지위로 강등시켰는데, 한 번에 몇 등급씩 강등되기도 하니 옛날 지위를 지키고 있는 자는 열 명 가운데 한 명도 안 될 정도였다.[3] 그러나 자신과 같은 일당인 장온 일당은 건드리지 않으니 이런 그의 행동에 육모는 편지를 보내 공자의 사랑과 곽태의 구제를 본받으라고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말대로 실행하지 않았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관직에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비루하면서 뜻이나 절개가 오염되고, 낮은 자들이 모두 군영의 막부에 배치되어 병사들을 다스리게 된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원한과 분노의 소리는 쌓여 점점 참언이 일어나자 글염과 선조랑 서표는 전적으로 사사로운 감정을 사용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공평한 이치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다투어 말하니 결국 글염과 서표는 자살해 의도만 좋았던 그의 개혁은 끝났다.
백성들이 그를 좋아해 그와 친하게 지냈는데, 글염의 죄가 인정되자 글염과 친하게 지내던 선비들이 모두 자신을 변명하기 바쁠 때 오직 진표만이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 장온은 평소에 촉나라의 정치를 칭찬하던 것 때문에 손권에게 미움을 받던 상황으로 손권은 장온이 추천한 글염이 죄를 저질렀다는 핑계를 대 장온을 투옥했으며, 낙통이 그를 변호할 때의 설명에는 장온은 글염과 앞이 아니고 뒤로 친했다고 한다.[4]

[1] 기염 또는 글염. 曁는 성씨로 쓰일 때 반절#s-2을 보면 집운 居气切, 광운 居乞切, 居乙切로 '기'와 '글' 모두 가능하다.[2] 반대로 주거의 말을 따라서 실행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고유.[3] 하정이나 여일과는 달리 피해를 입은 사람은 손소 한 명밖에 나오지 않는다. 장온과 글염이 손소에 대해 상소를 올리니 손소는 스스로 위계를 사임하고 죄를 청했으나 복직되었다고 한다.[4] 공적이 아닌 사적으로 친했다는 뜻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