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

 

1. 일반적인 의미
1.1. 관련 문서
2.1. 소개
2.2. 생애
2.3. 미디어 믹스
4. 후한 말의 인물
5. 이성동(1979)의 예명


1. 일반적인 의미


  • 固有: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수한 것을 뜻한다. 어떤 음식점에서는 '원조' 대신에 '고유'를 사용하는 괴랄한 센스를 보이기도 한다. 보통 판타지에서 쓰면 그냥 더 세다는 의미가 붙은 접두어가 된다.
'유' 자는 '유일(唯一)'의 '오직 유(唯)'와 같은 한자가 아니라 '있을 유(有)'이므로, 여럿이 있을 수도 있다.

1.1. 관련 문서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역임한 관직




'''高柔
고유
'''
'''시호'''
원후(元侯)
'''작위'''
관내후(關內侯) → 연수정후(延壽亭侯) → 만세향후(萬歲鄉侯) → 안국후(安國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겸 가절(假節) 겸 행대장군사(行大將軍事)
'''성씨'''
(高)
''''''
(柔)
''''''
문혜(文惠)
'''현조부'''
고고(高固)[1]
'''고조부'''
고신(高愼)[2]
'''증조부'''
고식(高式)[3]
'''조부'''
고홍(高弘)[4]
'''아버지'''
고정(高靖)
'''생몰기간'''
174년 ~ 263년 9월
'''고향'''
연주 진류군(陳留郡) 어현(圉縣)
'''재임기간'''
'''사공 재임기간'''
245년 8월 19일 ~ 248년 4월
'''사도 재임기간'''
248년 4월 ~ 256년 9월
'''태위 재임기간'''
256년 9월 ~ 263년 9월
고유:현명함과 공정함을 겸비한 당대 제일의 법관

2.1. 소개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로 위나라의 법학자. 자는 문혜(文惠). 고광의 아버지.
진류군 어현 사람으로 아버지인 고정은 촉군 도위. 원소의 외조카 고간은 고유의 사촌형, 혹은 7촌 족숙이다.[5] 참고로 고유는 '''삼공을 모두 해봤다.'''

2.2. 생애


고향에 있을 때 장막조조가 지금은 친한 친구 사이이나 곧 싸울 것이니 빨리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고향 사람들은 고유의 나이가 어리고 장막과 조조의 친분 또한 워낙 유명했으니 당연히 듣지 않았다. 물론 그 결과는(…)
마침 고간이 고유를 부르자 일족을 이끌고 하북으로 갔는데, 촉군도위를 지내고 있던 아버지 고정(高靖)이 촉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3년에 걸쳐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도적 때를 뚫고 촉의 험한 산길을 거쳐 촉까지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
왕수는 20세였던 고유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고 하며, 이후 조조가 원상를 토벌한 뒤인 204년에 관현의 장이 되는데, 이 당시 이미 고유의 명성이 유명했기 때문에 악덕 관리들은 야반도주를 해버린다. 그러나 고유는 진한시대의 병길이 과오가 있던 관리들을 포용한 예를 들어 도망간 관리들은 아직 자신의 관리 하에선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여 모두 복직시켰고, 이에 관리들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약속하여 전원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원소의 밑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고유가 부임한다는 소식만으로 부패한 관리들이 달아났다는 것을 봤을때 원씨 휘하에서도 엄정한 법관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206년에 고간이 재차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고유는 그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조조에게 붙는다. 이에 고유는 자간영사로 임명되었는데, 사실 조조는 고간의 친척인 고유를 전혀 믿지 않았기에 표면적으로만 기용한 것일 뿐 사실은 고유의 업무결과를 어떻게든 트집잡아 죽이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유는 법률의 적용이 매우 적절했을 뿐 아니라 옥 안엔 판결을 못 받아 기다리고 있는 죄수가 없는 등 일처리에 전혀 빈틈이 없었기에 오히려 조조의 감탄을 샀고 조조는 그를 불러 승상창조속으로 임명한다.
211년, 조조가 장로를 공격하려고 하자 지금 거대한 군대를 움직이면 서량의 군대가 움직일테니 먼저 서량을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한중으로 가던 중에 종요가 관문을 넘자 과연 마초한수가 동관으로 쳐들어온다. 216년에는 위나라가 세워지자 상서랑으로 임명되고 곧 승상이조연이 된다.
이때 합비성에서 군악대 소속의 송금이라는 자가 탈주한 일이 생겼다. 당시 법률에 따르면 탈영병의 처자식을 사형에 처해야 했는데, 그럼에도 탈영병이 끊이지 않자 조조는 탈영에 대한 처벌을 더욱 가중시킨 상태였다. 이때 송금의 모친과 처자식 및 두 동생은 노비가 되었는데, 담당 관리가 이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하자 고유는

사졸이 군에서 도망치는 것은 실제로 한탄할 일이나, 그들 또한 오히려 도망친 이후엔 후회할 것인데 여기서 그들의 처자식을 관대하게 처리하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적이 이것으로 인해 그들을 믿지 않을 것이며[6]

둘째는 그로 하여금 돌아오여는 마음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고, 셋째는 지금의 법대로 주위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게 되면 그 주위 사람들 마저 도망갈 것이니 그것이 세번째 이유입니다. 형벌을 무겁게 하는 것이 결코 도망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과연 조조는 그 말을 받아들였고 이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후에 승진하여 영천태수가 되고 다시 수도로 돌아와 법조연이 되었는데, 이 때 조조가 노홍과 조달 등을 감찰관으로 두어 관리들을 감시하게 했는데 이들은 사실상 조조의 정실인사에 가까웠다. 고유는 그들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한 것과 이들의 도덕성 문제를 지적하며 믿을 수 없다고 진언했으나 당연히 조조는 고유의 진언을 무시했는데, 이후 고유의 진언대로 그들의 부정이 적발되자 조조는 이들을 처형하고 고유에게 사례한다.
220년에는 조비가 즉위하자 치서시어사, 관내후로 봉해지며 전임하여 치서집법이 된다. 조비가 언론 통제의 일환으로 뜬소문을 내는 사람을 죽이고 고발자에게 상을 내리는 법을 만들자 고유는 잘못을 범한 사람이 착하게 바로잡을 기회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온갖 무리들의 무고와 상호 비방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 지적했다. 조비는 이를 무시했으나 고유의 예상대로 갈수록 무고가 심해지자 결국 몇년 뒤 고발하는 법을 포기한다.
당시 이로 인한 고발 관련 송사가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으나 고유는 이를 꼼꼼히 살피며 허실을 명확하게 밝혔으며 작은 위법사항은 되도록 벌금형에 그치도록 했다.
223년에는 승진하여 정위가 되었으며, 226년에는 조비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포훈을 죽이려하자 법대로 해야한다면서 반대하자 조비는 매우 노하여 고유를 상서대로 호출한 사이 사자 한 명을 정위로 보내 포훈을 죽이고 그제야 고유를 원래 위치로 복귀 시킨다.
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연수정후로 봉해졌으며, 조예에게 유자들을 학문과 품행의 우열에 근거하여 대접할 것을 건의하여 실현시켰고, 조예의 대대적인 궁궐 증축과 전국적으로 미녀를 선발해 후궁을 들이는 행태 등을 법에 따라 비판했으며, 해홍이라는 관리가 부친상을 지내다 몸이 약해져 질병으로 중앙의 소집명령을 어겨 처형당하게 되자 진상을 면밀히 조사해 사형을 막기도 한다.
권력자의 권력 남용에는 법과 원칙을 들어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뜬금없이 법에 걸려들어 날벼락을 맞는 일반 백성들에겐 유연한 법해석으로 최대한 화를 피하도록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성향은 조조 생전에도 시대에도 약간 나타나지만 대체로 짬이 찰수록 심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고유가 조조 휘하 10년차 이후에야 조금씩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초반엔 원소의 친척이란 이유로 대놓고 견제당한 것이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246년에 태상이 되었다가 열흘 후에는 사공이 되었으며, 얼마 후에 사도가 된다. 249년 고평릉 사변에서 사마의조상 일족을 없앨 때는 황태후의 지칙으로 가절대행군사가 되어 조상의 진영을 차지하여 조상 일족을 없애는데 큰 공을 세워 사마의로부터 주발급의 활약이라는 평까지 들으며 만세향후로 봉해진다. [7]
250년에 사마소에게 상국을 인수를 전달하며, 254년에는 조모가 즉위하자 안국후로 봉해지고 태위로 전임된다. 조모 시해 사건 당시 사마부, 사마소 등과 함께 뒷처리를 위해 황태후 곽씨에게 상소했다. 263년 9월, 촉한 정벌이 시작된지 얼마 후에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2.3. 미디어 믹스


[image]
삼국지 9,10,11
[image]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공을 모두 지낸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 높은 정치를 주기는 개뿔. 나오면 다행이고 그나마도 언제나 B급 문관 취급받았다. 그래도 원소랑 친족인 관계로 죽이면 원씨 일가랑 척을 지게 되니 심히 곤란해진다. 삼국지 9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1/59/72/79. 투석, 파괴,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그나마 특기는 3개에(치안, 반목, 명사) 불과했지만 명사 특기를 가지고 나왔고 지력 73 정치 82 매력 76이라 원소군에서는 아쉬운대로 굴릴만 했지만 이후 삼국지 11에선 지력 71에 정치 79, 삼국지 12에선 지력 72 정치 79로 너프당했는데 아무리 연의 중심이라지만 심하다는 의견이 많다. 일러스트를 보면 병서를 들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57/43/72/79. 특기는 농업 1, 설파 3. 전수특기는 설파로 전법은 고무.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6, 무력 44, 지력 72, 정치 79, 매력 76으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1 상승한 대신 통솔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법률, 주의는 왕도, 정책은 정령철저 Lv 3, 진형은 방원, 학익, 전법은 저지, 치료,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여담으로 고순과 같은 성을 가진 무장 중에서 지력, 정치력, 매력이 제일 높다.

3.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顧裕
생몰년도 미상
고옹의 차남. 고영의 아버지, 고소의 동생, 고제의 형. 자는 계칙(季則).
어려서부터 명성이 알려졌고 고옹이 손소가 241년부터 죽은 후에 2년간 승상을 역임하다가 243년에 죽은 후에 형인 고소가 작위를 계승했지만 군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사망하면서 고소에게 후사가 없자 258년에 손권이 조서를 내려 작위를 계승해 예릉후에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고소에게는 아들 고승이 있지만 고승은 벼슬을 역임하고 있어서 작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작위는 진동장군에 이르렀고 그의 다른 이름은 고목(顧穆)이며, 후에 병이 심해서 동생인 고제가 작위를 계승했고 의도태수로 있다가 사망했는데, 이 때 고영은 관직에 이미 나갔거나 어렸기에 작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4. 후한 말의 인물


高誘
생몰년도 미상
탁군 탁현 사람으로 노식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205년에 사공연으로 벽소되었다가 동군의 복양령으로 옮겼으며, 212년에 하동을 감독하는 일로 옮겼다. 저서로는 맹자장구, 여씨춘추주, 회남자주, 사기주, 전국책주 등이 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위에 서술된 것으로 그가 저술한 회남자주의 서목을 통해서만 남아있다.
전국책은 해독이 매우 어려운 고전이라서 고유가 주석을 처음 펴낸 이후로는 한참 동안 나오지 않다가 남송 때에 이르러서야 주석서가 다시 나오게 되었다.
소명출판에서 출간한 회남자는 보통 회남자의 주석들을 따로 번역하지 않았지만, 참고할 만한 것들은 주에서 수용해 허신과 고유의 주석을 구분하기 쉽지 않으므로 그 출처를 고유의 주석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5. 이성동(1979)의 예명


락 밴드 활동 시절 사용하였다.

[1] 진류기구전《陳留耆舊傳》에서 이르길 왕망이 득세할 때 출사하지 않았고, 지조가 높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2] 죽은 형의 5명의 아들 다섯을 데리고 사니 그 모습을 본 하영(何英)이란 자가 자신의 딸을 베필로 주었다.[3] 여러차례 현령에 임명되고 동래태수(東萊太守)도 되었지만 늙어서는 재산이 없을 정도로 청렴한 자였다.[4] 효자로 명성이 자자해 양순(楊舜)이 효자로 천거하자 사양하였지만, 후에 효렴으로 낭(郞) 되었다.[5] 진수가 쓴 삼국지에서는 고간이 고유의 사촌형이라 적고 있지만 고씨 족보에서는 7촌관계로 촌수가 상당히 멀고 항렬도 고유가 고간의 조카뻘이 된다.[6] 삼국지연의의 채중, 채화를 생각해보면 된다.[7] 정치적인 성향이나 야심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일생으로 보건대, 고유가 사마의급 복심으로 오랜 세월 조씨에 대한 증오를 숨겨온 게 아니라면, 당시 '''조상일파의 패악질'''에 대한 기록이 비단 사마씨의 쿠데타 명분을 위한 편향적 서술만은 아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