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

 


'''조위 초대 오왕'''
'''동오 초대 황제'''
'''太祖 大皇帝 | 태조 대황제'''

'''묘호'''
'''태조(太祖)'''
'''시호'''
대황제(大皇帝)[1][2]
'''작위'''
남창후(南昌侯) → 오왕(吳王)
'''출생'''
182년 12월 22일
'''사망'''
252년 4월 16일
'''능묘'''
장릉(蔣陵)
'''재임'''
'''한나라의 토로장군'''
200년 ~ 209년
'''한나라의 거기장군'''
209년 ~ 219년
'''한나라의 표기장군'''
219년 ~ 220년
'''재위'''
'''조위의 오왕'''
221년 ~ 229년
'''동오의 황제'''
229년 4월 7일 ~ 252년 4월 16일 (23년)
'''연호'''
황무(黃武, 222년 ~ 229년)[3]
황룡(黃龍, 229년 ~ 232년)
가화(嘉和, 232년 ~ 238년)
적오(赤烏, 238년 ~ 251년 1월)
태원(太元, 251년 1월 ~ 252년 2월)
신봉(神鳳, 252년 2월 ~ 25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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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孫)
''''''
권(權)
''''''
중모(仲謀)
'''부모'''
아버지 시조 무열황제 손견
어머니 무열황후 오씨
'''형제'''
장사환왕 손책
황후 ||<(> [[반부인|{{{#000,#fff 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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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외모
5. 가족 관계
6. 기타
7. 손권의 무덤
8. 삼국지연의에서의 손권
10.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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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삼국의 하나인 손오의 창업군주. 손견의 차남이며 손책의 동생. 자는 중모(仲謀).
황건적의 난이 벌어지기 직전인 182년에 태어나서 천하 통일이 임박한 252년에 사망했다. 삼국지에서 벌어진 거의 대부분의 사건이 일어날 때 생존해 있던 인물로 손권이 죽은 지 불과 11년 후 촉한이 멸망했다. 덕분에 생몰년 한 개만으로 따지면 가장 삼국지의 주인공에 부합하는 인물이지만 워낙 삽질을 심하게 해서 손권을 삼국지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인지 안그래도 비중이 가장 낮은데 인기는 더욱 마이너해졌다.
안후이와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소수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진무(토벌)하고, 타이완과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요동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 외의 경영에 노력한 군주였다. 또한 손권은 후반에 촉나라와 동맹을 맺되 위나라와 촉나라와의 싸움에서는 왠만하면 참가하지 않으려 했고, 덕분에 오나라는 삼국 중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했다.

2. 외모


적벽가에는 손권의 풍모를 벽안자염(碧眼紫髥)이라고 묘사하는데, 그의 눈이 푸른빛이었다는 것은 연의의 창작이며 자색수염은 헌제춘추의 기록이다. 참고로 중국 고서에서 눈이 푸르다(碧眼)고 하는 것은 눈동자가 아니라 잡티가 없고 붉거나 누런기가 없이 깨끗한 흰자위를 푸른빛이 돈다고 빗대 표현하는 것이다. 자색 역시 붉은색을 뜻하는 표현. 인간에게 보라색 털은 불가능하다(...). 한문에서는 진한 흑발을 녹발, 햇볕에 비추면 색이 붉게 비춰보이는 옅은 흑발을 자색이라고 빗댓다. 벽안자염이란 표현은 풍채가 당당한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말로 이해해야한다.
태평어람에 나오는 원희지(袁希之)의 <한표전(漢表傳)> 기록에 따르면 손견이 하비승일 때 손권이 태어났는데 턱은 네모나고 입이 크고 눈빛이 반짝반짝해서 손견이 기이하게 여기고 귀한 상이라 했다고 한다. 그 외에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짦았다는 <헌제춘추>의 기록과 턱은 네모나고 입은 크고 눈의 총기가 남달랐다는 <강표전>의 기록이 남아있다.
다만 건강실록에서 인용한 강표전에 묘사된 손권의 외모는 넓은 이마를 가졌다고 쓰여 있다. 그의 아버지인 손견의 미추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그의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손권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여지가 있다. 형 손책은 특이한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고 대단한 미남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 쪽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image]
여담으로 주연의 무덤에서 황제의 연회를 묘사한 그림이 하나 발굴되었는데, 만약 이 그림에 그려진 황제가 손권이라면[4], 삼국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당대에 그린 초상화'가 남아있는 셈이다. 아마 가운데 있는 인물인 듯 한데 실제로 상당히 이국적이다.

3. 생애




4. 평가




5. 가족 관계



6. 기타


오나라 대황제는 3자루의 보도(寶刀)와 여섯 자루의 보검(寶劍)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검은) 첫 번째가 백홍(白虹), 두 번째가 자전(紫電), 세 번째가 벽사(辟邪), 네 번째가 유성(流星), 다섯 번째는 청명(青冥), 여섯 번째는 백리(百里)이다. 보도는 첫 번째가 백련(百鏈), 두 번째가 청독(青犢), 세 번째는 누영(漏景)이다.

고금주 『여복』

손권 때 큰 배는 적마(赤馬)라 하였는데, 이는 말이 육지를 달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또한 배는 치마(馳馬)라고 하였다.

고금주 『잡주』

손권은 오나라의 군주이다. 이때 큰 배를 적룡(赤龍)이라 하고, 작은 배를 치마(馳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용이 하늘을 나는 것과 같고, 말이 육지를 달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중화고금주

적오 연간에 어떤 사람이 한신이 차던 검을 얻었다. 손권은 그것을 유(瑜)에게 하사하였다.

산당사고

먼 훗날 손권의 종씨가 공화국 초창기 임시 수도를 오나라 수도에 세우고 그의 후계자의 임기 전반기의 수도로 정착되나 임기 후반기는 섬으로 천도한다.

7. 손권의 무덤


손권은 죽은 뒤 장릉에 묻혔다. 이곳은 당시 남경(南京, 난징시)의 종산(鐘山)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훗날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종산에 자신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들 때 담당관이 손권의 무덤을 이장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원장은 손권은 영웅호한(英雄好漢)이니 그대로 두라고 했다. 손권의 무덤은 원래 손릉강(孫陵崗)이라 불렸는데, 이곳에 매화가 많기 때문에 1940년대에 매화산(梅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산에는 그의 부인인 보씨(步氏), 반씨(潘氏) 및 선명태자(宣明太子) 손등 등이 함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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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의 무덤 터 근처에 조성되어 있는 손권의 상. 유비의 무덤을 생각하면 좀 쓸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유비의 무덤은 혜릉이라 칭하며 한소열묘(廟: 제왕의 사당)와 함께 아직도 보존되어 있지만, 위 사진 속 안내판을 보면 손권의 무덤은 능으로도 취급 안하고 그냥 손권이라는 성명과 함께 '묘(墓: 일반 무덤)'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나마 무덤 자체도 유실되었는지 손권묘유지(遺址, 옛 자취가 남아 있는 터)라고 공지하고 있다.

8. 삼국지연의에서의 손권


정사와는 이미지가 꽤 다르다. 술을 좋아하고 무예를 즐겼던 호탕인 이미지는 거의 없으며 아버지나 형과는 큰 차이가 있는 맹장형보다는 견실한 타입의 군주로 묘사된다. 술을 좋아해 자주 문제를 일으켰던 내용도 연의에선 죄다 애꿎은 장비에게로 옮겨갔다.
그래도 합비 대전에서 장료가 도발해오자 몸소 창을 들고 싸우려는 대목이 있다. 이점에서 손책에 못지않은 장재가 있었는지도…이것은 경솔하다며 신하들이 주의를 주며 손권도 이를 수긍해 반성하는 대목이라 장군이라는 이미지보단 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전체적으로는 수혜를 받은 편. 젊은 나이에 수성의 달인으로 불리거나 위연의 됨됨이를 알아본 일화를 그대로 채용하면서 이궁의 변이라는 손권의 대표적 흑역사 중 하나는 아예 언급도 안 됐다.
그러나 작중에서 툭하면 결정을 미루다가 주유나 장소 같은 책사들의 의견을 따르는 등으로 우유부단하게 구는 장면이 대부분을 이루는지라, 유비와 조조에 비해 자기 색깔이 약하다. 손권 나오는 장면을 보다보면 '손권이 대답을 않고 있는데~'라는 대목이 진짜 많이 나온다. 그래서 자기보다 훨씬 짧게 나온 형 손책보다도 오히려 인기가 떨어지는 편이다.

9. 미디어 믹스




10. 둘러보기(계보)




'''조위의 오왕'''
신규 책봉

'''손권'''

동오 건국

[1] '大'는 시호로서는 안 쓰이는 글자고, 흔히 '대황제'라고 하면 시호가 아니라 단순히 황제를 더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므로, 이 시호는 굉장히 이례적이다. 그래서 대황제라는 시호는 후대에 오나라가 비판당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2]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조조를 무제(武帝),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 등으로 호칭했고, 자기가 한때 섬겼던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어느 정도 권위있게 존중해서 표현했다. 오나라의 경우 손권은 오주(吳主)전, 이후의 황제들은 삼사주전으로 일괄처리했고, 이전의 손견, 손책도 추숭된 시호를 부르지 않고 다 생전 관직인 '파로토역'으로 전을 처리한 걸로 봐선 아무래도 손권만 특별 대우를 받은 듯 싶다. 그러나 막상 내용으로 들어가면 촉서 선주전에서는 '선주의 성은 유, 휘는 비, 자는 현덕이다'라고 소개하고(휘라는 말은 일단 황제급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하고 유비를 계속 선주라고 부르는 반면, 오주전(손권전)은 그냥 다짜고짜 '손권은 자가 중모다'로 시작한 이후 그냥 계속 손권이라고 부르고 있다.[3] 독자 연호를 선포하기 이전에는 후한과 위의 연호를 사용했다. 참고로 손권이 황무라는 연호를 썼을 때는 손권이 아직 황제를 칭하기 전이다. 본래 연호는 천자가 선포하는 것이니, 독자 연호를 선포한다는 것은 향후 적절한 시기에 위나라에 대한 신종(臣從)을 철회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더불어 222년에는 조비가 태자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해오자, 손권이 이를 거부하여 위나라와 오나라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손권이 명목상 위나라의 신하를 칭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4] 주연이 모신 황제는 손권밖에 없다. 손권 시대에 활동하여 손권이 죽기 2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