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교선은 1892년 6월 6일 충청도 목천현 수신면(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홍일선(洪鎰善)과 함께 4월 1일의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3월 29일 인근 부락에 살고 있는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에게 독립만세시위 거사의 취지를 설명해 동참하겠다는 뜻을 받아냈다. 이후 4월 1일 홍일선·한동규·이순구와 함께 아우내 장터에 나가 장터의 출입구에서 장꾼들에게 독립만세시위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아우내 장터에서 별도 대열인 조인원, 유관순 등이 주동한 시위 군중과 합쳐져서 약 3천여 명의 큰 무리가 결성되었다.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군중 3,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운동의 열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시위대열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에 접근하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의 기세에 놀라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들까지 가세하여 총검을 마구 휘둘러대며 발포를 계속하니,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3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오후 4시경 피살자의 가족과 군중이 시체를 헌병주재소에 운반해 놓고 "이들을 살려내라"고 외쳤다. 이때 김교선은 한동규, 이순구, 이백하(李柏夏) 등과 함께 1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입구에 버티고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0년 7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김교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