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유관순
柳寬順 | Ryu Gwansun
'''
'''출생'''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사망'''
1920년 9월 28일 (향년 17세) '''(103주기)'''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고흥 류씨[1]
'''학력'''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2]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 (1996년 5월 30일)[3]
'''종교'''
개신교(감리회)[4]
'''신체'''
151.5cm[5]
'''가족'''
유중권(부), 이소제(모)
유계출(언니), 유우석#s-2(오빠)[6],
유인석(남동생), 유관석(남동생)[7]
'''유관순 표준영정의 변천 과정'''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8]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1. 개요
2. 생애
3. 서훈 격상
4. 과대평가 의혹
4.1. 과대평가 근거
4.2. 이화학당의 독립운동가
4.3. 과대평가 부정
5. 종교
6. 여담
7. 대중 매체에서
8. 관련 단체
9.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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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 생애


1902년[9]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10]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11]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12] 부인의 권유로 서울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13]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14] 교장 룰루 프라이[15]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16]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17] 이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다.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이는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으로 증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18]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영친왕)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이방자 여사)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19]
[image]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유관순#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0]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도 아니고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연합뉴스 2019년 3월 8일자 기사 - [팩트체크]② 유관순 열사 고문·순국에 대한 사실 왜곡[21][22]
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전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23]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언급했다. 유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전시실에서는 석유 상자 사진이 유관순 시신을 담은 거라며 설명했다.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참고)
결국 1920년 10월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 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24] 이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25] 비슷한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26]
유관순이 아우내(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지휘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 운동의 아이콘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해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이다.[27]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현재의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28]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만들고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참고 사진 #1 #2 1974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으며 1985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3. 서훈 격상


2019년 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로 추서할 것을 의결하였다.# 상훈법상 훈장은 같은 공적으로 중복수여할 수 없으나,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별도의 공적으로 인정하여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하기로 하였다. 정식 추서는 2019년 3월 1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 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만 3등급 훈장도 결코 낮거나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서둘러 격상해버린 모양새다. 유관순의 서훈 격상 논의에 학계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서울신문 2019년 2월 18일자 기사 - ‘유관순 서훈 격상’ 딜레마에 빠진 정부 정책서울신문 2019년 2월 13일자 기사“한국의 잔다르크” “인기로 정하나” 유관순 서훈 등급 어쩌나

"유 열사를 선열로서 기리겠다는 것은 얼마든지 반길 일이지만 훈격을 바꾸겠다는 것은 형평성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석주 이상룡(1858~1932)도 3등급이다. 유관순을 높이면 이런 분들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것이다. 모든 체계가 뒤집히게 된다"

-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청와대와 보훈처의 논리는 결국 '유명세 = 광복과 민족단결과 인권의 가치에 기여'라는 건데, 사후에는 행적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생전의 공적으로 서훈을 결정하는 체계에선 형평성이 문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신중론 자체는 26일 격상 이후에 새삼스럽게 나온 게 아니다. 시민단체와 지역정계의 격상 요구/학계의 신중론은 꾸준히 대립했고, 3.1절 100주년 격상 이슈는 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가 "이번 3·1절을 맞아 유 열사의 서훈을 상향 조정하면 국민께 좋은 선물이 될 것‘"라는 취지의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중앙정계서 현실화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대토론회가 2월 13일에 열렸다.[29] 그러나 이 토론회에서도 서훈 격상 반대측의 발표가 나오자 매국노 운운하며 야유로 뒤덮이는 바람에 제대로 된 토론이 되지 않았다.#
격상 후에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에는 언론의 말바꾸기도 한몫했다. 이 서훈 격상이 이뤄지기 전 언론에선 '유관순이 겨우 3등급에 머물고 있다'라며 지적했다가, 이후 등급을 격상하자 형평성을 지적하며 말을 바꾸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SBS 2019년 2월 23일자 기사'3·1 운동 상징' 유관순 열사가 3등급?…또 논란된 서훈
보훈처는 다른 독립운동가도 국민적 열망이 있으면 격상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인기와 지명도로 격상을 결정했다는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평가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것과 유관순 서훈 격상은 별개의 문제인데 이를 동일시하며 변명하는 것이다.

4. 과대평가 의혹


유관순이 자신이 한 업적에 대비에 너무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의견과 부정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4.1. 과대평가 근거


유관순이 훌륭한 활동을 한건 맞지만 3.1 운동 당시에도,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무명의 참가자였다. 1945년까지 발행된 모든 신문기사에서 유관순의 이름은 1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30년대 근우회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대 이름이 알려졌던 신여성 엘리트들이 많다. 유관순은 1947년부터 갑자기 국내 신문에 자주 등장하며 영웅서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유관순은 해방이후 누군가의 "적극적인 발굴"에 의해 "순국의 아이콘"이 된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30]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31]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이 된 뒤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천 5백 명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 분들이 희생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 이다.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유관순은, 저 중 사망자 혹은 부상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유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유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운동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유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 (4급)을 추서하였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왜경에게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 운동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신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시 천주교내 보수파는 "'안중근 의사처럼 거물도 하나 못죽였는데 열교들은 미화가 너무 심하고 우린 천주교 내 친일경력도 반성했다."'라고 주장했고, 불교 보수파 측은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한거 맞는데 친일파라고 음해받고 불교의 독립운동사는 왜 말이 없고, 왜 기독교는 유관순 열사만 띄우냐?'''라고 했다.
실제 4.1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인원 선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 유독 유관순만 3.1운동의 상징처럼 굳어져 버린 것은 과한 처사다.

4.2. 이화학당의 독립운동가


이화 출신 중 유관순 외에 독립운동가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이화학당 1회 졸업생 중 한 명인 신마실라는 주활동지역이 미국이며 미주한인의 자금조달 등의 활동을 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이태영은 독립운동도 했고 심지어 국내 최초의 여성변호사이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황애시덕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 섰는데, 그 활동이 대부분 김마리아와 겹치는 게 많다. 김마리아가 한 살 더 위였던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황애덕은 2인자의 느낌이 강하다. 예를 들어,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도 회장은 김마리아가, 부회장 겸 총무는 황애덕이 맡았다.
그 외 허정숙은 한국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사회주의, 그것도 마르크스 레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광복 후엔 아예 북한으로 갔으니 내세울 수가 없고(게다가 일제시대 화려한 연애사로 입방아에 오르내림), 권애라는 3.1운동 후 유관순과 같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는데 심지어 남편이 의열단 단원 김시현 이다보니 해방후 이승만 암살미수자의 아내를 추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타 이애라 최복순 등이 있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현앨리스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지만 사회주의계열의 활동을 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따라서 이래저래 순결하고(신여성의 연애사 스캔들이 없어야 함), 정치색이 없고, 기독교 집안이고(이화학당이 기독교 재단) 20살에 장렬하게 죽어 까일 점이 1도 없는 유관순이 발탁된 꼴이다. 유관순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발탁된 과정에는 여러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점, 1945년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옥을 반복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지금 전혀 기억되지 않는 여성들도 많다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만약 유관순이 살아서 1920-30년대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면 결코 지금같은 애국 아이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1920년대 신여성엘리트로 활동하거나, 1920년대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그랬듯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을 수 있는데, 그랬다면 절대 지금같은 위상을 가질 수 없다.

4.3. 과대평가 부정


훈장의 형평성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종교 논란 등은 반박이 있다. 향토사학자 임명순은 2014년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기사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화학당 측에서는 오히려 유관순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유관순의 조카[32] 유제한이 대한민국 최초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에게 제보를 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인덕을 비롯한 이화학당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의도적으로 띄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히려 이들은 유관순을 외면했다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와 함께 유관순 열사 재조명에 나선 소설가 전영택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인 것은 맞다.[33] 심지어 전영택은 유관순전의 내용 대부분이 박인덕의 진술에 의존해 집필하였다고 밝혔다. 이 전영택이 집필한 '유관순전'이 박창해가 만든 국어교과서에 실리게 되면서 유관순이 널리 알려진 건 분명한 사실.

5. 종교


집안 전체가 개신교 집안이라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믿게 되었다. 천안에서 살 때는 온 가족이 매봉교회에 출석했고, 이화학당에 입학한 이후에는 정동교회에 나갔다. 사실 정동교회가 이화학당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라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선교사들은 주일이 되면 이 교회를 나갔다. 당시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가 설교 중에 독립운동과 나라사랑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유관순은 손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매봉산에 올라가 한 기도가 유명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자주 기도를 하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해 이야기해 유관순에 감명을 받아 개종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20년 순국한 뒤 당시 이화학당의 룰루 플라이 교장은 개신교식으로 유관순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당시 장례예배는 손정도 목사가 집례했다.
현재도 개신교에서 개신교 독립운동가로 큰 비중과 명성을 차지하고 있으며, 개신교계는 유관순에 대한 추모예배를 자주 올리기도 한다. 2014년에는 유관순의 신앙적인 면을 다룬 영화 소녀의 기도가 개봉했고, 2019년 3월에는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유관순의 동상 앞에서 헌화예배를 하기도 했다.

6. 여담


[image]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 찍은 사진.[34]
  • 위의 초상화에도 사연이 있는데 원래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가장 왼쪽의 초상화였다. 유관순이 투옥되었을 때 찍은 사진을 이용해서 그린 초상화인데 문제는 실제 인물과 너무 차이 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투옥 때 촬영된 사진은 감옥 가기 전부터 고문당해서 얼굴이 부었으며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생존했던 유관순의 이화학당 동창들이 "얼굴이 너무 다르다"며 지적하자 가운데와 오른쪽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이다. 실제 인물은 청초하고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하니, 감옥에서 받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하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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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1일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의 미공개 사진 2점을 최초로 공개했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색깔 있는 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유관순이다. 출처.
  • 고화질로 복원된 사진이 있다.
  • 유관순이 징역 3년이라는 형량을 받으면서 정말 고문을 받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제의 법령에 따르면 여성은 법정최고형이 7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유관순은 징역 7년을 받고 들어간 것이었고, 이것은 현대로 따지면 무기징역과 똑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당대 일본 제국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가 아니었고, 여성의 경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준[36]이었다.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보통선거와 인권 신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실현된 것은 훗날 미군정기다. 또한 당대 공판 기록등을 볼때도 사상범 부부가 같이 기소되는 경우 여자는 형 집행 정지로 나오는 경우도 무척 많다. 이런 점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공훈 정리에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성에 대한 처우가 괜찮았다는 건 결코 아니다. 이런 식으로 법적으로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동일 범죄를 저질러도 여성에게 관대하게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전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아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고 낮은 지위에 대한 배상책의 일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1920년대나 30년대 초반에 신문을 보면 단순한 절도 내지는 참고인 조사과정에서도 나체 고문 내지는 고문치사, 성적인 학대로 인한 자살사례가 보도 될 정도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으로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 민족계 신문들을 한번 검색해 보면 오히려 한국의 1980년대 이상으로 자세한 고문 고발 기사가 다이쇼 시대에는 버젓히 실렸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신문에 잘 안나거나 갑자기 사망식으로 은폐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보면, 유관순에 대한 무서운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조갑제의 회고에 따르면, 3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도 경찰서에 고춧가루 통을 가지고 가는 순경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 5만원권에 들어갈 여성인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신사임당에게 밀렸다. 유관순 외에도 김구 선생이 들어갈 10만원권은 아예 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사유는 초상권 문제라는데 얼굴이 퉁퉁붓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이라 고문받기 전 사진을 찾기 힘들어서 라고 밝혔다.
  •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도 만세를 불렀다는 건 비중을 별로 두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다. 부모가 모두 진압군경의 총칼에 사망했음에도, 잘 다뤄지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소녀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상징성 때문이리라 추측된다. 앞서 언급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아우내 만세사건 부분에는 유관순이 아니라 진압군경에 총에 맞고 팔이 잘리고 머리가 절단난(...) 다른 남자를 주로 다루고 있다. 단 여기서 같이 잡혀간 사람 중에 이화학당 출신의 학생이 있다는 기록으로 이게 유관순이라고 본다.

사실 유관순의 부친인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고향에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였다. 일찍 감리회에 입교한 개신교 교인이기도 해서 마을 유지들과 협력해서 교회도 세워 교육, 계몽 활동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유관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37] 또한 독립운동가로 동시기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역시 투옥되었다가,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유관순과 잠시 해후하기도 하였다. 여동생 유관순의 사망 이후에도 유우석은 활발히 항일투쟁을 벌였다. 독립을 본 후인 1968년 5월 2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김완섭유관순이 폭력 시위를 계획, 준비하고 주도했다'여자 깡패'라는 비난을 했다. 이에 2003년 재판부는 그가 유관순이 주도한 시위는 폭력적이었다고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 및 번역본 판결문에 의해 당시 시위는 평화 시위였음이 확인되는 바 김완섭의 기술은 허위 사실 적시에 해당되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700만원 벌금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유관순이 '여자 깡패'라는 김완섭의 표현은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지만, 국내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어도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유관순 동상 건립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해당 기사에서 나오는 김활란은 스승이라는 도시전설이 있는데, 그녀는 이화학당 시절 선배로, 유관순과의 나이는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38] 실제 스승은 박인덕이다. 이 작자도 3.1 운동 후 여러 가지 활약을 했지만,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당연히(…) 친일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것을 별도로 하더라도 고위층과의 연애 플래그나 세계일주[39] 등으로 화제를 일으킨 여성이었다. 유관순이 각광받으면서 유관순의 스승으로 같이 인식된 건, 친일반민족행위자이던 박인덕이나 여러 작자들이 자신들의 더러운 걸 숨기고 유관순 찬양과 같이 지들을 미화하기 위한 게 컸다. # 실제 1990년대 어린이 위인전기에는 아예 박인덕을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도 나왔다. 그리고 소설 화수분으로 유명한 소설가 전영택도 친일 행위를 하던 걸 숨기고자 유관순과 알던 사이라는 걸 늘 강조하며 자랑하기도 했다.[40]
  • 한국의 개신교계에선 그녀를 개신교계 영웅으로 생각하나,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그녀와 이화학당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 친구였지만 뒤에는 불교로 귀의하고 비구니가 된 보각 스님이 회고하길, 알려진 거와 달리 꽤 짓궂은 면이 있었다고 한다. 유관순이 기도할 때 하나님 대신 명태님, 굴비님이라고 붙여 기도하며 킥킥거린다든지 친구들과 모여서 "예수님은 춥겠어. 벌거벗은 채로 늘 매달려 있잖아?" 라는 말에 "뭐 그래야지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관심을 기울일테니, 춥다고 불쌍히 여길 것은 없어"라는 말을 했다고 하나, 그녀의 나이가 어린 10대의 어린 소녀였음을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또래다운 발언이다.

보각스님의 주장만으로 그녀가 신앙적이었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무리이다.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만 보면, 유관순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그녀의 가족은 모두 개신교 교인이였고, 천안 병천면 지역의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아버지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녀는 개신교 미션스쿨이화학당에 다녔고 서울에선 정동제일감리교회[41]에 출석했으며,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나 잔 다르크를 뽑았다.[42] 보각스님의 회고가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정기적인 신앙생활을 한 개신교인이지만 짓궂은 면이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딱히 예외는 아니었다 정도가 되겠다. 다만 보각 스님의 회고 이외에는 딱히 근거가 없는게 문제.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크게 문제될 만한 행동은 아니다. 물론 어른이 그랬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43]
  • 크리스천 중에서 유관순을 개신교계 영웅 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다소 의심스럽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존경하지만, 그 모습은 종교 자체와는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면에서 본다면, 개신교측에서는 유관순 열사보다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순교를 당한 주기철 목사님이 훨씬 더 존경스러운 분이다.
  • 2014년 8월 한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이 누락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언론 일각에서 국정교과서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고교 국정교과서 모두를 확인해도 그 어느 책에도 유관순이 없었다.
확인해 본 바에는 6차교육과정에 '각주1 부분에 유관순 열사의 순국' 부분 간략히 기술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두산동아, 금성출판사, 천재교육, 미래앤 4종의 교과서이다.#[44]

  • 유관순의 이화학당 시절 친구로 2010년 4월 3일 106세의 나이로 사망한 남동순 할머니가 있는데, 유관순 열사가 사망한 이후 독립운동 단체[45]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8월 14일에도 작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46] 광복 이후에는 고아원을 세웠다.
  • 2018년 3월 28일(현지시간) 뉴욕 타임스(NYT)가 유관순 열사에 대한 부고기사를 총 8페이지에 걸쳐 게재했다.[47]
  • 유관순의 고향인 천안에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체육관이 있으며 현재 V-리그 남자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쌍용2동의 충무병원 앞에 위치해 있다. 여담으로, 동상이 있는 인도에서 횡단보도 2개를 건너면 2019년 초에 있었던 천안 라마다호텔 화재사고가 일어났던 그 호텔이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천안시의 상징인 구 마스코트 횃불낭자, 신 마스코트 나랑이 역시 누구를 묘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더 많은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구한말의 의병장 윤희순, 영화 밀정의 실제모델인 남자현, 김마리아[48][49], 박자혜, 권기옥, 차경신, 박차정, 등등... 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친일반민족행위자를 꼽아보면,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세 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역시 이화학당 출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박인덕이 앞장 서서 유관순 열사의 3.1운동 업적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 독립운동이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숨겨진 인물들이 많이 있어서, 더 많은 이화학당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대표적인 여성친일반민족행위자 세 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것은 이화여대의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심지어 이화여대에는 아직도 김활란의 동상이 있다.[50]
  • 그녀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이화학당 인근의 버스정류소인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을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유관순 활동 터'로 병기한다.

7. 대중 매체에서


전술한 영화감독 윤봉춘은 1948, 1959, 1966년 총 3차례에 걸쳐 <유관순>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윤 감독은 생전에 '유관순 전문 감독'으로 불렸다. 주인공 유관순 역은 고춘반(1948년판), 도금봉(1959년판), 엄앵란(1966년판)이 각각 맡았다. 1974년에 김기덕 감독이 만든 <겨레의 꽃 유관순>에선 당시 이화여고 3학년이던 배우 문지현이 맡았다.
국산 애니 <초롱이의 옛날여행>에서 유관순 목소리는 정미숙 성우가 맡았고, 2013년에 나온 모바일게임 <독도디펜스>에서 현대 복장으로 어레인지되어 등장했다.
2019년 2월 27일에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개봉됐으며, 배우 고아성이 유관순 역을 맡았다. 동년 3월 14일 1919 유관순이 개봉됐으며, 배우 이새봄이 유관순 역을 맡았다.

8. 관련 단체



9. 관련 문헌


  • 유관순: 3.1운동의 얼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이정은 저. 역사마당. 2004.

[1] 27세손.[2] 이 상태에서 순국함. 따라서 생전 최종학력은 이쪽이다.[3] 이화학당 개교 110주년을 맞아 심의를 거쳐 추서되었다. 따라서 실질적 학력은 이쪽이며, 공식적으로 이화여고 동문임을 인증한 셈이다.[4] 어렸을 때는 천안 병천에 있는 매봉교회, 이화학당 시절에는 서울 정동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가족이 모두 개신교 집안이다.[5] 1930년대 경성제국 여학생 평균 키가 150cm였다고 한다. 평균보다는 큰셈 자료. 지금 여학생 평균 키는 160cm 정도니 지금으로 치면 162cm정도였던 셈이다.[6] 한 때 유준석, 유관옥 등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7] 원래 모두 류씨가 맞으나 유씨로 표기한 이유는 1933년 두음 법칙이 생기면서 편의상 류관순을 유관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가 고유명사화 되어서 그렇다. 교과서에도, 대중적으로도 '류관순'보단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퍼져 있어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 혼란을 막기위해 2014년부로 유관순으로 바뀌었다. 참고 자료.[8]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강준만. 이외에도 서울시 홈페이지, 경향일보, 조선일보등에서 보도한 바 있다.[9] 일각에서는 1903년이나 1904년이라고도 하였는데 정확히 1902년으로 최종 확인되었다.[10]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11] 3남 2녀 중 언니 유계출모친이 다르다. 유관순이 태어날 무렵 박창봉결혼함.[12] 본명은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공주시에서 활동하다 교우를 심방하고 오던 남편이 병에 걸려 순직하자 혼자서 활동했다.[13]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졸업 후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로 된 학생.[14] 학교 바로 옆에 덕수궁이 있는데 고종황제가 붕어하면서 술렁거리고 혼란스런 분위기가 이화학당까지 들렸다고 한다. 오늘날도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는 덕수궁 옆에 있다.[15]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했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어 1935년 신촌으로 이전해 1946년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16] 실제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의 지휘자는 조인원(조병옥 선생의 아버지)이다. 참고로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영명학당에서 조병옥 선생이 졸업했다.[17]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낭독부터 4월 말까지 2달간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모든 만세 운동을 3.1운동으로 본다.[18] 2007년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견 전까지는 '7년형 설' 등이 유관순 지인의 입을 통해 유포되어 왔으며 위인전 등지에까지 나왔다.[19] 2심은 판결문이 남아있으나 1심은 5년형을 받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20] 1980년대 모 시사 잡지에서 취재한 서대문형무소 관련 이야기에 따르면 며칠 정도 가매장 후 시신을 인도했다고 한다.[21] 확실한 것은 사형이 아니라는 것. 애초에 사형은 정식 법 절차를 받아 집행하는 것인데 얼마 있지 않을 기결수를 굳이 복잡하게 죽일 필요는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랄했던 일제이니만큼 옥 중에서도 가열차게 투쟁한 유관순이 출소한 뒤에도 후환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석방 직전 불법적으로 그냥 죽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22] 유튜브나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관순이 미꾸라지 고문 등 입에 올리기 힘든 각종 성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는 동영상이나 글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어떤 근거도 없는 헛소리다. 왜 기록이 없냐고 물으면 일본이 그런 짓을 했던 흔적을 필사적으로 숨겨서라는 이상한 대답을 해대는데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전체를 숨기면 몰라도 특정 방법의 고문만을 숨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이런 충격적인 일이 정말 있었다면 당시에도 어떤 형태로든 증언이나 기록이 남지 않을리가 없는데 정작 시신을 수습한 이화학당 관계자들이나 친지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해진 고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작 유관순 외에 저런 고문을 당한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믿는 행동은 애국심이 아니라 역사 의식이 없는 것이다.[23] 윤봉춘은 1940년대 친일 활동을 하지 않기 위해 시골에서 은둔하였다.[24] 유관순의 유해를 받들어 조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어 일본이 고의적으로 이장 전에 무덤을 훼손하고 유골을 파괴했다는 설이 있다.[25] 실제로 가서 보면 봉분이 아닌 6각뿔 모양의 석관묘 형태로 조성해 놓았다. 석관 각 면에는 유관순에 대한 글귀가 적혀 있다.[26] 안중근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세월이 지나 건물이나 아스팔트 등으로 도배되어 어딘지 모르며 유력한 매장 장소에 대해서도 3곳이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 확실치 않다.[27] 조병옥 박사는 앞서 말한 유관순 영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자기 아버지를 연상할 수 있는 인물이 찌질하게 "아, 관순이가 나서니 내가 부끄럽구나" 류의 대사를 한다.[28] 병천 순대로 유명한 곳이다.[29] 유관순열사 서훈등급 격상을 위한 국회 대토론회 (국회 도서관대강당)[30] 인덕공업고등학교인덕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31] 이화여자고등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자 남자 교장. 이화여자대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총장)은 김활란이다.[32] ...인데 실제로는 조카 '''뻘'''인 먼 친척이다.[33]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이다.[34] 사진은 유관순의 평소 모습이 아니다. 일본군이 열사가 만세를 부를 때 저지하면서 가혹한 폭행을 했기 때문에 얼굴 전체가 부어 올랐다. 옆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눈과 볼 부분이 심하게 부어 오른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얼굴과 가깝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고초를 겪어 붓기가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겠으나, 흔히 보는 구타, 가혹행위 피해자의 사진들과 비교하면 좌우 대칭도 잘 맞고 멍든 흔적도 없다. 실제로 저렇게 생긴 사람도 흔하고 동양인은 옆 얼굴이 입체적이지 못한데, 가혹한 폭행의 결과고 평소 외모는 저 사진보다 나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숭고한 열사의 외모가 평균을 상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외모지상주의에 가깝다. 성웅 이순신도 외모는 볼품없다는 기록이 있는데 재현물에서는 미남형으로 그려진다.[35] 이 점은 사실 장우성 화백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린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문체부 하의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흐릿하게 찍힌 이화학당 시절 사진 탓에 제대로 얼굴을 복원하기 어려웠던 나머지 투옥 시절의 사진을 통해 자문을 내려줬다는 점도 있었다. 박목월 선생의 전기 등에서도 유관순의 한문 이름도 때로 기록이 서로 다른 점이 나올 정도였다.[36] 한국에서 "성고문"으로 떠들썩했던 건 1980년대 이전에 이미 1920년대 평양에서 그 사례가 있다.[37] 1899~1968, 아명인 유관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38] 그녀도 3.1 운동 때 체포되었으나, 이후에 친일파로 전향하여 맹활약을 하게 된다.[39] 그 당시 세계일주는 일본인들도 하기 어려웠다.[40] 실지로 전영택의 유관순 전기는 박인덕의 증언에 의해서만 기록되었다고 공언하고 있으며 전기 내용에서 관순이의 영특함을 과시하는 대목에서 항상 질문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바로 박인덕이다.(....)[41]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42]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고 기독교인이라는 보장은 없지만.[43] 교회에서 학생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보각스님의 회고가 별로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는 행동을 장난으로 하는 학생들 흔하게 볼 수 있다. 딱히 악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더라도 '하지 마라' 는 말 정도는 하지만,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는다. 유관순 열사 역시, 전국민에게 존경 받는 위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0대 소녀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보각스님이 말이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 저 말에 근거를 요구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44] 이 부분은 다소 설명이 필요한데, 유관순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중학교에서는 조금 약하게. 고등학교는 3.1 운동의 구조적 측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측면이 있다.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 것.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유관순은 실려있지 않다.천재교육 한국사 집필자인 주진오 교수의 경우처럼, 고등학교에서 유관순이 빠진 동일 저자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유관순이 나온다.[45] 자금전달, 정보수집, 심지어 무장투쟁까지 했다고 한다.[46] 체포된 동료를 구하는 작전이었다고 한다.[47] 자사 부고기사를 분석한 결과 저명한 백인남성 위주였다며, 이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지난 8일부터 '오버룩드'(overlooked·주목받지 못한) 코너를 마련했다. 매주 일요일 부고기사 지면에 게재되는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평가받지 못한 여성들 이야기를 다루었다. 유관순 열사가 재조명된 것도 그 일환이다.[48] 박마리아와 이름이 같아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고 살아온 길도 전혀 다르다. 이름만 같을 뿐이다. 박마리아는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이고, 나중에 이승만 정권의 핵심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기붕의 아내이다.). 그리고 이 친일파 박마리아도 이화학당 출신이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는 연동여학교 (현 정신여고) 출신이다.[49] 김마리아(1903-1970) 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또 있는데,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의 아내로, 이 분 역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훌륭한 분이다. 대한민국 설립 후, 이범석 장군이 초대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면서, 이범석의 아내 김마리아와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권력다툼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범석이 밀려나면서,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기는 했지만...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50] 2017년 11월 1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김활란 동상 앞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 라는 제목의 현판을 세웠다. 하지만, 11월 27일 학교측에서 현판을 철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