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충청도(호서)'''
忠淸道(湖西) | Chungcheong Province(Hoseo)

【한반도 전도에서 위치보기】

'''위치'''
대한민국(한반도) 중남부 / 남한 중부
'''면적'''
16,656.8㎢
'''인구'''
5,539,610명 (2020년 11월)
'''광역지자체장'''
허태정(대전광역시, 더불어민주당)
이춘희(세종특별자치시, 더불어민주당)
이시종(충청북도, 더불어민주당)
양승조(충청남도, 더불어민주당)
'''인구밀도'''
332.48명/㎢
'''행정구역'''
[image] 대전광역시
[image]세종특별자치시
[image] 충청북도
[image] 충청남도
'''최대도시'''
[image] 대전광역시
'''별칭'''
호서
1. 개요
2. 명칭
2.1. 성립 이전
2.2. 도 명칭 변천사
2.3. 이후
3. 범위
4. 인구
5. 특징
5.1. 지리
5.2. 사투리
5.3. 기타
5.4. 지역 간 관계
6. 정치
7.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한반도지방으로, 서해를 끼고 있는 중남부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경기 지역과는 한남-금북정맥으로 구별되며, 동부 영남 지역과는 소백산맥으로, 남부 호남 지역과는 금강-차령산맥으로 구별된다.

2. 명칭


역사적으로 이 일대를 '충청'으로 호칭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인 팔도 중 하나로 충청도가 형성된 것이 처음이다. '충청'이라는 이름은 충주청주의 앞 글자를 딴 것이며 이 두 도시는 오늘날에도 충청 지역, 엄밀히는 충청북도에 소재해있다. 다만, 아래 조선 충청도 문단에서 보듯 이 이름은 상당히 변동이 많았다. 오늘날에는 가장 오래 썼던 '충청도'가 정착해서 쓰이고 있다.
다른 말로 호서(湖西)라고도 한다. 이 때의 '호'는 대개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호강(湖江)이라고 불리던 금강이란 설이 있다.[1] 전라도/경상도의 별칭인 호남/영남과는 달리 현재는 많이 쓰이지 않고 호서대학교 정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이다. (京) 지역과 이 서(西) 지방을 합쳐서 기호(畿湖) 지방이라고도 불렀다.

2.1. 성립 이전


고대에는 충남 천안을 중심으로 한 명목상으로는 삼한 전체에서 가장 지위 높은 소국인 목지국이 번영하며 주변 세력을 영향권에 넣고 있었으나, 충주, 진천 등지의 충북 북부 일대는 다른 충청도 지역과는 달리 유물로만 보면 오히려 진한과 크게 가까워 그 지역은 마한이 아닌 진한에 속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다 3세기 후반 백제가 고이왕 혹은 책계왕 때에 목지국을 제압한 후로는 백제 역사의 주무대가 된다. 일단 3세기 중후반 천안 청당동에 위치한 옛 목지국 세력은 전성기에 비하면 어느 정도 위축된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나지만, 백제에게 제압당했어도 어느 정도 번영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4세기 중반 비류왕의 시대 때 청주에 백제계 세력이 대두하면서 위세가 커지는 것과 비례하여 천안 일대는 상대적으로 크게 쇠락하는 걸 보면, 백제가 청주에 의도적으로 직할 혹은 직접 제휴 세력을 심으면서 어쩔 수 없이 남겨놓은 천안의 옛 목지국 세력을 제압하는데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이 과정에서 충북 일대의 진한 계열 소국들 또한 쫓아내거나 복속하는데 성공하게 되는데, 신라 초기 백제와의 갈등 기사는 이 일과 관련 있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장수왕이 475년 한성 함락 후 남진하면서 얘기는 달라진다. 이 시기에 백제의 중심지는 충남으로 옮겨지지만 한성백제 전성기 시절 백제의 판도였던 충북 일대는 고구려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후의 충청도는 한동안 충남에서 개로왕 시즌2를 찍으려고 충북쪽에서도 찔러드는 고구려와 역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충남의 백제가 사생결단하는 무대가 된다. 이 시기 고구려가 적지 않은 시절 동안 점거했던 군사시설이 대전 월평동 심지어는 오늘날 세종 조치원에서도 발견되는 걸 보면, 백제가 초반에 얼마나 큰 위기에 몰려 있었는지 그리고 백제를 멸망시키려던 고구려의 의지가 어느 정도로 집요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신라가 처음으로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충남북의 남부 지역을 접수하면서 충청도에 진출했고[2], 진흥왕 때에 이르면 고구려를 몰아내고 충청북도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고구려 대신 백제와 대결을 벌이게 된다. 이 쟁패전은 660년 백제의 멸망으로 일단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충청도 전체는 한성백제 시대 이래로는 약 이백 년 만에 다시 한 나라 아래에 통합된다.
통일신라 시기 9주 5소경으로 지금의 충남 지역은 대부분 지역이 웅주, 충북 지역은 대체로 한주상주의 일부였는데, 이는 삼국 시대 때 웅주의 판도는 백제, 한주와 상주는 신라였던 데 그 이유가 있다. 중요한 도시인 5소경 중 중원경(충주)과 서원경(청주) 2개가 있었는데 청주는 4세기 중반 백제 비류왕 때부터 백제가 목지국 잔여 세력을 더욱 억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키워주면서 자리잡게 된 거점이었고, 충주는 고구려가 의외로 오랜 시점 경영하면서 성장시켰다가 진흥왕 때 신라가 접수해서 더욱 발전시킨 곳이었다.
그러다 후삼국시대가 개막되자 충청도는 다시, 고려와 후백제가 힘싸움을 벌이는 각축장이 된다. 이때는 앞서 웅진백제 VS 장수왕 고려 그리고 이후 사비백제 VS 신라의 구도와는 달리, 백제가 충남을 고려에게 더 많이 내어준 반면 충북은 보다 많이 확보한 형세가 벌어졌다. 이 별로 길지 않은 반세기 정도 되는 분열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끝났고, 오늘날 충청도의 행정구역은 다시 한 국가 아래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특기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백제에게 일격을 당한 후 크게 쇠락한 바 있는 천안 지역 호족들은 왕건에게 줄을 섰으며, 이를 통해 고려에게서 큰 우대를 받아 다시 한반도 남부의 중심지 중 하나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한때 마한 그리고 삼한 전체의 종주국이었기에 백제에게 견제받아 쇠락한 후로 거의 오백 년 만의 부활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초기 10도에서는 하남도~중원도가 존재했다. 이후 5도 양계 체제에서는 지금의 경기도 남부와 강원도 일부까지 합친 양광도[3]가 충청도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충청도의 틀이 완성된 것은 조선시대 태종 대에 와서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지속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겪는 과정에서 양광도 북부 일대를 경기도에게 내주고 그 대신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을 이관받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명칭도 '충청도'로 바꾸게 된다.

2.2. 도 명칭 변천사


조선왕조 내내 '''수시로 도의 이름이 바뀌었다.''' 관련 기사 가장 유명한 건은 명종문정왕후를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은 '양재역 벽서사건'[4]으로 이 때 충주는 현으로 강등되어 유신현이라 불리고 충청도는 잠시 홍주(현재의 홍성군)의 이름을 따서 18년간 '''"청홍도"'''가 되었다.
이 외에도 잦은 강등과 복권이 있어서 공주와 홍주까지 더해서 충공도[5], [6] 청공도(1년 공청도는 3회 '''28년''') 공충도(4회 '''27년'''), 충홍도(3회, 5년 이하), 홍충도(1회, 1년), 공홍도(3회 '''30년''') 등 4주의 6가지 조합이 다 나왔으며, 선후까지 합하면 안 나온 조합은 12개 조합 중 청충도, 홍공도 뿐이다. 대략 조선 역사에서 110년간은 충청도가 충청도가 아니었던 셈이며, 명종(청홍도), 광해군(공홍도), 인조(공청도), 순조(공충도, 공청도) 대에는 충청도를 쓰지 않은 기간이 더 길었다. 또 충청도가 온전히 그 이름을 보전했던 대는 인종, 선조(!), 경종, 헌종 정도다.
이렇게 이름이 자주 바뀐 것에 대해서는 우선 한양과 가깝다는 이유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기 쉬웠던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핵심 중심지가 부재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 충청도내의 주요 도시였던 충주, 청주, 공주, 홍주가 전주나 경주, 평양과 같이 그 도시를 빼면 말이 안 될 정도로 도내에서 인구적/문화적 중심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네 도시 모두 6만 정도(영조 시기)의 거의 비슷한 인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양직할시/역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선조 21년(1588년) 평양에서 발생한 존속 살해사건으로 평양의 강등과 평안도 개칭이 논의된 적이 있었는데 평안도는 충청도와 달리 평양을 대체할만한 중심지가 없어서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파란만장했던 도 명칭의 변천사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키백과 참고
'''연도'''
'''명칭'''
'''사유'''
'''충청도 명칭회복'''
'''비고'''
1505 (연산군 11)
충공도(忠公道)①
김처선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1506
중종반정
1540 (중종 35)
청공도(淸公道)
충주의 패륜사건[7]
1541
범인이 충주와 연고가 없어 예성부를 충주로 회복
1550 (명종 5)
청홍도(淸洪道)
충주의 역모
1567?
선조 즉위
1612 (광해군 4)
충홍도(忠洪道)①
청주의 역모
-
1613 공홍도
1613 (광해군 5)
공홍도(公洪道)①
충주 유인발의 난
1623?
인조반정
1628 (인조 6)
공청도(公淸道)①
괴산,충주의 역모
-
1646 홍청도
1646 (인조 24)
홍청도(洪淸道)
공주의 역모
1653
충원현을 충주로 회복함으로
1658 (효종 9)
충홍도(忠洪道)②
청주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함
-
1661 충공도
1661 (현종 2)
충공도(忠公道)②
홍주의 역모
1662

1680 (숙종 6)
공청도(公淸道)②
?
-
1681 공홍도
1681 (숙종 7)
공홍도(公洪道)②
청주의 역모[8]
-
1689 충홍도
1689 (숙종 15)
충홍도(忠洪道)③
?
같은 해 8월
숙종 7년 역모로 처형된 박상한이 신원됨
1735 (영조 11)
공홍도(公洪道)③
청주,충주 반역
1747

1777 (정조 1)
공충도(公忠道)①
역적 홍상범의 모친의 고향이라는 이유
-
1778 홍충도
1778 (정조 2)
홍충도(洪忠道)
역적의 출신지라는 이유
1779

1804 (순조 4)
공충도(公忠道)②
청주의 역모
1813

1817 (순조 17) 1월
공청도(公淸道)③
?
1826

1826년 (순조 26)
공충도(公忠道)③
청주의 역모
1834

1862 (철종 13)
공충도(公忠道)④
역적의 출신지라는 이유
1871


2.3. 이후


조선시대~해방 이후 동안 하위 행정구역의 출입에 관해서는 범위 문단 참고.
1895~1896년 약 1년간 시행된 23부제에서는 홍주부, 공주부, 충주부로 나뉘었다.[9] 이후 1년 만에 23부제를 철폐하고 시행된 13도제에서 충청북도충청남도로 나뉘었다. 해방 이후 1989년에 대전광역시가, 2012년에는 세종특별자치시가 분리되어 별개의 광역자치단체가 되었다.

3. 범위


'충청도'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범위가 포함될 수 있다.

1. 조선시대 이 일대에 존재했던 팔도 행정구역 중 하나인 충청도

1. 충청남도 + 충청북도

1. 충청남도 + 충청북도 + 대전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

1. 조선시대 충청도 및 후속 행정구역(3번)이 존재하는 일대 지방

2의 경우 '충청남북도' 식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으며, 4는 '충청권', (남한 기준) '중부 지방' 등으로 언급하곤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막연한 범위로 사용하는 '충청도'의 유래는 앞서 언급했듯이 1번 조선 충청도이다. 조선 충청도와 그 후속 행정구역인 충청남도 + 충청북도 + 대전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의 영역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나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가령 안성은 조선 초기에는 충청도였다가 1413년 일찍이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같은 시기에 영동옥천은 본래 경상도였다가 반대로 충청도가 되었다. 논산, 서천, 보령 남동부 지역은 본래 전라도였다가 충청도로 들어왔다. 평택은 다소 복잡한데 조선시대에 지역 일부가 충청도와 경기도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최종적으로 1914년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10][11] 한편, 금산은 줄곧 전라도에 속해있다가[12] 해방 이후인 1962년에서야 충청남도로 들어왔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한 3번을 기준으로 면적은 16,656.8km² 이다.
본 문서에서는 현행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한 3번을 중심으로 다루며 조선 충청도에 한정된 내용은 별도의 문단에서 다루도록 한다.

4. 인구


{{{+1 ''' {{{#000000 광역자치단체 인구현황
2020년 10월}}} ''' }}}











충청남도
2,120,347명


충청북도
1,599,102명


대전광역시
1,467,556명


세종특별자치시
351,007명


''' 충청지방 인구 추이 '''











1925년
2,129,514명


1966년
4,451,762명


1970년
4,259,308명


1975년
4,468,371명


1980년
4,378,043명


1985년
4,390,163명


1990년
4,451,614명


1992년
4,409,209명


1995년
4,556,788명


2000년
4,804,723명


2005년
4,906,087명


2010년
5,128,706명


2015년
5,391,260명


2020년 10월
5,538,012명


{{{+1 ''' {{{#000000 주요도시 인구순위
2020년 10월}}} ''' }}}











대전광역시
1,467,556명


청주시
844,486명


천안시
658,911명


세종특별자치시
351,007명


아산시
314,552명


충주시
210,246명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영충호시대''' 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말인즉 본래 영호남, 영호남 했지만 이제 충청도 인구가 호남을 넘었으니 영충호시대라는 것. 면적이 넓은 영남을 부울경대경권으로 나눠서 본다면 2020년 10월 주민등록인구 기준으로 수도권[13], 부울경[14], 충청권[15], 호남권[16], 대경권[17], 강원권[18], 제주권[19] 순이다.

5. 특징



5.1. 지리


충청도는 지리적으로는 남부 지방에 속해있기도 하고 중부 지방에 속해있기도 한 애매한 지역이다. 다른 지역들은 다 구별이 되어있는데 유일하게 충청도만 나뉘어있다. 서울/경기&강원&충청북부는 중부지방, 전라&경상&충청남부는 남부지방, 제주는 제주지방이며 일기예보도 보면 충청지역만 중부지방이나 남부지방으로 나뉘어 예보하는 것을 쉽게 볼 수있다. 생활권도 다 나뉜곳도 충청도가 유일한데 충청서북(천안, 아산, 내포권[20], 진천, 음성 등) 지역은 수도권, 충청동북(충주[21], 증평 등) 지역은 강원, 충청남동(영동,[22] 옥천, 보은, 괴산, 대전[23], 청주 등) 지역은 경상, 충청남서(서천, 보령, 부여, 청양, 논산, 공주, 금산 등) 지역은 전라 지역 생활권으로 나뉘어있다. 같은 충청지역 출신이어도 생활권이 다 달라 사투리가 다르는 경우가 많아 어색한 경우도 흔하다.
옛부터 평야가 넓고 강이 흐른 덕에 토지가 비옥해서 부자가 많았다. 광천에서는 돈자랑 하지 말라는 말도 있었고, 강경읍(現 논산시)의 번영은 유명했다.
수도권과 인접한 위치 덕분에, 특히 충남 천안, 아산 지역은 수도권과 바로 붙어있어서 그렇다. 천안은 아산과 함께 독자적인 도시권을 형성하며 교류가 수원 인천, 서울 쪽으로 압도적으로 많다.[24] 그리고 충남이나 충북의 수부도시인 대전이나 청주또한 마찬가지로 수도권의 교류가 많으며, 그 대신 영남권과 호남권의 교류가 적은 편이다. 이 때문에 충청도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지역색이 적으며, 특히 인구 상당수는 충청도 토착민이나, 수도권, 영남, 호남, 관동(강원도) 출신이 섞어서 거주하고 있다. 한마디로 강원, 경상, 전라, 제주, 서울/경기 지역은 전부 각 지역색이 엄연히 존재한데 유일하게 충청도만 없다.
게다가 충청지역은 경부선 소속도 아니고 호남선 소속도 아닌 지역이라 두 노선이 나뉘는 지역[25] 이다.
충남/충북은 다른 도들(경상도, 전라도 등)과 다르게 '''충청남도/충청북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다.''' 아무리 봐도 동서로 나눠놓은 것이지 남북으로 나눠놓지 않았음에도, 남북을 붙인 것은 다른 도의 남북 분단과의 형평성 때문이다. 충청도를 제외한 남북으로 나뉜 도들은 전부 남북 구분이 확실하기 때문에, 충청도만 예외로 두기 어려웠다. 애초에 충청도를 동서로 나눈 것은 충청도 자체가 동서로 길기 때문이다. 또한 동서로 나누는 것이 충청도의 좌·우도 분할도와도 거의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26]. 남북의 연원은 구한말 충북의 수부도시인 충주시와 충남의 상업도시인 강경읍[27]의 위치 관계에 의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대전광역시, 21세기 들어서 세종특별자치시가 분리되고 도에 남은 최대 도시가 천안시청주시로 바뀐 오늘날에는 역설적으로 위도 관계가 역전된 탓에 지리 관계에 둔감한 사람들은 충남/충북을 자주 헷갈리곤 한다[28].
충청도는 내륙지역, 특히 경부축[29]이 가장 발달하였는데 이쪽에 충청도 3대도시[30]가 있으며 이 세 도시의 인구 총합은 약 3,000,000만명 으로 충청도 전체 인구의 50%가 살고 있다

5.2. 사투리


8도 사투리 중 가장 부드럽다는 평가를 받는 충청 방언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사투리가 다른 것처럼 충청북도충청남도 간에도 사투리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차이점이 '''"기다(맞다, 그렇다)"'''의 사용 여부이다. 충청남도, 특히 충남 남부 지역에서는 표준어 "그래?"를 "그려?"내지 "기여?"로 쓰며, "그렇네", "맞네"를 "기네" 쓴다. 반면 충청북도의 경우엔 "그래?"를 "그려?"로 쓰는 것 이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사투리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매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투리가 충남 지역 사투리인데, 억양도 충북보다 세며, 어휘들도 충북에 비해선 풍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충청도 사투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단언 "~유", "~슈"일 텐데, 이는 표준어 "~요"에 해당하는 존대어이다. 또래나 친근한 사이에선 주로 "~겨", "~여", "~려(텨, 쳐), "~랴", "~햐", "~혀", "~겄", "~디", "~댜", "~께"와 같은 어휘를 쓴다.
현대의 충청도 젊은이들 사이에선 "~겨", "~여", "~겄", "~디" 정도의 어휘들만 쓰이며, 단어들은 대부분 표준어로 대체해서 쓴다.
전라도경상도 지역에 비해 최근 몇 십 년 동안 외지인의 유입이 지속되면서 원래도 강하지 않았던 지역색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약해졌으며 그에 따라 사투리 사용률도 현저히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남한 내에서 유일하게 여러 지역과 인접해있다보니 방언연속체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역이기도 하다.[31] 각각의 권역으로 나눠보자면, 충청 북부 지역[32]경기 방언, 충북 동북부 지역[33]영동 방언, 충남 남부 지역[34]서남 방언, 충남 동남부 지역[35]과 충북 중남부 지역[36]동남 방언 등 각각 인접한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인근 방언의 특징 일부를 사용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충청 방언 참고.

5.3. 기타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양반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구한말의 자료(?)에 따르자면 양반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충청도 출신이었단다. 특히 충남은 더더욱 그러했는데, 인구비율을 고려하지 않아도 양반의 수가 가장 많았다. 원래 충청도는 다른 지역보다 인구가 적었는데, 인구비율을 고려하지 않고 많았다면 인구비율을 고려한 양반 비율은 굉장히 높아진다. 무려 10가구 중 1가구(10.3%)가 양반이었다.[37] 여기에서 유래된 지역 별명이 '충청도 양반'. 다만, 통계자료의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보다는 조선 후기 권력을 잡은 서인,노론 가문들이 본관과는 별개로 갈수록 한양에 집중됐지만 충청도는 거리가 멀지 않고, 또 노론의 텃밭이 충청도이기도 해서 노론의 영수 송시열 같은 인물이 나오기도 했고, 또는 충청도는 말과 행동에 여유가 넘쳐서 마치 양반의 여유를 보는듯 하다고 하여 '''충청도 양반'''이라 했다는 썰이 있다.
사회복무연수센터로 갈 때 개별로만 입, 퇴교가 가능한 지역이다. 제주도에서 오는 입, 퇴교자들도 청주국제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병무청에서 전세버스를 제공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이다.

5.4. 지역 간 관계


2020년 현재 기준으로 보면 서울, 경기 지역에서 충청 출신이 가장 많은 지역은 서울 기준으로 송파구[39], 양천구[40], 강남구[41]가 있으며, 서초구는 청주, 충주 출신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편이다. 또한 중랑구도 충청 출신의 비율이 호남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42] 그 외에 충청 출신이 많은 지역으로는 영등포구[43], 성북구[44], 마포구, 강서구[45], 동작구 등이 있다. 인천 지역은 충청 출신이 가장 많고,[46] 호남 출신이 그 다음이다. 그리고 경기도의 경우 고양시, 구리시, 남양주시[47], 안양시[48], 부천시, 의왕시, 과천시, 성남시[49],용인시, 수원시[50][51], 안산시[52], 화성시, 평택시[53]가 충청 출신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54]
이들 도시의 대부분은 홍성, 서산, 예산, 당진 등 내포지방과 연계되는 서해안고속도로[55][56]와 대전, 천안, 청주, 세종 등 내륙지방과 연계되는 경부고속도로[57]에 연계되는 공통점이 있다.

6. 정치


인천·경기과 같이 대선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많이 했으며, 특히 정치나 선거 등과 관련해 충청도를 언급할 때 '수도권-호남-영남을 잇는 가운데'란 뜻으로 '중원(中原)'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중원은 충주시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58] 정당과 관련된 부분은 충청권 보수정당 문서 참고.
영남 vs 호남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지역감정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장 자유롭다고 여겨진다. 정치적으로나, 향토문화적으로나 두 지역에 비해 지역색이 옅고, 이로 인해 지역주의, 몰표로 욕먹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3당 합당, 자민련·자유선진당 흡수 등으로 인해, 최순실 게이트 전까지는 보수세가 살짝 우세한 중도지역이었다. 예를 들어, 18대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약 56% 정도의 압도적인 표를 선사하였고, 박근혜 정부 심판 성향을 띠던 20대 총선에도 충청권의 민심은 근소한 우위로 새누리당을 택한 바 있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충청권 보수정당이 있었던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충청권 보수정당 계열의 성향은 충청남도에서 지배적이었고 충청북도는 지역색이 상당히 옅은 편이다.[59]
이후 충북 청주권, 충남 북부권, 대전광역시, 세종시에 수도권 인구가 유입 되면서 보수세가 약화된 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민주당이 19대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후보와의 득표 격차를 충남, 충북에선 10% 넘게, 대전, 세종은 20% 넘게 냈고, 7회 지선에서 광역지자체장 자리를 석권했고, 21대 총선은 충청권 28석 중 20석을 차지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북도, 충청남도 문서 참고, 혹은 각 문서의 시·군의 문서를 찾아보길 바람.

7.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8. 둘러보기




[1] 호(湖)가 벽골제 또는 금강이라면 그 북쪽에 있는 충청도 지역이 왜 호북이 아니라 호서가 되었는지 의문이 남을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방위 인식에서 서쪽이 북쪽과, 동쪽이 남쪽과 혼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압록강 남쪽 6개 주는 '강남6주'가 아닌 '강동6주'라 불렸다.[2] 충북 일대가 진한에 속했을 개연성이 높지만 그 당시의 진한 영역 전체를 신라가 자국 영역으로 볼 때가 있었는진 오늘날엔 알 길이 없다.[3] 양주광주에서 따온 것이다.[4] 을사사화의 후속 사건으로 조작이라는 견해가 많다.[5] 충주+공주.[6] 나름대로 충격과 공포라고 할 만 하다. 한번은 연산군김처선을 죽일 때 나왔고(중종반정으로 1년), 또 한번은 효종 말, 현종 초에 청주와 홍주가 3년 간격으로 차례로 역모를 일으켜서 나왔으니까. 물론 2번 밖에 없는 일이었다.[7] 원주사람 유석이 충주에서 부친을 살해하려 하였다.[8] 청주사람 박상한이 쓴 기우제문에 임금을 비난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구절이 있었다.[9] 충청도에서 4대 도시 중 남은 하나인 청주 일대는 공주부에 속했다.[10] 진위현은 태조 때, 평택현은 연산군 때 경기도로 들어갔다. 이후 중종 대에 다시 충청도로 되었다가 진위군은 고종 대에 경기도가 되었다. 이후 충청도에 남아있던 평택군 일대가 진위군에 통합되면서 평택 일대가 모두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평택시/역사). 효종김육이 충청도에도 대동법이 적용된 것을 감사하며 세운 비석이 평택에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11] 현재의 평택시의 대부분을 관할했던 진위군은 사실상 충청도에 속해 있고, 충청 방언을 제법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23부제 실시할 때에도 공주부에 유일무이하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라 보는 학설이 상당히 우세하고 통설로 보는 편이 많다.[12] 23부제 당시 잠시 공주부에 속한 적이 있다. 이후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전라북도 소속이 되었다.[13] 26,032,007명[14] 7,879,010명[15] 5,538,012명[16] 5,109,611명[17] 5,063,934명[18] 1,541,836명[19] 673,606명[20] 홍성, 예산, 태안, 서산, 당진 일대[21] 경기도와도 접해 있고 언어적으로도 제천, 단양보다는 진천, 음성과 비슷할 정도로 수도권 생활권에도 포함된다.[22] 영동군 일부 지역은 19세기말 23부제 시행 당시 대구부에 속한 지역도 있었고, 지금도 동남 방언을 사용하는 곳이 있으며 예장고신의 교세가 충청도에서 가장 강할 정도로 사실상 거의 경상도라고 봐도 무방하다.[23] 참고로 대전은 충청도 지역에서 경상도 출신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24] 2017년 기준 전국 고속/시외버스 승하차량 1위가 천안 - 서울 경부 노선이며, 수도권 전철 1호선 또한 천안을 거쳐 아산 신창면까지 운행한다.[25] 고속철도는 오송역, 고속도로는 천안에서 나뉘고, 일반철도는 대전에서 나뉜다. 대전지역은 심지어 서울경부(대전복합 출발)행 고속버스와 서울호남(유성 출발)행 버스가 같이 있으며, 청주는 고속버스는 경부선, 시외버스는 호남선이다. 공주시는 철도는 호남선인데 고속버스는 서울경부이며 반대로 충주시는 고속버스가 호남선이다. 같은 충남, 충북끼리여도 호남선과 경부선이 뒤죽박죽 얽혀있는곳이 바로 충청도다. 예전에는 대전청사행 고속버스 노선은 호남선과 경부선으로 나뉘어있었다가 지금은 전부 경부선이다. 그리고 천안은 예전에 천안삼거리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거리는 서울에서 영/호남 지역으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한 지역에 버스는 경부선인데 철도는 호남선, 혹은 그 반대이거나 대전이나 청주처럼 고속/시외버스 둘다 경부/호남선인것 처럼 완전히 복잡하다. 애초에 충청도라는 지역은 영호남 지역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라. 충청도는 솔직히 내세울만한 특징이라곤 교통의 요충지밖에 없다. 충남 서해안 지역은 호남선이며 천안아산, 대전복합, 공주 행 노선은 경부선이다. 당장 고속터미널에 가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경부선(경상도)&영동선(강원도), 센트럴시티터미널은 호남선(전라도)으로 확실히 구분되어있다. 이는 철도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역은 경부선, 용산역은 호남선, 청량리역은 영동선. 제주도는 지역 전체가 섬이라 예외.[26] 참고로 조선시대의 좌ㆍ우도 개념은 북쪽을 위쪽으로 하여 그려지는 지도상에서 보았을 때가 아니라, 임금이 계신 서울(한성부)에서 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한다. 이 때문에 서울 이남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는 동쪽이 좌도가 되고 서쪽이 우도가 된다. 일반적인 지도에서 볼 때와는 반대가 되는 것. 대신 서울 이북인 황해도, 평안도는 일반적인 지도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동쪽이 우도, 서쪽이 좌도가 된다. 참고로 함경도는 현재와 같이 좌우가 아닌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다.[27] 비단 상업이 아닌 행정 등의 지표로 본 수부도시인 공주시 등도 충분히 남쪽에 있긴 하다.[28] 특히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선 등 국가 주요 간선교통망은 천안-청주-대전 순으로 통과하기에 더 그렇다.[29] 경부선, 경부고속선, 경부고속도로 [30] 대전,청주,천안[31] 전 버전에서는 충청도 사투리가 없다는 식의 서술을 해놓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사투리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을 의미한다. 상술한 것처럼 많은 사투리가 조금씩 섞인 것은 사실이지만, 충청도 지역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특징이 존재하므로 충분히 독자적인 사투리로 분류 할 수 있다.[32] 충남 천안, 아산과 충북 충주, 진천, 음성, 증평, 괴산[33] 제천시, 단양군[34]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공주시·보령시·논산시·금산군·서천군·부여군·청양군[35] 대전광역시[36] 청주시,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37] 2위는 충북으로 전체 가구 중에서 4.5%, 3위는 경북으로 3.8%, 4위는 서울로 2.2%, 5위는 전북으로 1.0%의 비중을 차지하였다.[38] 진주 출신은 강남 3구에서 가장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특히 강남구에 가장 많이 거주하며, 다음으로 송파구, 서초구 일대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39] 송파구 인구의 약 33% 정도가 충청 출신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한다. 즉 '''송파구'''는 영등포구와 더불어 '''서울에서 충청 출신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대전대학교 한방 병원이 이로 인해 생겼다고 충청향우회 송파구지회에서 알려주었다. 물론 송파구 인구 내의 출신지별 비율로 계산하면 가장 비율이 높은 것은 '''영남 출신'''이다. 충청 출신과 영남 출신이 결혼하여 영남 출신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겠지만, 보통 송파구 갑 지역에는 경상도, 특히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진주시[38], 창원시,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영주시, 안동시, 경주시 출신이 굉장히 많이 거주한다.[40] 양천구 전체 인구의 약 30%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41] 강남구에도 충청 출신이 다른 구에 비해서는 제법 많은 편에 속한다. 적어도 강남구 전체 인구의 27% 이상 된다. 특히 천안시, 충주시(서초구 못지않게 많이 거주함), 연기군(현재의 세종시), 청주시, 공주시, 아산시, 대전광역시 출신이 강남구 관내에 굉장히 많이 거주한다.[42] 특히 지리적 위치 특성상 충주, 제천 등 충북 북부 출신이 많다. 전체 인구의 약 28~29% 정도 추산되고 있다. 물론 중랑구에서 출신지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약 32~33%를 차지하는 강원도. 춘천으로 나가는 46번 국도 구선과 강릉으로 나가는 6번 국도가 통과하는 강원도의 관문 지역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43] 지금은 송파구에 살짝 밀린 감이 있지만 이전에는 서울 25개 자치구 중 충청 출신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현재도 32~33% 정도. 특히 경부선 영등포역이 자리한 지역 특성상 경부선 연선지역인 대전, 청주, 천안 출신이 많다.[44] 의외겠지만 영남 다음으로 충청 출신의 비율이 높다. 약 28%.[45] 양천구와 비슷하게 구 관내 인구의 30% 정도로 추산된다. 충남 서북부(내포) 출신이 많다.[46] 인천 인구의 충청 출신 또는 연고지가 30% 정도 된다고 한다. 특히, 서산, 홍성, 당진, 예산, 태안 등 내포지방(충청남도 서북부 서해안) 연고자가 많다.[47] 충청 출신이 남양주시 인구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구리시도 약 27~28% 정도 된다. 상술했듯 중랑구도 충청 출신이 전체 인구의 약 28~29% 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48] 안양시 인구의 32% 정도가 충청도 출신이라 한다. 특히 천안, 아산, 예산, 홍성, 서산, 당진 등 충남 북부 출신이 많다.[49] 전체 인구의 약 25% 정도 된다. 특히 충남 출신과 청주 출신이 많다.[50] 의외겠지만 충청 출신이 그래도 많은 편에 속한다.[51] 경부선 및 경부고속도로의 연선으로 인하여 천안 출신도 많고, 대전, 청주 출신이 수원에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52] 호남 출신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긴 하지만 안산에도 주변 다른 지역에 비해 충청 출신이 꽤 많이 거주한다.[53] 화성, 평택에서 서해대교만 건너면 바로 당진이다. 또한 아산만방조제 및 45번 국도를 통해 아산과, 1번 국도를 통해 천안과도 연결된다. 이 때문인지 평택에는 천안, 아산 출신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며, 천안과 아산 다음으로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의 교세가 강하다. 다만 화성시는 경부선보다 서해안선의 영향이 좀 더 강해 내포지방 연고자가 천안권 연고자보다 우위이다.[54] 과거 평택은 충청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평택시의 전 지역은 충청 방언을 사용하며, 충청남도나 다름없는 지역이다. 실제로 평택시 소사동에 대동법 시행 기념비가 있는 것은 이는 평택시가 과거에 충청도에 명백히 속해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물론 평택시는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을 1914년부터는 경기도 진위군이었다. 그렇지만 평택시가 충청도의 문화나 역사나 사람들의 풍습을 지니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문화가 완전히 똑같거나 상당수 일치한다고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23부였을 때에도 평택만은 공주부에 속해 있었다.[55] 평택, 화성, 안양, 안산, 인천이 그러하며 충청권 중에서도 내포지방 연고자가 많다.[56] 다만, 내포지방 중에서 예산은 서해안고속도로가 통하지 않고 대신 당진영덕고속도로를 통해 서해안고속도로와 간접 연계가 된다.[57] 수원, 용인, 성남이 그러하며 실제로 대전, 천안, 청주, 세종 연고자가 많다.[58] 주로 어르신들이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로 부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도농통합 이전 옛 중원군 땅에 발견되었기 때문.[59]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충청북도에서 당선된 대통령이 거의 대부분 전국적으로도 당선되었을 정도이다. 아마 충북이 특히 타 지역과 접하는 곳이 많은 영향도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