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

 


1.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李淳九
2. 천안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旬求
3. 경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純久


1.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李淳九


성명
이순구(李淳九)
생몰
? ~ 1920년
출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이순구(李淳九)의 생년월일과 출생지를 비롯해 그의 초기 행적에 대해선 전혀 알 수 없다.
1920년 만주 유하현(柳河縣)[1] 소재 합성소학교(合成小學校)의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민족 교육에 앞장서고 있던 중, 그해 10월부터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발생한 간도참변 때 일본 경찰에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천안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旬求


성명
이순구(李旬求)
이명
이순구(李順求)
본관
한산 이씨[2]
생몰
1892년 12월 28일[3] ~ 1950년 8월 11일
출생지
충청도 목천현 수신면 발산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발산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이순구(李旬求)는 1892년 12월 28일 충청도 목천현 수신면(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한동규(韓東奎)·이백하(李柏夏) 등과 함께, 4월 1일의 갈전면(현 병천면)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거사일인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유관순 등이 주동한 독립만세시위에 합류하여, 동지들과 함께 시장 입구에서 장터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이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 3,000여명 앞에서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삽시간에 독립만세소리로 온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헌병주재소를 향하여 접근하자, 이에 놀란 일본 경찰이 주재소에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들도 평화적인 시위대열에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탄압하니,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사망자의 가족과 친지들은 일본 경찰의 발포로 순국한 시체를 헌병주재소로 옮겨놓고 '살려내라'고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으며, 그도 김교선·한동규·이백하 등과 1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달려가서, 쇠스랑으로 주재소 유치장 벽을 때려부수며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그해 5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었고#, 9월 1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되어 징역 2년형이 확정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0년 8월 11일 별세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경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純久


성명
이순구(李純久)
본관
여주 이씨[4]
생몰
1884년 1월 15일 ~ 1983년 9월
출생지
경상도 안강현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5]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이순구(李純久)는 1884년 1월 15일 경상도 안강현(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4월 정용기·친형 이한구 등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조직되자 이에 입대하여 주로 통신·정찰의 책임을 맡고 의진 밖에서 이세기(李世紀)·남석인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약하였으며, 진중실기를 간략하게 뽑아 모으는 역할도 하였다.
1907년 10월 7일 의병장 정용기와 형 이한구 등이 입암전투에서 순국한 후 그의 부친 정환직이 의진을 통솔하게 되자 그 막하에서 활약하던 중 1908년 의성 구봉산(九峰山)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다.
그후 서종락과 후일을 기약하고 귀향하여 은거하다가
1912년 우재룡·권영만 등 전 의병 간부들과 연락하다가 그들의 소개로 광복회에 가입하였고, 이후 만주로 가솔들을 거느리고 피신하였다.
한편, 만주에 도착한 후 반석현(盤石縣)[6]에서 이상룡을 만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다가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가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1983년 9월 별세하였다.
사후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지린성 퉁화시(通化市) 류허현(柳河縣).[2] 27세손 구(求) 항렬.[3] 판결문에는 2월 2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여강경주파 23세손 '''◯구(久)''' 秉(병)◯ ◯燁(엽) ◯榮(영) 時(시)◯ 항렬[5] 인근의 양동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6]지린성 지린시(吉林市) 판스시(磐石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