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1854)
경주 김씨 상촌공파 18대손으로, 안성 일대에서 대대로 상당한 토지를 보유한 집안의 자제였다. 그는 1907년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정미7조약 체결 직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자 가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한 후 1907년 8월 26일 전북 진안 마이산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거병한 이석용 의병장에게 아들 김봉환(金鳳煥)과 함께 가세했다. 이후 그들은 이석용과 함께 기삼연 의병장이 주도하는 호남창의맹소에 가담했다.
그러나 기삼연 의병장이 1908년 2월 2일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고 다음날 광주 백사장에서 총살당하면서 의병대가 흩어지자, 그는 이석용과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반면 아들 김봉환은 3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남 일대에서 활동하다 1909년 9월 27일 전남 무안군 발다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동식은 1908년 9월 13일 이석용 의병대가 진안을 공격, 탈환하는데 참여했다.
이후 용담 심원사로 철수한 이석용 의병대는 이곳에서 김동신 의병대와 합세했다. 그러나 이들이 연합의진을 형성한 직후 일제 군경의 기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고, 양 의진은 곧바로 분리되었다. 이후 이석용 의병대는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 계곡으로 피신하고 일단 해산되었다. 이석용은 김동식 및 몇몇 인사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서 요새를 구축한 뒤 부대를 정비하고 고광순 의병장의 부대와 연계하여 일제에 맞섰다.
이석용은 지리산에서 어느 정도 병력을 모은 뒤 순창을 향해 진격했다. 행군 도중 순창과 남원의 경계인 화산에서 일본군 첩자의 거짓정보를 믿고 부대를 이동했다가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패퇴했다. 하지만 이석용과 김동식은 의병대를 재정비한 뒤 진안읍을 다시 공격해 탈환했다. 그러나 1909년 3월 22일 진안군 백마산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는데, 하필이면 마침 비가 쏟아져 화승총을 쏠 수 없어서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이석용 의병대는 잔존 의병들을 재정비한 뒤 근거지를 옮기며 계속 투쟁했고, 장수군청을 공격하여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공세가 가중되면서 전력소모가 많자, 결국 의병대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김동식은 이후에도 이석용과 함께 임실을 거점으로 재기해 항전을 도모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석용의 맏아들 이원영(李元泳, 1899~1983)이 편찬한 정재문집(靜齋文集)에 따르면, 김동식은 일이 잘 되지 않자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동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동식은 1854년 1월 14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러나 기삼연 의병장이 1908년 2월 2일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고 다음날 광주 백사장에서 총살당하면서 의병대가 흩어지자, 그는 이석용과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반면 아들 김봉환은 3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남 일대에서 활동하다 1909년 9월 27일 전남 무안군 발다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동식은 1908년 9월 13일 이석용 의병대가 진안을 공격, 탈환하는데 참여했다.
이후 용담 심원사로 철수한 이석용 의병대는 이곳에서 김동신 의병대와 합세했다. 그러나 이들이 연합의진을 형성한 직후 일제 군경의 기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고, 양 의진은 곧바로 분리되었다. 이후 이석용 의병대는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 계곡으로 피신하고 일단 해산되었다. 이석용은 김동식 및 몇몇 인사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서 요새를 구축한 뒤 부대를 정비하고 고광순 의병장의 부대와 연계하여 일제에 맞섰다.
이석용은 지리산에서 어느 정도 병력을 모은 뒤 순창을 향해 진격했다. 행군 도중 순창과 남원의 경계인 화산에서 일본군 첩자의 거짓정보를 믿고 부대를 이동했다가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패퇴했다. 하지만 이석용과 김동식은 의병대를 재정비한 뒤 진안읍을 다시 공격해 탈환했다. 그러나 1909년 3월 22일 진안군 백마산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는데, 하필이면 마침 비가 쏟아져 화승총을 쏠 수 없어서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이석용 의병대는 잔존 의병들을 재정비한 뒤 근거지를 옮기며 계속 투쟁했고, 장수군청을 공격하여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공세가 가중되면서 전력소모가 많자, 결국 의병대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김동식은 이후에도 이석용과 함께 임실을 거점으로 재기해 항전을 도모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석용의 맏아들 이원영(李元泳, 1899~1983)이 편찬한 정재문집(靜齋文集)에 따르면, 김동식은 일이 잘 되지 않자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주먹으로 바위를 치며 통곡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니, 대장 이석용이 관을 구하고자 했지만 길이 없어 태극기로 싸서 묻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의병을 일으킨 지 3년이 되었지만 국권회복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우리들을 어찌하리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동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다만 그의 사망일자는 기록마다 다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1909년 12월 27일을 사망일자로 기록했지만 1910년에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은 그의 사망일자가 1957년 3월 10일이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