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한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갑오년(1894년) 6월 이후에는 시골에 칩거하여 평생 자정[1]
하고자 하였더니, 지난해(1895년) 8월의 대변(大變)에 이르러서는 원통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금도 살 마음이 없던 중, 다시 11월 15일의 사변(事變)이 일어났다. 이 역시 흉악한 역신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신민[2] 된 자의 박절[3] 한 정이 격동하여 시세와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복수하고 설치[4] 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1896년 2월 25일 김복한의 법정 진술.
1. 개요
김복한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김복한은 조선 중기의 인물 김상용의 후손으로 조상들이 대대로 목사와 군수 등을 지닌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러나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1년이 지나기 전에 어머니마저 잃었으며, 뒤이어 조부마저 죽는 불운을 당한다. 다행히 종조부에 손에 자라면서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관직생활을 시작한 김복한은 직급은 낮았으나 학문을 인정받아 왕세자를 가르치는 서연을 맡았다. 그리고 과거에도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왕인 고종에게도 서연을 한번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1894년에 경복궁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져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다.
뒤이어 1895년에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연이어 터지고, 홍주의 유림 세력들을 모아 의병운동을 일으키도록 지원하면서 의병에 가담한다[5] . 그런데 의병세력 중 하나가 배신하여 의병운동은 허무하게 실패하고 김복한도 체포되어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곧 풀려나 관직을 받았지만 김복한은 이를 모두 거절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이에 일전의 동료였던 이설과 함께 유림세력을 모아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이설이 오히려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상소를 올리자고 하여 1905년 12월 2일에 상소를 올린다. 상소에는 을사오적의 처벌과 의병세력을 모아 일본을 몰아내어 왕실을 회복하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틀 뒤 일제가 김복한을 체포하는 바람에 효과가 없었다.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매우 나빠진다.
어느정도 몸을 추스린 다음엔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김복한은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했고, 해당 청원서에는 137명이 서명한다. 이 일로 김복한도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는 것을 반복한다.
그 뒤 후학을 양성하는 등 유림으로서 활동하다 1924년에 순국했다. 묘는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있으며, 전처 연안 이씨 이의익(李毅翼)의 딸[6] 과 후처 청주 이씨 이주찬(李周讚)[7] 의 딸이랑 합장되었다. 사후 사림들이 추양사(秋陽祠)에 영정을 봉안했으며, 제기에 문집을 올렸다. 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아들은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의원과 제 2대 국회의원, 반민특위 위원을 지냈으며, 일제 강점기 시절 신간회 등 독립운동을 하셨던 김명동 국회의원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21~22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