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1. 조선 중기의 관료
2. 여담


1. 조선 중기의 관료


이름
김상용(金尙容)
생몰년도
1561년 ~ 1637년(76세)
사망 원인
화약을 이용해 폭사로 순절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의 문신이다. 서울 출생이며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이다. 청음 김상헌의 형이며, 장유의 장인. 인선왕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 판돈녕부사의 자리에 있었으며 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가 노구를 이끌고 강화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76세였다. 손자와 종 한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전쟁이 끝나고 몇개월 뒤 인조는 그가 순절한 것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다가 과실로 폭사한 것이라고 의심했으나[1], 그는 흡연자가 아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아들인 김광한과 김광형이 옹호하고, 윤방과 이세완, 이덕안 등이 구체적으로 증언하여 마지못해 순절로 인정했다. 최명길이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의 자살 시도를 두고 밖에 자식들 다 세워놓고 무슨 순절이냐며 빈정거렸던 것도 그렇고 은근히 조정내에 이런 반응이 흔했다.
그의 순절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졌는데 강화읍 용흥궁 심도직물 기둥 앞에 위치해 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동생 김상헌의 묘도 같이 있다.
그의 직계 자손이 김이교, 김옥균, 김가진, 김좌진이다.

2. 여담


  • 강화도에서 순절할 때의 그의 나이가 76세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오래 산 편인데, 동생인 김상헌 또한 80을 넘어 장수하였다. 강화도에서의 순절이 아니었다면 김상용 역시 80을 넘겨 장수하였을 것이다.
  • 반면 그가 순절할 때, 같이 폭사한 김익겸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아들이 구운몽을 집필한 서포 김만중이다. 김익겸은 김만중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순절하였고, 그로 인해 그의 형 김만기김만중은 유복자로 성장한다.

[1] 의리가 태산같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제문을 문제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