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김성종(金聖鍾)
'''광복 이후 최고의 추리소설가'''
한국 추리소설의 시조가 김내성이라면 김성종은 중시조라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 추리소설을 논할 때 광복 이전에 김내성이 있었다면 광복 이후 한국 추리소설계에선 김성종이 독보적으로, 197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한국 추리소설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현재까지 100여권의 추리소설을 출간.
1941년 12월 31일 중국 산둥성 지난시에서 태어났다. 네이버 인물정보 등 인물 웹사이트에서는 전남 구례군을 출생지로 적고 있으나, 1990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8면에 실린 '自傳 에세이 나의 길 (19) 金聖鍾'에서 김성종 본인이 "내가 태어난 곳은 中國 濟南이다. 全南 求禮가 고향인 아버님께서 일제시대 중국으로 건너가 평안도가 고향인 어머님을 만나 그곳에서 한동안 사셨기 때문에 제남이 나의 출생지가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 필동에 자리잡았으나 그가 일신국민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 진해를 거쳐 여수까지 피난을 갔다. 피난 중에 아버지는 노무자로 끌려갔고, 당시 임신 중이었던 어머니는 피난지인 여수에서 아이[1] 를 낳고 12일만에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몇달 후 아버지가 돌아와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구례에 정착해 농사를 짓게 되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구례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1963년 연세대학교에 진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연세대에 입학해서도 "대학생이기 전에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그는 졸업할 때까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지긋지긋한 가정교사 짓"을 해야 했기에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것은 느껴보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 한번은 도저히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강도짓을 결심하고 실행 직전 포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경찰관」이 당선되었고, 1971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200만원 현상 장편소설 공모에 추리소설 『최후의 증인』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1980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족과 함께 내려와 이후 부산에 살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에 1992년 개관한 '김성종 추리문학관'이 있다.
'''광복 이후 최고의 추리소설가'''
한국 추리소설의 시조가 김내성이라면 김성종은 중시조라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 추리소설을 논할 때 광복 이전에 김내성이 있었다면 광복 이후 한국 추리소설계에선 김성종이 독보적으로, 197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한국 추리소설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현재까지 100여권의 추리소설을 출간.
1941년 12월 31일 중국 산둥성 지난시에서 태어났다. 네이버 인물정보 등 인물 웹사이트에서는 전남 구례군을 출생지로 적고 있으나, 1990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8면에 실린 '自傳 에세이 나의 길 (19) 金聖鍾'에서 김성종 본인이 "내가 태어난 곳은 中國 濟南이다. 全南 求禮가 고향인 아버님께서 일제시대 중국으로 건너가 평안도가 고향인 어머님을 만나 그곳에서 한동안 사셨기 때문에 제남이 나의 출생지가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 필동에 자리잡았으나 그가 일신국민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 진해를 거쳐 여수까지 피난을 갔다. 피난 중에 아버지는 노무자로 끌려갔고, 당시 임신 중이었던 어머니는 피난지인 여수에서 아이[1] 를 낳고 12일만에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몇달 후 아버지가 돌아와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구례에 정착해 농사를 짓게 되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구례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1963년 연세대학교에 진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연세대에 입학해서도 "대학생이기 전에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그는 졸업할 때까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지긋지긋한 가정교사 짓"을 해야 했기에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것은 느껴보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 한번은 도저히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강도짓을 결심하고 실행 직전 포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경찰관」이 당선되었고, 1971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200만원 현상 장편소설 공모에 추리소설 『최후의 증인』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김성종 본인에 의하면 상금 200만원은 "당시 시세로 서울에 집 한 채 사고 결혼식 비용까지 해도 남았던 거액"이라고 한다.[2] 1971년경 출판사에서 함께 일하다 만난 아내 최애경과 1974년 결혼했다.이날 입때껏 따뜻한 밥 한끼 먹어보지 못한 나에게는 장편소설 현상금이 군침을 돌게도 했다. 그래,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16년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장편소설 현상 모집에 응모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추리소설 「최후의 증인」이 당선됐다. 그것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만약 이것이 실패했다면 죽음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당선된 것이다.
1980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족과 함께 내려와 이후 부산에 살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에 1992년 개관한 '김성종 추리문학관'이 있다.
1. 작품 목록
- 최후의 증인 (1974년)
- 여명의 눈동자 (1975~1981년)
- 제5열 (1977~1978년)
- 1977년 3월부터 1978년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 MBC에서 드라마화되어 1989년 방송되었다. 이영하, 한진희, 박인환, 박근형 등이 출연하였다.
- 국제열차 살인사건 (1987년)
- KBS에서 백색미로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되어 1993년 방송되었다.
- 후쿠오카 살인사건 (2008년)
- 일본 후쿠오카를 배경으로 한 추리 스릴러. 후쿠오카 시내의 디테일한 묘사가 압권이다.
2. 기타
- 동생 김인종(金仁鍾)이 도서출판 남도(南島)를 운영하고 있다.
-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부산 시의원 후보(해운대구 제2선거구)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3. 참고자료
- 自傳 에세이 나의 길 (19) 金聖鍾 (1990년 8월 19일 동아일보 8면)
- 추리문학관 20년:나의 인생 나의 문학 김성종 (2012년 3월 31일 부산일보)
[1] 당시 김성종의 형제는 4남 1녀였다. 이때 태어난 여섯번째 아이는 곧 사망했다.[2] 출처: 이승렬 (2013년 3월 28일), 국제초대석 <12> 김성종 추리문학관 관장, 국제신문.[3] 출처: 최보식 (2015년 6월 7일), 최보식의 만난 사람: 한국 추리소설의 代父 김성종, 프리미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