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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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김영복은 1920년 8월 2일 경상남도 밀양군(현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에서 아버지 김윤병(金允柄)과 어머니 고성 이씨 이민기(李民基)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그는 같은 학교 학생 임굉·이태길·최낙철 등과 함께 당시 대구부 동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소재 이무영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한 단체로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온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따라서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했으며, 회의 운영을 위해 비밀엄수·매월 10일 연구발표와 하급생 지도 및 동지포섭 등의 방침을 정하였다.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이때 그는 이과부 책임 겸 사무원의 일을 맡았다. 동회는 1941년 2월부터 동년 3월까지 여섯차례의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회원들 다수가 졸업을 하게 됨에 따라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하게 되었고,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지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여 활동상황을 발송하기로 했다.
그는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로 이주하였으며, 인근 신암공립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출판물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교원생활을 했으며, 고향 밀양의 밀성중학교와 밀성고등학교의 교감을 지내기도 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