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씨)
1. 金
김(金)씨는 대한민국의 성씨이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 중 '''21.51%'''가 사용하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성씨이다.[1] 무려 '''약 1070만여명'''으로 남한의 인구 5명 중 1명이 김씨이다.[2] 한국처럼 특정 성씨가 전체 인구에서 10%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는 베트남[3] 이외에는 사실상 전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찾기가 힘들다.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Smith(스미스)는 전체 인구의 1%가 안 되고, 일본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佐藤(사토) 또한 전체 인구의 1.5% 정도에 불과하다.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García(가르시아)도 3.2%밖에 지나지 않고, 중국에서 가장 많다는 이(중국 발음 '리')씨도 전체 인구의 7~8% 수준이다. 다만 왕씨나 장씨도 7%가 넘는 비슷한 수준.
한국에서 성씨 개념은 그 이전에도 주요 귀족가문 위주로 존재했지만 널리 퍼진 것은 고려시대 초반인 문종 9년(105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종이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리게 되면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성을 사고 파는 행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즉, 문종 9년(1055년) 이전이 신라시대였기 때문에 신라시대의 왕성이었던 밀양박씨(220년을 통치함), 경주 김씨(587년을 통치함), 경주 이씨(신라 6두품), 다양한 본관의 이씨(중국의 이씨), 그리고 김해 김씨(가야 왕조, 520년)의 성씨를 빌리거나 사고 파는 귀족들이 늘어났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김씨, 박씨, 이씨 본관을 많이 선택했을까? 성씨는 일반적으로 임금이 관료에게 하사한 것으로 조선 초기에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족과 일부 권문세가 등에 국한되어 그 수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일반 민중들 중에서도 과거에 급제하고 싶어 성씨를 가지기 위해 몰락 귀족등으로부터 족보를 사는 일이 늘어나게 된다. 김해 김씨(가야 왕조 520년), 이씨(조선 왕조 519년 왕성+ 중국 최대 성씨), 박씨(신라 왕조 230년), 경주 김씨(신라 왕조 587년) 등이 더욱 더 편중되어 늘어나게 된다.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를 합치면 통합 1107년으로, 김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김씨 뒤로 이씨(조선왕조 519년, 중국에서 유입된 이씨), 박씨(신라 230년)가 따라온다.
김씨의 대표 본관인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 둘만 합쳐도 전체 김씨의 반이 넘는다. 이씨 또한 대표 본관인 전주 이씨와 경주 이씨 둘을 합치면 반이 넘고 박씨는 밀양 박씨 하나만으로 4분의 3 이상인 '''78%''' 정도다. 그나마 김씨는 3위인 광산 김씨, 4위인 김녕 김씨, 5위인 안동 김씨[4] 까지도 인지도 면에서나 인구수 면에서나 경주 김씨에 압살 당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씨는 3위인 성주 이씨는 경주 이씨와 완전히 다른 레벨로 봐야할 만큼 차이가 벌어진다. 특히 박씨는 밀양 박씨 바로 다음으로 많은 반남 박씨는 그 정도가 상당하다. 셋 다 본관이 적어도 100개에서 많으면 200개가 넘는데, 특정 성씨 집중에 이어 특정 본관 집중도 대체로 심한 셈이다. 본관이 여러 개 있는 것처럼 분포가 비교적 균일한 정씨와 조씨가 있다.
그 외 조선 초기 조선에 유입된 여진족을 왕명으로 '''모두''' 김씨 성을 하사한 점도 있다. 사족으로 오늘날 이 항복한 여진족들의 후손이 전해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후손들이 북방 이민족 출신임을 숨기기 위해 다른 김씨 가문의 후손임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카자흐스탄에서는 3번째로 흔한 성씨라고 한다.#
가장 흔한 성씨이다 보니 한국을 대표하는 성씨로 쓰이는데 예를 들어 어떤 외국인이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 거의 똑같은 정서를 보여줄 때, 이때 주변인들이 장난으로 김OO(김제임스. 김찰리 등등)로 부르거나, 아니면 즉석해서 한국인 캐릭터 하나를 창조(?)해야 할 때 주로 김씨를 붙인다.
2. 한국의 金씨
2.1. 신라 계열
신라 계열 김씨는 김알지에서 유래되었다. 본관은 《삼국사기》 · 《삼국유사》 ·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 · 《증보문헌비고》 · 《조선씨족통보》등의 역사 문헌(文獻)에 500여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중 본관과 시조가 뚜렷한 것은 100여본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신분제 변화가 일어나며 족보 위조 현상이 심화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고려 · 조선 왕조 대에 전 왕조 후손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신라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리기 위해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계(譜系) 위조 현상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족보를 우후죽순 발간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 까지 끌어 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다.
조선 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문중의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전의 조상들의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으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조선시대는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하여 상인(常人) 계층은 족보 제작을 엄두도 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사 만든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와 같은 위보(僞譜)를 판별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부인(夫人)에 대한 기록이 없고, 조상이 어느 왕조에 탄생하였는지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조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에다 1세(一世), 2세(二世)니 하는 대수(代數)만 표기해 놓았으며, 무슨 높은 벼슬을 하였다고 하면서 어느 왕조에 임명되었는지 출처는 없거나 또 벼슬 이름과 실재 했던 벼슬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등 겉은 화려하지만 그 내용은 엉망진창이라면 그 족보는 의심해 봐야 한다.
심지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 직계 후손으로 기록해 놓은 족보도 있다.[5] 김부식이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었다면 왜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마의태자의 이름과 행적, 부인과 아들들에 대해 언급해 놓지 않았을까? 이러한 족보 역시 위보(僞譜)라 할 것이다. 보학을 조금만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은 족보들이 엉터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족보류 내용들은 모두 배척(排斥)하였다.
2.1.1. 김알지 계열
- 경주 김씨(慶州 金氏): 신라 대보공 김알지 후예들 중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낳은 후손들을 중심으로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함
- 경주 김씨(벽상공신내사령공파): 고려 초 삼한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金禮謙) 후손[6] [7]
- 경주 김씨(평장사공파): 고려 신종 때 평장사 김봉모(金鳳毛) 후손[8]
- 경주 김씨(태사공파):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 김인관(金仁琯) 후손[9]
- 경주 김씨(판도판서공파): 고려 말 판도판서 김장유(金將有) 후손[10]
- 경주 김씨(장군공파): 고려 초 장군 김순웅(金順雄) 후손[11]
- 경주 김씨(호장공파): 고려 초 호장 김위영(金魏英) 후손[12]
- 경주 김씨(상서공파): 조선조 상서 김여진(金麗珍) 후손
- 경주 김씨(목사공파): 조선조 목사 김소(金邵) 후손
- 경주 김씨(판서공파): 고려 말 판서 김의(金義) 후손
- 경주 김씨(판서공파): 조선조 병조판서 김덕재(金德載) 후손
- 경주 김씨(직장공파): 조선조 상의원 직장 김수구(金壽龜) 후손
- 경주 김씨(상호군공파): 조선조 상호군 김중약(金仲約) 후손
- 강릉 김씨: 태종무열왕의 후예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 후손
- 선산 김씨: 문성왕의 후예 시중 김선궁(金宣弓) 후손, 혹칭 '일선 김씨'(一善 金氏)
- 선산 김씨: 원성왕의 후예 상서좌복야 김한충(金漢忠) 후손, 혹칭 '들성 김씨'(坪城 金氏) 즉 둘은 엄연히 다른 집안이다
- 광산 김씨: 신라 김알지의 후예 왕자 김흥광(金興光) 후손
- 순천 김씨: 신라종실 인가별감 평양군 김총(金摠) 후손
- 괴산 김씨: 좌사경 김지효(金知孝) 후손. 본관 및 세계 미고(未考)
- 중화 김씨: 고려 개국공신 김철(金哲) 후손 - 순천 김씨 분적
- 안산 김씨: 상서좌복야 김긍필(金肯弼) 후손
- 용궁 김씨: 태자소보 김존중(金存中) 후손
- 안성 김씨: 좌복야 김돈(金墩, 㻻) 후손
- 연안 김씨: 신라종실 후예 사문박사 김섬한(金暹漢) 후손
- 예안 김씨: 참군 김탁륜(金卓倫) 후손, 김원백(金元伯) 후손
- 선성 김씨: 호장 김상(金尙) 후손, 혹칭 예안 김씨(禮安 金氏)
- 운봉 김씨: 동지중추원사 김담(金淡) 후손
- 토산 김씨: 도첨의 김부윤(金富允) 후손
- 진도 김씨: 선무랑 김자경(金自敬) 후손 (사용 김천손(金千孫) 일파, 시랑 김혁여(金奕與) 일파)
- 임진 김씨; 상호군 김인조(金仁朝) 후예
- 해풍 김씨: 해풍부원군 김숭선(金崇善) 후손, 혹칭 풍덕 김씨(豊德 金氏)
- 덕수 김씨: 현감 김니(金泥) 후손 - 해풍 김씨에서 분적
- 정주 김씨: 조선조 부장 김수 후손 - 해풍 김씨에서 분적
- 성천 김씨: 국자감주부 김한초(金漢貂) 후손
- 강서 김씨: 강릉 김씨 분적 대사성 김반(金泮) 후손
- 무풍 김씨:무천군 김천이(金天利) 후손 - 광산 김씨 분적 김흥광(金興光) 후예
- 무주 김씨: 전서 김남우(金南雨) 후손 - 광산 김씨 분적 김흥광(金興光) 후예
- 만경 김씨: 순문사 김희제(金希磾) 후손
- 무장 김씨: 조선조 제주목사 김자무(金自武) 후손
- 보령 김씨: 조선조 상국(相國) 김극성(金克成) 후손
- 해미 김씨: 조선조 진사 김종해(金宗海) 후손
2.1.2. 경순왕 계열
- 울산 김씨: 신라 경순왕 김부의 왕자 학성부원군 김덕지(金德摯) 후손
- 의성 김씨: 경순왕의 후예 태자 첨사 김용비(金龍庇) 후손[13]
- 언양 김씨: 경순왕의 후예 신호위 별장 동정 김수(金壽) 후손[14]
- 삼척 김씨: 경순왕의 후예 지양주사 김위(金偉) 후손[15]
- 나주 김씨: 경순왕의 후예 김운발(金雲發) 후손[16]
- (구)안동 김씨: 경순왕의 후예 상락공 김방경(金方慶) 후손
- 철원 김씨: 요동백 김응하(金應河) 후손, 혹칭 고성 김씨 - (구)안동 김씨 분적
- 수원 김씨: 경순왕의 후예 수성군 김품언(金稟言) 후손 (또는 상낙군 김변(金忭) 후손)
- 김녕 김씨: 경순왕의 후예 금녕군 김시흥(金時興) 후손. 혹칭 (후)김해 김씨라 함[17]
- 상산 김씨: 경순왕의 후예 보윤 김수(金需) 후손
- 봉산 김씨: 황해도 봉산태수를 역임했던 김이상(金履祥)의 후예인 김명진(金明晋) 후손. 상산 김씨와 같은 후예라함
- 청도 김씨: 경순왕의 후예 오산군 김지대(金之岱) 후손
- 계림 김씨: 경순왕의 후예 판서 김상한(金相漢) 후손
- 원주 김씨: 경순왕의 후예 원성백 김거공(金巨公) 후손
- 부안 김씨: 경순왕의 후예 호장동정 김경수(金景修) 후손[18]
- 전주 김씨: 경순왕의 후예 시랑 김봉모(金鳳毛) 후손 - 경주 김씨 분적[19][20]
- 수안 김씨: 전법판서 김선(金宣) 후손 - (구)안동 김씨 분적 김방경(金方慶) 후예
- 아산 김씨: 시조 미고(未考). 문장공 김구(金鉤) 후손 - 경주 김씨 분적
- 평해 김씨: 판관 김맹절(金孟節) 후손
- 청풍 김씨: 시중 김대유(金大猷) 후손
- 서흥 김씨: 중낭장 김보(金寶) 후손
- 금교 김씨: 사찬 김예천(金禮千)후손, 김공남(金公南) 후손
- 우봉 김씨: 대호군 김록(金祿) 후손
- 순흥 김씨: 흥녕군 김자창(金子昌) 후손, 정랑 김함일(金咸逸) 후손
- 성주 김씨: 대장군 김맹(金孟) 후손, 혹칭 경산(京山)
- 밀양 김씨: 사직 김승조(金承조) 후손
- 양산 김씨: 통사사인 김연(金衍) 후손
- 영덕 김씨: 호장 김취린(金就磷) 후손
- 풍덕 김씨: 선공감서령 김자앙(金子盎) 후손
- 낙안 김씨: 검교금오위대장군 김광습(金光襲) 후손
- 청주 김씨: 대호군 김보(金甫) 후손
- 여주 김씨: 현감 김순양(金純良) 후손, 고려조 태자소보 김정자(金挺磁), 고려조 태자첨사 김준(金濬)
- 교하 김씨: 군수 김정석(金廷碩) 후손
- 황주 김씨: 참지정사 김정순(金正純) 후손, 삼한공신 김석(金晳) 후손
- 충주 김씨: 충원군 김남길(金南吉) 후손
- 상원 김씨: 조선조 상원군 김낙(金洛) 후손
- 진주 김씨: 시조 미고(未考). 진성군 김종(金鍾) 후예, 삼척군 김위(金偉) 후손
- 의주 김씨: 귀성군 김성갑(金成甲) 후손 - 혹칭 의흥 김씨(義興金氏)
- 영광 김씨: 전서령 김태용(金台用) 후손
- 금산 김씨(錦山 金氏): 사복시부정 김정보(金正寶) 후손
- 연기 김씨: 현신교위 김덕재(金德載) 후손 - 연주(燕州) 별호(別號)
- 청산 김씨: 김사한(金士翰) 후손
- 옥천 김씨: 통정대부 김희철(金希哲) 후손
- 공주 김씨: 조선조 집의 김학기(金學起) 후손
- 청송 김씨: 한성판윤 김정기(金正起) 후손
- 수주 김씨: 소감 김정실(金鼎實) 후손
- 금산 김씨(金山 金氏): 김문부(金文富) 후손
- 희천 김씨: 김용(金用) 후손
- 영암 김씨: 교위 김세정(金世貞) 후손
- 개령 김씨: 김현선(金玄繕) 후손 - 혹칭 개성 김씨(開成金氏)
- 개성 김씨: 개성군 김용주(金龍珠) 후손
- 안강 김씨: 시조 미고(未考). 중시조 상의원 직장 김수구(金壽龜) 후손 (경주 속현)
- 괴산 김씨: 좌사경 김지효(김지효) 후손
- 직산 김씨: 시조 미고(未考). 직산군 김문장(金文長) 후손
- 안동 권씨: 신라 종실 고려태사 김행(金幸) 후손 - 고려사성권씨(高麗賜姓權氏)
- 수성 최씨: 고려 귀순후 경순왕의 후예 김영규(金永奎) 후손 - 고려초사성최씨봉(高麗初賜姓崔氏封) 수성군(隋城君)
2.2. 가야 계열
2.3. 사성 계열
- 사성 김해 김씨(우록 김씨): 시조 김충선 (임진왜란 때 귀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집성촌이 있고, 김충선 묘와 사당이 있다.
- 함박 김씨: 시조 김성인 (임진왜란 때 귀화). 함박[21] 을 본관으로 쓴 건 대한민국 건국 이후이고, 그 전에는 김해 김씨를 사용했다. 그의 후손들 중 다수는 지금도 김해 김씨로 남아 있다.
2.4. 기타 계열
- 신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이 고창[22] 성의 성주로 있다가 왕건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 당악 김씨 :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김락이다.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 대신 왕의 수레를 타고 죽어 왕건이 지묘사를 세워 그를 기렸으며, 일가에게 당악(평안남도 중화군의 옛 지명)을 식읍으로 내려 후손들이 당악을 관향으로 삼았다.
3. 중국
중국에도 金씨가 있는데, 성씨 순위로 62위이다.(470만명으로 62위). 한족이 대부분이나 만주족[23] , 조선족 출신도 많은 편이며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 끌려온 조선인 포로의 후손들 중에도 金씨인 사람들이 많다. 중화권에는 琻을 쓰는 김씨도 있다. 발음은 표준어식으로 진(Jīn)이거나 광동식으로 '깜'이다.
4. 미국
미국에서도 한국에 김씨가 많은 점을 재미있게 보기도 한다. 급기야 평창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컬링팀의 인원이 전부 김씨라서 외국인들은 가족으로 착각하기도 했다.[24]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도 언급된다. 한국계가 아닌 외국인의 이름에도 'Kim'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Kim'은 성씨가 아니라 이름이다. 남자와 여자 이름에 모두 쓰인다. Kimberly, Kimberley, Kimball, Joakim 등의 약칭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킴(성씨) 문서 참조.
5. 일본
일본에는 金이라 쓰고 '곤'이나 '긴'으로 읽는 성씨가 있는데 한국과는 반대로 희귀한 성씨이다. 도호쿠 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다.[25]
6. 한자 읽는 법
쇠 금(金) 자는 성씨로 쓰일 때와 지명으로 쓰일 때(김포시, 김천시, 김해시, 김제시, 김화군, 김녕리(제주시 구좌읍) 등)만 '김'(金)으로 읽는다.[26] 그러나 지명으로 쓰일 때도 '김'이라고 읽는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데 비롯한 오해가 있다. '원래 성씨로 쓸 때도 금이라고 읽었으나 조선이 들어선 이후에, 오행 사상에 의하면 김 씨의 쇠(金)가 이(李) 씨의 나무(木)를 누른다 하여 김 씨로 바꿔 부르게 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하지만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권인한 교수에 따르면 근거 없는 설이라고 한다(김 씨 연원에 대한 설). 위 연구에 의하면 한자 전래 당시의 한자음은 '금'이며, 이후 중국에서 큰 음운변화가 일어났고 원간섭기에 고려인이 몽고식 이름을 짓는 등 몽고의 영향으로 변화된 발음 '김'이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명 지휘자인 금난새는 원래 금 씨가 아니라 김 씨였다(본관은 김녕).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금이라고 읽을 뿐이다. 금난새의 선친인 금수현이 교육자 시절 학교에 같은 성씨인 김 씨 성을 가진 교사들이 많다는 이유로 자기 성씨의 독음을 금으로 바꿨다고. 국내에는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된 자신의 성씨의 한자 독음을 바꾸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27] 금난새도 가족관계등록부상에는 김 씨로 되어 있었으나, 2020년 1월에 법적으로 완전히 금 씨로 변경할 수 있게 됐다. 금난새 문서에 설명이 있으니 참고할 것.
중국의 일부 방언 사용 지역에서 金 자를 김이라고 읽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객가어에서 이 글자 발음이 gim이다(표기법에 따라 kim으로 쓸 수도 있지만). 《R.O.D》 TV판에서 김 선생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김 선생은 홍콩인.[28] 베트남에서는 金 자를 낌이라고 읽는다. 캄보디아에도 킴이라는 성씨가 있지만 한자는 다르다. 쇠 금이 아니라 가슴걸이 근(靳)이다.
金씨 성을 갖는 중국인의 이름을 '김'으로 읽을지 '금'으로 읽을지 혼란이 있다. 신해혁명 이후의 인물은 현지음 원칙에 따라 진(병음 Jīn)으로 읽으면 되겠지만[29] , 예컨대 명말청초의 문인 金聖歎은 '김성탄' 혹은 '금성탄'으로 표기된다.
통명을 쓰는 재일 한국인의 경우에 김씨들은 가네다(金田)나 가네무라(金村), 가네바야시(金林), 가네시로(金城) 같은 일본 성씨를 이름으로 많이 빌려 쓴다.
7. 로마자 표기
라틴 문자로 표기할 때는 99%의 확률로 Kim으로 쓴다.
종종 Gim(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 또는 Gym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쓰면 영어권에서나 로망스어권에서는 '짐'이라고 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Keehm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Ghim'''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음운론적으로는 한글 자음 중에서 ㄱ, ㄷ, ㅂ, ㅈ은 어두에서 무성음인데,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어두에서 ㄱ은 [k], ㄷ은 [t], ㅂ은 [p], ㅈ은 [tɕ]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즉, 김은 국제음성기호를 쓰면 [kim]로 표기되고,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서 이를 반영해 Kim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때 대구나 부산을 Taegu와 Pusan으로 썼던 것도 이러한 사실에서 근거한 것이다.
8. 지역별 분포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주로 강원 영동, 영남 북부 및 동해안, 호남 남서부, 제주도에서 높은 비율로 발견할 수 있는 성씨라고 한다. 이들 지역은 평균적으로 인구의 25% 이상이 김(金)씨인 곳으로, 전국의 김(金)씨 비율인 21.51%보다 상당히 많은 김(金)씨가 분포하고 있다. 수도권, 호서, 강원 영서에 많은 이(李)씨와 상반된 분포를 보이는 특징도 있다.
김(金)씨가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은 전라남도 장흥군으로, 무려 인구의 '''30.15%'''가 김(金)씨다. 그 뒤를 강원도 삼척시(29.64%), 경상북도 의성군(28.86%), 강원도 양양군(28.56%), 강원도 동해시(28.41%)가 이었다. 반대로 김(金)씨가 가장 적게 분포하는 지역은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고작 인구의 '''18.38%'''만이 김(金)씨다. 그 뒤를 경상남도 함안군(18.93%), 경상남도 산청군(18.98%), 인천광역시 강화군(19.15%), 경기도 하남시(19.19%)가 이었다.
경상북도 성주군은 김(金)씨가 인구의 21.08%로 전국과 유사한 분포를 보이지만, 이(李)씨가 이보다 0.41% 많은 21.49%를 보여서 근소한 차이로 김(金)씨는 지역 2위 성씨가 되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金)씨가 1위가 아닌 지역인 셈이다.
본관별로 따지면 김해 김씨는 전라남도 신안군과 완도군, 경상남도 통영시 등 호남 남서부에 많이 분포하고, 경상북도 영주시, 봉화군, 청송군 등 경북 북부에 적게 분포한다. 경주 김씨는 충청북도 보은군, 강원도 양양군 등 중부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전라남도 신안군, 무안군, 나주시 등 호남 남서부에 적게 분포한다.
9. 성이 김씨인 인물
10. 钅
2015년 통계청 조사에서 처음 발견된 성씨로, 전국에 총 8명 거주하고 있다고 나왔다. 김(金)씨와는 발음은 같지만 완전히 희귀 성씨.
이 글자는 중국 간체자를 만들 때 쓰는 간화편방으로, 金이 왼쪽에 놓일 때 쓰인다. 아마 중국인들이 귀화 하면서 생겨난 성으로 추정된다.
[1] 성주군만 근소한 차이로 김씨가 이씨보다 적다.[2] 이(李)씨 또한 '''15%'''로 10%를 월등히 넘고 박(朴)씨는 10%가 안 되는 8.5% 정도.[3] 1위 성씨인 응우옌(阮, Nguyễn) 성씨를 가진 사람이 전체 인구의 '''40%''' 조금 안된다. 2위인 Trần(陳, 쩐)이 11%, 3위 Lê(黎, 레)가 10%로 2위 간의 격차가 무려 '''30%p''' 이상이다.[4] 이 때의 안동김씨는 구 안동김씨를 말한다. 신 안동김씨는 김씨 내에서 47,702명으로 18위이다. (2000년 기준—어찌된 일인지 신 안동김씨는 2015년 자료가 없다.)[5] 김부식은 증조부 김위영이 경순왕과 동시대의 인물이므로 마의태자는 물론 경순왕의 후손도 될 수 없다. 즉, 이 사람은 적어도 신라 계열 김씨일 가능성은 있으나 경주 김씨라 확언할 수는 없다.[6] 《김자류 묘지명 》에는 신라왕의 후예라 한다.[7] 조선조 말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파조가 경순왕 3자로 추정되는 영분공 '김명종'이라 함[8] 조선조 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파조가 경순왕 4자로 추정되는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이라 함[9] 헌강왕의 후예라 한다. 혹칭 경순왕 후예라고도 한다.[10] 경순왕의 후예라 한다.[11] 원성왕 후예라 한다. 혹칭 경순왕 후예라고도 한다.[12] 신라 종성으로 김알지의 후예라 한다. 혹칭 경순왕 후예라고도 한다.[13] 조선조 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시조를 경순왕 5자로 추정되는 의성군 '김석'(金錫)이라 함[14] 조선조 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시조를 경순왕 7자로 추정되는 언양군 '김선'(金鐥)이라 함[15] 조선조 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시조를 경순왕 8자로 추정되는 삼척군 '김추'(金錘)라 함. 또는 경순왕의 손자 실직군왕 김위옹(金渭翁)이라 함[16]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가 경순왕의 계자(막내아들)라 함[17] (후)김해김씨는 경순왕의 4자 김은열의 3자인 김해군 김렴(金濂)의 후손이라 함[18] 최근 들어 조선조 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시조를 경순왕 1자로 추정되는 김일(金鎰)이라 함. 또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 함. 그러나 역사에는 경순왕 태자의 이름은 실명으로 전하지 않음[19] 일설에 시조가 평장사 김태서라 한다.[20] 유명인으로 김일성,김정일등이 있다.[21] 경북 청도군 각남면 함박리[22] 여기서의 고창은 안동의 옛 이름이다.[23] 청나라의 황족이던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수장 역시 현재는 金씨로 개명했다고 한다.[24] 근데 2명은 실제 자매가 맞긴 하다.[25] 실제 인물로 1960년대 후반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었던 金博昭(콘 히로아키)라는 야구선수 등이 있다. 재일교포랑 상관없는 사람이다.[26] 지명의 金을 전부 '김'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금정구(金井區), 금천군(金川郡), 금호동(金湖洞), 금곡동(金谷洞) 등 원음인 '금'으로 읽는 지명도 많다.[27] 다만, 두음법칙이 적용된 성씨의 경우 북한에서 하는 것처럼 두음법칙을 풀어버려서 한자의 원래 발음을 되살리거나 할 수는 있다(직계비속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며, 한 명이라도 거부할 경우 서류 처리가 복잡해진다). 반대로 두음법칙을 무시한 성씨에 다시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경우도 가능.[28] 그러나 사실 광둥어로는 gam으로 읽는다. 뭐 홍콩에 객가인이 아예 안 사는 것은 아니지만...[29] 잘 안 지켜진다. 무협작가 김용(金庸)처럼 굳어진 예도 있는 거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