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固城 李氏 (鐵城 李氏)
고성 이씨 (철성 이씨)
'''
'''관향'''
경상남도 고성군
'''원시조'''
이이 (李耳)
'''비조'''
이반 (李槃)
'''시조'''
이황 (李璜)
'''집성촌'''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북도 청도군
경기도 화성시
평안북도 삭주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인구(2015년)'''
104,768명[1]
'''공식 사이트'''
대종회
1. 개요
2. 역사
3. 문화재
4. 분파
5. 왕실과의 관계
5.1. 고려왕실
5.2. 조선왕실
6. 인물
7. 주 집성촌


1. 개요


경상남도 고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이황(李璜)이다.

2. 역사


『고성 이씨 명현 열전(名賢列傳)』에 따르면, 중국 전한 문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2] 고성 이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반(槃)은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을 있다가 나이 70에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고 하며,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나 성을 이(李)씨로 정했다고 한다. 노자의 본명은 이이(李耳)이다.
기원전 109년한 무제조선을 침략할 때, 이반의 후손[3]이 도호원수(都護元帥)가 되어 우리나라에 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눌러 살게 되었다. 이황(李璜)은 그의 24세손이라고 하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고증할 수가 없다고 한다.[원문] 1세대 차이를 평균적으로 30년으로 잡으면, 전한 문제 때 사람이라는 이반과 고성 이씨 시조인 이황의 연대차가 약 720년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시기의 차이가 무려 1,200년(40세대) 안팎이다. 이반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이황의 직계 조상이라면, 사십이(42)를 이십사(24)로 잘못 적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황은 고려 덕종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였다고 하며,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과는 동명이인이다. 덕종 2년(1033) 1월에 거란군 일부를 사로잡은 일로 1등급 진급하였으며, 문종 17년(1063) 4월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다. 이후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밀직부사였던 일과 철령군에 봉해진 일은 정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일부 문헌에서는 이황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登第隱不仕]고 하기까지 하지만, 그가 관직에 이미 있었으며 끝내 호부상서까지 이른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아니면 동명이인이거나.

좌우위(左右衛) 맹교위(猛校尉) 오행(吳幸), 이황(李璜), 신선립(申先立) 등이 거란(契丹)의 군사 7인을 사로잡아, 관직을 1급씩 하사하였다.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 抄掠丹兵七人, 賜職一級.

고려사 권 5 세가 권 제5, 덕종 2년(1033) 1월 28일 을미

이황(李璜)을 호부상서로, 박희중(朴希仲)을 섭(攝)공부상서로 임명하였다.

以'''李璜'''爲戶部尙書, 朴希仲攝工部尙書.

고려사 권8 세가 권 제8, 문종 17년(1063) 4월 30일 신축

여하튼 이황이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진 일을 계기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철령'은 고성(固城)의 별호이다.

3. 문화재


  • 안동 임청각(臨淸閣): 보물 182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다. 사대부 반가로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현존하는 민가로는 가장 크다. 임청각은 1519년 이명(李洺)이 지어 500년 가까이 고성 이씨 종가로 보존되어 온 고택이지만, 일제시대에는 일제가 이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집 안을 지나도록 철로를 부설하면서 일부 철거를 당하기도 했다. 2002년 후손들이 국가에 헌납했다.
  • 안동 소호헌(蘇湖軒): 조선 중기의 별당 건축이다. 본래 안동 법흥동 임청각의 이명이 다섯째 아들 이고를 분가시킬 때 지어준 것으로, 이고의 외동딸과 혼인한 중종 때의 학자 서해에게로 물려내려졌다.

4. 분파


  • 안정공파(安靖公派): 이암(李嵒)의 2남 이숭(李崇)을 중시조로 한다.
  • 둔재공파(鈍齋公派): 이원(李原)의 장남 이대(李臺)를 중시조로 한다.
  •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원(李原)의 2남 이곡(李谷)을 중시조로 한다.
  • 좌윤공파(左尹公派): 이원(李原)의 3남 이질(李垤)을 중시조로 한다.
  • 동추공파(同樞公派): 이원(李原)의 4남 이비(李埤)를 중시조로 한다.
  • 병사공파(兵使公派): 이원(李原)의 5남 이장(李塲)을 중시조로 한다.
  • 참판공파(參判公派): 이원(李原)의 6남 이증(李增)을 중시조로 한다.
  • 사암공파(思菴公派): 이원(李原)의 7남 이지(李墀)를 중시조로 한다.
  • 도촌공파(桃村公派): 이암의 동생 이교(李嶠)를 중시조로 한다.[4]
  • 은암공파(隱菴公派): 이엄충의 5세손 이백(李伯)을 중시조로 한다.

5. 왕실과의 관계



5.1. 고려왕실


  • 근비 이씨: 도촌공파 11세. 이림(李琳)의 셋째 딸. 음력 12월 12일생.

5.2. 조선왕실


  • 혜순궁주(惠順宮主) 이씨(李氏): 이림의 손자인 이운로(李云老, 1383~1417)의 딸.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들인 후궁으로, 족보에 보이지 않는다.
  • 이구(李嶇): 사암공파 14세. 이지(李墀)의 4남인 이맥(李陌)의 차남. 성종의 서자 운천군 이인(雲川君 李𪬦, 1490~1524)의 장녀 이계영(李桂英, 1505~?)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두었다.

6. 인물


인터넷 족보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세(世), 파(派), 생년 순으로 정렬하였다.
  • 이인충(李麟冲): 5세. 고려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
  • 이엄충(李嚴冲): 5세. 고려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待中).
  • 이존비(李尊庇): 7세.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한 후,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관직은 판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좌승지, 필도치(必闍赤), 세자원빈(世子元賓), 지공거(知貢擧), 감찰대부(監察大夫).
  • 이우(李瑀): 8세.
  • 이암(李嵒): 9세.
  • 이교(李嶠): 도촌공파 9세.
  • 이숭(李崇): 10세. 이암의 둘째 아들.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정원공신(定遠功臣).
  • 이강(李岡): 10세. 이암의 넷째 아들.
  • 이림(李琳): 도촌공파 10세. 이교의 장남. 문하시중(門下侍中), 좌명공신(佐命功臣),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근비 이씨의 아버지, 우왕의 장인.
  • 이원(李原): 11세. 이강의 장남.
  • 이육(李陸): 사암공파 13세.
  • 이괄(李适): 사암공파 17세.
  • 이로(李魯): 은암공파 17세. 용사일기 저술. 곽재우의 첩장인. 전란시 초유사 김성일의 막료이자 의병장으로 활동.
  • 이응태: 참판공파 17세.
  • 이종주(李鍾宙, 1935~): 참판공파 28세. 전 대구시장.
  • 이수정(李秀正, 1940~2000): 참판공파 28세. 전 문화부 장관.
  • 이종명: 참판공파 28세.
  • 이상룡: 참판공파 30세.
  • 이진희: 참판공파 30세.
  • 이영창: 참판공파 30세.
  • 이상희: 참판공파 30세.
  • 이동흡: 참판공파 30세.
  • 이효수(李孝秀, 1951~): 참판공파 30세. 전 영남대학교 총장.
  • 이용득: 참판공파 30세.
  • 이현동: 참판공파 30세.
  • 이기백: 사암공파 30세.
  • 이기준: 도촌공파 30세. 제22대 서울대학교 총장, 제5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겸 부총리.
  • 이군현: 도촌공파 30세.
  • 이한동: 도촌공파 32세.
  • 이한석(李漢錫, 1964~): 도촌공파 32세. 가천대학교 행정학박사.
  • 이서진: 참판공파 33세.
  • 이유근(李裕根, 1944~2011): 사암공파 33세.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제2대 총장.
  • 이필모: 도촌공파 33세.
  • 이석제: 사암공파 34세.

7. 주 집성촌


  •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下楮里)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증거리(增巨里)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錦川面) 금전동·방지동
  •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東海面) 외곡리(外谷里)
  •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外南面) 송남리(松南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爲美里)[5]
  •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오방리

[1] 고성 이씨(88,587명)+철성 이씨(16,181명)[2] 바이두에서 찾거나 구글링을 해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정말로 이름 없는 평민이었거나, 아니면 전형적인 조상 숭배의 결과로 나타난 가공 인물일 것이다.[3] 시기상 대략 손자, 증손, 또는 멀리 가야 현손이었을 것이다.[원문] 遺乘云, 漢文帝時, 李槃中書舍人. 漢武討朝鮮時, 槃後孫, 以都護元帥, 出來仍居焉. 槃後二十四世孫璜, 而玄遠不可考.[4] 계보 불명인 도촌공파 후손도 적지 않다.[5]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이괄의 맏형인 진사(進士) 이적(李適)이 연좌제로 화를 입게 되자, 그의 둘째 아들 이만세(李萬世)가 제주도로 피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