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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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한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죽산 조봉암과 김복만(金福萬)의 부인이기도 하다.
1904년 경남 창원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300석지기 부자였던 덕분에 서울로 올라가 동덕여자고보를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죽산 조봉암을 만나게 되며 1924년 6월 결혼식을 올린다. 조봉암을 통해 이후 조선공산당로 입당하여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한다.
1925년 1월에 "경성녀자청년동맹"이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했는데 겉으로는 여성단체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여성들을 중심으로한 화요파 공산주의그룹이였다.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전형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후보로 활동했으며, 같은 4월에 소위 적기(赤旗)시위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왔고, 12월에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지자 일경을 피해 조봉암과 함께 만주로 피신했다.
1928년 말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으로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2년간 입학했다. 1930년 화요파의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되었으나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1931년 9월 하순 김조이는 소련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의 동기 5명과 함께 몰래 국내에 잠입하고, 김복만(金福萬)과 재혼했다.
1932년, 함경도 함흥에서 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을 재결성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1934년 8월에 노동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당시에 이를 "함남공청사건(함경남도 공산청년 사건)"이라 칭했다. 이 사건으로 김조이는 상당한 옥고를 치뤄야 했는데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9월 20일에 출소했으며 이 당시 조봉암은 1932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후 1938년 12월 6일에 출소했다. 출소 후 김조이는 조봉암과 재결합하여 인천에 정착한뒤 일제 말기를 지내다가 광복을 맞았다. 김조이는 출소한 뒤에는 직접적인 활동은 자제하고 조봉암을 내조하는 등 가정에만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는데 20대 때에는 같이 산 기간이 별로없었고, 3년의 옥살이 후유증으로 임신이 어려웠을 것이다
광복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조봉암은 서울에 남아서 넘어가서는 안되는 기밀문서를 파기한뒤에 미처 파기못한 기밀문서는 싸들고 아슬아슬하게 한강을 건너 도피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처 부인 김조이는 데리고 오지 못해 김조이는 그대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이후 김조이의 행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7월쯤에 납북되었다고 하며 이때 김조이의 남동생인 김학송도 함께 납북되었다고 한다.
납북된 이후의 생사여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의 태도로 미루어 보면 김조이를 납북한 후에 처형했거나 납북과정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평양의 애국열사묘역에 조봉암의 가묘를 조성해 기리고는 있으나, 조봉암의 부인인 김조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다. 김조이 자신도 공산주의자였고, 납북당해 행방이 묘연해진 탓에 김조이는 역사속에 묻혀있다가,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04-?)
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죽산 조봉암과 김복만(金福萬)의 부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904년 경남 창원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300석지기 부자였던 덕분에 서울로 올라가 동덕여자고보를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죽산 조봉암을 만나게 되며 1924년 6월 결혼식을 올린다. 조봉암을 통해 이후 조선공산당로 입당하여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한다.
1925년 1월에 "경성녀자청년동맹"이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했는데 겉으로는 여성단체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여성들을 중심으로한 화요파 공산주의그룹이였다.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전형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후보로 활동했으며, 같은 4월에 소위 적기(赤旗)시위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왔고, 12월에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지자 일경을 피해 조봉암과 함께 만주로 피신했다.
1928년 말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으로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2년간 입학했다. 1930년 화요파의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되었으나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1931년 9월 하순 김조이는 소련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의 동기 5명과 함께 몰래 국내에 잠입하고, 김복만(金福萬)과 재혼했다.
1932년, 함경도 함흥에서 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을 재결성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1934년 8월에 노동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당시에 이를 "함남공청사건(함경남도 공산청년 사건)"이라 칭했다. 이 사건으로 김조이는 상당한 옥고를 치뤄야 했는데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9월 20일에 출소했으며 이 당시 조봉암은 1932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후 1938년 12월 6일에 출소했다. 출소 후 김조이는 조봉암과 재결합하여 인천에 정착한뒤 일제 말기를 지내다가 광복을 맞았다. 김조이는 출소한 뒤에는 직접적인 활동은 자제하고 조봉암을 내조하는 등 가정에만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는데 20대 때에는 같이 산 기간이 별로없었고, 3년의 옥살이 후유증으로 임신이 어려웠을 것이다
광복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조봉암은 서울에 남아서 넘어가서는 안되는 기밀문서를 파기한뒤에 미처 파기못한 기밀문서는 싸들고 아슬아슬하게 한강을 건너 도피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처 부인 김조이는 데리고 오지 못해 김조이는 그대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이후 김조이의 행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7월쯤에 납북되었다고 하며 이때 김조이의 남동생인 김학송도 함께 납북되었다고 한다.
3. 기타
납북된 이후의 생사여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의 태도로 미루어 보면 김조이를 납북한 후에 처형했거나 납북과정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평양의 애국열사묘역에 조봉암의 가묘를 조성해 기리고는 있으나, 조봉암의 부인인 김조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다. 김조이 자신도 공산주의자였고, 납북당해 행방이 묘연해진 탓에 김조이는 역사속에 묻혀있다가,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