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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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국회부의장
조봉암
曺奉岩 | Cho Bong-am

'''출생'''
1898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사망'''
1959년 7월 31일 (향년 60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창녕 조씨
'''호'''
죽산(竹山)
'''재임기간'''
초대 농림부 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9년 2월 22일
제2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1950년 6월 19일 ~ 1952년 6월 18일
제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1952년 7월 10일 ~ 1954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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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조창규, 어머니 유씨 부인
'''형제자매'''
형 조수암[38]
동생 조용암
'''배우자'''
김금옥(사별)
김조이(재혼)[39]
'''자녀'''
딸 조호정, 조임정, 조의정
아들 조규호
'''친인척'''
사위 이봉래
처남 김송학
손자 조광현, 외손녀 이성란
'''학력'''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중퇴)
주오대학 (정치학과 /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 '''2'''
'''약력'''
초대 농림부 장관
제헌 국회의원(인천시 을/무소속)
제2대 국회의원(인천시 병/대한국민당)
제2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제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1. 개요
2. 생애
3. 사후
3.1. 정치적 복권
3.2. 대법원 재심
3.3. 2020년 조봉암에 대한 김일성 발언 문서(구 소련 외교 문서) 발견
4. 어록
5. 선거 이력
6. 대중 매체에서
7. 참고/관련 자료
8. 관련 단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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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1 운동에 참가한 한국의 항일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짧게 활동하였다. 이후 좌경화되어 소련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으면서 고려조선, 중국공산당을 조직하고, 입당한 한국중국의 공산주의자. 광복 직후에도 경도되어 조선공산당에서 움직였으나, 1946년 이후 사회민주주의[1] 전향하였다.
조봉암은 전향한 공산주의자 중 드물게 임시정부대한민국 제헌 국회 선거[2]에 둘 다 참여하였다.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농지개혁을 주도하였으며 후에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제2대 대통령 선거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하면서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하였다. 1958년 1월 간첩죄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959년 2월 27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1959년 7월 31일 사형되었다. 2011년 1월 대법원의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2020년 김일성이 조봉암의 창당 및 대선 출마에 개입해 지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구 소련 외교 문서가 발견되었다.[3]

2. 생애


1898년 9월 25일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의 빈농 집안에서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강릉 유씨(江陵 劉氏)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강화공립보통학교 4년제에 입학하였고, 1910년 잠두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강화군청의 급사로 취업하였다. 그러나 원칙을 고수한 탓에 상관과 마찰이 잦았다. 이후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조봉암의 주산 실력은 좋았으나, 상사에게 의심을 받았고, 그와의 불협화음으로 곧 군청 공무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1919년 경성 YMCA 중학부에서 1년 학습했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내부 갈등에 회의를 느껴 일본으로 가서 주오대학 전문부 경제학과를 다니다 중퇴했다.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무정부주의에 심취하기도 했고 이어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 참가하면서 좌경화되어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조봉암은 1922년 국내로 귀국하여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소련에서 열린 웨르흐네스크의 고려공산당 회의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해 다녔지만 2년간 수료하였으나, 폐결핵으로 관둬야 했다. 코민테른 측에서는 요양 후 복학을 권했지만 당시 치료약도 없던 폐결핵은 요양과 재발을 반복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중병이었다. 그 때문에 조봉암은 목숨을 걸고 국내로 귀국했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해주, 평양, 인천등지에서 강연활동을 하였고,1924년 6월 동지인 김조이결혼을 하였다.1924년 9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잠입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을 주도하였고 조직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동시에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조봉암이 이런 일련의 일을 활동하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데는 고향 선배 김찬의 도움이 절대적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김찬의 도움을 얻어 운동을 전개하면서 '박철환' 등의 가명을 사용했고 연사로 이름을 날렸다. 1925년 4월말 조선공산당을 승인받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출국하였고, 1925년 5월 말쯤 도중에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의 집을 찾아가서 4월에 조선공산당이 수립되었으므로 제3인터내셔널의 승인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가야 하니 소련 영사관여권 교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운형에게 여권을 받았다. 1925년, 조봉암조동호는 조선공산당 밀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8월 모스크바에서 도착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승인받는다. 그러나 1925년 11월 22일 조선공산당은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인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임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중국으로 도주한다.
192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김찬, 김단야 등과 함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였다. 5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상하이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다시 중국 상하이의 공동 조계에 가서 여운형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 살게 되는데 첫사랑이자 죽마고우였던 김이옥은 폐결핵에 걸리자 조봉암을 보고 죽어야겠다 싶어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상하이를 거쳐 보름 가까이 걸려 그를 만나서 동거를 시작했다. 조봉암은 이미 김조이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이 때 김조이는 러시아에서 유학 중인 관계로 오래 헤어져 있었다.[4] 4월에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봉암은 이때즘 코민테른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4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산하에 한인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동년 6월 경에는 중국 한구에서 개최된 국제적색노동조합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또 1927년 11월에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를 조직하였다.
1928년 5월12일부터 15일간 길림성 회구현에서 개최된 전민족획일당조직총성회의에 참석하는 등 상해에서 활동한 좌익계의 청년들의 교양에 힘썼고 재중국한국인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8년 9월 30일 김이옥이 딸 호정을 출산하였고, 조봉암은 김이옥(1905~1933.10.26)과의 사이에서 장녀 조호정(1928.09.30~)을 낳았으나 김이옥은 결국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조봉암이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의 공금을 유용한 것과 공산주의 경력은 두고두고 정치계에서 발목을 잡혔다. 특히 박헌영과 크게 대립했는데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박헌영의 극심한 조봉암 공작은 광복 후 조봉암이 남조선로동당과 거리를 두는 계기가 된다.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2년 9월 28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되었고 12월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1932년 투옥되어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7년간 감옥에서 복역하였는데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 끝내 손가락 마디 7개가 동상으로 잘려나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1933년 김이옥, 조호정 모녀가 귀국하였으나, 10월 26일 강화도에서 김이옥이 죽었다.
1938년 출옥 후 인천으로 내려가 살면서 김조이와 재결합하였다.[5] 김조이의 친정 식구들이 창원에서 인천으로 이사오기도 한 것을 보면 이 때의 생활은 나름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왕겨를 공급하는 조합에서 일을 보며 지내던 중 1945년 1월 해외와 비밀 연락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예비구금령으로 구속,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6] 광복되던 날 일본 순사가 찾아와 조봉암과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을 불러내서 다른 방에 2열로 앉혔는데 조봉암은 사형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순사가 '곧 항복할 것이다'라고 해서 놀랐다고 한다. 그러다 윤봉림을 만났다.[7]
1945년 8.15 광복 때 여운형이 치안권을 이양받아 정치범을 석방하면서 풀려났으며 여운형은 조봉암과 친한 사이었기 때문에 그가 출옥할 때 마중나갔다고 한다. 이후 조봉암은 8월 18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조직을 시작으로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초 박헌영에게 비타협적으로 좌경화된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행태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다.[8] 조봉암은 자신의 편지가 박헌영에게만 전달되기를 원했지 공개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946년 3월 소련과 연계 여부 등 공산당 활동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던 주한미군 CIC#s-1 방첩대가 조봉암의 사무실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에 들어와 서류를 압수해갔는데 서류 중에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 초고가 있었고 미군정은 초고에 윤색을 보태서 언론에 공개했다. 이 과정에서 안재홍이 비판 서한을 입수하여 한성일보에 보도했다고 하며 조봉암이 미군에 붙잡혔다가 석방된 이후로 좌익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서가 그의 명의로 배포되기도 했다. 서한을 계기로 조봉암의 이름이 우익 측에서 좌익 비판 용도로 이용된 측면도 있었다. 그 결과 조봉암은 박헌영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고, 상술한 편지외에 좌우합작 노선의 당위성을 제기한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소책자에서도 박헌영과 남로당을 공개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결국 조봉암은 1946년 5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였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자 김규식을 찾아가서 동참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김규식은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하여 참여가 무산되었으며 1948년에 열린 남북협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9] 1948년 북한과 사회주의 세력에게 변절자라고 욕을 먹어가면서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10]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내각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어찌 보면 변절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조봉암은 당시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피할 방도가 없으니 출마를 해서 국회의원이 된 다음 평화 통일을 지향하고 민중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인데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려 했던 것. 결과론적으로 5.10 총선거에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선택이 되었다. 그 무렵 결국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로동당원들은 소련 스티코프의 자금과 명령을 받아 폭력적 사건 사고를 벌였고[11]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남한에서 불법 단체가 되자 정치적 입지도 좁아져 황급히 월북해버렸다. 여운형 중심의 사회민주주의 계열 좌익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대화와 협력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였지만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흐지부지된다. 이 때 김구, 김규식 중심의 민족주의 계열 우익은 출마 자체를 아예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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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농지개혁을 추진하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대지주 계층 중심인 한국민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과감하게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지주와 소작농 계급이 대다수를 이루던 농촌 사회의 불안정 요소를 점차 줄여나갔다. 농지개혁의 목표는 소작농의 비중을 줄이고 자영농의 비중을 늘리면서 농업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소작농의 설움을 겪었던 민간인에게 호응을 얻었다.[12]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지만 이러한 개혁 정책 덕분에 6.25 전쟁 당시 농민들이 계급을 해방한다는 북한군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설이 존재하며[13] 무엇보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농사지을 자신의 땅이 생겼다는 것은 굉장한 밑천이다. 이 밑천은 후에 자식 교육에 투자되는데 비록 빈천하지만 당시 터져 나온 폭발적인 교육열과 더불어 서민들이 먹고 살면서 교육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재원 중 하나가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재선되었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북한의 기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 신성모채병덕은 이승만에게 전장의 상황과 달리 허위 보고를 하며 모두가 피난을 더욱 멀리 가게될 정도로 상황을 악화되게끔 하였다. 신익희조차 자신의 부하인 윤길중에게 함께 피난을 가자고 약속하고서는 가족들을 데리고 먼저 서울에서 도망쳤는데 조봉암은 이들과는 달리 끝까지 서울에 남아서 다른 국회의원들의 피난 비용을 마련해주고 북한군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공문서들을 불태우고 정리하여 새벽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과정에서 정작 아내인 김조이는 함께 피난하지 못했고 결국 행방불명되고 말았다.[14] 그렇게 조봉암은 납북당하지 않고 피난하였고[15] 부산에서 정치에 참여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당시에 영향력 있는 중도파 정치인이었던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은 납북되었기 때문에 이승만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은 조봉암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부산까지 따라온 조봉암을 보고 "북에 가지 않고 여기에는 왜 왔냐"고 말했다고 한다.
1952년, 국회부의장 시절의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국회 간선으로는 재선이 어려워진 이승만은 이른바 발췌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다. 이에 따라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으로 치러지게 되었는데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9만여 표를 득표해 2위를 기록하였다. 1955년 민주당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조병옥, 신익희 등은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의 입당을 반대했다. 반면 장택상이나 김성수는 공산당 결별 선언만 확실히 한다면 입당을 허락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민주당 주류에서도 마지못해 입당 허가를 고려하겠다고 했지만 얼마 뒤 김성수가 죽어버리면서 입당은 결국 무산되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16], 국민 의료 보장, 무상 교육을 내세우면서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럽게 지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조봉암이 이승만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으나 290만여 표 차이로 이승만에게 패배하였다. 조봉암 측은 투·개표장에 참관인을 내는 것조차 어려웠고 일부 참관인은 정치깡패들의 폭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사실 당시 민주당이 신익희 후보가 죽은 이후 조봉암을 지지했다면 조봉암은 부정 선거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느니 이승만이 3번 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에서 '신익희 추모표'를 찍을 것을 독려했고 무효표만 185만여 표가 나왔다. 당시 이승만의 득표수가 약 504만여 표였고 조봉암의 득표수가 약 216만여 표였으니 민주당이 기권 투표를 유도하지만 않았으면 5:4로 싸워볼만한 형국이었다. 물론 신익희의 185만여 표가 고스란히 조봉암에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부동층이 있었겠지만 대략적인 형세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당시 선거 결과 #1, 당시 선거 결과 #2[17] 이후 2차례의 대선 도전으로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존재가 장기 집권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고 사법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한편 조봉암의 선거 캠프에는 김성주도 참가했는데 좌익과 빨갱이사탄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극악무도한 백색테러를 일삼던 악명이 높은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의 간부 출신이었다. 평화주의자인 조봉암의 성향을 본다면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인데 왜 이런 사람을 선거 캠프에 받아주느냐고 조봉암 선거 캠프 내에서도 의문이 많았는데 조봉암 본인이 정략적인 의도로 일부러 김성주의 참가를 허락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이승만으로부터 빨갱이라고 하도 공격을 받다보니 그런 정치적 공격에 대한 방패로 삼고자 일부러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 김성주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김성주 개인의 원한도 있었는데 원래 서북청년단 간부인 김성주는 한 때 이승만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점차 자신에게 맞서려고 하자 서북청년단을 재빨리 해체시켜 버렸고 이에 김성주는 이승만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1950년 10월경 6.25 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여 평양을 점령하자 김성주는 재빨리 유엔에 붙어서 유엔의 힘을 등에 업고 평안남도 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승만이 평양에 보낸 관리들은 모두 김성주가 쫓아냈고 이승만이 평양에 가서 평양 시민들 앞에 연설을 하는 자리에 김성주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이승만이 몹시 분노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헌데 중공군이 쳐들어오면서 김성주는 몸을 피해 남한으로 달아났으나 이미 이승만의 미움을 산 터라 처신이 몹시 어려웠는데 마침 이승만의 정적이던 조봉암이 떠오르자 그에게 붙어서 이승만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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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1월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하는데 당시 특무대와 결탁해서 대북 밀무역을 하던 양명산간첩으로 체포되어[18] 협박과 회유[19] 끝에 "북한 공작금을 조봉암의 대통령 선거 자금 및 진보당 창당 자금으로 지원했고 북의 서류를 조봉암에게 주었다"는 진술을 하게 된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을 기소하였는데 문제는 증거가 맞지도 않고 양명산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게 된다. 결국 유병진 판사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의 간첩 혐의는 무죄로 선고하고 조봉암에게만 불법 무기 소지죄를 적용하여 5년 징역을 선고했다.[20] 유병진의 회고에 의하면 그렇게라도 안 하면 조봉암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병진은 조봉암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으며 조봉암의 기일마다 묘소를 참배하며 사죄해왔다.[21] 앞의 판결로 반공 청년단들은 "용공 판사 타도",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를 외치며 더욱 난동을 부렸고 결국 유병진은 법관 연임 심사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어야 했다.
그래서 검찰에서 내세운게 진보당의 '평화 통일' 정강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고 조봉암은 바로 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던 장택상[22]을 비롯하여 반 이승만 계열의 국회의원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23] 결국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서 사법살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진보당 사건이다. 사형 집행일 아침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던 중 호송 간수를 잠깐 기다리게 한 뒤 서대문형무소 담장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에 다가가 한참 동안 꽃향기를 맡은 뒤 담담히 사형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집행관은 의례적인 절차에 이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조봉암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24]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 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조봉암은 입회 목사에게 누가복음 제23장 22절[25]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교수형을 당했으며 11시 14분에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검시관의 검시를 받았다. 처형 직전 조봉암이 남긴 유언은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를 달라"였다고 한다. 그러나 간수들은 막걸리는 주지 않는 대신 담배는 허락하여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천천히 피운 후 형이 집행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 처형에 대해 철저히 언론 통제를 했고 언론들은 침묵했다.[26] 당시 언론 측에서 이런 통제에 대한 법적 근거를 묻자 조선총독부 시행령이라고 답했는데 일제강점기 시행령은 특정한 범죄자의 사형 내지는 장례식 관련 보도를 통제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를 계승한 것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정부 수립 10년이 넘은 시점에 정적을 제거하면서 일제의 시행령(독립운동가들의 죽음에 대한 일제의 법제)을 따른다는 것도 참 구차한 변명이다.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해 당시에도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고[27] 보수 논조의 동아일보도 조봉암 재판 과정에서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아서 그렇게 되었지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기사를 냈다. 미국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는데 1958년 1월 23일자 주한미국대사관은 보고 문서(Joint Weeka)에 『On basis available information Embassy believes purported evidence against Cho is, at best flimsy and that arrest and reported confession is administration attempt to discredit Progressive Party.』라고 작성하였다. 번역하면 『이용 가능한 기본적인 정보들로부터 판단하건대 대사관 측은 조봉암에 대한 불리한 증거라고 하는 것들은 기껏해야 설득력이 없다고 밖에 할 수 없으며 구속 건과 보도된 증언은 진보당을 흠집내기 위한 정권의 시도다.』라는 뜻인데 미국 또한 진보당 사건을 조작으로 보고 있었다. 일부에게 참군인으로 추앙받는 이종찬 역시 국민방위군 사건을 해결할 때 많이 만났던 조봉암이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민간인이 군사 재판에 회부된 불법적인 재판이니 사형은 안 된다며 그 사건으로 권력의 핵심에 오른 이기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간의 불신은 더욱 강해졌으며 9개월 뒤에 그러한 불신은 터져 나오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조봉암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을 때 조봉암의 무죄를 외친 것은 극우파 정객인 장택상윤치영이었다.[28] 윤치영은 조봉암이 억울하다는 주장을 했고 길을 잘못 들어서 좌경으로 몰린 것 같다[29]고 평하였다. 장택상은 당시 홍진기 법무장관[30]을 찾아다니며 조봉암에 대한 석방 구명 운동을 벌였고 국회에 조봉암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며 옥 중의 조봉암을 대신하여 무료 변론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조봉암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끝끝내 막을 수 없었다.
2020년 조봉암이 김일성에 의해 대선 자금을 받았다는 구 소련 문서가 발견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 참조.

3. 사후



3.1. 정치적 복권


조봉암의 재평가 움직임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면서였다. 동년 5월 24일 구국사회당 대표 고정훈이 진보당 사건의 내막을 폭로했는데, 이승만의 지령으로 특무대와 대북 공작기관 대원이 사건을 조작했으며 이승만도 사전에 김창룡에게 그러한 지시를 내렸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는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과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한 만큼 폭로 자체가 주목받았으나 명확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몇몇 인사들 사이에서 조봉암 재평가 움직임이 일었고, 1989년경에 윤길중과 허영무 등이 '죽산조봉암선생추모사업회'를 만든 후 1991년에 윤길중 의원이 국회의원 86명의 서명을 받아 가며 '죽산 조봉암 사면 복권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냈고, 언론 등지에서도 심층취재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여러 번 조봉암을 다뤘다. 1993년 조봉암의 측근들은 김영삼에게 조봉암의 억울함을 탄원했다. 김영삼이 장택상의 정치적 제자인 점을 감안해 장택상이 그의 억울함을 인정한 만큼 김영삼도 그의 억울함을 들어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으나 외면당하고 말았다.[31]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조비오 신부와 조아라 광주YWCA 명예회장, 강원용 목사, 이수성 전 총리 등이 죽산의 사면/복권을 청원했으나 이마저도 가로막혔고 그 사이 추모사업회도 윤길중과 허영무의 유고로 유명무실화됐다. 그러나 2001년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진해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뒤 2004년에 딸 조호정이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다. 뒤이어 2006년에 그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재조사 신청서를 냈고, 2007년에 진화위는 진보당 사건이 '정치탄압'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죽산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도록 권고했다. 2008년에는 대법원에 재심까지 냈다.
이에 따라 2009년부터 죽산 조봉암 사망 50주년을 맞아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고 있다. 이미 2007년에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가 세워진 이래 조봉암에 대한 평전 등 서적이 발간되는 등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 및 명예 복권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조만간 건국훈장 수여까지 갈 듯했지만, 부인 김조이가 먼저 2008년에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 국가보훈처는 심사 과정에서 1941년 12월 그가 일제에 '국방헌금 150원을 낸 전력이 있다'며 심사를 보류했는데, 이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 기조를 유지했다.(국가보훈처 정관회 공훈심사과장 인터뷰) 다만 2017년 58주기 때부터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최초로 추모 화환을 보냈다.
2019년 8월 14일 조봉암의 유족들은 더는 조봉암의 서훈을 주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는 "왜곡된 신문에 나온 단편적인 한 줄짜리 기사를 가지고 친일 행위로 매도하는데 이 상황에서 서훈 신청을 또 하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오히려 누가 되는 행위라고 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도 평양 신미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릉 가묘를 세워 정치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3.2. 대법원 재심


2010년 10월 29일 진보당 사건의 재심을 열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공식적으로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해 원심을 파기했다. 이것으로 조봉암은 사법살인을 당한지 52년 만에 신원(伸冤)되었다.대법원 판례 장녀 조호정은 아버지의 복권 소식에 기뻐하며 오랫동안 비워둔 아버지의 묘비에 내용을 새길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일부 언론에서는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등의 주장을 펼치는데# 진보당 사건은 분명히 조작된 사건이다. 이게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는 글이고 이게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는 판결문이다.[32]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반도 이남 지역에 있었던 정치가들 중에서는 단순히 조봉암 뿐이 아니더라도 남조선로동당 계열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반공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자신의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과 당적을 같이 하는 정치인이 아니라면 마구잡이로 제거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이들 중 상당수가 좌파 성향이었던 것으로 오해받을 뿐이다. 김구의 경우도 이승만 못지않게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으며[33] 무정부주의 이론가였던 박열조차도 김일성의 북한은 시작부터 글러먹은 체제인 것으로 무정부주의자답게 판단한다. 이들은 이승만이 정적을 제거할 때 반공주의를 이용한 것을 문제 삼았을뿐 반공 성향 그 자체에 반기를 든 것은 아니다.
1959년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김갑수 판사는 이 공로 때문인지 승승장구해서 대법관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말년까지도 진보당 사건에 대한 논란과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정치판사의 말년고뇌-김갑수
반면 죽산의 유족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한동안 연좌제에 시달려왔는데, 사위이자 영화감독인 이봉래 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경찰에 수 차례 불려가는가 하면 외아들도 출신성분 때문에 수 차례 회사를 옮겨야 했다.
통합진보당이정희는 조봉암의 뒤를 잇는다고 자처했으나 조봉암이 단순히 반공(또는 반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닌 진보를 통해 반공을 하자는 주의였기 때문에 이정희가 조봉암의 유명세에 편승하려던 시도로 봐야 한다.

3.3. 2020년 조봉암에 대한 김일성 발언 문서(구 소련 외교 문서) 발견


관련기사
2020년 국민대학교 유라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인 표도르 째르치즈스키[34] 박사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연방 국가문서보관소에서 구소련 외교 문서를 발견했다. 이 문서에는 1968년 9월 12~13일 북한을 방문한 드미트리 폴랸스키(Дмитрий С. Полянский)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 부의장이 김일성과 나눈 얘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중대한 발견으로 조봉암이 진보당 설립 또는 대선 출마와 관련해 북한에 조언을 구하고 북한측이 그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김일성의 주장이 확인된다면 2011년 대법원 재심 판결 역시 근거를 잃게 된다.
이 문서에 따르면 조봉암은 진보당 설립에 대해 북한 쪽에 편지를 보내 '해당 임무를 달라'고 요청했으며 김일성은 '정치국에서 토론한 결과 다른 동지들을 통하여 그(조봉암)에게 연결체가 될 수 있는 합법 정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고 소련 측에 밝혔다. 또한 김일성은 조봉암의 대선 출마에 대해서도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조봉암)는 우리의 조언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조봉암)가 이승만 정권의 장관이라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봉암의 대선 자금 지원에 대해서는 '대선 1~2달 지나서 어쩌면 그 이전에 미국은 우리가 조봉암에게 선거 운동을 위해 돈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언급하여 북한에서 조봉암의 대선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소련에 밝히고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2011년 대법원의 재심 무죄 판결도 다시 들여다 봐야 한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의 재심에서 세 가지 주요 혐의에 대해 선고유예 및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의 혐의는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해 중앙위원장에 취임하고(국가보안법 위반) △육군첩보부대(HID) 공작요원을 통해 북한에서 금품을 받고 대한민국 정보를 제공했으며(형법상 간첩죄) △당국 허가 없이 권총과 실탄을 소지했다(군정법령 위반)는 것이었는데 2011년 대법원은 이중 무기 소지(군정법령 위반)에 대해서만 선고유예를 내리고 나머지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죄 위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며 이들 혐의에 대해 입증할 증거가 체포와 불법 감금을 통해 얻어진 증인 진술 뿐이었다며 판결 근거를 밝힌 바 있다.관련기사
그러나 이 문서에서 언급된 김일성의 발언을 100% 신뢰할 수도 없는 증거도 있다. 조봉암의 제3대 대선 출마(1956년 5월)와 진보당의 창당(1956년 11월) 날짜가 다르다는 점[35], 조봉암과 이승만의 실제 득표수가 김일성의 발언과 다른 점[36], 조봉암이 총살됐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교수형이었던 점 등을 볼때 김일성이 과장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화 시점인 1968년 당시 1.21 사태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등을 벌인 김일성이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얻기 위해 거짓말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정확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선 이 문서에 관한 추가적인 연구가 나와야하는 상황이다.

4. 어록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한국의 독립을 쟁취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한국이 독립되어도 일부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잘 살고 호사하는 그런 독립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모든 사람이 잘 살고 호사할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中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사회질서를 억압과 공포로서 유지하고 있는 대신에, 우리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명랑하고 활달한 정치를 지향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안식처를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946년 당시 연설.

이북의 괴뢰정권 김일성은 최근 박헌영 일파를 또한 같은 방법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피의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더욱 민주주의 이념에 철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 1953년 8.15 8주년 기념행사에서.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

-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이승만 박사가 무서워서 대적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 국민이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

- 장녀 조호정의 회고 中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만 주시오.

- 진보당 사건으로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유언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1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제2선거구(인천시 을구))
무소속
'''17,620표 (37.77%)'''
'''당선 (1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제3선거구(인천시 병구))
대한국민당
''' 14,095표 (42.75%)'''
'''당선 (1위)'''

1952
제2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797,504표 (11.35%)
낙선 (2위)

1956
제3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2,163,808표 (30.01%)
낙선 (2위)


6. 대중 매체에서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송기윤이 연기했고, 1989년작 제2공화국에서는 최명수가 연기했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 당시 해외 순방 중이던 국회의장 신익희를 대신해 부산에서 열린 임시국회 본회의의 진행을 맡아 진상을 폭로하기 위해 출석한 신중목의 신변보호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봉암의 처형과 관련하여 서대문형무소 수인들과 간부들 사이에 전해져내려오는 민담 중에 '봉암새' 혹은 '죽산조'라는 민담이 있다.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진보당 사건 자체가 짤막하게 언급되고 끝이지만, 2화 뒤에 이정재가 사형 판결을 받고 조봉암이 썼던 방에 수감되는데, 이때 죽산조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나는 어느 사이 비둘기의 벗이 되었다. 악하고 거짓 많은 인간들보다 이 비둘기는 얼마나 더 기특하며 정다운 친구인가 말이다.
비둘기가 좋아하는 콩, 그 콩을 내 밥에서 골라내어 던져준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어 먹는 배고픔 속에서도 이 비둘기 모이만은 잊지 않는다. 식후 창가로 가서 구구구 비둘기를 불러 콩알을 던진다.
여기저기 모여와 구구거리면서 그걸 쪼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끝없는 희열감에 젖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일은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딴 방의 사람들도 소중한 밥을 나누어 던져주는 것이었다.
건너편 2사의 조봉암 선생도 끼니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 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어 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 분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드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죽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교수대에서 그 막을 내린 것이다. 그 후 사형집행의 버드나무엔 전에 볼 수 없었던 낯선 진귀한 새가 나타나 슬피 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소위 ‘봉암새’ 혹은 ‘죽산조(竹山鳥)’라는 얘기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누가 지었는지조차도 확실치 않는 ‘봉암새’의 얘기가 서대문 징역꾼과 형무관 사이에 마치 하나의 전설이나 민화(民話)처럼 구전되고 있다.
여운형의 글에 따르면 조봉암은 술을 아주 잘 마셨으며, 시를 잘 읊었고 강개가 북받치면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밖에,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여운형과 가장 친했으며, 한국민주당이승만, 김구를 모두 안 좋게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김구테러리스트라며 싫어했다고 한다.
허영만오! 한강에도 등장했다. 조봉암의 죽음으로 주인공 이강토는 현실 정치에 절망하여 등을 돌리고 그림에만 몰두하게 된다. 2부의 중요 캐릭터.
장기려 박사를 다룬 평전 2권에서 모두 장기려 박사가 처한 당시 고난을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편히 있었을까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1995년에 KBS2에서 방영된 드라마 바람의 아들에서 극 중 장하수(김영철), 권산(신현준), 장홍표(이병헌)의 친아버지인 장한기가 이 인물을 모티브로 설정되기도 했다.
1998년작 야망의 전설에서는 주인공 이정우(유동근 분), 이정태(최수종 분) 형제의 아버지인 이현준(이영후 분)이 조봉암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는 모습으로 초반부에 잠깐 언급된다. 경찰서로 면회를 온 장남 이정우에게 이현준은 "조봉암 선생이 정치적 희생물이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야. 나는 그 분을 먼 발치에서 뵈었고, 악수 한 번 한 것이 전부지만, 나는 그 분을 존경한다. '''그 분이 빨갱이면, 나도 빨갱이야.'''"라고 말하며 조봉암의 억울함을 확신했다.
전술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한춘일[37]이 맡았다.
2018년 극단 '어니스트씨어터'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사법살인 59: 죽산 조봉암>을 상연했으며, 배우 임주영이 죽산 역을 맡았다.

7. 참고/관련 자료


  • 도서
    • 조봉암연구 - 박태균 저. 창작과비평사. 1995.
    • 죽산 조봉암 평전 - 김삼웅 저. 시대의창. 2005.
    • 조봉암평전: 잃어버린 진보의 꿈 - 이원규 저. 한길사. 2013.
  • 다큐멘터리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1999.10.03. MBC)
    • 역사스페셜 '반세기만의 무죄 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2011.04.21. KBS1)
    • 역사저널 그날 271회 (2020.07.14. KBS1)
  • 내용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개정증보 3판) - 서중석 저. 웅진지식하우스. 2020.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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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공산주의자로도 찍힐 수 있었던 '평화통일론'과 조선공산당의 '농지개혁론'을 주장하며 급진적인 입장을 보여줬다.[2] 1947년 소련북한이 남북한 총선거 안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였다.[3] 이에 대해서는 아래 후술할 문단을 참고하기를 바라며 여러 가지 소련 문건을 정확하게 조사하기 위해 계속 연구가 필요하다.[4] 김조이 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유학을 떠났던 조봉암의 동생 조용암도 서신을 통해 조봉암을 비난했지만 동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김조이는 2살 연하인 동지 김복만재혼한다.[5] 마침 김조이도 1937년 출옥하였는데 김복만과 헤어진 상태였다.[6] 과거 이글루스에서 활동한 모 블로거는 1939~1945년 기간 동안 조봉암은 '변절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라는 등의 왜곡된 선동질을 했었는데 실제로 조봉암이 이 기간 동안 '유휴분자'라고 비난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로서 활동을 게을리했다는 비판이지 친일은 아니었으며 1945년 1월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고 끌려가서 광복 때 풀려난 것을 감안하면 조봉암이 변절했다고 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 내내 조봉암은 '특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있었다. 공동 조계에서 김이옥과 생활하던 때조차 품에 칼을 품고 잘 정도로 밀정에 쫓기는 신세였다.[7] 당시 조봉암의 나이 50살이 가까웠는데 20대 초반 여성 윤봉림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둘 사이에서는 차녀 조임정(1947.04.25~), 삼녀 조의정(1950.08.26~)이 태어났다. 한편 유일한 아들인 조규호(1949.07.23~)는 청운각 송 마담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8] 사실 조봉암의 입장이나 편지의 내용을 보면 좌경화의 문제같은 것보다는 자신의 처우 문제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스크바 대학 유학파로 코민테른의 지원을 등에 업고 활동한 조봉암의 입지가 이 시기에는 엄청나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조봉암 변절 논란까지 나오는 것도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던 그 시기에 조봉암이 개인 생계 활동 이외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광복 이후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 조봉암의 입지를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너 너무하는 거 아니냐,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9] 김구가 우익이었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과 달리 조봉암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정치인으로서 현실을 고려한 측면이 있었다. 1번 변절한 사람이 또 변절했다고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그나마 남았던 지지 기반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구의 경우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우익적 입장을 견지했다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김구를 지지했던 우익 쪽 지지가 떨어져 나가서 이승만에게로 갔다. 물론 3.15 부정선거가 있던 이승만보다 후대의 평가는 높아졌다.[10] 이 때문에 남조선로동당에 의한 테러 위협에 시달려서 선거 기간 중에 시골에 은거했다고 한다.[11] 자세한 것은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항목 참고.[12] 물론 모든 소작농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고 산업 자본으로의 전환이 잘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농지개혁법 항목 참조.[13] 그러나 농지개혁에서도 당시 시골에서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며 살아가던 머슴들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그래서 1950년 6월 25일 쳐들어온 북한군이 머슴들한테도 땅을 분배한다고 약속하자 땅을 분배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던 수많은 머슴들이 북한군에 협력하는 역효과도 낳았다.머슴과 무당들이 북한군에 적극 협력했다. 6.25 전쟁과 관련하여 꼭 나오는 회고담 중 하나가 시골 농촌의 머슴들이 북한군이 쳐들어오자 재빨리 북한군에 붙어서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렸다는 내용이 바로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들이다.[14] 북한에 끌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평양에 위치한 조봉암의 가묘 옆에 아내인 김조이의 가묘가 없는 것이 그 이유. 북한은 그 후 이승만이 조봉암을 억울하게 처형했다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6.25 전쟁에서 김조이를 제거한 행위는 애써 모른 척 했다.[15] 조봉암이 이승만을 대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서울에 남아 인민위원장이 됐다더니..."였다고 한다.[16]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보수적인 통일 방안이지만 휴전 직후의 현실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17] 이 '신익희 추모표' 떡밥은 훗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민주당의 선거 단일화 요구를 비판하는 근거로서 절찬리에 사용되고 있다.[18] 특무대의 조작이라는 설부터 3중 간첩이라는 말도 있다.[19] 양명산의 말에 의하면 약물 고문.[20] 당시의 어지러운 정세 하에서 정치적 주요 인사들은 누구나 권총 하나 정도는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조봉암을 숙청하려고 마음먹은 상황에서 무죄를 때릴 수는 없고 하나 엮어 넣기는 해야겠기에 궁여지책으로 엮은 것이 불법 무기 소지라는 것.[21] 유병진 판사는 소신있는 판사 중 1명으로 6.25 전쟁 당시 부역자를 처벌한답시고 만들었던 대통령 긴급명령#s-1 1호에 명백한 위반을 행한 이들에게 무죄를 수차례 선고한 바 있다. 무죄 선고한게 뭐가 소신이냐 하면 유병진 판사가 판결해야 할 부역 사건이라는 것이 길을 물어본 북한군에게 그냥 대답해준 10대 어린이에게 사형, 무기, 징역 10년 이상의 형벌을 내리라는 짓이었기 때문. 지금 같으면 어린이가 이적행위라는걸 이해하고 있을 기대 가능성이 없다고 보아 기소조차 안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게 없었고 대부분의 판사가 검사의 구형에 응하여 사형을 때리던 미친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절도도 같은 형벌이었는데 피난 도중에 배가 고파서 고추장을 꺼내 먹은 피난민이나 북한군이 약탈하고 남긴 약간의 물품을 가져간 학생들에게 사형 대신 무죄를 판결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전시 단심제라서 자신이 판결을 내리면 못 건드린다는 것을 방패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22] 비록 장택상이 좌파 탄압의 앞잡이로 유명했지만 조봉암만큼은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사실 장택상은 반 이승만 계열로 인해 민주당의 전신인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영입했던 사람이였으며 좌익 계열과도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23] 홍진기 법무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올렸던 장택상은 "벼룩에게 굴레를 씌워 수레를 돌리지, 박사가 조봉암을 처형할까?"라고 하기도 했다. 제일 안 좋은 상황이 진짜로 일어났다는게 문제이다.[24] 민주주의 형태도 여러가지이다. 심지어 독재형태를 갖춘 북한도 왕정을 바라는건지 조선식 민주주의를 사용한다.[25]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이 사람(예수)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때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26] 한국일보부고란에 '지난 7월 31일 상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3시 서울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 반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라고 1단 6행으로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이다.[27] 물론 최근까지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오제도 변호사였다. 이 사람이 망명해서 훈장까지 받은 황장엽의형제를 맺은 사람이다.[28] 윤치영은 이승만의 최측근에다가 제헌 헌법 초안을 만들 때 유진오와 몇 시간을 다투면서까지 "인민이라는 단어는 공산당이나 쓰는 단어라 쓰면 안 된다"고 하며 국민이라는 단어를 쓰게 하였고 장택상은 광복 이후 박헌영, 김원봉, 남조선로동당을 탄압하고 괴롭혔던 인물인 것을 보면 의외의 행동들이기도 하다.[29]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을 돌려서 말한 듯 싶다.[30] 홍진기는 후에 내무장관이 되는데 4.19 혁명 당시 최인규의 뒤를 이어서 시민들을 향한 발포를 지시하였고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회장인 이건희사위로 두었으며 6대 일간지에 속하는 언론사인 중앙일보의 창업주까지 된다.[31] 근데 재미난 것은 황장엽이 김영삼 정권 시절에 망명한 인연으로 서로 절친했다는 것이다.[32] 조봉암을 가장 열렬히 간첩이라고 했어야 할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조봉암을 옹호했으니 말 다했다.[33] 일제강점기 때도 김립을 무작정 죽인 것처럼 극단적 반공 성향을 보였다.[34] 본명은 표도르 콘스탄티노비치 테르티츠키(Фёд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ертицкий)이다.[35] 진보당 창당위원회는 1956년 1월에 성립했지만 진보당 창당이 이뤄지지 않고 조봉암은 제3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36] 1968년 김일성의 발언으로는 조봉암이 280만여 표, 이승만이 300만여 표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선거 결과는 조봉암 216만여 표, 이승만 504만여 표였다.[37] 해당 배우는 1부에서 개성 경찰의 순사역을 맡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