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1. 개요
2. 1920년대 공산주의 배경
2.1. 국내 공산주의자
2.2. 해외의 공산주의 활동
3. 1925년 창당
4. 광복 직후
4.1. 남한의 정파 정리
4.2. 주요 활동과 몰락
5. 관련인물


1. 개요


朝鮮共産黨.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한반도공산주의 정당.
당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화요회 정파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 있다. 이 세 사람은 화요파 삼인당(三人黨), 트로이카라고 불리게 된다. [1]

2. 1920년대 공산주의 배경



2.1. 국내 공산주의자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사회활동가 지식인 청년 일본유학생 중 일부는 일제로부터 민족해방도 중요하지만 계급 해방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탐독한다. 이때만 해도 공산주의 혁명은 그거 망한 얘긴데...가 아니라 새로운 서양 사상이며 이상적 세상에 대한 혁명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법'[2]으로 수차례 탄압을 받아 해체와 재창당을 여러번 겪었다.
시기에 따라 김재봉을 중심으로 한 1차 조선공산당, 강달영을 중심으로 한 2차 조선공산당,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3차 조선공산당, 차금봉을 중심으로 한 4차 조선공산당으로 나눈다. 하지만 내부분열이 만만치 않았으며, 사상과 배경의 차이에 따라 여러 파벌로 나뉘었기에(화요파, 북풍파, 서울파, ML파 등) 이들의 대립은 생각 이상으로 심했다.[3] 이러한 공산당의 파벌 대립은 후에 김일성에게 종파주의 숙청이라는 명분을 얹어주고 독재를 강화하는 빌미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1920년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과 독서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여기에 힘 입어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공산주의 단체를 세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 등이 세워졌고, 일본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북성회'가 만들어졌다.[4] 이런 단체들은 국내외 공산주의 운동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고, 국외에 있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와도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5] 이들은 나중에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파벌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들도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가지고 서로 대립했다.[6]

2.2. 해외의 공산주의 활동


처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세력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하려는 세력(이동휘파/상해파)'''였고, 또 다른 하나는 러시아 한인들을 중심으로 한 '''진성 볼셰비키 공산주의자 세력(이르쿠츠크파)'''이었다. 김알렉산드라가 건재하던 시절에는 분열될 일이 없었으나, 김알렉산드라가 사망한 후에는 이들은 각자의 정당을 결성[7]하여 소련의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 파벌은 극심히 대립했고[8], 결국 코민테른에 의해 '헤쳐 모여'를 당한다.


3. 1925년 창당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공산당 결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국외에서도, 국내에서도 파벌 간의 대립은 공산당 결성을 막는 주요 원인이었다. 앞에서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서로 정당을 건설하고 자신들이 진짜 공산당이라며 대립하다가 망했고, 국내 파벌들 간의 대립과 충돌도 심각했다. 그럼에도 조금씩 국내에서는 공산당 건설을 위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24년에는 러시아 한인 2세들을 주축으로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고, 화요파북풍파, 무산자동맹회 등에서도 공산당 창당을 위한 협력을 시작했다.[9] 그 중에서도 김재봉과 화요파가 가장 적극적으로 창당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25년 4월 17일, 화요파북풍파의 주요 인물 19명이 중국 음식점인 아서원에 모여 회동을 가졌다.[10]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김재봉, 김약수, 김찬 등의 내로라하는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모인 이 회동에서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세워졌다. 김재봉이 당 책임비서로 선출되었고, 김찬과 조봉암, 조동호가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앙집행위원회와 중앙검사위원회는 각 파벌에서 나름대로 골고루 선출되었다. 다음 날인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집에서 공산주의자 20명이 모여 조선공산당 산하 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과 선출자는 아래와 같다.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후, 공산주의자들은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바로 ''''공산주의 운동'과 '조선공산당의 정식 인정''''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공산당은 여러 활동을 벌였다. 4월 18일 김찬의 집에서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당을 관리하고 각 부문에 야체이카를 조직하며, 선전선동을 담당할 사람들을 뽑았다. 또 당의 강령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회의 3일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주도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열려 일제의 탄압과 대회장 폐쇄에도 불구하고 1000여 명의 대오를 이루어 적기(!)를 들고 행진하기도 했다.[11] 그런가하면 청년 20명을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을 보내고, 전국 각지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야체이카를 조직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코민테른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인정받고자 조봉암과 조동호를 밀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코민테른은 '당 강령이 없다'는[12] 이유로 조선공산당을 완전히 공인하지 않았지만,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통일당의 기지'로 인정함으로써 '''조선공산당을 실질적으로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공산당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파벌 간의 갈등 그리고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북풍파는 점점 화요회가 주도한 조선공산당에 불만을 가졌고, 조선공산당 창당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서울파도 자신들을 빼고 결성된 조선공산당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러한 파벌 갈등으로 조선공산당은 북풍파 출신 인사들을 제명했다. 결국 조선공산당이 '''화요회 조선공산당'''으로 전락한 셈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은 신의주 사건[13]이라는 우연한 사건으로 덜미를 잡혀 당원 대부분이 검거됨으로써 창당된 지 1년 반 만에 강제로 해산당하고 만다.
1925년을 전후로 조선공산당은 총독부 당국,경찰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결국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가 벌어진 1928년 해산되었다.[14] 4차 공산당 검거 사건 이후에는 사실상 중앙위원이 궤멸되었으며, 코민테른[15] 의 권고에 따라 당을 재건하려는 공식적인 노력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을 배경으로 한 권영태 중심의 국제파와 이재유와 김삼룡, 이현상의 2차 트로이카와 함흥의 이주하를 중심으로 한 국내파가 다시 갈렸으며,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에는 1940년대에는 체포를 면한 이관술, 만기출소한 이현상, 국내로 귀환한 박헌영을 주축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기도 했었다.

4. 광복 직후



4.1. 남한의 정파 정리



8.15 광복 이후, 1945년 8월 16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16]와 재건파[17]가 출범하였는데, 박헌영이 장안파를 제압하고 8월 24일 '조선공산당'을 재창당한다. 1달 후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된다.[18] 서울의 조선공산당의 통제력이 삼팔선 이북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군정을 등에 엎은 김일성이 주도했다. 박헌영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분국 설치에 부정적이었으나 소군정의 압박을 물리치지 못했다.

4.2. 주요 활동과 몰락


광복 직후 시기 조선공산당은 미군정기 시기 초창기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아 처음에 온건 노선에서 군정청에 어느 정도 협조하는 스탠스[19]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제1차 미소공위의 결렬 이후 소련의 지령에 강경노선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46년 5월 중순. 서울 소공동의 근택빌딩(現 서울시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맞은편 부지에 위치해있다)에서 터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당시 미군정청에서 공산당이 위조지폐에 연관있다고 공산당을 불법화 시키고, 대대적인 공산당 간부 체포작업에 들어가자 조선공산당은 더욱 급진적 성향으로 흘러가게 된다.[20] 정판사 사건을 전후로 대중들로부터 부정적 여론[21]이 강해지면서 조선공산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중적인 정당으로 타개하기 위해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3당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되었다. 여기서 남로당 당내 주류,주도권을 쥐었던 쪽이 조선공산당 출신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로당의 전신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합당 이후의 조선공산당의 행보는 남조선로동당 참고.

5. 관련인물



[1] 사실 트로이카라는 단어는 박헌영대가 아니라 이재유시절 생긴 단어이다. 공장 노동자, 농민, 학생 조직을 분산운영하며 상향식으로 운영되던 이재유 시절의 조선공산당을 트로이카라고 불렀는데, 박헌영 계파가 재건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삼인당을 칭하게 된 것이다.[2]국가보안법의 원형이다.[3] 파벌 사이에 폭력이 오갈 정도였다. 특히 화요파, 북풍파, 서울파 간이 벌어지는 3자 대립이 심했다.[4] '서울청년회'는 서울파로, '신사상연구회'는 화요파로, '북성회'는 북풍파의 기원이 된다.[5] 파벌들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화요파는 이르쿠츠크파와 가까웠다. 서울파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강조했기에 국외 파벌은 물론이고 국내 파벌들까지도 껄끄럽게 봤다. 북풍파는 조선공산당 창당 전후로 주도권을 놓고 화요파와 다투었다.[6] 예를 들어 서울파는 북풍파가 유학생으로 이루어졌기에 국내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비판했다. 그런가하면 앞의 국외 파벌들 간의 갈등도 국내 파벌 간의 갈등에 한몫 했다.[7] 이동휘파는 한인사회당을, 이르쿠츠크파는 전로한인공산당을 각각 결성했다. 원조는 김알렉산드라와 김립 등이 있었던 한인사회당쪽.[8] 이 대립과 관련된 사건이 그 유명한 자유시 참변이다.[9] 다만 여기에서 서울청년회(일명 서울파)는 배제됐다. 그러나 서울파는 국내 공산주의 파벌 중에서는 그 힘과 영향력이 커서 제1차 조선공산당은 시작부터 허약한 편이었다.[10] 조선노동당은 1924년 11월의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함부로 나다니기에는 어려운 탓에 그 쪽 인사들은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조선노동당은 아서원에서의 회동 이후에 조선공산당에 참여한다.[11] 위험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일제는 조선공산당이 건설된 것도 몰랐고, 이 일을 그저 '해프닝'으로만 취급했다.[12] 4월 18일의 중앙집행위원회는 당 강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북풍파의 어깃장으로 당 강령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못했다. 그 강령이 조선공산당의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13] 신의주의 한 식당에서 친일파 변호사 박유정이라는 사람이 일제 경찰과 술퍼마시면서 고성을 벌이다가 같은곳에 별실에 있던 신만청년회원들이 시끄럽다며 그들에게 집단구타를 했는데, 문제는 이 청년들 가운데 한 명이 '통쾌하다!'면서 팔에 소매를 걷었던것에서 시작된다. 그 자리에 그 청년의 팔에 붉은 완장을 찬 것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자리에서 일제경찰의 의심을 사서 상부에 보고를하고, 총독부 일제 경찰 당국은 신만청년회 회원들 가택수색을 한 결과, 그 단체 가운데 회원 한명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이 상해의 조봉암에게 보내는 비밀문서'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버린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고려공산청년회)가 식민지 조선 국내에서 비밀리 조직되어 활동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사건이다.[14] 4차 조선공산당 창립의 주역이던 차금봉이 검거당한것이 결정타였다. 1920년대 1~3차 조선공산당의 주요 핵심멤버들 상당수가 양반, 지식인 계층 출신들이 이끌었던 것과 달리 차금봉은 순수 노동자(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자 출신으로 최초로 정당의 책임비서가 된 인물'이다.[15] 코민테른은 1928년 제6차 대회에서 이미 맛탱이가 가버린 상태였다.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는 기존의 국제연대 중심주의를 벗어나고 '스탈린주의'의 노선으로 확실히 바뀌어버린다.(...)[16]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김철수, 정백, 이영등이 주도해 서울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결성했다해서 '장안파'라고 불렸다. 장안파는 강령이나 규약, 당면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을 뿐더러 조직력 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성 10여 일 만에 '재건파'의 해체 요구로 그 세력이 대부분 와해된다. 다만 이영, 정백 등 일부는 한동안 독자세력을 유지했다.[17] 1928년 일본 경찰에 의해 해체당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말한다. 박헌영, 김삼룡 등 경성 콤그룹이 중심이 됐다.[18] 형식상 조선공산당 중앙의 산하이기는 했지만 상당한 자율권을 인정받았다.[19] 1946년 4월,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추모 1주기 행사를 주최할 정도로 최소 '미군정 체제에는 순응했던' 정도였다.[20] 초창기 미군정에 온건한 노선으로 취했던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을 전후로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대중적인 투쟁'을 결의하면서 노동자,농민들을 선동하여 총파업으로 미군정에 맞섰다.[21] 정판사 사건 이전까지만해도 조선공산당은 대중들로부터 나름 지지도가 꽤나 광범위했었다.(일제강점기 시기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 계열이 주류였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판사 사건으로 대중들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매우 나빠지기 시작한다. 관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전략) 경남 하동군의 또 다른 농부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인민공화국과 공산당이 조선의 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왔다. 하지만 나는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듣고서 충격을 받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할복으로 사죄해야 한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