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익(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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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翊
1886년 ~ 1937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교육가이자 사업가. 전라남도 순천시 월등면 대평리 출신으로, 호는 우석(友石).[1]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증식하여 '사천구렁이'로 불리었던 김학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과거제가 폐지되자 경성 중동학교와 일본의 메이지대학에 유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고, 이 시기 다양한 조선청년들을 만나며 교육(민족계몽)에 눈을 떴다. 그 결과 김종익이 관료가 되길 바라며 순천시 부시장 자리까지 준비 해 놨던 아버지 김학모의 요청을 뿌리치고 사업가의 길을 선언한다.
김학모는 이에 반발하여 김종익에게 한 푼도 주지 않았고, 김종익 역시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쌀 장사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장사에 실패하여 다시 고향에 내려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김학모로서는 예상외의 일격을 당한 셈. 그 결과 김학모는 김종익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김종익은 기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김종익은 이후로도 수완을 발휘하여,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인기업들(조선제지, 조선제사(朝鮮製絲))를 인수하여 회생시킴은 물론이고, 재산을 배로 늘리기도 했다.당시 신문기사 이는 김종익의 사업수완 뿐 아니라, 그가 회생시켰던 기업들이 모두 조선인 기업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민족자본 보호와 육성에 공을 들였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그렇게 모은 돈으로 조선인 최초로 증권회사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1937년 급작스런 병환으로 인해 숨을 거두게 된다. 김종익은 자신의 재산 175만원[2]을 육영사업에 쓰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 돈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우석대학교(서울)의 전신)[3]와 부속병원, 현재 순천중학교, 순천여자중학교, 순천고등학교, 순천여자고등학교, 그리고 장학회 설립에 사용되었다. 사망 2년 전인 1935년에는 순천농업학교(순천대학교의 전신)설립을 위해 기부하기도 하였다.
고리대금업을 하던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행을 베풀었고, 망해가던 조선인기업을 인수하여 회생시킴은 물론 조선인 최초의 증권회사 설립을 계획하며 사업수완과 민족자본 보호에 대한 의지를 몸소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였음에도 자신의 재산을 교육에 투자하여 지역 교육의 틀을 잡았을 뿐더러, 특별한 친일행위 역시 발견되지 않았기에 존경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 실제로 순천지역에서는 지금도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며, 지역의 대표 공원인 죽도봉공원과 순천대, 순천고에 그의 동상이 꽤나 크게 설치되어 있다.
가족으로는 1931년에 결혼한, 판소리 명창으로도 유명한 박녹주가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김종익은 박녹주를 후원해왔고, 이 인연으로 조선성악연구회 건립 및 활동 비용을 지원하는 등 국악계에 대한 지원을 했다. 다만 박녹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없다.


[1] 순천시에 그의 호를 딴 우석로가 있다.[2] 2016년 기준으로 약 5000억원[3] 이는 김종익의 딸이 고등학교때 병으로 숨을 거두자, 여자 의사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