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1. 대한민국의 가수
2. 대한민국의 정치인
3.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4. 조선 시대의 인물
1614 ~ 1671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김류의 손자이자 김경징의 아들. 김경징은 병자호란 때 맹활약(?)한 희대의 명장이며, 아들 김진표도 그에 못지 않은 막장스런 인물이었다. 그나마 애비와 달리 자연사했다.
병자호란 당시 김진표는 일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해 있었다. 김경징 역시 김류의 천거로 강도검찰사가 되어 강화도로 이동했다. 이 때문에 김류는 '온가족이 난리를 피하게끔 계책을 꾸몄다.'는 비판을 받았다.[1] 청군이 바다를 건너 섬에 상륙하자, 김진표는 김경징과 더불어, 일가족을 내버리고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인조실록에는 '김진표는 병자호란 때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인조 15년 9월 21일 병술 2번째 기사. '병자록(丙子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야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그 신빙성에는 논란이 좀 있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석연치 않은데, 당장 제 목숨 아까워 도망치려는 위인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운운할 여유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만갑은 김류의 모함과 참소에 의해 8년 가까운 세월을 귀양가거나 외직을 전전해야 했기 때문에, [2] 병자록의 내용 중 김류 가문에 대한 서술은 그 악연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3] '연려실기술'에도 '당시 민심이 김류에게 극히 부정적이어서 김류 집안 부녀자들의 절개를 깎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전략)
○ 김류(金瑬)의 아내 유씨(柳氏)(근(根)의 딸)ㆍ경징의 아내 박씨(효성(孝誠)의 딸)ㆍ진표(震標)의 아내 정씨(백창(百昌)의 딸) 및 김류의 첩 신씨ㆍ경징의 첩 권씨가 같은 날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아울러 정려하였다.《강화지》
○ 그때 경징과 장신의 어머니가 모두 성 안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어머니가 마침내 적중에서 죽었다. 경징의 아들 진표는 그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고, 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입니다.” 하니, 두 부인이 이어서 자결하고 일가 친척의 부인으로서 같이 있던 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
○ 일찍이 경징의 아내 박씨가 경징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 간하니, 경징이 노하여 말하기를,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 하자, 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깨치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 과연 이때에 이르러 한 집안의 부녀가 모두 목을 매어 죽었다. 혹자는, “진표가 다그쳐 죽게 하였다.”고 일컬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강화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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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에 나온다. 기록 중간에 '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데에서 나왔는데, 대개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2] 김경징은 공조판서 시절 군관을 곤장 때려 죽인 적이 있다. 당시 인조는 가벼운 훈계로 넘어가려 했지만, 사헌부는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로 인해 김경징은 삭직당했다. 때문에 김류 부자는 대사헌 정엽은 물론이고 정엽의 사위였던 나만갑에게까지 원한을 품었다. 이후 나만갑을 비롯한 청서의 소장파들이 소북의 영수 남이공이 대사헌으로 발탁된 데 대해 비판을 제기하자, 격노한 김류는(남이공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김류였다.) 자신의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그들을 모조리 외직으로 좌천시키고, 그 후로도 틈만 나면 모함과 참소를 일삼아 그들을 탄압했다.[3] 물론 이를 근거로 병자록의 모든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병자호란 당시 김류 부자의 행적을 비판한 것은 병자록뿐이 아니기 때문. 당장 실록에 실린 사실들만 보아도 병자호란 당시 김류 부자가 어떤 병크를 저질렀는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어한명의 강도일기에 기록된 김경징의 모습 역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어한명은 당대의 조정 신료들 누구도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일개 지방관에 불과했다. 공서니 청서니 하는 정치 싸움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김류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전부 반대파의 악의적인 왜곡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흑백논리에 매몰된 행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