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1. 개요
2. 반정의 시작
3. 반정의 진행
4. 반정의 영향
5. 인조반정을 다룬 미디어들
6. 관련 문서


1. 개요


'''仁祖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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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雲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玳事令)을 내렸다."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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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반정(쿠데타)의 하나로,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2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 및 추대한 사건이다. 성공 가능성도 절대적으로 낮았는데도 실행됐고, 결과적으로 한 붕당의 씨를 말려버리고 한 붕당의 절대 우위를 만들었고, 민생이라는 명분에 집권의 결과물이 따르지 못한 복잡미묘한 쿠데타이다.
진짜로 막장을 달린 연산군을 내버려뒀다가는 나라가 망할 거라고 대신들이 확신하고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능양군의 개인적 원한과 당리당략적인 이해 요소도 있었다.[1] 능양군은 중종처럼 반정 후 대신들의 추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적극적으로 복수의 칼을 갈며 반정을 '''주도했다.''' 아버지가 책봉 의사가 있기도 했던 신성군의 동생이였기에 정치적으로 반정의 명분을 얻기 쉬웠던 것.[2]
연산군 때는 내각을 구성하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정파도 이를 순순히 응낙했다. 반면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지지 기반인 대북 전체가 타 정파의 공공의 적이 된 판이라 이들 전부를 타깃으로 삼았고, 상당수 북인을 제거했다. 물론 100% 전멸한 것은 아니지만 대북 계열은 '학맥'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제거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파로서는 완전히 궤멸(소멸). 적어도 기축옥사와 계축옥사는 물론이고 후대 숙종 대의 환국이 한쪽 붕당이 실각하는 수준에서 끝난데 비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대북, 더 나아가서 북인 자체를 역적 취급해 북인 세력의 일가친척까지 모두 씨를 말렸기에 인조반정이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된다.[3]

2. 반정의 시작


광해군은 분명 민생에 있어서는 혼군(混君)이었다. 궁궐 공사를 위한 뇌물 상납액의 많고 적음이나 징세관인 조도사들에 대한 협조 여부로 지방관과 변방 장수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등, 한 나라의 국왕이 수탈을 부추기는 막장짓을 하였다. 지나친 궁궐 공사와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 여름을 기점으로 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4]
궁궐 공사 재원 마련을 위해 전국에 영건 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는데 영건 도감 자체가 왕의 지대한 비호 아래 부패하고 권력 기구화하여 정해진 수량(1개 도에서 50필~100필 가량)에다 방납가를 적용,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기에 관료들이 광해군에게 조도사의 불법 행위를 고발한다. 그러자 왕은 조도사들이 취한 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서 취한 게 아니라는 궤변으로 지방 수령의 탄원을 무시하고 조도사의 수탈을 지원하는 막장짓을 했다. 조도사의 수탈
반정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620년 광해군의 옥사에 대한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불만 세력이 조금씩 등장한다. 이 중에서 능양군의 외삼촌인 구굉은 친구 이서와 친척인 구인후, 신경진, 최명길 등을 은밀히 포섭해 거사를 모의했다. 구굉은 그 후 많은 병력을 수하에 둔 장만을 끌어들여 거사를 행하려 했으나 장만은 위험하다고 여겨 구굉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결국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처음 시작은 구굉, 이서 등이 주도했으나, 반정에 실질적인 공을 세운 주도자는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으로 이들은 반정 성공 후 모두 반정공신(反正公臣) 목록에 올랐다.
반정 직전 평산 부사였던 이귀는 호랑이 한마리를 잡아 그 가죽을 광해군에게 진상한 뒤, 이렇게 주청한다. 즉 호환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나 경계 지역을 넘어서 쫓을 수 없다. 그러니 착호갑사(호랑이 사냥을 위한 특수 부대)를 경기, 황해 일대에도 파견 가능하게 해주십사고. 광해가 이를 허락하자 사전에 모의한 장단 부사 이서의 군대와 합류해 이 병력이 반정 당일 주력이 된다. 이 와중에 이귀가 작당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이귀는 무고하다는 상소를 올리며 역으로 고변자와 대질 심문하자고 버텼다. 대북 일당이 이귀의 탄핵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사했다.
반정 실행 직전, 이이반이 배신해 김신국박승종에게 반정 사실을 일러바쳤다. 하지만 연이은 고변으로 감각이 무뎌진 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에 빠져 그 대처를 소홀히 했다.[5] 또 박승종 등 다른 관원들도 뒤늦게 대책을 강구하던 중에, 반정군이 궁중에 들어와 인조반정이 성공하였다.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은 1623년 음력 3월 12일 밤,[6] 홍제원에서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이귀를 호위 대장으로 삼았다.

3. 반정의 진행


능양군의 600명~700명의 병력을 필두로 장단의 이서군, 이천의 이중로 군이 속속 합류했다. 그러나 반정 직전 포섭한 이이반[7]이라는 인물이 어찌된 셈인지 내막을 고변해 반정 세력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고 특히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가 집에 틀어막혀 두문불출하자 이에 급한대로 무관인 이괄을 대장으로 창의문으로 진군했다.[8] 게다가 이미 이들과 내통한 훈련대장 이흥립(박승종의 사돈)이 창의문을 내어주어 별다른 저항 없이 궁궐을 접수했다.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 갔고 반정이 성공했다고 느낄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반정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반정이 성공하자, 서궁에 유폐 중이던 인목대비는 혹시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가 아닌가 싶어 궐문을 걸어 잠갔다. 반정의 수뇌부들이 와서 "광해군을 폐했으니 문을 열라." 하고 청했음에도 무시했으나 능양군이 직접 와서 설명하고 나서야 믿고 "내가 이 날을 보기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나갔구나!"라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반정 세력을 지지하여 명분을 실어준다. 광해군은 야밤의 기습에 제대로 대처해 볼 겨를조차 없이 궁궐을 탈출해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으나, 얼마안가 밀고자 때문에 붙잡혔고, 결국 폐위된 뒤 유배되었다.
옥새를 내리기 전에 인목대비가 '이혼(광해군)과 이지(세자)의 목을 베어 살점을 씹기 전에는 책봉이고 나발이고 없다!'라고 버텨서 잠시 소동이 있었으나, 애시당초 능양군 일행은 대비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반정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하들이 임금을 폐한 예는 있어도 주륙(住戮)한 예는 없다고 잘라 말했고 '그러면 이이첨, 유희분 그 작자들이라도 내 손으로 처단해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했으나 즉위 후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권력이 없던 인목대비는 결국 옥새를 그냥 내려준다.[9]

4. 반정의 영향


반정 이후 조치는 좀 과격할지언정 상식선에서 진행되긴 했다. 그 다음 처리가 개판이라 그렇지.
일단 당시 수순이 으레 그렇듯, 타겟인 정인홍,[10] 이이첨, 이위경, 한찬남, 백대형, 정조, 윤인 등 폐모론에 적극적이었던 대북의 핵심 요인 대부분이 사형당했고 200여 명에 달하는 그 추종자도 유배에 처해졌다. 소북의 경우에는 이귀 등이 폐모론에도 반대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의한 상황을 참작하여 가벼이 처분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가 강경하게 처형할 것을 주장하여[11] 유희분과 그의 아우 유희발을 비롯하여 소북의 수장들이 처형당했고[12] 소북은 대북과 사이좋게 역사에서 퇴장하고 만다.[13]
한편 광해군의 부인 류씨와 세자 이지 부부 등 가족들 또한 폐서인되어 유배에 처해졌으며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물론 아무 이유 없이 죽여버린 건 아니고, 세자 이지가 유배지를 탈출하려다가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세자 내외는 이로 인해 자결하였으며, 류씨는 화병으로 죽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명분 따져서 광해군은 죽이지 않으려고 인조가 나름 노력(?)을 한 덕택에 천수를 누리긴 했다.[14][15]
또한 반정의 주역인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16]을 위시로 한 사대장과 최명길, 장유, 심기원, 이시백, 이시방,[17] 김자점 등 33명은 정사공신으로 신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고 마침내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반정을 방조했던 남인들도 은근히 떡고물을 얻어먹게 되었다(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公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초기 명나라는 이를 그닥 환영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뭘 잘못했기에 폐위됐냐'''라는 비난[18]과 '''왜군을 끌어들여 광해군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고. 나중에 모문룡의 추천으로 22개월만에 명의 승인을 얻었고, 때문에 이후 모문룡이 가도에 눌러앉아 깽판치는 걸 제대로 억제하지 못해 고생했다. 청의 침공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가도의 모문룡이다. 이괄의 난 당시 '''이괄에게 더 호의적이어서''' 조정에서 모문룡을 설득하는 데 비상이 걸렸던 적도 있다. 정충신이 이괄이 가도와 손을 잡으면 필승이라고 추정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괄은 전격전을 선호했다.
민생도 획기적으로 나아진 것이 아니란 점에서 중종반정 때와 다르지 않았다. 거대한 궁궐 공사는 중단되고, 세금이 덜어지면서 민생은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모든 것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던 것.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 역시 북인 정권 실세의 재물 분배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북인들이 타던 말(가마)을 타고 북인 살던 집에서 떵떵거린다. 니들이 걔네와 다른게 뭐냐"라는 식의 비방이 많이 나올 정도였다. 또한 기찰(감시와 검문)을 자주하여 무고한 백성이 졸지에 반역자로 몰려 죽는 일이 많아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이 쉽게 한양을 접수할 정도로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인조반정의 핵심 공신들 중에 후에 몰락한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반역을 저지른 경우(이흥립, 이괄, 심기원)이 있었다. 기세등등했던 이귀는 이후 10년 동안 왕의 총애를 못 입다가, 그나마 막판에 왕의 정원 대원군의 추숭[19]에 찬성해 신임을 얻었지만 그 1년 뒤 사망하고[20] 김류는 처음엔 이귀와 대비되어 일찍이 정승에도 올랐지만[21] 추숭과 강빈 사사에 반대해 왕의 노여움을 샀고 아들의 사형을 청하는 신하들의 행보에까지 합류해야 했다.[22][23] 김자점은 병자호란 때의 막장 행보에도 불구하고 인조 말년에 효종이 세자가 되는 것과 강빈 사사에 찬성해 권세를 누리나 효종 때 산당에 의해 힘을 잃고 결국 '김자점의 옥사'로 인해 아들들과 함께 역률이 적용되어 거열형을 받는다. 심기원 또한 인조 때 왕이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잘못 돌아간다며 세자를 옹립하려다가 포기하고 회은군을 세우려다가 걸려서 복주된다. 최명길 또한 두번의 호란으로 척화파에게 공격받고 횡의 문제로 인해 청나라의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24]
구굉, 구인후, 이서, 신경진은 무신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권세가 덜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 반정 이후 서인계 무장은 훗날 5군영이 되는 군벌을 조직해 실권을 행사했다. 특히 구씨 일가는 이후로도 정조 대 구선복의 몰락까지 계속 무신 명문가로 대대로 영화를 누렸다.[25] 구굉은 능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판의금부사, 오위 도총관, 5군영의 대장을 역임했다. 구인후는 구굉 생전에는 반정 현장에 있던 구굉만 못했지만 심기원의 옥사 이후로 능천 부원군에 좌의정까지 오른다(시호는 충무공(!)으로, 강빈을 두둔했음에도 효종에게 잠깐 짤렸다가 복권된 게 함정). 신경진은 훈련대장과 각 판서에 삼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효령대군의 후손 이서 역시 완풍군에 봉작되었다.
다만, 인조 및 서인 측이 반청을 표방했기에 정묘호란병자호란을 얻어맞으며 금 멸망 이래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여진족에게 다시 사대하게 되었으며, 한국 사상 마지막으로 왕이 항복하는 삼전도의 굴욕이 일어나게 된다.

5. 인조반정을 다룬 미디어들


조선 시대의 다른 세 쿠데타인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 반정에 비해 묘하게 현대 매체에서 덜 다뤄지는 사건이다. 인조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인조 치세 자체가 치욕스러운 시대라는 대중적 인식도 있고 그나마 병자호란과 이후의 인조 치세 후반기가 주된 배경이 되는 편.

6. 관련 문서



[1] 왕기가 흐른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정원군이 저택을 강제로 빼앗기면서 집이 헐린 뒤 경희궁으로 지어졌으며 동생인 능창군은 모함으로 인해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당했다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아버지 정원군도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다만 정원군은 인망이 그렇게 썩 좋지 않았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고 세자 후보 중 하나였던 신성군 (인빈 김씨 소생)의 동복 아우인 정원군의 장남이였고 유능해서 제거당한 능창군의 친형이었기 때문.[2] 또한 인조의 장인은 남인계인 한준겸이었던데다 남인 계열 또한 광해군 시기 대북의 전횡에 갈수록 정계에서 배제되고 있었기에(임란 극복의 일등 공신이자 남인의 수장이였던 류성룡을 쫓아낸 게 북인의 수장인 정인홍이며, 류성룡 뒤를 이은 이원익 또한 결국 밀려났다) 이원익이 암묵적 찬성을 했기에 남인의 지지도 얻었다.[3] 다만 북인 중에서도 특히 대북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들이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에서 싹쓸이되었지만 소북이나 경기 일대의 대북 학맥은 주류학파가 된 서인과 남인에 비교할 수 없어도 살아 있었다. 오히려 북인 계열들은 이후 남인에 통합되어 활동하였다.[4] 광해군 14년 (1622년) 10월 전라도 나주 백성들이 목사 유석증의 유임을 위해 쌀 1000석을 바치거나 함평 백성들이 현감 이홍망의 재부임을 위해 쌀 300석을 바친 것이 그 사례다. 유석증은 임지에서 근신하면서 잘 다스렸고, 이홍망도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백성들의 마음이 무척 감동적이다"면서 감탄하고 있다(...). 그러니까 청백리 목사와 현감의 가격이 각각 쌀 1000석 · 300석이라면, 백성들이 돈을 바치고 그들의 수령을 스스로 구입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실사례[5] 이귀와 김자점은 사돈 관계였다. 정확히는 이귀의 서녀와 김자점의 동생이 결혼했는데 김자점의 동생은 몸이 약해 일찍 죽고 과부가 된 이귀의 딸은 궁중에 무수리로 들어 갔다가 김개시의 총애를 받는다. 김자점은 그녀를 사전에 포섭해 김개시한테 엄청난 뇌물을 먹인 덕에 광해군의 눈귀를 막는 공을 세웠다.[6] 어느 야사에는 이렇게 나온다. 원래 거사 일은 열흘 뒤인 3월 22일이었는데 마침 당대의 점술 대가인 김치에게 반정의 성공 여부를 점치러 간 심기원은 그날 거사하면 실패할 것이라는 점괘를 듣고 만다. 이에 놀란 심기원이 방도를 묻자 김치는 열흘 앞당겨 12일에 거사하면 비록 고변자가 있어 초반에는 고생할지라도 결국에는 성공한다는 점괘를 주었고 반정 세력들은 반신반의하며 12일을 거사 날짜로 잡았다. 한편 김치는 원래 이이첨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였는데 점괘를 봐준 공로로 목숨을 부지하고 승진한다.[7] 참고로 이 사람은 단명한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다시 말해 왕가의 종실 출신이다. 결국 고변한 대가로 반정 직후 처형된다.[8] 고변이 들어오자 김류는 겁을 먹고 집에 숨어있었다. 이괄을 임시 대장으로 삼고 심기원과 원두표가 부리나케 달려가 김류를 가까스로 끌고 왔다.[9] 물론 그 후에 이이첨, 유희분은 인목대비 손이 아니지만 처단됐다(하지만 이마저도 유희분은 서인들이 살려주자고 했지만 인조가 걍 죽여버렸다). 특히 이이첨은 아들들까지 목이 달아났다.[10] 당시 80 넘은 나이였는데 80 넘은 나이로 처형까지 당한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사사로 끝난다.[11]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인조(당시는 능양군)가 가산을 털어 유희분에게 뇌물로 바치면서 동생을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유희분은 돈만 받아먹고는 들은체 만체 했다고 한다. 결국 능창군은 역모죄로 사사당하고, 후일 인조는 그 원한으로 유희분을 죽였다고 한다.[12] 소북의 또다른 수장 박승종은 지방으로 도망쳐 반격을 꾀했으나 한성이 이미 장악된 것을 알고는 포기하고 자결했다.[13] 물론 다 그런건 아니었다. 김신국처럼 소북의 대표적 역할을 했으면서도 중용된 경우도 있다.[14] 말이 좋아서 천수지 제주도로 같이 딸려온 여종에게까지 영감탱이 드립을 들으며 개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광해군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집은 나중에 하멜 일행이 잠깐 머무르게 된다.[15] 다만 인조는 '''광해군 시절의 궁녀를 광해군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보내준다!'''[16]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아들이다. 공교롭게도 또다른 주모자인 김류는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의 부장이었던 김여물의 아들. 정작 이서와 더불어 무력을 준비했고 이귀나 김류보다도 먼저 반정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지만 무인이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 안습.[17] 이 두 사람은 이귀의 아들들로 현종 때까지 살아 대동법 관철 등에 기여했다. 또한 최명길~김자점은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친구 관계다. 그 스승은 이항복.[18] 명나라는 광해군 정권을 '''명에 협조적인 정권'''으로 보고 인조반정 직전에 조선군을 단독으로 움직여 청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광해군 거의 혼자만 중립을 주장할 뿐 정권 구성원(대북. 대북은 결코 사대부 대다수가 아니다)은 거의가 친명 반청주의자들인데다, '''명의 요구에 따라 대규모 파병한 전례까지 있으니''' 대외 정책이 불확실한 인조 정권보다 오히려 광해군 정권이 더 친명에 가깝다고 판단한 것. 실제로 인조 정권은 명의 청에 대한 공격 요구에 대해선 어떻게든 얼버무리곤 했으며, 근래 학계에서는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인조 정권의 친명 반청적 행보는 전형적인 내부용 정책이고 실제로는 광해군의 그것을 어느 정도는 따라간게 아닌가 라는 의견이 대세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광해군은 선조의 그것을 이어받았고 다시 인조 정권이 이를 계승했다고 본다. 그러나 정충신 문서나 광해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인조는 그것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외교를 했을 뿐이다. 당장 인조 본인도 제 자리에 두기만 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던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19] 인조는 인목대비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인조가 자신은 '''정원군의 아들'''로서 즉위한 것으로 하기 위하여 '''원종'''이라는 묘호까지 올렸다. 대원군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친부에게 올리던 것이니 상관없지만, 묘호는 왕이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앞서 이야기한대로 정원군은 왕이 될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조도 자신의 부친을 대원군으로 추숭한 것에서 그쳤다. 이는 유학적으로 봤을 때에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기에 대다수의 관료들이 반대하였는데, 인조는 이를 밀어붙였고, 결국 통과시켰다. 본인은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차자인 효종이 뒤를 잊게 되면서 발생하는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유학, 특히 성리학은 눈으로 보이는 '''禮'''를 바로 세우는데에 아주 민감한데, 모범이 되어야할 왕실이 몇번이나 이를 어겼다. 여기에 조선 예학의 중심을 자처하던 우암 송자의 존재는 상황을 헬게이트로 가게 만들 요소였다).[20] 그래도 이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의 아들 이시백, 이시방은 왕의 총애를 꽤 받아서, 인조가 죽으며 효종에게 김자점과 더불어 잘 예우하라는 분부를 내린 게 이시백이었다. 효종 때도 꽤 나아가기도 했고 명문가가 되기도 했다. 특히 이시백의 경우 인조가 죽으면서 효종에게 잘 예우하라는 두 사람중 하나이기도 했다(다른 하나는 김자점, 하지만 김자점은 자폭을 터뜨려 거열형을 당했다).[21] 이귀는 한평생 앉아보지 못했다.[22] 호란 당시 김경징은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강도검찰사가 되었고, 동시에 왕족 일가를 지키는 임무까지 함께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강화도의 방어태세를 살피는 본인의 역할을 망각한 채 안에 틀어박혀 놀기 바빴고, 실권자인 강도유수 장신과 병권을 두고 다투는 등 내분까지 벌였다. 게다가 청군이 바다를 건너 상륙하자, 모두를 내버리고 혼자 달아나버리기까지 했다. 장신 또한 강화도의 병력을 총지휘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을 마주하자 머뭇거리다가 그냥 도망쳐버렸다.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김경징과 장신은 나란히 사형당하게 된다.[23] 김류의 손자이자 김경징의 아들인 김진표 역시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자, 가족들을 모두 내버리고 혼자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연려실기술에는 김진표가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오랑캐에게 붙잡히면 안되니 절개를 지키라며 자살을 강요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연려실기술 자체가 야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해당 기록에 '사람들이 김경징에 대한 원한이 깊어, 그 집안 여인들의 위신까지 깎아내린 것으로 의심된다.'는 지적도 함께 기술되어 있기 때문. 물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시점에서 이미 패륜아나 다름없다.[24] 그나마 최명길은 마지막까지 불충한 짓도 안하고 행보도 좋아서 후대에 매우 고평가받는 케이스. 오죽하면 명분론에 입각해서 최명길 까기에 바쁜 사관들은 최명길이 나라를 구한 것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고 극찬한다. 그를 까기 바쁜 사관들조차 그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긴 것.[25] 구굉, 구인후는 인조의 외척이었다. 인천 왕후로 추존 된 인조의 어머니가 구씨라 구굉이 인조의 외삼촌, 구인후가 인조의 외사촌이었다. 그리고 인조의 외할머니가 신립의 여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