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1870)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태원은 1863년 9월 15일 전라남도 나주군 문평면 갈마지들마을에서 부친 김노학(金魯學)과 모친 장수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사육신과 함께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벼슬을 한 조상은 없으며, 부친 대에 가세가 더욱 기울어 일시적으로 화순군 동복면에 살다가 나주의 갈마지 마을로 옮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며,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신과 비슷한 포부를 지닌 사람들과 어울렸다. 때로는 미천한 신분의 백정들과 같이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또한 자질구레한 예절이나 성리학적 명분 등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24세 때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곧바로 동학에 가담했지만 농민군이 약탈을 일삼자 이에 실망하여 잠시 수원에 옮겨살다가 귀향했다. 그 후 수원에서 관찰사에게 아전들의 탐학을 고발하는 등 향리에서 주민들을 위해 노력하던 그는 1907년 6월 기삼연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전 참봉 김돈(金燉)과 의논하여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여 선봉장이 되었다. 9월 9일에는 고창의 일본군을 무찔렀고, 그 후에는 의병의 세를 키우기 위해 기삼연을 떠나 모병 활동을 전개하다 1907년 10월 4일 신덕순(申德淳)과 정읍 내장사에서 만나서 창의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이후 신덕순을 도독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이 되었으며, 아우 김율은 호군이 되었다. 그는 수백명의 의병대를 이끌고 광주에 격문을 띄우고 군사를 거느려 순창 회문산으로 가서 무기를 감추어두었던 곳을 찾아갔으나 그 무기들은 이미 일본군에게 빼앗긴 뒤였다. 이에 다시 회문산으로 회군했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고, 신덕순은 이 전투에서 체포되어 정읍으로 압송되었고, 의병대는 일시 무너졌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숨어지내던 김태원은 12월에 나주, 함평, 장성, 무안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수차례 토벌대와 접전을 치렀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 지휘관 천단조장(川端曹長)과 부하를 사살했지만, 그가 이끄는 부대의 피해도 컸다. 이후 기삼연과 합세하여 영광에 있는일본군을 격파하기 위해 먼저 법성포에 불을 질러 큰 성과를 거뒀으며, 이후엔 광주,나주로 옮겼다.
한번은 적장 요시다카 츠사부로우(吉田勝三郞)이 이끄는 기마병에게 쫓기다가 요시다카를 사살하기도 했으며, 기삼연이 1908년 음력 1월 1일 체포된 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는 상복을 입고 토천(土泉) 뒷산에 돌로 성을 쌓아 적병을 유인하여 적장 테츠도 미타(鐵道三田)를 사살하였다. 그 후 그날 밤으로 영광 땅으로 향하였는데, 낭월산(郎月山)에서 적을 만나 도포장 최동학이 죽고 이어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는 이 시기 스스로를 대장으로 칭했고, 군도를 차고 쌍안경을 가지고 다녔는데 동작이 기민하여 신출귀몰해 당시 일본군과 동료 의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1908년 3월 21일 장성군 광곡(廣谷)에서 부하 약 80명을 이끌고 잠복 활동하다가 토벌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암굴에 은거하였다가 밤을 타서 탈출하였으며, 그 후 10여 적병들의 공격을 받았다. 다시 나주 박산촌에서 지병을 치료하다가 적에게 발각되어 광주 어등산으로 이동했지만, 1908년 4월 25일 그곳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