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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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澤榮
1850년(철종 1) ~ 1927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이다.

2. 생애


김택영은 1850년(철종 1) 개성부에서 통사랑(通仕郞) 개성부분감역(開城府分監役)을 지낸 김익복(金益福)과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윤희락(尹禧樂)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김윤영(金潤榮)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김한영(金漢榮)과 김호영(金浩榮)이 있었다.
그는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2등 11위로 급제하였다.# 1894년 편사국주사#s-4[1]가 되었고, 1895년에는 중추원#s-2서기#s-4관 겸 내각 기록국 사적(史蹟) 과장이었지만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런 행적 때문에 김택영은 한국 사학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에서 작성된 서양식 역사서의 번역에 가까웠다는 비판을 받는다. 어느 정도냐면, 당시 김택영이 주역을 맡아서 1905년 제작된 근대식 역사 교과서 역사집략에는 임나일본부설이 고스란히 포함 되어 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중국에 망명, 북경 통주(通州)[2]에 살면서 학문과 문장 수업으로 여생을 보냈다.

[1] 편사국은 갑오개혁 이후 역사를 편집하여 엮는 의정부의 한 국(局)으로, 역할은 말 그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 편사국에는 참의 한 사람, 주사 네 사람을 두었다.[2]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퉁저우(通州)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