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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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5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철종(哲宗), (추존된)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휘는 원범(元範)이었으나 왕이 된 후 변(昪)으로 개명[5] , 자는 도승(道升).
국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낸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를 칭하는 별명은 강화도령이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며 당대 실권자인 안동 김씨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군주로 옹립되었다.
삼정이정청의 설치 등으로 민생을 돌보려는 시도도 했었으나 미약한 권력과 신하의 간섭으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였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6]
2. 생애
2.1. 가족사
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서출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는 적자인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이다. 은언군은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이광이다.
1786년(정조 10년)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철종의 친부인 이광을 비롯해 식구들이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 거기서 은언군은 순조 때 사사당하지만 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무려 40년 넘게 살다가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831년 3남 이원범이 태어난다.
결국 철종은 조선 숙종부터 시작해서 후궁(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 역시 후궁(영빈 이씨)의 아들인 사도세자, 후궁의 아들인 은언군, 그 서자인 전계대원군의 서자인 것이다.[7] 그야말로 방계 중 한미한 혈통이다. 자신은 물론 아버지 대부터 군호조차 받지 못하는 한미한 왕족이라 궁궐에 들어와서 즉위 전날에야 덕완군이라는 군호를 받아보았다.[8] 아버지나 큰형의 군호는 아예 자기가 왕이 된 후 올렸다.
그래도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알량한 방계 종친 신분)으로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9]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린 뒤 한성부 향교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돌아가신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이명[10] 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작은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이원범은 강화도에서 왕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으로 살았다.
2.2. 왕이 된 강화도령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조선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는 헌종의 7촌 재당숙이자 순조의 5촌 조카인 이원범을 왕대비의 자격으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11]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큰형(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이때 철종의 형 이욱은 도망가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의 설득과 주민들의 설득과 이해로 결국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12]
세간에 철종의 즉위와 관련한 오해들이 많이 알려져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 안동 김씨가 헌종과 가까운 왕손들을 제치고 다루기 쉬운 일자무식인 철종을 옹립했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철종이 왕이 된 것은 그가 헌종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효종—현종—숙종까지는 외아들로 이어졌고, 숙종은 3남을 두었으나 영조 빼고는 후사가 없었다. 영조는 두 아들을 두었으나 후손을 남긴 건 사도세자뿐이었다. 사도세자는 무려 5남(정조, 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 은언군)을 낳았으나 그중 3남(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은 후사 없이 사망했고, 정조의 직계는 헌종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남은 가까운 왕족은 오직 은언군의 손자들뿐이었던 것이다. 이원범은 비록 서손이긴 해도 영조 - 사도세자의 진짜 직계 후손이라 남은 왕족 중 헌종과 촌수가 가장 가까웠다.
그런데 당시 살아있던 은언군의 친손자들은 철종 말고도 이복형 이욱, 그리고 사촌형이자 은언군가의 종손인 익평군 이희가 있었다. 종법상으로는 은언군가의 종손 익평군이 가장 서열이 높았다. 그는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고, 이욱 역시 22살의 성인이었다. 그런데 순원왕후는 저들을 제치고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19세의 이원범을 굳이 왕으로 택했고 수렴청정을 행했다.[13] 안동 김씨들이 쉽게 다루기 위해 옹립했다는 추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야사에서 철종 대신 유력한 계승자로 꼽히던 인물로 알려진 이하전이나 이하응의 경우, 생물학적 혈통을 따지면 오히려 이원범보다 더 멀었다. 이하전은 덕흥대원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이 은신군(정조의 이복 동생)의 양자로 들어간 것이지 실제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철종의 사촌이라던 경평군 이세보 역시 실제로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이었다가 철종의 큰아버지 풍계군에게 입적한 경우이고, 그 시기도 철종 즉위 이후였다. 그러니 이하전, 이하응, 이세보는 절대 철종을 제치고 왕이 될 수 없었다.
효종—현종—숙종까지는 외아들로 이어졌고, 숙종은 3남을 두었으나 영조 빼고는 후사가 없었다. 영조는 두 아들을 두었으나 후손을 남긴 건 사도세자뿐이었다. 사도세자는 무려 5남(정조, 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 은언군)을 낳았으나 그중 3남(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은 후사 없이 사망했고, 정조의 직계는 헌종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남은 가까운 왕족은 오직 은언군의 손자들뿐이었던 것이다. 이원범은 비록 서손이긴 해도 영조 - 사도세자의 진짜 직계 후손이라 남은 왕족 중 헌종과 촌수가 가장 가까웠다.
그런데 당시 살아있던 은언군의 친손자들은 철종 말고도 이복형 이욱, 그리고 사촌형이자 은언군가의 종손인 익평군 이희가 있었다. 종법상으로는 은언군가의 종손 익평군이 가장 서열이 높았다. 그는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고, 이욱 역시 22살의 성인이었다. 그런데 순원왕후는 저들을 제치고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19세의 이원범을 굳이 왕으로 택했고 수렴청정을 행했다.[13] 안동 김씨들이 쉽게 다루기 위해 옹립했다는 추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야사에서 철종 대신 유력한 계승자로 꼽히던 인물로 알려진 이하전이나 이하응의 경우, 생물학적 혈통을 따지면 오히려 이원범보다 더 멀었다. 이하전은 덕흥대원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이 은신군(정조의 이복 동생)의 양자로 들어간 것이지 실제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철종의 사촌이라던 경평군 이세보 역시 실제로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이었다가 철종의 큰아버지 풍계군에게 입적한 경우이고, 그 시기도 철종 즉위 이후였다. 그러니 이하전, 이하응, 이세보는 절대 철종을 제치고 왕이 될 수 없었다.
→ 실상을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다. 위에도 나왔듯이 철종의 계승 자체는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는 형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시대의 왕실에서 며느리(신정왕후 조씨)가 시어머니(순원왕후 김씨)에게 뭘 어찌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철종이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이라 순원왕후가 본인의 양자로 들인 것이다. 양자는 아들과 같은 항렬의 일가 친척 중에서 들인다. 위에 언급했듯이 철종은 헌종의 7촌 재당숙이다. 재당숙이면 아저씨 뻘이고, 아저씨 뻘은 당연히 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란 뜻이다. 설령 철종이 헌종과 같은 항렬이거나 아랫 항렬이어서 신정왕후나 효정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손쳐도 왕실의 제일 큰 어른인 순원왕후가 살아있는 이상 수렴청정은 순원왕후가 하는 것이고,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순원왕후가 철종을 양자로 들임에 따라, 철종은 전임 국왕인 헌종의 숙부(아버지의 동생)가 된다.
철종 옹립 배경에 관한 루머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믿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봤듯이 철종의 즉위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 절차와 과정에서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저런 루머가 나돌 정도로 철종 시기 안동 김씨들의 세도가 극에 달했던 것은 사실이다.그리고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이 하나 있었다. 앞서 말했듯, 철종이 헌종의 7촌 재당숙뻘이라서 항렬이 한 세대가 높다는 것이었다.[15] 당시 철종이 즉위할 경우 종묘 제례 때 자신보다 항렬이 하나 낮은 헌종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것은 장유유서의 원칙에 어긋난다. 하지만 가까운 왕손이 없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묻혔으며, 당장 철종의 승계에 항렬 어긋난다고 트집 잡는 사람은 없고 종사의 무궁한 복이라는 언급들만 있다. 대왕대비의 분부에 어찌 태클을 걸겠느냐마는... 순조 이후 세도 정치가 굳건해졌으니 똑부러지기보단 어리버리해서 구워삶기 좋은 왕이 대신들에겐 홍복이었을 것. 그러나 하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철종은 결코 세도가의 대신들이 하자는 대로만 놀아난 어리버리한 왕은 아니었다.
2.3. 임금 철종
자신이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 김씨조차도 또 다시 안동 김씨를 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결국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 철인왕후를 왕비로 삼고 김문근은 국구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철종은 즉위 시점에 이미 19세의 청년이었던 데다가 여러모로 공부한 바도 있었고, 즉위 후 제법 군왕 다운 위엄을 보였기에 수렴청정 3년 차인 1852년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특히 어릴적부터 서민들의 민생고를 직접 눈으로 본 철종은, 초기에는 여러 개혁 정책들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으나 세도 가문들의 반발과 비협조에 부딪혀 대부분이 불발되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순조 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철종은 딱히 제왕학을 교육받지 않아 현실 정치에 어둡고 정통성 면에서도 좀 꿀렸으며, 무엇보다도 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정치적 친위 세력이 부족했기에 국정 장악이 쉽지 않았기에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하였고 결국 민심이 폭발하여, 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 등지에서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임술민란)'라 한다. 이때 조선 조정은 대책은 커녕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의욕을 보인 것은 철종 혼자나 다름없었다. 임술농민봉기가 터졌을 때는 "우리 백성들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를 외치면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제법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나, 안동 김씨와 그들의 나팔수 정원용 등이 "환곡제도가 수백 년을 이어 내려왔는데 이제 와서 없애자니 애석한뎁쇼? 급하게 없앴다가 부작용이 나면 어쩔까요?"라고 반대하며 슬슬 딴죽을 걸었고, 그 사이에 농민 봉기가 대부분 정리되자 "어떻게든 되겠지" 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러한 혼란 와중에 '말세론'이 면면히 퍼졌고, 교주 최제우가 창시하고 만민 평등을 제창한 '동학(東學)'이 등장한다.
그 외에 철종 때 일어난 사건 중 하나로 종계변무 사건이 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에서 태조 이성계를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써놓자 조선에서 이를 고치려 노력한다. 이후 큰 줄기의 일은 선조 때 해결되었으나 뒷일이 철종 대에 다시 불거진 것이다. 즉, 청나라의 어느 이름 없는 학자가 쓴 듣보잡 서적[16] 에 이런 잘못된 내용이 나온다는 것. 때문에 당시 사행사로 중국에 가 있던 윤치수가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반응은 "그런 미미한 서적에 대해선 우리도 몰라요." 그런데 윤치수는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이 책을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철종은 위에서 보듯 길고도 아름다운 시호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책을 윤치수는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부분에서 또 다른 의문을 사기도 한다.
여담으로 중국에 보내는 연행사에 왕족인 경평군 이호를 임명했는데, 이에 대해 숭실대 하정식 교수는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사행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되자 왕족을 직접 보내 정보를 얻어 보려고 노력한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20대 애송이 왕족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세도 정치가들에게 쉬운 일이었으며 오히려 경평군을 통해 중국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만 가지게 되었다. 이후 경평군은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유배된다.[17]
2.4. 철종의 개혁 시도
당시 철종은 강화도에서 살았던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백성을 수탈하던 삼정 문란을 저지하려고 삼정이정청이라는 개혁 기관을 설치하며 세도가의 횡포와 삼정 문란을 저지하려 했지만 3개월만에 순원 왕후와 세도가의 반발과 압박으로 인해 폐지하게 된다. 사실 철종은 나름대로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개혁해보려는 의지도 충분했으나, 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세력이 너무 부족했다.
2.5. 이른 죽음
나중에 가면 철종은 자신이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 세력들의 꼭두각시 허수아비 왕으로 실권이 없어 스스로 왕다운 왕이 아니라는 허탈감과 복잡한 궁중 예법에 질려버렸고,[18] 여색과 술로 시간을 때운다. 그러다보니 농사로 튼튼했던 체력이 급속히 무너져버렸고 재위 말기에는 잔병치레로 골골하다가[19] 결국 1863년 33세라는 한창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에 안동 김씨는 혼란에 빠졌으며, '''모두 후계 문제에 정신이 팔려 왕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철종은 중전과 여러 후궁들 사이에서 5남 6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어릴 적에 죽었고, 철종 승하 당시에는 후궁 숙의 범씨에게서 낳은 영혜옹주만이 생존해 있었다. 영혜옹주마저 훗날 개화파의 거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박영효와 혼인했지만, 혼인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1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철종의 승하로 조선의 왕통은 다시 단절되었다. 그래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차남 명복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는데, 이가 바로 고종이다. 사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철종과는 핏줄상 남과 다를 바 없다. 이 둘은 인조에서 갈라져 나오는데 촌수로 무려 17촌[20] 이다. 최초로 방계 승통한 선조가 정통성 문제로 불안했지만[21] 그도 선왕이었던 명종과 3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22] 앞에 선조의 예도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정통성 문제는 더 심해졌다. 효종은 적자임에도 동복형제이자 장자인 소현세자가 있는 둘째여서 고통을 많이 받았다. 이를 송시열과 송준길을 위시한 산당에게 인정받고자 재위기간 대부분을 보냈으며, 승하 이후에는 예송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철종은 대한제국 개창 이전에 승하한 마지막 조선 임금이어서 그런지 마지막 타이틀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데, 먼저 전통적 방식으로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철종의 실록이 마지막이다. 그 뒤의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경술국치 후에 일제가 편찬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철종실록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은 편에 속하는데,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정치가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죄다 빼버려서 내용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철종 12년 3월 27일 ~ 4월 23일의 기사는 2쪽 분량일 정도이다. 이어지는 5월 한달치 기사는 1쪽도 안 된다. 사실 철종 실록 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기의 실록인 순조 실록과 헌종 실록도 이전까지(태조 ~ 정조)의 실록에 비해 기록이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시절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승정원일기가 완역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의 황제로부터 시호를 추증받은 마지막 조선의 왕이기도 하다. 철종이 청나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는 충경(忠敬)인데, 공교롭게도 수백년 전 고려의 원종이 원나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와 같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의 예릉(睿陵)으로 철인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인데, 실록, 중국 측으로부터 받은 시호와 마찬가지로 철종의 예릉 역시 전통적인 조선 왕릉 형태로 조성된 마지막 왕릉이다.
3. 평가
여러모로 명암이 존재하는 군주. 무너져가는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나 선대 왕인 헌종이 외가나 처가 등을 통해 정치적인 기반을 가지고 세도가문을 견제해가며 나름 왕권을 구축했던 것에 비해 방계왕족 출신인 철종의 개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정통성이 약했기 때문에 양모인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오히려 이만한 핸디캡을 안고 삼정이정청 설치 등의 성과를 낸 것만도 역량이 아주 없었다기에는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선대인 헌종에 비해 정치적인 역량은 많이 뒤쳐졌다고 볼 수 있다. 세도정치라고는 하지만 세도가문들이 고려시대 무신정권도 아니고 국왕의 역량에 따라 충분히 통제할 수도 있었다는게 중론이기 때문이다. 헌종 때에는 국왕이 세도가문끼리 경쟁구도를 만들어 세도가들을 국왕이 어느 정도 제어하는 모습이 있었으나 철종 때에는 이러한 모습 없이 사실상 안동 김씨가 독주하는 모습이 만들어졌던 것도 그만큼 역량 면에서 철종이 선대보다 뒤떨어졌던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23] 더군다나 집권 후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문란한 생활을 하며 정치에서 손을 땠던 것은 분명 명군이 아닌 암군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24]
종합해보면 왕으로써의 역량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나 정조 말년부터 터져나온 조선사회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수습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본인이 죽고 난 이후 어느 정도 역량있는 인물이 나타나 이전의 폐단들을 어느 정도 수습해서 왕조의 수명이 조금은 늘어났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4. 여담
4.1. 일자무식의 왕?
강화도에서 엉겁결에 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빈농으로서 산 전력 때문인지, 강화도에서 자란 까막눈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출생지는 수도 한성이며,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1844년). 1849년에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강화도령'이라 하기엔 억지스러운 면도 약간 있긴 하다.[25]
또 조선왕조실록의 행장에 의하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년에 통감 2권과 소학 1권, 2권을 읽었다"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천자문 이야기는 행장에 기록된 것이라 4살에 배웠다는 것은 띄워주기였다 해도 즉위 시점에서 이미 공부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천자문, 통감, 소학은 모두 초급 교육에나 쓰이던 교재들이라 19살 기준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고, 아버지의 사망이나 강화도로 유배되는 등의 사정으로 그 이상 나가지 못한 것은 물론 그나마 어렸을 때 배웠던 것도 많이 잊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고 한다. 결국, 흔히 알려진 대로 일자무식은 아니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에서 중학교 중퇴 후 공부를 꽤 오래 쉬다가 고3 나이 정도에 다시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수준이니 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로서는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족 종친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성종 때의 '''구성군 사건''' 이후로 직계 왕족의 5대손까지는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족 종친들은 학업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26] 특히 왕위에 가까운 왕족일수록 영특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찍히는 일[27] 은 삼가야 했을 테니 더더욱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28]
강화도 시절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는데, 위에서 인용된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민간에 알려진 바로는 친척 집에서 종 노릇도 해봤고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한다. 다만 최양업 신부가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카더라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긴 곤란하다.[29] 당시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소문의 신빙성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실제로 귀양 제도에 대해서 알면 말이 안 되는 것으로, 지방 관청에서 관리하고 식량을 대주고 동향을 보고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게다가 철종은 친척이 극히 귀해 후에 외가 친척을 사칭한 인간도 생겼을 정도인데 무슨 친척 집에서 일한단 말인가. 다만, 식량을 대주는 대신 일을 시키거나 혹은 제대로 식량을 대주지 않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많았다. 마치 고구려의 미천왕과 인생 역전이 비슷한데 어쩌면 미천왕의 얘기에서 차용했을 수도 있다.현재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렸고, 자기 친척 집의 종 노릇을 하였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하였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전 임금님이 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 왕조의 창업 이래 5백 년 역사상 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왕에게 영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물론 당시 조선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철종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 할 수 있다. 신빙성과는 별개로 나름 의미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 시절은 당대 백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는지, 덕지덕지 살이 붙어서 과장된 루머가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4.2. 임금님의 첫사랑[30]
로맨티시스트라는 얘기가 있는데, 강화도 시절 ‘양순’이란 이름의 하층 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천한 신분의 양순은 궁에 들어간들 무수리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 바로 철종의 후궁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의 야사까지도 있다.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보다 못한 조선 왕실이,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는 것. 나중에 이를 안 철종은 비탄에 잠겨 국사도 멀리한 채 황음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독살인지 어떤지는 얘기마다 다르지만 일찍 죽었다는건 공통적으로 전해진다.
적어도 독살 부분은 조선 왕실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왕은 초월적인 존재라,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정식으로 후궁으로 삼을 권한이 분명히 있었다.''' 설령 신분이 미천해 바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 치더라도, 궁녀로 삼은 뒤 승은을 내리면 된다. 당장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실제로 조선 초기의 일이기는 하나 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나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으로 정1품 빈까지 되었다. 경종 - 영조 시대 이후로 법적으로는 궁녀는 노비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31] 위에서 인용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종의 강화도 시절에 대한 과장된 소문은 이미 당대에도 돌아다녔다는 것을 감안하자.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천한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철종이 왕이 된 뒤 정신이 없어서 못 챙기고 있다가 부르려고 보니 병에 걸려 이미 죽었다거나, 역적의 후손이라 부를 수 없다든가 등등 그녀가 입궁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 양순이란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려서 왕이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아마도 이미 죽었거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왕이라도 부를 수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거기에 당시 왕의 후계자가 귀해져서 강화도에서 농사 짓던 촌놈까지 왕위에 앉힐 정도로 막장으로 치달았던 조선 후기는 더이상 찬 밥 더운 밥 가릴 시점도 아니었다, 왕이 마음에 들어 해 후사를 볼 가능성이 높은 여성이라면, 노비고 나발이고 상관없고 역적 후손이면 족보 세탁이라도 해서 당장 데려오라고 날뛸 법한 시점이었는데, 그럼에도 못 데려온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거나 이야기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봐야 겠다. 당장에 선대 왕인 헌종의 7촌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먼 촌수인 철종이 왕이 된 걸 상기해 보자. 특히 신분을 감안해보면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천한 신분이기에 결국 안동 김씨와 맞서기에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후궁의 자식들은 모두 태어나는 즉시 왕비의 자식으로 입적된다. 신분상 모든 후궁의 자식들은 왕비의 자식이 되는 셈. 그런 이유로 수렴청정 또한 후궁은 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여기에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웬만하면 (당연하겠지만)적자가 세자가 되고 세자가 왕이 된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양순이 후궁이 되어 철종의 아들을 낳는다 한들 왕비가 아들 하나 낳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물론 왕의 나이가 많아지는데 왕비에게서 아들이 없으면 그 아들이 세자에 책봉될테고 한번 세자로 책봉되면 죽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하지만 왕위를 계승해도 역시나 천한 여자의 자식이란 이유 때문에 정치력과 능력이 비범하지 않은 이상은[32] 안동 김씨에게 휘둘린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즉, 안동 김씨의 권세를 몰아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왕이 작정하고 몰아내려고 한다면야 모르겠지만 그럴려면 왕에게 그럴 만한 결단력과 의지 그리고 정치력과 배짱이 필요할텐데 그러기가 어디 쉽나... 헌종의 전례가 있으니만큼 유난증을 떨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극단적인 수를 쓸 정도까지는 아니란 것.
또한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때 먹던 모주(막걸리)를 너무 그리워해,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친정에 부탁해 구해 올렸다는 야사가 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도 나온다.
4.3. 철종 외가 사칭 사건
경기도 파주 근방에 염종수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새 임금 철종의 외가 집안이 용담(龍潭) 염(廉)씨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보고 용담(龍潭) 염씨(廉氏)는 자신의 본관인 파주(坡州) 염씨(廉氏)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따지면 상감마마와 자신은 한 뿌리가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철종의 외할아버지인 염성화(廉成化)의 가계(家系)가 자신의 가계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족보를 위조하는 엄청난 짓을 꾸민 다음 본인이 철종의 외숙부가 된다고 거짓 상소를 올렸다. 친척 하나 없어 항상 외로움을 느끼던 철종은 염종수 부자를 대궐로 불러와 잘 대접해고 벼슬도 주었다. 그렇게 잘 살게 된 염종수는 완전범죄를 꾸미기 위해 철종(哲宗)의 외할아버지 묘 앞에 비석을 세운 다음 거기에다 원래의 용담(龍潭)이라는 글자 대신에 자신의 본관인 파주(坡州)라고 새겨 넣는 짓까지 벌였으며, 그 뒤 본인의 권세를 이용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나중에 강화도의 파주 염씨 성을 가진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廉輔吉)이 그 사실을 밝혀내면서 결국 염종수는 기군망상죄로 목이 달아났고, 그의 아들은 노비로 전락하였다. 물론 외할아버지의 묘도 다시 용담으로 복귀되었다. 철종의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은 실제로 강화도에서 하인으로 살고 있었다. 염보길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무서워서 차라리 하인으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후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5. 어진
맨 왼쪽의 어진은 1861년 당시 31세였던 철종이 구군복 차림으로 그려진 어진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 중에서도 유일한 구군복 어진이라 예술성이나 역사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그림이다. 이 어진은 2006년 보물 제1492호로 지정됐으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철종의 나이 31세 때인 1861년에 어진화사가 시행되었는데, 이후 20세기에 들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서울에 있던 수많은 왕실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어진들도 함께 옮겨 졌다. 그리고 1953년 전쟁이 끝났음에도 이 문화재들을 서울로 옮기거나 하는 등의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부산에 계속 놔두고 있었다. 하지만 1954년 큰 불이 나면서 어진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고#,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철종의 어진은 화재로 인해 반 이상이 타버렸지만 순조#s-3, 효명세자#s-4 등 얼굴 부분까지 타면서 복원이 불가능하게 된 다른 왕들보다는 그나마 다행인 편. 다만 입 부분이 타 버렸다.
맨 오른쪽의 어진은 구군복 어진과 동시에 도사한 것이어서 강사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구군복본과 거의 차이가 없다. 가운데 어진의 경우 1852년 당시 22세였던 철종의 모습을 그린 면복본 어진이다. 비록 표제 부분이 중간중간 타버렸지만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 이 어진이 철종의 어진임을 확인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구군복 어진의 경우 진작부터 공개되어왔지만 나머지 두 어진의 경우 그 처참한 훼손상태가 심각해도 '''너무 심각하다 보니''' 남아있는 부분이나마 보존 처리만 마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수장고에 계속 보관되어왔다가 2019년 하반기에서야 뒤늦게 공개되었다.
어찌보면 초대 - 그 증손주 - 본인의 고조부[33] 와 함께 가장 뚜렷한 외모의 어진을 남기게 된 임금.[34]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남아있는 간략한 철종의 초상화가 있다. 위의 어진과 비교해 보자. 얼굴을 실제 어진과 자세하게 비교하자면, 과도하게 치켜세운 눈썹과 눈을 빼면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 하다. 그러나 실제 어진에 비하면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모습은 아이들 그림책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5.1.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철종 어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철종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 철종 어진
-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 방화수류정
- 대한민국 구석구석 : 방화수류정(동북각루)
- 수원화성 테마관 : 방화수류정
- 두산백과 : 철종 어진
5.2. 보물 제1492호
<철종어진>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에 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서 펴낸 『御眞圖寫事實』에 의하면, 李漢喆과 趙重黙이 주관화사를 맡았고, 金夏鍾, 朴基駿, 李亨祿, 白英培, 白殷培, 劉淑 등이 도왔다고 한다. 당시 1개월여에 걸쳐 絳紗袍本과 軍服本을 모사했으나 현재 군복본만 현전한다.
이 <철종어진>은 임금이 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세한 표현 등에서 이한철과 조중묵 등 어진 도사에 참여한 화원 화가들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ㅇ 규격(세로x가로) : 202×93㎝
6. 가계
- 정비: 철인왕후 안동 김씨
- 후궁: 귀인 박씨
- 후궁: 귀인 조씨
- 후궁: 귀인 이씨
- 후궁: 숙의 방씨
- 후궁: 숙의 범씨
- 후궁: 숙의 김씨
- 딸: 옹주(1856년 ~1856년)
- 후궁: 궁인 박씨
- 딸: 옹주( ? ~ ? )
7. 창작물 속 철종
출신 배경 때문에 창작물을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 철종은 '''왕이 된 어리버리한 듣보잡 방계 왕족''' 이미지로 자주 묘사된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할 경우, 강화 생활 등에서 백성들의 삶을 접하고 이를 통해 나름대로 국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본인의 능력과 제반 조건이 너무 부족해서 실의에 빠지고 정치에 뜻을 잃게 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7.1. 소설
- 《운현궁의 봄》 (1933) - 철종
소설가 김동인의 작품. 현대 흥선대원군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 여기서는 다소 긍정적인 묘사로 나온다. 강화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어진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은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하려 노력한다. 당시의 노대신인 정원용에게 민생의 어려움을 꾸짖는 장면에서 이 모습이 잘 나온다. 하지만 당시의 국정은 자신의 의지만으론 해결이 안된다는 점 때문에 결국 정무에서 손을 놓게 된다.
- 《임금님의 첫사랑》 (2016) - 철종
소설가 유오디아의 역사 로맨스 소설에 등장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7.2. 영화
- <강화도령> (1963) - 철종
배우는 신영균. 주인공. 1963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국내에서 철종에 대해 만들어진 첫 영상 창작물이다. 야사에 알려진 철종의 첫사랑을 처음으로 영상화 했다. 이 작품은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링크
7.3. 드라마
- TBC 드라마 <임금님의 첫사랑> (1975~1976) - 철종
배우는 최수종. 이 드라마에서도 양순이(신윤정 분) 보고 싶다고 궁궐을 나가려고 하다가 병사들이 가로막자 담을 넘으려던 모습을 보였고 내관들은 지존인 왕의 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서 그저 말로만 아니되옵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결국 양순이의 죽음으로 그야말로 삶을 놔거린 것처럼 방탕에 빠졌다. 병으로 쓰러질 무렵 안동 김씨에게 비웃듯이 "과인이 죽으면 참 당황하겠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듯이 묘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