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반도 전투

 



1. 개요
2. 배경
3. 전투
4. 결과


1. 개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강 하류인 김포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김포지구 전투’라고도 한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활약으로 개성을 점령하고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의 진격을 지연시켜 국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2. 배경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럽게 남침을 시작해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곧바로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로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남하하였다. 한강 하구의 김포 지역을 장악해 국군의 한강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영등포·인천·수원 방면으로 곧바로 나아갈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포 지역에는 개성 지역의 38선 경계를 맡고 있다가 한강을 건너 퇴각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일부 병력과 김포 비행장에 주둔하던 육군정보학교와 보병학교의 병력만이 있을 뿐이었다. 육군본부는 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의 병력을 김포 지역으로 증파하는 한편, 6월 26일 그곳에 있는 각 부대들을 통합해서 3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해 북한군의 진격을 막게 했다. 김포지구사 전력은 다음과 같다.
  • 김포경비사령부(사령관 : 남산학교장 계인주 보병대령(6.25~28), 우병옥 보병중령(6.28), 29일 임충식 보병중령(6.29), 최영희 보병대령(6.30~ )[1])
    • 남산학교 기간병력 : 남산학교(국군정보학교)의 대대급 기간병력으로 이뤄져 25일 김포로 파견.
    • 호국대대 : 탈북한 인민군 육군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빨치산 토벌에 투입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 육본에 자청해서 김포반도로 출전. 김포반도와 강화도의 대안에서 에서 도하하던 적군과 싸우던 중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인민군 육군 6사단과 격돌하여 부대가 흩어질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 제12연대 2대대: 25일 개성 함락 직후 후퇴로가 차단된 연안의 2대대는 배천에서 배타고 강화와 김포에 상륙, 개성에서 뒤늦게 후퇴한 3대대 병력들과 재편성하여 김포반도 북단에서 적 도하를 막았다.
    • 제8연대 3대대(대대장 : 박태운 보병소령):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부대로서 25일 파견.
  • 독립기갑연대(연대장 : 유흥수 기갑대령)
    • 제1장갑수색대대 제1중대: 육본 작전명령에 따라 김포반도로 파견. 도하를 시도하던 북한 단정을 M8 장갑차의 37mm 포로 격파, 적 도하를 1일 이상 미룸.
    • 제3도보수색대대(대대장 : 강문헌 보병대위, 본 전투에서 전사)
  • 제1공병단 : 당시 부천에 위치하였으며, 25일 육본의 명령에 따라 김포지구에 투입.
  • 제22연대 2대대 : 대구에 주둔하던 부대로서 27일 밤 영등포에 도착해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에 참가했다가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

3. 전투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김포반도 북단 지역은 유속이 빠르고 강폭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북한군은 6월 26일부터 김포반도 북단의 월곶면과 하성면 지역으로 강을 건너 진출하려고 시도했으며, 국군은 문수산 등의 하안 고지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쌓아 북한군의 진출을 막으려 했다.
6월 26일 새벽 북한군의 일부 부대가 강을 건너 김포반도에 상륙했으며, 그날 오후부터 강녕포(康寧浦)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도하를 시도했다. 국군은 포격 등으로 북한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 때문에 6월 27일 오전까지 북한군 제6사단의 병력 대부분이 강을 건너왔고, 국군은 통진으로 물러났다. 국군은 운유산과 천마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김포읍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김포읍과 양곡 방면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와중에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 대령은 사령관이라는 작자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사라져버리는 아연실색할 사태가 발생했다. 후일 이 인간은 그것도 모자라 6월 28일 야간열차 편으로 가족과 함께 대구로 도망쳤다는 게 밝혀졌다. 결국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참모장이던 최복수 중령이 임시로 김포지구사를 지휘한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자 육군본부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김포로 증파했으며, 부평에 주둔하던 병력도 김포 전선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6월 28일 전차중대도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은 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김포읍과 김포비행장까지 점령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변변한 저항도 없이 김포비행장을 내줬다고 질책하면서 최복수 중령을 직위해제하고 대신 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을 사령관 대리로 임명했다. 국군은 장릉산·계양산·개화산 등에 진지를 쌓고 북한군이 부평과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6월 29일에는 김홍일 장군의 명령에 따라 반격에 나서 김포비행장 탈환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격을 실시한 12연대 3대대, 22연대 3대대, 기갑연대 3대대는 전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으며, 자원하여 공격을 지휘한 참모장 최복수 중령과 기갑연대 3대대장 강문헌 대위, 돌격을 이끈 선임중대장 김일록 대위도 전사했다. 공격 실패와 참모장 전사를 보고받은 사령관 대리 우병옥 중령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사령관 대리와 참모장의 죽음으로 김포지구사가 통합지휘능력을 상실하자 김홍일 장군은 29일 아침 김포나루로 도하, 철수해온 18연대장 임충식 중령이 지휘권을 이어받게 한다. 김포지구사 잔여 병력은 6월 30일에도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다시 공격에 실패하고 비행장 남단에서 한걸음 더 밀려났다. 이날 늦게 오류동·소사 방향에서 위협을 느낀 김홍일 장군은 제5사단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김포지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철수중인 5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경인가도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7월 1일 최영희 대령은 미 공군의 참전으로 제공권을 확보했으니 김포비행장보다는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 박격포와 장갑차의 지원 하에 전날 피탈당한 138고지와 107고지를 공격하여 악조건에도 양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7월 2일에는 보다 북쪽의 126 고지에 대한 공격이 실시됐지만 성과는 없었으며, 김포지구사는 한강선이 무너져 경인가도를 고수할 이유가 없게 된 7월 3일 오전 10시까지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영등포 방면에서 퇴로가 끊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철수했다.

4. 결과


7월 3일 영등포와 인천이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한강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자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병력은 수원과 안양 방면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대가 재편되어 안양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병력과 장비가 모두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포반도 전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진격을 상당 기간 지연시킬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신속히 인천·수원 방면으로 진출해서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겠다는 북한군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활약으로 서부전선을 지키던 국군은 안전하게 한강을 건너 철수해 한강 방어전을 벌일 수 있었다.
국군이 처절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했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실 이 전투는 한국전쟁 초기 제6보병사단이 벌인 춘천-홍천 전투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2001년 공개된 소련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군은 김포반도를 통해 영등포를 점령하고 수원선으로 진출을 기도하는 제6사단과, 제12사단이 홍천을 돌파하면 이를 발판삼아 수원으로 돌진하도록 계획된 제603모터사이클 연대를 양익으로 하여 한국군 주력을 한강 북방에서 포위섬멸하겠다는 계산 하에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김포지구사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북한군 공세를 상당시간 지연시킴으로써 춘천-홍천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부전선에서도 북한군의 작전적 의도는 좌절되었다. 춘천-홍천 전투가 북한군 2군단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며 춘천을 통해 수원으로 들이닥칠 북한군의 작전적 양익 중 왼날개를 꺾어버렸다면 김포반도 전투는 북한군의 오른날개가 펼쳐지는 것을 틀어막은 전투다.
[1] 전 15연대장, 훗날 국회의원까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