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1. 개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Partisan
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문화어: 파르티잔
비정규군(非正規軍) 유격전 요원을 뜻하는 단어. 은어나 비속어가 아니고 실제로 국어사전에 '러시아어 외래어'로 등재되어있는 정식 단어다. 어원은 러시아어 '파르티잔(Партизан)'으로 실제 러시아어 발음상으로는 빠르찌잔에 가깝다. '파르티잔'은 러시아어의 한글 표기법상의 표현이다.
어원은 빨간색이나 빨갱이와는 전혀 무관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산당의 상징 색상인 '''빨'''간색이 쉽게 연상되어 공산 게릴라를 쉽게 떠올리게 한데다가, 특히 공산 게릴라 한정으로 이 단어가 쓰였다. 또한, 우연히 글자까지 딱딱 맞아 떨어져 '''빨'''갱이 '''치'''들이 '''산'''에서 활동해서 빨치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1] 실제로 남한 최후의 공산 빨치산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빨치산 유격전을 벌이다가 소탕당한 것이 잘 알려진 것도 한몫했다.
이렇다보니, '파르티잔' 보다는 '빨치산'이 워낙 잘 알려져서 한국어의 외래어 단어 중 껌, 빵 등과 함께 된소리 발음/표기가 허용되는 몇 안되는 단어 중 하나다.
2. 어원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적어도 12세기경부터 partisan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17세기경에는 이 단어는 지역 군벌을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중 스페인 전역에서 게릴라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이들을 군벌이라고 호칭하게 되었고, 그것을 옆에서 잘 지켜보던 영국군은 게릴라 = 파르티잔이라고 생각하게 됨에 따라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게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순수한 유격대원의 의미와 더불어서 정예, 혹은 특수부대의 의미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19세기 이전 미국에서는 파르티잔의 의미가 약간 뒤틀리게 되었는데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와 남북전쟁 당시의 남군[2] 의 영향으로 인해 19세기까지 미국에서 파르티잔의 의미는 레인저나 코만도와 같은 특수부대와 비슷한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러던 와중 20세기에 접어들어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반프랑코 게릴라들의 활약과 국제여단덕에 파르티잔과 게릴라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의미도 거의 현재와 비슷하게 고정되었다.
3. 현재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3] 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앞서말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제네바 조약[4] 에서는 몇몇 상황에서 무기를 공공연하게(=숨기지 않고) 갖고 있으면 전투원으로 취급되며, 잡혔을 때 전쟁포로로서 존중됨을 규정하고 있다.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현실적으로 잘 지켜질지는 의문이지만...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 조항을 "유보"하고 제네바 협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적용 자체가 안된다(...).가. 각 교전기간중 및
나. 공격 개시전의 작전 전개에 가담하는 동안 적에게 노출되는 기간 중. 본 항의 요구에 부합하는 행위는 제37조1항에서 의미하는 "배신적 행위"로 간주되지 아니한다.
제네바 조약이 없던 시절인 나폴레옹 전쟁 중의 스페인 전역 때에도 프랑스군은 게릴라들은 불문곡직하고 쏴 죽였으며, 동조자들도 종종 처형하곤 했다.[5]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그들의 통신·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 또는 파괴하고 인원을 살상한다. 빨치산은 일반 주민의 협조나 지원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고, 그 지방의 지리나 지형에 밝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 되므로 아무 곳에서나 실행할 수 있는 전투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6.25 전쟁 전에 각지에 준동하였던 공산 게릴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빨치산 대신 공비(共匪, 공산당 도적)라는 호칭도 많이 사용한다.
4. 역사
빨치산의 역사는 게릴라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라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반란, 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민병대, 러시아 내전에서 대다수의 적군과, 백군에 가담한 민중봉기 세력들 등을 빨치산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전간기 시절 있었던 리프 전쟁 당시 반군 지도자 아브드 엘 크림의 게릴라 전술은 스페인 내전의 게릴라 전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이후 굵직한 빨치산을 몇몇 다루자면 다음과 같다.
4.1. 스페인 내전과 그 이후의 게릴라
게릴라/파르티잔의 확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세력으로, 스페인 내전당시와 이후 반 프랑코 세력을 총칭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제적으로 상당수의 의용병들이 들어와서 국제여단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공화파 의용군의 경우 대부분 제대로된 군복과 명령체계가 없었다. 그 외에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망명했던 스페인인 일부가 귀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들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막상 '게릴라'란 단어 자체가 태어난 곳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스페인 내전이 당장 벌어지고 있을 때 공화파 진영 전체로 보면은 CNT나 UGT 등 공화국 정부와는 사실상 따로 노는 전투 노조들이 프랑코 군에게 포위 된, 막말로 가망 없는 조직원들에게 최후 항전의 의미로 내린 단발성 지령을 빼고는 조직적인 게릴라전을 펼친 적이 없다. 이 당시는 게릴라전에 대한 심도 깊은 군사학적, 전술적 연구가 이루어 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1차대전식 '정정당당한' 마인드가 군사적 인프라로는 영 후진국인 공화파, 파시스트진영 양쪽에 팽배했기 때문에 공화파는 충분히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 이득을 못 봤으며, 후대 살아 남은 공화파 인사들은 아나키스트 CNT나 공산당 지도 아래 공화국 정부 인사나 군사 내적인 측면에서는 이 점을 최대의 실책으로 평가했다. 빨치산의 근간이 되는, 발렌시아에 위치한 공화국 정부의 지휘를 받는 정규군인 공화국인민군(Ejército popular de la República) 소속이 아닌 좌익 의용군, 민병대들은 전쟁 발발 이전 노동자로서 먹고 살며 지리와 구조에 익숙했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곳의 시가전에서는 정규군 못지 않은[6] 효율과 전투력을 발휘했던 반면, 어리석게도 공화파 지도부나, 자체적인 노조 의용대 지휘관들이나 오히려 1차대전의 참호전과 근본적으로 변한게 없는 야전에서의 고지 점령전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CNT의 연맹 민병대(milicia confederal) 같은 무장 노조 민병대들도 나름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시작부터 정규군과 헌병대의 절반 이상이 넘어갔으며, 당시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실전에서 단련 된 정예 병력인 북아프리카 식민지 부대(regulares)만으로도 모자라 그나마 외부 지원 세력인 소련은 오히려 공산당이 점차 장악해 가는 공화국 정부만 독점 지원하며 자신들을 때려 잡으려는 와중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받는 파시스트 쿠데타 세력을 상대로 기본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격차는 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그나마 상술 된 상황에서의 선전으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북동부 산악 지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무장 노조들은 당장 해방구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 사회적 혁명의 물결을 주도하는 걸로 대중적인 지지와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런 이데올로기적 사회 혁명을 지속 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구체적인 마을과 도시를 중심으로 고정적인 해방구를 성립해 사수하고 확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기적으로는 저런 근본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로[7] 더 불리할 수 밖에 없으니 CNT나POUM, 혹은 바스크 자치정부 산하 구다리 (Euzko Gudarostea) 같은 독립 세력들은 '''오늘은 우에스카, 내일은 사라고사'''라는 식으로 정치적인 가치가 큰 지방 도시들을 목표로 삼아 제대로 된 기갑, 항공 지원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 1주일 전에는 민간인이었던 알보병들로 도시 점령 전격전(...) 공세를 펼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단순히 군사적인 차원을 넘어 공화파와 스페인 좌파 전반의 정치적,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 못하고 결국 공화파는 반자이 돌격스러운 무분별한 공세를 남발하다 느리지만 착실한 프랑코군의 반격으로 하나 하나 통제 지역을 상실하다 1939년 결국 패망했다. 오히려 전쟁이 말기에 들어가고, 공화국의 패망이 시간 문제인 기정사실화 되면서 프랑코가 점령한지 얼마 안된 지역이었던 아스뚜리아스-레온의 북부 산맥, 카스티야 라만차의 중부 고원, 안달루시아 대농장과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2차대전이 터지자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와 발을 함깨 한 유격전이 성행했다. 이 시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아예 조직 자체가 붕괴되어 버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파시스트들에게 항복하자니 에라이 될대로 되라는 마인드니 저런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속박 당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펼치다 보니 의외로 효율이 좋아(...) 공화국이 정식으로 패망하고도 10년 넘게까지 빨치산 조직들은 프랑코 정권의 속을 썩였다.
이들의 운명 또한 프랑코 정권이 열렬한 양다리 외교로 연합국에 의해 그 생존을 허락받자(...) 결국 하나 둘 씩 고립되어 잡혀 죽던가 아니면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로 결국 망명하는 식으로 말라 죽었으나, 이들의 경험에 기반한 군사 활동/정치 활동 양면의 유격전 군사적 교훈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 전반으로 국제 여단과 망명객들을 통해 퍼지게 된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연합군이 프랑코 정권을 응징하지 않고 협상으로 그 존속을 허락해 버리자 피레네 산맥, 칸타브리아, 아라곤 등지에서 버티고 있던 빨치산들 중 많은 수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프랑스를 통해 망명을 갔다. 이 와중 적지 않은 수가 프랑스, 중남미 등 망명간 나라의 좌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투쟁 방식과 게릴라전 경험도 전파하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 자체에서 빨치산 전술은 잘해봐야 가능성을 보여준 정도에 끝나지만, 여기서 실전 경험을 한 이탈리아 의용병 출신 가리발디 여단이나 프랑스계 파리 꼬뮨 전투단 같은 국제여단의 의용병들은 스페인에서 배운 선동술, 전술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자국 내 반파시스트 빨치산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 1943년 여름 무솔리니 정권이 한번 몰락하고 살로 공화국이란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부활해 이탈리아 전선이 내전의 구도로 변화 할때 까지 핵심적인 조직적 기반과 교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숙련된 투사들은 비공산권 사회주의 혁명 조직이었던 정의와 자유 (Giustizia e Liberta)나 이탈리아 공산당 내 국제여단 출신원들 같은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장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수이자 30년대 후반에서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 외 국제 공산주의 네트워크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였던 팔미로 톨리아티만 하더라도 국제 여단 의용병 모집을 책임지면서 국제적 경력과 인망을 쌓았다.
4.2. 소련의 파르티잔
소련은 그 태동부터 파르티잔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는데, 적백내전 때부터 파르티잔은 볼셰비키로 전향한 장교들이나 지역민들에 거의 의존했다. 보급 또한 힘들었기에 제복은 물론 제대로 된 명령 체계도 없다시피해서 대부분의 경우 지휘관과 사병만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독소전쟁에서 파르티잔의 역할은 다시 중요해졌다. 독소전 초반 스탈린의 폭정에 반발했던 이들이 반소 게릴라 조직에 붙었다가 나치가 점령지에서 학정을 벌이며 다시 재전향한 이들이 늘게 되자, 파르티잔 조직들은 이 재전향자들을 적극 포섭해 세를 불려 지리멸렬한 분대나 소대급에서 연대나 여단급 조직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소련군도 이렇게 거대화된 빨치산 조직들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와 탄약, 훈련과 보급 요원들을 공수해 지원했다.[8] 이 시기에 활동한 유명한 빨치산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 출신인 시디르 코브파크가 있다.
역설적으로 파르티잔이 과격해진 것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점령지의 약탈이었다. 친지를 적군에게 잃고 농지와 작물을 속절없이 빼앗겨 잃을 것도 없어지자 복수심에 불탄 많은 이들이 파르티잔에 들어가 점령군과 싸웠다. 가뜩이나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으로서는 파르티잔이 철도를 파괴하고 후방 부대를 급습해 지휘관이나 병사들을 암살하거나 무기와 탄약 등을 탈취해 가는 것에 치를 떨었고, 파르티잔이 잡히면 고문을 가하고 모욕적인 문구를 써넣은 플래카드를 들게 해 조리돌림한 뒤 공개처형하는 식으로 보복했다. 심지어 파르티잔이 아닌 일반인도 그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사소한 지원을 했을 경우 같이 처벌했다. 하지만 이런 강경한 탄압은 오히려 파르티잔의 저항을 더 격렬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전쟁이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면서 소련군에 해방된 지역 출신의 파르티잔들이 정규군으로 재입대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베를린 전투에서 제국의사당 옥상에 소련 국기를 꽂은 밀리톤 칸타리야와 미하일 예고로프도 파르티잔 출신 병사들이었다.
사실 소련에는 우크라이나인들 같이 소련을 증오했던 민족들이 많았던 것은 물론, 러시아인들조차 집단농장이나 비인간적일 정도로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 등에 불만을 품어 소련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기다가 파르티잔이 조국을 위한답시고 수시로 식량을 털어가는 바람에 이들도 독일군 못지 않게 파르티잔을 증오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쟁 초 반소 파르티잔 조직들이 우후죽순 생겼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독일이 사유재산 보장을 조건으로 이들을 달래어 무장 민병대를 편성하는 데 적극적이었다면 파르티잔의 병력과 물자 증원을 차단하는 동시에 파르티잔 토벌에 유용한, 더 나아가 소련 정규군 상대로도 방어전에서 시간을 버는 데 정도에는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을 대량으로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슬라브인들을 절멸해야 한다는 나치즘의 광기어린 신념에 빠져 오히려 파르티잔들에게 숨통을 틔여 주었다. 민간인 입장에서는 자신을 부려먹는 압제자와 자신을 죽이겠다는 살인마가 싸우고 있다면 일단 압제자 편에 붙어 목숨은 건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사실 일부 생각이 있는 독일군 지휘관들은 실제로 이런 반공 민병대들을 편성하기도 했고, 카민스키 여단 또한 이런 민병대에서 출발했다. 보통 카민스키 여단은 바르샤바 등에서 보인 막장 행각으로 악명이 높지만, 민병대 시절에는 매우 건실한 전력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실제로 카민스키 여단이 통제하는 지역에는 파르티잔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니 말 다한 셈이다. 독일이 이런 효과적인 대파르티잔 전력을 내버리지 않았으면 파르티잔 토벌에 투입된 수십만의 보안군 전력을 소련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제 3제국의 멸망을 늦추거나, 어쩌면 정권의 존속 정도는 가능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3.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4.4. 이탈리아의 파르티지아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과,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뒤 이탈리아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군과 나치에 의해 옹립된 무솔리니 괴뢰정권에 대항해 싸웠던 이탈리아의 무장 저항집단인 파르티지아노 또한 큰 활약을 보였다.
이탈리아가 추축국이었고 학살과 인권유린 등의 전쟁 범죄를 다수 자행한 이력이 있었음에도 같은 추축국인 일본이나 독일과 다르게 그다지 전범 국가로 취급되지 않는 이유는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과 같이 이탈리아군이 그다지 추축국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 이외에도, 이렇듯 일본이나 독일과 달리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침략 전쟁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연합군과 함께 연합하여 싸운 파르티지아노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파르티지아노에 가담한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기독교계에서도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전후 이탈리아의 여당 자리를 장기간에 걸쳐 차지했었던 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의 핵심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국가 헌병대의 경우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 당시에는 독재정권의 수족으로서 기능했지만 무솔리니가 실각한 후에는 그를 체포하고 연합군과 함께 이탈리아 해방을 위해 나치 독일과 싸웠는데, 이로 인해 나치의 미움을 받아 1943년 10월 7일에 해체당하고 장병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 뒤에도 많은 장병들이 파르티지아노에 가담하여 계속 나치에 저항하였다고 한다. 전후 추산으로는 나치와의 전쟁으로 최소 2700명이 전사하고 65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고슬라비아 등 이탈리아 국외에서도 나치에 맞서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때문에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이들에게 훈장을 추서하여 공을 치하했다.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시리즈의 주인공 돈 까밀로 신부와 빼뽀네 읍장은 파르티지아노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다. ABE전집의 '초록 불꽃 소년단'도 소년 파르티지아노들의 활약을 다룬 청소년 소설이며, 관련 민중가요로 벨라 챠오가 있다.
4.5.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역시 빨치산으로 유명하다. 유고슬라비아의 빨치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문서 참조.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저항조직은 체트니크의 세르비아계와 티토의 공산주의 파르티잔 두가지가 있었다. 티토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연합국에게 대독전선에서 파르티잔의 활약상을 효과적으로 선전하였다. 반면 체트니크는 전쟁 중후반부터 추축국 부역혐의가 생기고 빨치산 토벌을 하기도 하여 민심이 기우는 바람에 전후 민중과 승전국의 암묵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된다.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의 활동은 유고에서 독일을 몰아내고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9] 이같은 파르티잔 전쟁 수행의 성공적인 경험은 냉전 시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국가방위 계획 수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방위 계획은 기본적으로 침공군을 지연시키며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설계되었던 유고의 준군사 조직인 국토방위군은 향후 유고 내전에서 각국의 군대로 변모하였다. 외적을 상대로 계획했던 비정규전이 유고 구성국간의 비정규전이 되어 서로간에 총부리를 돌렸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파르티잔은 군사정책 뿐만 아니라 유고와 그 후신 국가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어 하나의 시대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세르비아의 축구팀 이름에 파르티잔까지 붙는다(파르티잔 베오그라드).
4.6. 대한민국에서의 빨치산
4.6.1. 일제강점기의 무장투쟁단체
- 북로군정서
- 대한 광복군
- 조선의용군
4.6.2. 6.25 전쟁 당시 빨치산
4.6.2.1. 친대한민국 빨치산
친대한민국 빨치산들도 한국에선 빨치산으로 불렀다."유격전과 비슷한 용어로 빨치산전 혹은 게릴라전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군과 싸우면서 등장한 빨치산이라는 용어는 싸우는 사람 혹은 그 단체를 뜻하고, 스페인 산간지역에서 프랑스군과 투쟁하면서 사용된 게릴라전은 소규모 전투행위를 의미한다. 이처럼 각 국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빨치산전 혹은 게릴라전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미군은 게릴라전, 혹은 빨치산전을 혼용하였다. 1952년 11월 유격대 간부들의 훈장을 상신할 때 게릴라대원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사령부에서 발행한 동키 제13부대의 대원 신분증에는 ‘애국 빨치산부대의 일원’이라고 했다.1952년 11월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한국인 유격부대를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UNPFK)에서 보듯이 파르티잔(partisan)이라고 했다. "
조성훈,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4~5쪽
- 미 제8240유격부대
- 호림부대
- 제1사단 제5816유격부대
- 제2사단 독수리유격대
- 제 8사단 유격대
- 민간인들의 자생 빨치산: 전라북도 보라매구국대 → 진안결사대, 전라남도 완도 청산향토방위결사대, 강원도 화무결사대, 강원도 춘성군 남면 반공투쟁 공작 산악대, 강원도 진동리 한청결사대, 경기도 북면 ‘임산 의혈대’, 초옥동 결사대 가평읍 반공 산악공작대, 태극단, 조양단, 해동의사단 등등 굉장히 많다.
- 북한의 반공 빨치산: 북한 내에도 소수이기는 하나 반공 빨치산이 존재했다. 북한의 반공 빨치산들은 이북에서 치안대라고 불리며, '치안대 출신'이란 단어는 북한에선 적대계층이란 뜻이라 심한 욕설이자 낙인이다.[10]
4.6.2.2. 반대한민국 빨치산
4.7. 북한에서의 빨치산
빨치산은 북한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일단 주석인 김일성부터가 동북항일연군을 통한 게릴라전으로 경력을 쌓았고, 이 당시의 김일성부대 인물들이 북한을 구성하는 초기 멤버들이 된다. 동북항일연군 이후 김일성이 조직한 조선인민혁명군을 비롯한 다양한 부대들은 조선인민군으로 전통이 내려왔다고 보며, 북한이 국가 정통성을 항일 빨치산에서 찾는 근원이 된다.
또한, 북의 선전에 따르면 과거 6.25 전쟁 때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11] 인민군 부대와 지역민들이 '제 2 전선'을 조직해서 북한 중, 남부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고 하며 그렇게 북한의 지역을 해방하고 미군과 국군의 보급선에 큰 타격을 줘서 북의 인민군 부대가 남하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서울까지 해방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진실은 그냥 소규모 전의 빨치산, 남로당 저항활동 좀 한 것일 뿐, 남하할 수 있었던 것이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그럴 수 있던 것인데, 무슨 백두산 빨치산 운운하며 빨치산으로만 북의 지역을 해방하고 진격했다는 건 참...
[1] 여기서 '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벼슬아치, 장사치 할 때의 '-치'다.[2] 특히 이들은 Partisan Rangers라고 자칭하고, 파르티잔 전술을 총정리하기까지 했다. 다만 최초의 문서화는 프로이센군의 한 공병 대위가 7년전쟁 중에 했다.[3] '편의'란 사복, 즉 민간인 복장을 가리키는 구식 표현이다. 그리고 빨치산=빨갱이는 남한 내에서 무장공비가 자주 쳐들어오다 보니 붙게된 인식이다.[4] 정확히는 제1 의정서[5] 사실 대부분의 빨치산들도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며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6] 물론 당시 스페인 정규군도 쿠데타군이던, 공화파에 남은 편이던 유럽 주요 열강에 비하면 장비나 훈련의 질이 모로코 식민지 외인부대 빼고는 한두단계 아래이기도 했다[7]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아무리 유럽 기준에서는 2류라 해도 일단 정규군과, 말 그대로 내전 발발 하루 전에는 빨레방 이모, 정육점 아저씨로 일하다 총 잡은 민간인들의 대결이다.[8] 맥심 기관총 같은 중화기는 물론, T-34 같은 전차도 한두대 굴리는 파르티잔 부대도 있었다. 영화 컴 앤 씨에도 자세히 묘사된다.[9] 2차 대전 이후 소련군의 점령하에 놓인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괴뢰정권이 아닌 엄연히 '''자력'''으로 나치독일을 몰아냈기 때문에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서방세계가 소련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티토의 독자노선을 지지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종속국 처지가 아닌 제3세계의 주요 국가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10] 출처: 탈북자 동지회[11] 이때 들이대는 자료가 로동신문의 전신인 조선인민군 일보에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고 나온다. 진실은 저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