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홍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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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 위치하고 있는 춘천전투기념비'''
1. 개요
춘천-홍천 전투는 6.25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 육군이 진공해 들어오는 것을 중동부전선인 춘천지역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민군은 단기간 내에 남한을 점령하는 것을 '''실패하게 되었고,''' 국군이 군을 재편하여 '''지연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 중 가장 전과가 높은 전투이다.'''[1]
2. 주요 전투 정보
3.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1949년 미국은 자국내 안보전략의 수정[7] 에 따라 한반도 남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 중 500명을 군사고문단으로 남겨놓고 그 외의 전 병력의 한반도 철수를 결정하였다.
이어 1950년 1월 12일 국무장관 애치슨이 전미 신문 기자 협회에서 행한‘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소위 애치슨 라인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요약하여 말하면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축소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공산진영(소련과 중국으로 대표되는)의 세력팽창을 저지를 목표로 한 발언이었다.
다시 말하면 방위선 내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과 타이완은 공산진영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완벽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선언이 6.25 전쟁의 커다란 원인 중 하나로 알려져있었으나, 전후에 공개된 소련 공문서의 내용에 의해 애치슨 라인이 끼친 영향은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그때는 이 일로 트루먼 행정부는 사방에서 까이고 적십자사 총재로 물러나 있던 조지 C. 마셜 원수를 급히 불러와야 했다(...).
반면 북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수물자와 병력 등을 지원받고 있었다.[8]
4. 북한군의 초기 전략
북한의 김일성은 대대적인 남한진공을 통하여 남한을 공산화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미군이 재진입하여 전쟁이 장기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에게는 미군의 전력이 심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9]
또한 북한군 내부에서는 박헌영의 호언장담 때문에,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 국군 내에 남아있는 남로당계열의 군인들과 남한 민중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호응할 것을 기대하고 또한 예상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여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국군은 약 3년간 유지되어 오던 비상경계령을 50년 6월 24일부로 해제하고, 전 장병의 약 30% 정도 되는 병력이 휴가, 외출, 외박 등으로 외지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24일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다.
따라서 북한 군부는 개전과 동시에 육군 주력 사단을 내려보내 국군의 육군 4개 사단을 서울에서 밀어내고, 춘천으로 해군 육전대 등 별동대를 우회시켜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여기엔 두 가지 플랜이 있었다. 하나는 북한군에서 자체적으로 수립한 선제타격계획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련 군사 고문단장이었던 라주바예프 장군이 제작한 반격계획이었다. 두 계획은 틀에 있어서 대동소이한데, 요지는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춘천-홍천 지역을 우회하여 국군의 주력 사단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5. 전투 전야
개전을 앞둔 2일 전 38선 남쪽 300미터 지점[10] 에 길이 250m, 폭 4m의 모진교[11] 에서 한 노인이 다리에 설치된 지뢰를 밟고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고를 당한 이 노인은 이남에 남아있던 아들을 만나기 위해 다리를 건너오려고 인민군 검문초소를 통과하여 다리를 건너던 중, 인민군 진공 억제를 위해 국군이 매설해두었던 지뢰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다. 인민군 측에서는 모진교에 지뢰가 매설되었음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뢰의 매설량과 그 파괴력을 알아보기 위해 '''민간인 노인'''을 통과시킨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인민군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무렵 국군 6사단에선 춘천에 7연대, 홍천에 2연대, 19연대는 원주에 예비대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개전(6월 25일) 2주 전 김종오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종오 대령은 (포천 전투의 9연대장처럼) 적진이 심상찮고 이 과정에서 붙잡은 무장공비[12] 로 인해 전 간부/장병의 외출 외박을 전격적으로 통제한 상태로 각 주둔지의 경계를 강화하였으며,[13] 정신교육과 실질적인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16포병대대는 비전투병과인 군의관조차 포병 사격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병들을 동원하여 보병 및 포병 진지를 강화시키고 정보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정보활동을 지속하던 도중 강원도 화천과 양구지역에 적의 보병부대가 집결하고 수십대의 차량이 집결한 것이 확인되었다.
6. 전투 경과
6월 25일 오전 4~5시를 기해 북한군은 춘천시 사북면 인람리와 지암리에 위치한 국군 6사단 전초 진지들을 향해 공격준비사격을 30여분간 퍼부은 뒤[14] 자주포를 앞세우고 남진을 시작했다.
이후 북한 2군단 예하 2사단은 강원도 춘천으로, 12사단은 인제∼홍천 방면으로 각각 내려갔는데, 이는 경기도 가평과 강원도 홍천을 경유, 먼저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수도권에서 북한군의 주공(主功)을 막아내는 국군 부대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6.1. 춘천 방면 (춘천 전투)
참고자료
전초 진지들을 박살낸 북한군 2사단 6연대는 곧장 자주포 10대를 앞세우고 국군 7연대 1대대가 배치된 북한강 (모진강) 옥산포로 공격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논밭에서 정면으로 들어오는 실책을 저질렀고, 이에 포격으로 두들겨 맞는 가운데 7연대 대전차포중대의 심일 소위[15] 와 5명의 특공조가 육탄공격으로 자주포 2~3대를 파괴해 장병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소양강을 도하하지 못한 채 7연대 1대대에게 북한강까지 쫓겨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북한군 2사단장은 예비로 둔 17연대까지 투입했다.
6월 26일 오전 7연대 1대대는 지원포격과 원주에서 우두산 진지로 이동해 온 19연대 2대대의 측방엄호사격 속에서 옥산포로 집결 중이던 북한군 대대 하나를 기습 공격해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북한 2군단장은 홍천 방향으로 향하던 12사단의 일부를 춘천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북한군은 오후 1시 공격준비사격 후 재공세를 폈고, 이에 소양강 방어군은 오후 3시경 사단장의 명령으로 일단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6월 27일 오전 5시 지원포격 속에서 북한군들은 소양강을 도섭하거나 소양교로 공격해 왔고 국군은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11시 30분경 봉의산 정상부가 피탈당하자 7연대 병력들은 일제히 춘천시내로 후퇴하였다. 이 무렵 국군 6사단은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서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육군본부는 시흥군으로 철수했으니 이에 6사단은 사단장의 판단에 따라 철수하면서 중앙선을 중심으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 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한편 이 무렵 홍천 북방에서도 2연대가 북한군 12사단으로부터 계속 두들겨 맞자 사단장은 춘천과 홍천 모두 위태롭게 되었으니 일단 홍천 방어를 하자는 결단을 내렸고, 이에 7연대에게 춘천∼홍천 사이의 원창고개를, 19연대에겐 2연대와 함께 홍천 방면의 말고개를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했으며, 이에 7연대도 2대대를 원창고개에 배치하고 나머지 주력을 홍천으로 철수시켰으며, 2대대는 원창고개에서 북한군 공격을 수차례 저지시킨 뒤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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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및 참고자료 - 참고로 동그라미 쳐진 곳이 후술할 가래목이며, 그 옆의 다리는 지금의 소양1교. 또한 인근에 우뚯 솟은 산은 봉의산.
이 무렵 춘천 옥산포를 장악한 북한군은 164고지와 춘천의 군대가 사라졌으니 남진해도 되겠다란 판단이 섰고, 춘천 시가지를 향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기도 전에 2개 대대가 5번 국도로 내려와 강폭이 좁은 가래목에 몰려 허겁지겁 도하를 시도했다.[16] 하지만 춘천 소양강 이남엔 16포병대대가 아직 남아있었고, 이를 본 봉의산의 3포대장 정오경 대위는 가래목의 좌표를 일러준 뒤 북한군의 병목 현상이 절정에 다다를 즈음 포격 신호를 내렸고, 이에 춘천역의 2포대, 나의동 뽕밭의 1포대, 춘천 우시장의 3포대가 가래목을 향해 일제 포격을 가했다.[17] 이후 무자비한 불포탄 속에서 적들이 엄폐도 못하고 여기저기 박살나며 우왕좌왕하자 신바람 난 정오경 대위는 계속 쏘라며 포병들을 마구 응원했고, 이에 M3 105mm 경곡사포 포신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이를 물로 식히고 계속 쏠 정도로 신나게 포탄을 쏴댔다.[18] 하지만 후방의 북한 포병들이 굉음과 포연으로 위치를 추격해 반격을 해왔고, 그럼에도 가래목에 포격을 지속해 가래목의 북한군 상당수를 살상시킨 뒤[19] 6사단 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퇴각한다. 이후 북한군은 일몰 무렵 춘천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 와중에 북한군 12사단 31연대는 퇴각중인 6사단 행렬을 쫓아 춘천 남부로 향했다.
6월 28일 새벽 국군 7연대 1대대는 금병산으로 이동해 진지공사를 벌였고, 2대대는 남동쪽 원창고개를 방어하고 있었다.
오전 8시 북한군은 7연대를 포위하기 위해 세 갈래로 나뉘었고, 오전 10시경 금병산의 2중대와 원창고개의 2대대가 제각기 교전함으로서 후속 전투, 원창고개-금병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후 1시 연이은 포격에 원창고개에서 버티기 힘들어진 2대대가 모래재로 물러날 무렵 1대대는 여전히 금병산을 고수하고 있었고, 이는 오후 3시 후퇴 명령을 받기까지 계속된다.
참고로 원창고개를 29일까지 사수했고 오전 11시 경 북한군이 위장 투항을 한 뒤 뒤치기를 했고, 이로 인해 원창고개를 내주었다는 말이 있는데, 일부 참전자들은 당시 그런 건 없었고 뒤치기는 1950년 3월 신남 일대의 김무현 공비 패들이 했다고 증언해[20]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6.2. 인제-홍천 방면 (인제-홍천 전투)
6월 25일 새벽 4시 공격준비사격 후 북한군 12사단 2개 연대가 홍천 이남으로 정면 공격을 시작했으며, 돌파 및 포위 위기에 처한 2연대 1대대는 오전 6시 20분 경 퇴각한다.[21] 이후 1대대는 558고지, 2대대는 402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낙오병이 어느정도 복귀하자 오전 10시 지휘소를 자은리에 설치하며 지연전을 계속한다.
6월 26일 오전 6시 2연대 1,2대대가 반격을 시도하나 돈좌되었고, 이들의 추격을 피해 남하하는 과정에서 국군 2연대는 3분의 1로 줄어들고 만다.
6월 27일 계속 얻어터지는 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19연대 주력과 16포병대대가 구원군으로 가세해 말고개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했고, 일대에서 쌍방 포격이 이어진다.
6월 28일 새벽 국군 2연대 1대대가 일대 고지군의 북한군을 격퇴하다 포격 세례를 받자 후퇴했다. 이 무렵 북한군 12사단은 국군 2연대를 계속 밀어내며 인제 남방과 큰말고개까지 진출해 국군 6사단의 퇴로를 위협했다. 그러나 춘천을 맡았던 북한 2사단이 16포병대대에게 전멸하자 북한 2군단장은 춘천을 우선 점령하라고 지시해 12사단은 해당 방향으로의 진출을 멈추고 큰말고개에 예비로 남겨둔 연대와 함께 춘천으로 향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큰말고개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 2연대와 19연대 3대대는 육탄 11용사의 활약으로 적 자주포(SU-76), 전차(T-34) 10대를 격파 또는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일본군 출신인 19연대장 민병권 중령의 지침[22] 에 따라 길가에 쓰러져 죽은 시체로 위장했으며, 오전 10시경 접근중인 적 전차가 아군의 대전차포에 맞고 쏜 위치를 확인하려고 멈춘 순간 기습을 가했다. 우선 1번조인 19연대 3대대 소속 조달진 일병이 선두 전차의 해치를 열고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같이 까넣어 기동 불능으로 만들어 후속 전차들까지 멈추게 만들었다. 그리고 후미의 전차장이 고개를 내밀어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순간 아군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직후 11용사 중 한 명이 그 전차 안에 수류탄을 까넣었고, 이로 인해 행렬 중간의 전차들은 앞뒤가 가로막힌 채 고립되었다. 이후 이 전차들은 승무원들이 상황을 확인하려고 혹은 강제로 해치가 열려 차례차례 정리되었다.[23] 이후 조달진 일병을 포함한 3명은 2계급 특진을, 나머지는 1계급 특진을 하게 되었다.[24]출처
6월 29일 춘천을 정리한 북한군은 국군 2, 19연대를 포위하기 위해 홍천으로 향하며 개중 일부는 우회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군 6사단장은 반격 작전을 하려던 2연대에게 철수를 명령해 횡성과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후퇴한다.
7. 피해
'''위아래가 바뀐 게 아니다!'''
7.1. 6사단의 피해
6사단 사상자는 407명이며, 춘천을 빼앗기고 후퇴해야 했다.
7.2. 인민군 제2군단의 피해
인민군 출신 귀순자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 제2군단의 사상자는 2,000여명(6사단 자체 집계로는 6,900여명)이며, 다수의 자주포가 격파되었고,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전략은 무산되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제2군단 군단장 김광협과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가 해임되었다.[25]
8. 의의
'''인민군은 이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지 못하여 결국 최초 작전 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인민군 2사단은 국군 6사단의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울 동남방 진출이 좌절되었고, '''춘천에서 약 3일간 남진을 지연당하게 된다.'''
'''이 3일의 지연은 인민군에게 대단한 악영향을 끼쳤다.''' 이후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은 강북을 점령했으나 병력+화력 부족으로 3일간이나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지체함으로써''' 국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쳤다.[26] 게다가 북한군이 한강을 두고 머뭇거리는 동안 한강 이북의 국군 장병들은 자력으로 한강을 도하해 한강 이남에서 재편성됨으로써 전투력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었고 여기서 얻어진 시간적인 여유는 UN군의 파병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국군은 부산 축선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 이후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게 된다.
9. 여담
- 1975년 월남 패망 당시 주월한국대사관에 근무하다가 탈출에 실패, 현지에 억류되었던 이대용 공사가 한국전쟁 당시 제6보병사단 장교로 이 전투에 참전한 이력이 있었다. 때문에 북베트남에 억류되었을 당시 북한이 전향(?)을 요구했는데 한국전쟁 초기에 인민군을 박살낸 이력이 있는 인물을 곱게 대우했을 가능성은 0%! 즉, 말이 전향이지 자신들을 패퇴시킨 지휘장교를 꾀어내 죽이겠다는 계획에 가까웠다. 이대용 공사는 훗날[27] 역사스페셜 방송[28] 에도 출연해 당시 이 전투상황을 증언하기도 했으며 2017년 11월 14일 작고했다.
- 춘천 전투에서 활약한 16포병대대는 현재 제7보병사단 포병여단 소속이다. 하지만 역사 존중을 위해 매해 개최하는 춘천 전투 행사 때마다 일부가 국군, 심지어 북한군 역으로도(...) 불려나온다.
- 또한 27일 춘천을 점령한 북한 2사단 잔병들의 주 무장은 모신나강, 7사단 조선족 부대는 99식 소총[29] 으로 달랐는데, 이날 밤 9시쯤 두 사단 중 누군가가 오발을 냈다. 그런데 반대 사단 병사들은 익숙한 총소리가 아니여서 이를 은밀히 침투한 국군 특작조가 낸 것으로 오인해 그 방향을 향해 즉시 응사했고, 이들은 그렇게 1시간 가량 팀킬을 벌였다.#
- 북한 2사단은 이후 진천 전투에서 진격이 일주일 가량 막히는 굴욕을 또 겪는다.
[1] 이전에는 이 전투로 인해서 낙동강 방어선이 성립되었다는 등의 설명이 있었지만 국군의 지연작전의 상징인 낙동강 전선은 춘천-홍천전투에서 활약한 6사단뿐 아니라 강릉시의 8사단, 김포시의 김포전투사령부의 피나는 분투, 시흥군전투사령부의 병력재편이 모두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6사단의 업적은 대단히 크다.[2] 5.18 민주화운동 당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 안병하 치안감(추서)이 이 당시 7연대 16포병대대 소속 관측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안병하 역시 이 춘천-홍천 전투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3] 현지임관출신으로 이등병에서 소장까지 진급한 최갑석 장군이 이 대대에 소속돼서 전투를 치렀다. 당시엔 장교로 임관하기 전. 이 대대는 지금은 제7보병사단에 있다. 최초 창설 6개대대 중 한곳.[4] 패전의 책임을 물어 문책당한 후 7월 10일 이후에는 김무정 중장으로 교체됨.[5] 피해 책임을 물어 최현 소장으로 교체됨.[6] 7월 3일 이후 최춘국 소장으로 교체됨.[7]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국방비를 삭감함과 동시에 전시동원체제를 해제하였다. 종전 당시 1,200만명에 육박하던 미군의 병력수는 6.25 전쟁 개전시점 즈음에는 146만명으로 대폭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군비를 확 줄여버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재래식 전력의 감소를 우월한 공군력과 전장에 실제로 사용하여 그 효과를 톡톡히 본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데 있었다. 또 그토록 비대해진 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방비가 지출됨에 따라 미국내 여론과 언론의 몰매를 견딜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8] 사실 엄밀하게 살펴본다면 중국과 소련은 입장이 상이했는데 당시 스탈린은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에만 가면 "남조선을 해방시키려하니 스탈린 동지가 좀 도와주시라요."라고 했고, 스탈린은 내내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 이 시기가 중국과 소련의 노선이 갈리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 공산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중국은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무력투쟁을 할 것을 주장했다.[9]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유럽에서 독일,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양면전쟁'''을, 그것도 양쪽 다 압도적인 우위에서 벌인 무시무시한 나라다. [10] 원래대로라면 한국군이 이 다리 전체를 완전히 확보한 상태가 맞긴 하나, 교량이 지나치게 38선에 근접해 있어서 사실상 교량 자체가 경계선 역할을 하던 상황이었다.[11] 춘천 북쪽 13km 지점에 위치한 교량으로써 북한에서 남한으로,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였다. 그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인마(人馬)뿐 아니라 차량 역시 이동가능하다는 점에서 남북한 모두 주시하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춘천댐의 건설로 수몰된 상태이다.[12] 머잖아 우리의 공격이 시작돼 8월 15일에 완전 해방된다고 진술하였고, 우군의 배치상황이 적힌 상황도도 가지고 있었다.[13] 다만 24일 자정에 육군본부에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외출-외박을 허용하자, 6사단에서도 외출 외박은 계속 통제하되 경계 태세는 최소한의 상태로 하향했다. 이는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 즈음부터 1달이 넘게 비상 경계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장병들이 크게 지쳐서 '''적어도 이발하고 목욕할 시간은 주어야 한다'''고 건의가 올라와 김종오 사단장이 이를 수락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육군본부에서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것도 계속된 긴장과 근무에 따른 병력들의 피로+군량미 고갈 때문이었다. 문제는 운이 매우 나쁘게도 북한군이 이 때 남침해 버린 것.[14] 이 과정에서 춘천 북방 모진교 진지에 있던 7연대 9중대장 이내흥 중위와 부하들이 전사했다.#[15] 이후 50년 말 7사단으로 전출돼 수색중대장으로 싸우다 전사해 7사단 수색대대의 우상이 되기도 했다. 심일의 영웅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보는 주장도 있었으나, 진상조사로 인해 오히려 사실 증명이 되었고, 미국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는 자료도 발굴하게 된다.[16] 이는 당일 안으로 춘천을 점령해 그간의 졸전을 만회하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어찌된 일인지 옆에 멀쩡하게 남겨진 소양1교를 내버려 두고 여기에 몰렸는데, 정황상 전차에게 양보했거나 미끼라고 봤을 수도 있다.[17] 당시 이들의 포병전력은 105mm 곡사포의 공수부대용 경량화 버전 13문밖에 없었다.[18] 이 과정에서 춘천의 주민들이 직접 혹은 민간 트럭을 이용해 포탄을 날라다 주는 등 상당한 도움을 줬다.[19] 이게 어느정도냐면 그간 7연대와 교전하며 발생한 수보다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가 많았기에 인민군 2사단은 '''전투력의 40%를 상실하여 전멸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이 전투를 아예 '16 포병대대의 대포격전' 으로 부르기도 한다.[20] 자세한 건 아래 여담 항목의 북한군 간 쌍방교전 참조.[21] 게다가 옹진에서 6월 20일에 홍천에 도착해 8연대와 임무교대한터라 현지 지형을 익히기는커녕 철조망과 지뢰도 없었기에 쭉쭉 밀려났다.[22] 해치가 열려있으면 수류탄과 화염병을, 해치가 닫혀있으면 81mm 박격포탄을 궤도 밑으로 밀어넣으며, 이조차도 안되면 연막탄으로 시야를 가린다. 그럼에도 계속 저항하면 화염병을 엔진실 상판 덮개 위에 투척한다.[23] 참고로 현대의 전차와 달리, 이 시대의 전차는 해치 잠금장치가 부실하거나 없었기에 밖에서 해치를 열기가 쉬웠고(영화 퓨리를 보면 이게 잘 나타나있다.) 특히 T-34 전차의 경우 전차 자체의 문제로 시야 확보가 매우 어려워 자주 해치를 열었기에 이 약점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그리고 SU-76 자주포는 원래 지붕 자체가 없이 상부가 뻥 뚫린 개방형 차량이었고 6.25 전쟁에 투입될 때는 얇은 철판으로 지붕을 씌우는 개량이 된 상태였으나 여전히 수류탄 등 보병화기 공격과 근접전투에 매우 취약하였다.[24] 해당 전투 기록을 보면 전차대수, 종류, 격파 수량 등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참고로 조달진 일병은 1928년 11월 18일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 두지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이등중사로 진급해 7월 24일 경북 상주군 유곡 북방전투에서 7명의 대전차 특공대에 자원해 이 또한 성공시켜 2계급 특진해 소위가 되었으며, 불사조, 탱크(킬러)로도 불렸다. 이후에도 맹렬하게 싸워 10월엔 을지무공훈장과 함께 한국군 최초로 미 동성훈장을 수훈하였다. 순천시 역시 2015년에는 제31보병사단 95연대 5대대가 ‘조달진대대’로 명명됐다. 또 순천 주암면에 ‘조달진로’가 생기기도 했다.[25] 북한 7사단이 전투 후 12사단으로 개명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최근 연구와 6.25 전쟁사 제2권에 의하면 7사단설은 오류라고 지적하였다.[26] KBS1 역사 스페셜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쟁 실패 원인이 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라며 통탄했다고 한다.[27] 이후 북한과 베트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억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문에 훗날이 있을 수 있었던 것.[28] 역사스페셜 33회: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1999.6.26)[29] 이는 국공내전 이후 북한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들고왔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