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집

 




'''김화집의 수상 이력'''




[image]
金和集
1909년 5월 26일 - 2006년 7월 8일
평양에서 태어나 축구 선수로 활약하다 1933년에 심판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조선축구협회 창립회원이었으며 심판 이사였다.
중앙여고 교사로 활동하던 김화집은 여학생들 유교적 관습의 족쇄에 억눌려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축구를 보급하기로 결심하고, 교무부장이던 1946년 김화집은 교장과 상담해 여자축구부 창설의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학부모들을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1] 여러 어려움 끝에 축구부를 창설하게 되고, 활달하게 활동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 학부모들의 반대도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1949년 체육신문사 주최로 열린 1회 전국 여자 체육대회에서 김화집이 지휘하는 무학여중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50년 6.25가 발발함으로 자연스레 대회는 중지되었다.
1952년 김화집은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게 된다. 허나 전후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국제대회 출전도 제대로 못하다 동남아 순방경기를 하게 되었는데[2] 원정 비용으로 14600달러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퇴하게 된다.
또한 이와 동시에 김화집은 1951년 같이 심판으로 활동하던 여러 동료들과 함께 피파로부터 최초로 한국인 국제 심판에 위촉되어 심판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3]
이후 축구인으로 여러 활동을 이어가다 1985년 끝내 축협에서 여자 축구 대표팀을 재창단시키는 데 성공하며 단장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이후로도 여자 축구팀은 해체와 재창단, 선수 선발의 잡음[4] 등 여러 문제와 부딪치게 된다.
평소에도 국내 여자 축구 대회라면 분주하게 찾아다니며 정성을 쏟던 김화집답게 국제 여자축구대회 개최에도 열과 성을 쏟았다. 한국 여자 축구의 기량이 떨어지는 건 맞으나 그만큼 세계축구와 더 부딪쳐야 한다는 지론을 가졌던 김화집은 2005년 동아시아 대회에서 한국이 북한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자 한국 여자축구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음에 기뻐했다. 여자축구 대회를 개최를 열망하던 그의 염원대로 2006년, 피스퀸컵이 한국에서 개최되었다. 고인은 그 소식을 듣고 한국이 여자 축구를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게 되었다며 감격했지만, 이미 97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끝내 겨울에 열릴 대회는 보지 못하고 그 해 여름 영면에 들었다. 그래도 여자축구에 평생을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타계 1년 전인 2005년에 김용식(축구인), 홍덕영, 이회택, 차범근, 거스 히딩크, 정몽준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니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1. 관련 문서



[1] 시아버지 밥상을 발로 걷어차게 할 생각이냐는 항의도 있었고 파면 건의도 있었다고 한다.[2] 동남아가 아시아 축구를 주도하던 시절[3] 심판으로서의 철칙이 있었는데, 항상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경기 당일 날씨 정보를 알아야 하며, 관중 정보를 숙지해야 하며, 경기장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양팀의 최근 전적을 알아야 하며, 양팀의 경기전술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양팀 지도자의 성향을 알아야 하며, 현재 동료 심판들의 판정 성향 추이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4] 북한과의 경기라고 체제 홍보를 위해 못생긴 선수를 제하고 예쁜 선수를 선발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