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거스 히딩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네덜란드'''}}}
{{{-2 41대, 48대
'''대한민국'''}}}
{{{-2 59대
'''호주'''}}}
{{{-2 27대
'''러시아'''}}}
{{{-2 9대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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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PSV'''}}}
{{{-2 29대, 37대
'''발렌시아'''}}}
{{{-2 46대, 50대
'''첼시'''}}}
{{{-2 26대, 32대


'''발렌시아 CF 역대 감독'''
빅토르 에스파라고
(1988~1991)

<colbgcolor=#f58220> '''거스 히딩크'''
'''(1991~1993)'''

엑토르 누녜즈
(1993~1994)
호세 마누엘 리엘로
(1994)

'''거스 히딩크'''
'''(1994)'''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1994~1995)

'''거스 히딩크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image] '''올해의 감독상'''
'''2001년'''

'''2002년'''

'''2003년'''
나세르 알 조하르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팀)

'''거스 히딩크'''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차경복
(성남 일화 천마)


'''Curaçao National Football Team'''
''' 이름 '''
'''거스 히딩크'''[1]
'''Guus Hiddink'''[2]
''' 출생 '''
1946년 11월 8일 (78세) /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 비스[3] 파르세벌트
''' 국적 '''
네덜란드
''' 신체 '''
182cm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더 흐라프스합 (1967~1970)
PSV 에인트호번 (1970~1972)
더 흐라프스합 (1972~1976)
NEC 네이메헌 (1977~1981)
워싱턴 디플로매츠 (1978 / 임대)[4]
산호세 어스퀘이크스 (1980 / 임대)[5]
더 흐라프스합 (1981~1982)
''' 감독 '''
더 흐라프스합 (1982~1984 / 수석코치)
PSV 에인트호번 (1984~1987 / 수석코치)
'''PSV 에인트호번 (1987~1990)'''
페네르바흐체 SK (1990~1991)
발렌시아 CF (1991~1994)
'''네덜란드 대표팀 (1994~1998)
'''레알 마드리드 CF (1998~1999)[6]
레알 베티스 (2000)[7]
'''대한민국 대표팀 (2000~2002)'''
'''PSV 에인트호번 (2002~2006)'''
'''호주 대표팀 (2005~2006)'''
'''러시아 대표팀 (2006~2010)
''' '''첼시 FC (2009)'''[8]
터키 대표팀 (2010~2011)
안지 마하치칼라 (2012~2013)[9]
네덜란드 대표팀 (2014~2015)
첼시 FC (2015~2016)[10]
중국 U-21 대표팀 (2018~2019)
PSV 에인트호번 (2019~ / 기술고문)
퀴라소 대표팀 (2020~)
''' 국가대표 '''
없음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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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울산대학교 (경영학 / 명예박사)
'''종교'''
무종교[26]


1. 개요
2. 특징
2.1. 이름
2.2. 가족
2.3. 여자친구
3. 선수 경력
6. 논란
7. 여담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의 축구인.
여느 명장들이 대체적으로 그랬듯이 선수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감독으로서는 클럽과 국가대표팀 양면에서 성공을 이뤄낸 보기 드문 명장이다. 주요 국가대표팀 감독 성과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의 네덜란드 4강 진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대한민국 4강 진출, 2006 FIFA 월드컵 독일의 호주 16강 진출, UEFA 유로 2008의 러시아 4강 진출이 있으며, 클럽 감독 성과로는 PSV 에인트호번UEFA 챔피언스 리그,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KNVB 베이커에서 우승시켜 달성한 트레블첼시FA컵 우승 등이 있다.

2. 특징


"경험이 부족한 젊은 감독들이 복잡하게 전술을 짜거나 선수들 위치를 끌어내려 역습을 꾀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큰 대회에서는 전술을 단순하게 짜고, 나머지는 선수들의 역량에 맡기는게 더 낫다."

2018 월드컵 종료 후 인터뷰에서


2.1. 이름


네덜란드어의 g의 발음은 /x/[11]으로 한국어로 표기하면 '''후스''' 또는 '''휘스''' 히딩크가 좀더 가까우며, 2005년 제정된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휘스 히딩크'''로 표기된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임하기 이전 국내 언론에서는 주로 '후스' 히딩크로 표기하였으나, (좀더 쉬운 영어식 발음인) '거스'라고 불러 달라는 본인의 요청이 있은 이후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거스' 히딩크라 표기한다.
한국팬들은 그가 부진할 때[12] '오대영'이라 부르다가, 그가 4강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보여주고 나자 '구국의 명장 희동구'라고 칭송했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후이딩커(暉定克)이라고 표기했다.[13]

2.2. 가족


히딩크의 가문은 고향인 파셰펠트에서 수백년간 뿌리를 내린 명성이 있는 집안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게트 히딩크는 2차 대전 당시 겉으론 시청 공무원직을 수행하며 암암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는데,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지만 유대인들을 숨겨주거나 배식표를 빼돌려 그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었고, 독일군이 배급하는 식량을 빼돌려 레지스탕스의 군량을 조달했으며, 적지에 떨어진 미군 조종사들을 중립국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아이젠하워로부터 감사장을 전달받았다.
6명의 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히딩크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학교 수업을 자주 땡땡이를 치곤 했다고 한다. 사냥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가 부추겼다고 하는데, 덕분에 외할아버지로부터 모험심이나 결단력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아예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입수한 적도 있었다.[14] 아무튼 이런 개구쟁이가 공차는 걸 좋아해서 결국 축구선수가 되었다.

2.3. 여자친구


히딩크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2002년 월드컵 당시나 지금이나 알려진게 많지 않다. 일단은 1살 연하의 이니 히딩크와 결혼하여 1969년과 1972년에 각각 미셸 히딩크와 마크 히딩크가 태어났지만, 부인 이니와는 이미 2002 월드컵 이전부터 별거 상태였고 20살 연하의 엘리자베스 피나스와 교제중인게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그녀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출신으로, 독일 자동차 브랜드 오펠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흑인 여성.[15]
이처럼 부인과 이혼하지 않고 별거 중인 상태에서 애인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다니는게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그냥 단순한 사생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지만, 유교적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영 좋지 않은 시각이 강했던 탓에 히딩크호 출범 초기부터 기자들이 집요하게 정보를 캐내려 했다. 물론 서유럽을 비롯한 서양쪽 문화는 사생활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심각한 결례인데다[16] 히딩크 본인의 성격부터가 불같기로 유명했던지라[17]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를 두고 집요하게 질문을 날린 기자들을 향해 "머리통을 발로 차 버리고 싶다"며 불쾌한 감정을 보이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와의 컨페더컵 조별리그 경기와 유럽 전지 훈련에서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5-0 으로 참패하는 등 2001년 내내 성적 부진 문제가 제기된 와중이었던지라, 엘리자베스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리더쉽 문제라는 언론의 문제 제기도 있었다.
하지만 커리어 우먼답게 진중한 성격의 엘리자베스가 히딩크의 불같은 성격을 통제하면서 차츰 히딩크가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고, 2001년 말에는 휴가를 추가로 다녀오는 문제로 이용수 당시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히딩크 감독이 언쟁을 벌이며 그만두네 마네 등의 험악한 말까지 오가자 엘리자베스가 히딩크를 진정시킨 뒤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을 설득해서 히딩크가 연말 휴가를 다녀올 수 있게 되는 등의 여러 활약을 해냈다. 이용수 전 기술위원장의 인터뷰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던터라, 히딩크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개인적으로 장애인 등의 소외 계층을 지원하는 단체를 찾았고 나중에 히딩크에게 한국에서 자선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그 결과 탄생한게 바로 히딩크 재단이다.''' 히딩크의 인터뷰 히딩크가 현재까지도 한국에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여러 애정을 표시하고 히딩크 재단 활동도 계속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엘리자베스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3. 선수 경력


[image]
히딩크는 처음부터 프로선수가 되고자 다른 선수들처럼 유스팀에 입단해서 프로선수가 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스포츠 전문대학(CIOS)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CIOS 졸업 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18] 더 흐라프스합의 코치로 부임했지만 나이도 스물이고 기량도 괜찮았기 때문에 감독이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곧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
1960년대 당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AFC 아약스PSV 에인트호번같은 강팀을 제외하곤 급료도 부족한 편이어서 선수들 대부분이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훈련하는 투잡을 뛰었다고 하는데 히딩크는 코치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오전에 유소년을 지도하고 오후에 팀 훈련에 참가했다고 한다. 더불어 야간에 체육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 준비도 같이 했다고. 3시즌 동안 데 그랴프샤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PSV로 이적하였는데 주전 경쟁이 심하여 제대로 출전하지도 못했다. 다시 데 그랴프샤프로 이적했고, 후에 나이메이건으로 이적했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체육교사와 선수를 겸임했는데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경험[19]이 훗날 감독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20]이 됐다고 한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시즌 종료 후 즉, 5월부터 다음 시즌이 시작되는 9월 즈음까지 미국에 잠시 임대되어 미국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룸메이트가 조지 베스트였다고. 나이메이건에서 은퇴 후 다시 더 흐라프스합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선수가 부족한 탓에 감독의 부탁으로 1시즌 더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포지션은 리베로. 하지만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하게 은퇴한다.

4. 감독 경력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경력은 히딩크호 문서에서 별도서술하고 있다.

5. 대한민국과의 관계




6. 논란


[image]
[image]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한국에서 벌어들인 광고 수입과 인세를 실제보다 적게 신고했다는 혐의와 월드컵 직후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벨기에 아셀에 집을 얻은 뒤 거주지 허위 신고를 해 '''17억 가량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21]로 인해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이던 2006년 7월 탈세 혐의로 네덜란드 검찰에 의해 법정에 기소되었다. 이후 2007년 1월과 2월 각각 1, 2차 공판에 나서 본인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6개월 집행유예와 벌금 4만 5천 유로(약 5천 500만원)를 선고받았다.
히딩크 입장에서는 그나마 실형을 모면한 것이 다행스러운 점이라는 입장이었으나, 이로 인해 그동안 국제 축구계에서 쌓아온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히딩크의 커리어에 있어서 상당한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첼시 FC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부정적인 시선들을 어느 정도 거두는 데 성공했으나, 히딩크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거론되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7. 여담


  • 아들만 6명인 아들부잣집 출신인데, 동생들과 나이 차가 꽤 있다고 한다. 딸 한 번 낳아보려고 낳은 게 바로 밑 동생이라서 형들과 함께 그 동생을 여자애라고 놀린 적도 있다고 자서전에 나왔다.
  • 한국 음식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갈비생선전은 그래도 입에 맞았던지 잘 먹었다고 한다.
  • 자국어인 네덜란드어는 당연하고,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스페인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한다.[22] 그래서 한국 감독 시절 차두리와는 통역없이 독일어로 대화하기도 했고, 2002 월드컵 기간중에도 스페인어나 독일어 등으로 해당 언어권 기자와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전 승리 직후 인터뷰 스페인어로 인터뷰하는 히딩크 또한 2014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직접 만났는데 이 때도 독일어로 대화했다. 당시 영상[23]
  • 하계종목과 동계종목의 은인이다. 하계종목인 축구의 경우 알다시피 신화를 쓰며 지금의 한국축구를 일으켰고 동계종목의 경우 보프 더 용 코치가 빙상연맹의 병크를 너무 잘 알고 있어 한국행을 망설이자 자신이 감독으로 있던 기간 동안 한국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경험을 꺼내며 보프 더 용 코치의 한국행을 이끌었다.
  • 2002 한일 월드컵이 폐막한 직후 명예 서울특별시민증 수여식에 참여하려고 서울특별시청을 방문했다. 이 때 당시 서울특별시장 이명박의 아들인 이시형과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서울특별시 명예 시민증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명예국민이 되었다. 명예국민의 혜택은 2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무비자로 한국을 방문할 수 있고[24] 둘째로는 명예국민이 신청하면 아무 조건이나 심사 없이 즉시 한국 영주권(F5)을 받을 수 있다.[25]
  • 제주특별자치도 용머리 해안 근처에 히딩크가 먹고 싶어하는 햄버거라며 광고하는 햄버거 집이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 같은 네덜란드 사람인 헨드릭 하멜 기념관이 있다.
  • 축구인이기는 하지만 야구에도 애정이 많은지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유소년 야구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1]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면 '휘스'가 맞지만, 본인의 요청으로 공식 언론에선 ''''거스''''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다. 영상 한국의 외래어 표기 규정에서는 본인의 요청이나 그에 준하는 요구가 있을 경우, 표기법에 대한 예외를 인정한다.[2] IPA 표기는
[ˈɣys ˈɦɪdɪŋk]
로 알려져 있다. 현지 발음과는 별개로 표준 네덜란드어 IPA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BBC에 의하면 스코틀랜드 영어의 Loch(로흐)에 프랑스어의 u발음을 합쳐서 KHUESS HIDD-ink(휘스 히딩크)라고 하면 된다고 한다.
[3] 現 아우더에이셀스트레이크[4] 워싱턴 디플로매츠는 시즌 종료 후부터 새 시즌 개막 전까지 임대를 다녀왔다.[5] 산호세 어스퀘이크스도 역시 시즌 종료 후부터 새 시즌 개막 전까지 임대를 다녀왔다.[6] 시즌 중 경질.[7] 시즌 도중 부임 뒤 성적부진으로 경질.[8] 시즌 도중 부임.[9] 시즌 도중 부임.[10] 2015년 12월 19일에 부임.[11] 가래 끓는 소리. 바흐, 하바롭스크의 ㅎ가 이 발음이다. 중국어의 /h/이 바로 이 음가이다.[12] 당시 프랑스는 랭킹 1위, 체코는 랭킹 2위였으며, 체코와의 경기는 체코의 홈에서 열렸다.[13] 2016년 12월 현재는 시딩커(希丁克)라고 표기한다.[14] 아버지가 학교 교장이었고, 아들이 땡땡이 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혼낸 적은 없다고 한다. 장인이 자기 아들이랑 놀고 싶다는데 혼낼 수야 없으니.[15] 네덜란드의 흑인들은 대부분 수리남 출신이며, 간혹 퀴라소 출신도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수리남 사람들을 여전히 자국인으로 간주할만큼 우호적으로 대하며, 심지어 수리남 국적이면 네덜란드 영주권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중에서도 클라렌스 세도르프, 루드 굴리트, 에드가 다비즈, 버질 판데이크 등이 수리남 출신.[16] 한국 및 동양권 사람들이 서양쪽에서 흔히 범하는 실수에 속하는게 바로 결혼, 연애, 가족, 자녀에 대한 질문. 아주 가까운 사이일 때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해준다면 모를까, 이쪽에서 먼저 "결혼은 했냐", "애인은 있냐" 등의 질문은 매우 큰 결례로 통한다. 왜냐하면 개인주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라고 여기기 때문.[17] 사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비롯한 북서유럽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좀 공격적으로 들리더라도 표현을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하는 편. 당장 히딩크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인 조 본프레레 또한 한국 감독 시절 직설적인 인터뷰로 언론과의 관계가 매우 불편했다.[18] 여담으로, 농구야구 지도자 자격증도 함께 취득했다고 한다.[19]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칼을 들고 교실에 들어온 아이도 있었는데, 따끔하게 타일러서 충공깽한 사태를 막아냈다고.[20] 장애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히 심리전에 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슈퍼스타들을 휘어잡은 것이나, 한국에 와서 안정환, 홍명보 등 스타급 선수들을 길들일 때도 유효했다고. 이러한 심리전은 상대팀을 위축시키기도 했는데, 1998년 당시 한국대표팀이 연습장에 도착한 걸 보고도 무시하고 30분 넘게 연습을 이어간 사례나 2002년 천하의 이탈리아를 생까고 8강전을 준비한다며 태연히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16강 경기를 관전하러 간 일 등등. 심리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괜히 지장이니 명장이니 소리를 듣는게 아니다![21] 여자친구 엘리자베스가 주로 암스테르담에 기거했던데다 히딩크 본인은 해외팀 및 원정팀과의 경기로 인해 실제로 이 집에 거주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22] 유럽의 경우 인접한 국가끼리 언어가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다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드물지 않은 편. 특히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는 어느 정도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23] 영상에서 보다시피 차범근과는 1998 월드컵에서 맞대결을 펼친 악연(?)이 있지만, 이걸 서로 농담 따먹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화한다. 사실 히딩크가 2001년 한 해 동안 엄청난 비난을 견딜 때 지지해준 극소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차범근.[24] 다만 히딩크는 네덜란드 국적이기 때문에, 이미 네덜란드 여권만 갖고도 대한민국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다.[25] 영주권자는 한국에서 입국, 거주, 취업에 제한이 없으므로 영구 거주가 가능하다. 그리고 한국 공항에서 내국인 줄로 출입국이 가능하다. 물론 히딩크가 한국 거주를 원할 때나 의미가 있지만, 애초에 조건없는 영주권 부여 자체가 외국인에게는 나름대로의 혜택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