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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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해설자, 행정가.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을 맡았다. 차두리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국내에서 고려대학교,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에서 활약한 뒤 만 26세의 나이에[9]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축구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활약했다.
2. 상세
(당시 독일 대표팀 수석코치였던 요아힘 뢰프가 화면에 잡히자)
'''차범근''': 아, 저 코치가 예전에 저랑 팀 동료였는데... 이름이?"
'''김성주''': 요아힘 뢰프 코치입니다.
'''차범근''': 아, 맞습니다. 선수 시절 제 동료였었죠. 좋은 선수에서 이제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
'''김성주''': 선수 시절 요아힘 뢰프는 어땠나요?
'''차범근''': '''제 교체 선수였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중계 中
두팀에서 모두 UEFA컵 우승을 들어올렸으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고[10] 분데스리가 통산 98골로 11년간 외국인 최다 득점 타이틀을 보유하였고,[11] 컵대회를 포함하면 121골을 넣었다.[12] 또한 국가대표 통산 130경기 56골로 한국 국가대표팀 역대 A매치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등[13][14] 오랜기간 한국 축구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한 레전드다.'''캐스터''': "차범근, 독일의 No.1 외국인 선수 입니다."
해외의 축구 중계 방송 中 관중석의 차범근이 화면에 잡히자
무엇보다 공군 축구단에서 군복무(27개월+5개월)를 하고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후 만 26세의 나이로 분데스리가에서 뛰기 시작했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군복무가 아니었다면 더 일찍 유럽 축구 무대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렇게 됐다면 유럽에서 더 뛰어난 활약과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실제로 27개월 단축 군복무 후 분데스리가의 다름슈타트에서 데뷔전까지 성공적으로 치렀으나, 군복무 단축에 대한 논란이 생겨 남은 5개월 군복무 기간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3. 개인 신상
본관은 연안(延安, 현재 황해도 연안군)이며,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서 삼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은 배우자 오은미와 그 사이에 딸 1명(차하나)과 아들 2명(차두리, 차세찌)이 있다. 그 중 장남인 차두리는 대를 이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었다. 차남 차세찌가 2018년 배우 한채아와 결혼하여 배우 며느리를 맞이하게 됐다. 이에 앞서 차두리도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회장 신철호의 장녀 신혜성과 결혼해 며느리를 봤으나 이후 이혼으로 가족의 연은 끊어졌다. 차두리와 신혜성 사이에 손녀 차아인과 손자 차아일이 있으며 차세찌와 한채아 사이에 손녀 한명이 있다한다.
4. 축구인 경력
국가대표 136경기 출장, 56골 기록, 한국인 선수 최초의 센추리 클럽에 가입, 한국인 선수 중 역대 최다 A매치 득점 기록,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24년 139일), 독일 분데스리가 1부 리그에서 12년간 총 308경기 출장(외국인 선수 중 역대 3위), 98골(외국인 선수 중 역대 6위) 기록. 참고로 분데스리가 98골 중 페널티 킥 득점은 0골이다.[15][16] DFB-포칼이나 UEFA 컵 기록까지 포함하면 372경기 121골. 차범근은 인터뷰에서 멀티골은 20번이나 해 봤지만, "해트트릭은 한 번도 못해봤다."고 말했었다.[17]
1976년, 아시아에서 큰 국제대회이던 박스컵에서 말레이시아[18] 를 상대로 7분 남기고 1:4로 뒤진 상황에 차범근이 혼자 세 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무승부를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방송국도 그 경기의 테이프가 없다고 했고[19] 차범근도 두 골은 기억이 나지만, 나머지 한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박스컵도 그렇지만, 이 시기의 국대 축구는 영상이나 문자 매체 등의 상당수가 유실된 상태라서 차범근의 육체적 전성기인 20대 초반의 활약상은 직접 본 사람 외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현역 시절 자료가 부족하다보니 발생한 것이 바로 포지션 논란. 중앙 공격수였는지 아니면 윙어였는지 논란이 분분하다. 하지만, 차범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어, 분데스리가에서는 최전방 투톱으로 뛰었다고 한다. 윙어로 뛰었던 경험 덕분에 클럽에서는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드리블과 측면 활용 능력을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년에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향했다.
4.1. 선수 경력
4.2. 지도자 경력
4.3. 해설자 경력
1998년의 실패 이후 K리그 감독으로 복귀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국가대표 감독 이후 국내의 심각한 비난여론에 의해 도망치듯 중국 프로축구 선전 핑안[23] 감독으로 부임했다.[24][25] 1년 6개월만인 1999년 12월 재계약이 불발되었고 이후로 국내외를 오가며 눈에 띄지 않는 야인 생활을 거듭했다. 하지만 차범근 축구교실만큼은 직접 챙기면서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의지만큼은 뜨거웠는데, 2001년 초에 한 어린이 선수가 '''"우리들이 다치는 걸 걱정해 직접 얼음을 깨고 있는 저 분이 바로 전설적인 축구선수 차범근 감독님이다."'''라는 글과 차범근의 뒷모습을 Daum의 차범근 팬 카페에 올린 사연도 있다.[26]
그러다가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 1998년 내려졌던 자격정지 5년에 대해 사면조치를 취하면서 차범근의 국내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신문선을 SBS에 빼앗긴 MBC가 2000년 12월부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27] 2001년 2월 2일 2억원에 MBC 해설위원으로 계약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개막된 컨페더레이션스컵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 해설은 여러 분석을 내놓는 신문선과 이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포장하는 송재익 콤비를 내세운 SBS가 대세였고 차범근 본인이 딱히 말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허정무를 해설위원으로 내세운 KBS에 오히려 시청률이 뒤지는 상황까지 있었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에 또박또박한 말투, 그리고 '''수십 년간 쌓였던 선수시절 내공 덕에 경기를 한 수 앞 먼저 읽는 해설'''로 차츰 호평이 많아졌고, 2002년 월드컵 본선 때는 오히려 SBS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누르고 MBC가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정타가 된 것이 월드컵 개막 직전인 2002년 5월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 때도 SBS와 동시 중계로 해설을 했는데 당시 김남일의 태클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한 뒤 허공으로 손을 돌리자 신문선은 판정불만에 대한 항의하는 거라고 했지만 차범근은 '''표정을 보고 지단이 부상으로 뛸 수 없다고 해설했으며''' 벤치에서 얼음찜질을 받고 알약 먹는 장면이 잡히자 신문선-송재익은 영양제를 먹으며 컨디션을 관리한다고 언급했지만 차범근은 '''"지금 진통제를 먹고 있네요."'''라는 언급을 했다. '''실제로 지단이 이 날 부상으로 인해 본선에서 제대로 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해설은 저 멀리서 선수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매의 눈을 가진 예언자급 해설.''' 이후 신문선 해설위원의 삽질이 거듭되면서 시청자들도 MBC로 눈길을 돌리고 월드컵 기간 내내 MBC가 일방적인 1위를 달렸고 왕년의 시청률 제조기였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야심차게 영입한 SBS는 2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때 이후 신문선은 다시는 메인스트림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한편 2002년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 감독인 루디 푈러와 소소하게 티격태격한 적도 있다.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루디 푈러는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28] 을 너무 먹은 것 같다'고 맞디스를 했다. 말만 들으면 살벌한 독설 배틀 같지만,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이다. 애당초 저 아스피린 드립은 푈러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루디 푈러 역시 레버쿠젠에서 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냥 친한 친구끼리 틱틱거린 수준. 당시 독일의 국내 여론은 차범근보다 푈러에 대한 비판이 더 강했는데, 그만큼 당시 독일 팀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푈러와 차범근이 따로 만나서 화해는 했다고.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서로 만나 얼싸안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중계방송 시작때 그대로 나왔다,
2003년까지도 계속해서 MBC 해설을 맡았으나 계약기간이 만료된데다 마침 수원 삼성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면서 해설위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2006 독일월드컵 기간에 한해 MBC 해설을 또 맡기로 이면합의가 되어 있었고 여기에 엔트리에서 탈락한 차두리까지 가세하면서 '''부자(父子) 해설위원'''이라는 진풍경으로 또 다시 MBC가 시청률 1위를 기록. 물론 '우승 경쟁 하는 마당에' 월드컵 해설하러 가신다고 서운해 하는 목소리가 그랑블루 안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을 정도인데 다른 팀 서포터들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왔는지는 차범근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모 스포츠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 '미안하다'고 답한 바 있다. 다만 후반기 앞두고 이관우와 백지훈을 영입해 반등에 성공, 준우승을 차지했기에 서포터즈의 우려와 달리 책임은 다했다.
2010년과 2014년 SBS 해설위원으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경기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경기를 해설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그의 인기는 여전했으나 브라질 월드컵에선 나이가 들어서 인지 순발력이 좀 느려지고 말을 버벅대는 부분이 많아지고 다른 방송사의 해설위원들이 선전하면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분위기다.
다만, 전문 해설가가 아니라 방송인으로써도 달변가가 아니기 때문에 해설자로써 한계는 있다. 특히 순발력이 떨어져 머릿속에서 상황은 읽지만 말로 옮겨내지 못해 버퍼링이 걸리기도 한다. 이게 빠른 시간 내에 적당한 말로 옮겨지면 여지없이 명해설이 터지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도 많다. 또한, 특유의 사람 좋은 면 때문에 선수단에게 나쁜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거나[29] 직접 해결책을 지시하지 않는 해설 스타일은[30]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해설까지 집중할 코어 시청자의 대부분은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해설을 더 선호하나 한국에 말주변 좋고 직설적이면서 경기를 읽는 눈까지 갖춘 해설자는 없기 때문에[31] 호불호의 문제다.
축구 중계 시 카메라에 잡힌 축구계 유명 인사들을 잘 소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장지현, 한준희 등이 축구계 인사는 물론 때로는 정재계 인사들마저 귀신 같이 소개하는 반면 차범근은 잘 소개하지 못한다. 요아힘 뢰프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거나[32] 올리버 비어호프가 카메라에 몇 차례나 잡혔음에도 캐스터와 함께 침묵을 지켰던 사례가 있다. 물론 축구해설자의 본분은 잡학 자랑이나 선수 프로필 읊어주는 게 아니라 경기를 풀어주는 것인만큼 큰 단점은 아니나[33] 어쨌든 중계 카메라가 이들을 잡아주는 건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중계 특성상 '''멘트가 중간에 끊어지는 걸 시청자들은 매우 어색해하기 때문에''' 이 점이 축빠들에게 약점으로 지적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미네이랑의 비극에서 전반에만 독일이 5:0으로 브라질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자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셀프디스를 시전했다.[34]
독일 대표팀의 중계를 맡으면 중립을 지키다가도 은연중에 독일 쪽으로 편파해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35] 하지만 프로야구의 편파중계 정도의 완전하게 치우친 모습은 당연히 아니고 잘 들어봐야 알아차릴 그런 정도다.[36] 그랬다면 공중파 해설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차범근 본인의 독일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꽤 중립을 잘 지키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37] 단, 독일이 브라질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가장 고전한 16강전 알제리와의 경기에서는 외질이 두 번째 골을 넣자 기쁨을 감추진 못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마친 후 SBS와 계약이 만료됐고, 재계약하지 않았다. 다만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 때 SBS의 객원 해설로 마이크를 잡은 적은 있다.[38] 계약이 끝난 현재까지도 SBS 직원들과의 친분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4.4. 행정가 경력
2016년 4월에 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지금껏 축구인 생활을 하면서) 감투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감독이나 해설자가 아닌 축구 행정가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밝혔다. #
4.5. 차범근 축구교실
축구인 차범근 최대의 업적을 꼽는다면 '''차범근 유·소년 축구 교실'''로 대표되는 한국의 축구 유·소년 인재 발굴·육성의 토대를 잡은 것이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1978년 다름슈타트에 도착했을 때부터 독일 축구를 배워서 대한민국 축구계에 크게 기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선수생활 말년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수은퇴후 1군팀 코치직 제의가 들어왔었으나 일본 아이들이 잔디구장에서 축구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 일본인들은 지금 30년을 내다보고 축구선수를 키우고있다 ''' 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생각했던 계획을 이루기 위해 1990년 독일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축구교실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차범근 축구교실은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서, 아니 대한민국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학원 스포츠 밖에서 유·소년 양성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이다. 오래 전부터 학원 축구의 폐해를 지적하고 유·소년 축구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았으나, 이를 실천에 옮긴 이는 차범근이 처음이었다. 차범근 축구교실을 시작할 때는 외부의 지원 없이 차범근이 개인 재산을 사용해야 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성공리에 마치고 스포츠토토 수익금으로 자금력을 확보한 대한축구협회가 비로소 유·소년 육성 정책을 시작했고, 이들 2002 키즈가 바로 훗날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이 되었으니 차범근의 선구자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차범근축구상'''을 제정해 이동국, '''박지성''', 기성용 등 축구 꿈나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유·소년 육성과 지도자 교육이라는 부분에, 유럽 축구를 먼저 경험한 차범근이 그 터를 닦았고 이는 한국 축구계의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
날아라 슛돌이에도 등장했으며 첫 화에 21 대 0 으로 대승을 거뒀다.. 이강인이 있던 슛돌이 3기를 위협했던 거의 유일한 팀. 이상윤이 당시 감독으로 등장했으나 승부욕에 선수들을 크게 질책해 댓글에 악플이 달리기도.
5. 플레이 스타일
아시아인으로서는 다시 나오기 힘든 '''무지막지한 속도와 괴물같은 피지컬'''을 동시에 갖춘 선수였다. 사기적인 신체능력을 뒷받침하는 '''강철같은 체력'''과 '''정교하고 빠른 슈팅능력''' 또한 이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났으며, 치달을 위주로 하는 플레이스타일에 가려져서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드리블, 패스, 헤더, 오프더볼, 연계, 수비가담 등 모든 능력치들이 수준급이었다. 한마디로 만능 공격수.
순수 퍼포먼스와 임팩트로만 봐도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임에 틀림없다. 클럽에서는 본인의 이타적인 플레이로 인해 오히려 저평가받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당대 리그 최고의 공격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았고,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가장 첫눈에 들어오는 능력은 역시 속도와 경합력이다. 어떤 수비수들을 만나더라도 자신있게 치고 달리면서 스피드/몸싸움 경합을 거는 편인데, 대부분의 경우 최소 반칙 이상의 성과를 얻어내는 편. 주력 자체는 엄청난 편인데, 그에 반해 민첩성이나 순간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최전방에서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는 능력보다는 한단계 아래에서 볼 운반과 치달을 통한 돌파에 훨씬 더 강점이 있다.
뛰어난 피지컬로 등지는 플레이가 가능하고 강한 슈팅력, 왕성한 활동량, 높은 체공력과 더불어 헤더슈팅과 연계능력이 뛰어난 무결점 스트라이커의 대표격이다. 저 당시 차범근과 비슷한 플레이스타일을 가진 선수는 대표적으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있다.[39]
기본적인 신체조건은 평균적이나(181cm 79kg)[40] 피지컬이 어마어마한 데다 그 '''흉기같은 몸'''에 100m 달리기 11.02초라는 엄청난 주력을 겸비했다. 아시아인이라는 선천적인 열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피지컬 떡대들인 분데스리가에서 강력함을 과시했을 정도로 타고난 피지컬이 끝내줬다고 한다.
체공력을 이용한 강한 헤더슈팅으로 차범근의 경기 스페셜을 보면 헤딩골의 비중이 상당하다. 게다가 슈팅력도 디디에 드록바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분데스리가에서는 주로 최전방 투톱으로 뛰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국가대표로 활약할 때의 포지션은 윙어로 뛰었다.[41] 이 때문인지 득점력 못지 않게 연계 플레이에서 강점을 보였다. 인사이드 패스와 원터치 패스가 뛰어났으며, 크로스도 수준급이었다. 자신이 골을 넣을 수 있는 상황이어도 주변에 동료가 골을 더 잘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지체하지 않고 패스하는 이타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보이기도 했다.
활동량도 뛰어나서 밀린다 싶으면 미드필더 진영까지 내려가 공을 따오기도 하는 등, 당시의 전형적인 골게터 스타일 공격수와는 상당히 다른 선수였다. 여기에 부상 빈도도 적은 편이었으며, 전방에서 몸싸움을 구사하고도 신사적인 플레이로도 명망이 높아 현역 전체를 통틀어서 수집한 카드는 옐로카드 단 1장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듯 경기투입 안정성까지 덤으로 갖췄으니, 그야말로 현대 완성형 공격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신기한 점은 차범근의 슛 스페셜들을 보면 다른 골게터들과는 달리 슛이 대부분 허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는데 일반 선수들이라면 일명 '''소녀슛'''이라는 명칭으로 놀림받으나 차범근은 '''그 슛이 무진장 빠르다.''' 때문에 공 속력이 느리기는커녕 '''키퍼가 다이브하기도 전에''' 들어가는 골이 많다. 그렇다고 고각도로 못 차는 것도 아니라서 그야말로 키퍼 입장에서는 이지선다(...).
6. 평가
독일 현지에서의 차범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SBS에서 기획한 차범근 다큐멘터리. 국내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에 이미 독일에 진출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낸 성적인 만큼 정말 대단한 것.[42] 국내에선 '갈색폭격기', 독일에선 '차붐'이라 불리며 유명세를 탔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이 조그만[43][44] 동양인 축구선수에게 세 번이나 놀랐는데, 하나는 축구를 너무 잘해서, 또 하나는 명문대인 Korea University 출신이라서[45] 마지막으로 명문대학교 출신인데 영어를 전혀 못해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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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회자하기로는 독일인들이 차범근의 크고 튼실한 다리근육 덕에 허벅지 밖에 안 보였다는 말을 했다.[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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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내가 누구냐고? 가서 너네 아빠한테 물어봐.
-부모에 의해 얼떨결에 함께 사진 찍은 어린이들이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묻는 질문에 차범근의 답[48]
Sportbild지에서 선정한 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 3톱에 같이 선정된 다른 두명은 해당년도 발롱도르 수상자인 케빈 키건과 해당년도 발롱도르 2위이자 그 이듬해 발롱도르 수상자인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2회의 발롱도르 수상자들이다.
1980년 12월 당시 UNICEF가 후원한 FC 바르셀로나 vs 세계 올스타 경기에서 리저브 선수로 선정되어 조르조 키날리아의 백업으로 출전하였다.[49][50] 경기 결과는 바르셀로나의 3:2 승리. 출처
차붐이 1979/80 부터 1985/86 7시즌동안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순위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숫자가 낮을수록 평가가 높은 것이다.
1979/80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전년도 발롱도르 수상자)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1980/81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981/82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82/83
1. 루디 펠러(2.32)
2.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983/84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1)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984/85
1. 프리드헬름 푼켈(2.81)
2.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3. 클라우스 피셔(2.82) (분데스리가 최다득점)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칼 알고어(2.97)
5. 차범근(3.31) (루메니게 인테르 이적)
1985/86
1. 칼 알고어(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3.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7. 차범근(3.18). 리그 득점 4위
말 그대로 80년대 분데스리가의 정상급 공격수로서 그때부터 축구전문가들에게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포인트. 특히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에 무려 '''36회'''나 선정되었는데 이는 분데스리가에서 뛴 역대 아시아 선수 중 독보적인 1위 기록이다. 참고로 위 표를 볼 때 참고할 사항은 독일에서의 축구 평점은 낮으면 좋다. 즉, 1점을 받으면 최상급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들은 것이다. 고등학교 내신 등급을 생각하면 쉽다.80년대 초반 79-80부터 83-84까지 5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306
2. 차범근 2.72
3. 루디 푈러 2.727 - 3시즌 평균
4. 만프레드 벅스뮐러 2.865- 4시즌 평균
5. 라이너 게예 2.886
6. 클라우스 알로프스 2.966
7. 칼 알고베르 - 2.9925 - 4시즌 평균
8. 프라이드헬름 푼켈 - 3.012
9. 위르겐 밀렙스키 - 3.012
독일에서의 현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08/09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엘 레버쿠젠과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경기를 차범근이 독일에 가서 관람한 적이 있었다.(관련기사 동영상) 차범근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부인과 같이 경기를 관람했기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이 못 알아봤었으나 전광판의 카메라가 딱 비추자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고, 경기를 진행하던 레버쿠젠과 코트부스의 선수들도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다가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파트리크 헬메스와 슈테판 키슬링, 카어슈텐 라멜로프같은 선수들은 직접 차범근에게 찾아가서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 찍기를 요청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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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범근이 첼시 FC에 수원 감독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레버쿠젠 출신인 미하엘 발락[51] 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얘기한 것도 유명한 얘기. 한때 '''귀화 요청'''도 있었는데 거절했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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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0일 수원 삼성과 첼시 FC의 친선전이 끝난 이후 차범근 감독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무리뉴 감독.
81시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던 시절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상대팀의 겔스도프에게 고의성이 짙은 육탄공격을 받아 선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심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54] 이 때,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난리가 나서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에게 살해 위협 소동까지 벌였다. 프랑크푸르트팀은 겔스도프를 고소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차범근의 동의를 구했으나 차범근은 고소를 취하하고 그를 용서했다고 한다.[55]# 그리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했을 때 겔스도프와 재회하는데, 그 이후 겔스도프는 타 팀 선수의 거친 수비로부터 차범근을 지켜주게 된다. 이후 겔스도프와는 절친한 사이로 지내는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 분데스리가는 엄격하게 파울을 제재하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분데스리가 11시즌과 A매치 135경기를 포함한 선수생활 동안 퇴장 0회, 경고 1회를 기록한 페어플레이어 이기도 했는데 현재보다 거친 파울이 잦았던 80년대의 과격한 축구에서 저러한 태도로 경기에 임했다는 것도 존경스러운 부분. 유일한 경고는 슈투트가르트 원정경기때 독일 국대이자 당대의 명수비수였던 칼 하인츠 푀르스터가 상대로, 차범근의 술회로는 자신을 10번이나 거칠게 넘어뜨렸는데도 경고를 받지 않고 되려 푀르스터에게 태클을 하자마자 역으로 경고를 받았다고 회상한다.
여담으로 현 독일 대표 팀의 감독인 요아힘 뢰프 감독은 선수 시절 차범근과 같이 선수생활을 했었고, 주전에서 밀려 항상 서브멤버였다. 차범근이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독일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석코치[56] 였던 요아힘 뢰프가 카메라 화면에 잡혔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저 코치가 예전에 저랑 팀 동료였는데...이름이..."'''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성주 캐스터가 '''"요아힘 뢰프 코치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맞습니다. 선수 시절 제 동료였었죠. 좋은 선수에서 이제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57] 라고 말했다. 그러자 캐스터가 다시 물었다. '''"선수시절 요아힘 뢰프는 어땠나요?"'''라고 묻자, 차범근은 시크하게 '''"제 교체 선수였습니다."'''라고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에서, 차범근이 추첨자가 되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차붐이 죽은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을 정도. 외국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축협에 대한 국내 비판 여론은 어마어마했다.[58] 더군다나 차범근 대신 뽑힌 세계 최고 축구대회 추첨자가 하필이면 축알못 여배우였으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해설을 하던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 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9]
당시, 독일 국대 감독이었던 루디 푈러가 이 말을 듣고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을 너무 먹은 게 아니냐?'[60] 며 농담을 섞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61]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감히 차붐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라고 오히려 자국 대표 팀 감독인 루디 푈러를 깠는데 진짜로 너 따위가 차범근님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라는 뉘앙스보다, '''농담이어도 정도껏 해야지라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했기 때문에 까인 측면 + 독일 국민들도 예선전 경기력의 실망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결국 루디 푈러 감독이 차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전했다고 하며 차붐도 훈련장에 찾아가 화해했다고 한다. 당시 뉴스 소개영상. 참고로 루디 푈러는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을 우승시킨 최고의 스타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차두리에게는 푈러 '''아저씨'''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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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 당시 아르센 벵거가 차범근에게 엄지를 지켜드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중계가 끝난 후 나오는 길에 또다시 아르센 벵거가 축하인사(?)를 했다고 한다. 아마 독일이 우승 차지하자 독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차붐에게 축하인사를 한 듯싶다.
이분과 같이 따봉을 선보였다.
은퇴 직전 레버쿠젠 감독을 하던 리누스 미헬스 감독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리누스 미헬스는 바로 네덜란드 토탈풋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명장이었다.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2010년 골닷컴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분데스리가 용병 TOP10'에서 3위에 선정되었다.[62]
2013년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베스트 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1인의 사진이 프랑크푸르트 역내에 전시 되었는데, 전시 당일 자리에 참석해 이름을 빛내주었다. 유럽은 차범근을 최고라고 인정했다는 쾌거.##
2014년 1월 대한민국과 미국과의 친선 A매치 전에 미국 대표팀 감독인 위르겐 클린스만이 SBS 해설위원으로 참가한 차범근을 알아보고 다가와 포옹과 환담을 나누는 장면이 찍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SBS 브라질 2014 특집다큐에서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는데 아직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는걸 보여줬다. 이 항목 상단에 링크된 동영상이 그것.
현역으로 뛸 당시 독일의 시인인 에크하르트 헨샤인트가 차범근에게 헌정하는 시가 있을정도니 그의 독일에서의 평가는 말하면 입이 아픈 수준이다.
이하는 위 시의 일부 번역본이다. 전체의 번역은 이곳에 있다. ..##“Hymne auf Bum Kun Cha”
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
Wunderbar ist die Gunst denn des Gottes des
Fußballs. Zwar niemand weiß, wann und von wannen
Er schenket nach Puskas und Pele und Kempes den
Neuen Erwählten - nie doch und nimmer vergißt
Er sein hoffendes Volk. Über Indien hinaus
Und den Ganges spähet sein
forschender Blick, ins ferneste Land, da
Seit Alters Männermut blühet und hoher Sinn.
Tapf'res Korea! Du schenktest uns Cha!
Festlicher klinge mein Saitenspiel! Denn lang
Lieb ich dich, Cha, schon, drei Monde -
Drei Monde schon fällt dein verjüngendes
Licht auf die scheinbar gealterte Eintracht. Wir
Sahen dich erstmals, Lieblicher, gegen Stuttgart,
- und das Herz war bezaubert, verzaubert bald
Gar. Ach! Wie du da Förster, den Holzer,
Versetztest und Martin, den Rammler, so daß selbst
Sie dein Lob dann sangen - wie du dich
Schlängeltest durch die Abwehr - um endlich,
Endlich, kurz nach der Halbzeit, hoch in die
Lüfte dich reckend, die Flanke von Borchers
Nahmst mit der Stirn, der klugen, das
Leder versenktest im rechtesten Toreck - es war
Wie ein Herzkrampf, ein schöner, in Freude und
Ahnendem Jubel in eins.
Am Abendhimmel blühte ein Frühling auf, und
Sein Name war Cha. Die Eintracht aber, jahrlang
Von Klippe
Zu Klippe
Geworfen, glühte mit dir, o mein Trauter, zu
Neuschönem Glanze. Aus dem Schlaf des
Dornröschens erwachte die alte, die beinah
Vergeß'ne Primadonna sehr rasch. Vergessen das Alter
Grabowskis, vergessen der Streit mit dem Trainer.
O neues heilig' Herz der Mannschaft! Uns zur
Erhabenen Lust stürmst du, Schönster, so viel ich
Sah, seither, wie der Vogel des Waldes über die
Wipfel fliegt, schwingst du, Zierer, leichter und
Mühlos und sonder Gewalt dem Tore dich zu, dem
Beschützten - Östling unter Deutschen,
Und ihnen dennoch verwandt in der Seele,
Nah auch in Tordrang und Technik und
Teilung des Raumes in all seiner
Tiefe . . .
Kenntnisreicher Künstler am schwarweißen Balle!
Der Mann aus Korea allein hat die Präzision deines
Abspiels. Trocken schlägst du die Pässe, den
Kurzpaß sowie auch den raumgreifenden Vetter, den
Steilpaß. Nicht fremd ist dir der
Fallrückzieher, wir sahen's. Du zeigtest, daß
Auch in Asia, dem fernen, bekannt ist der Trick
Mit dem kunstreichen Haken - doch mehr noch
Erstaunen den Gegner die nicht-orthodoxen, die
Tricks, die im Lande noch unbekannt. Freilich,
Nie ähneln sie je doch der Tücke des Panthers,
Nie schielet Verschlagenheit Asiens durch -
Fair play ist Bum Kun Chas Religion!
Ach, abermals weiden die Augen auf dir! Hurtig
Treibst du das Leder nach links, kühner umkurvst
Du den grätschenden Stopper, zaubernden Fußes
Entläßt du den Lib'ro in Scham. Leichthin,
Euphorion erinnernd, vergleichbar auch durchaus
Der zarten Gazelle, dribbelst du torwärts und
Spannst doch den Fußnerv alljetzt schon zur Bombe -
Denn kaum hinkt die Macht deines Schusses der
Pracht nach Bernd Nickels, genannt "Dr. Hammer":
Dem du, so liest man, längst Brücken der
Freundschaft gebaut hast, auch menschlich . . .
Herzschöner Mann! Flutlichtumschwärmt auf den
Flügeln der Flanke, jetzt plötzlich der rechten,
Füllhorn der Technik, Fülle des Seins!
Samtschwarzen Seraphkopfs sehr schönen Scheins!
Seht nur den Doppelpaß jetzo mit Nachtweih und
"Holz"! Tripelpaß ewiger Klarheit!
Genius des Ostens! Sel'ges Korea!
Ein Flankengott jener Abramczik? Da lachen die
Gütter des alten Olymp! Sie lachen Schorsch
Volkerts und
Lächeln ob jenem, der, unrhythmisch seltsam,
Rummenigge sich nennt! Wer kennt Okudera? Cha
Aber - ob er nun "Cha Bum Kun" heißt, so wie die
"Frankfurter Rundschau" es will; oder doch
"Bum Kun Cha", wie die FAZ ihn besingt; oder
"Tscha Bum", wie "Bild" ihn begrüßte - dich,
Cha, kennt Deutschland, kennt Asien, die Welt so und so - -
Ew'ges Korea!
Im Winde klirret die Fahne zum Eckstoß. Gefahrstufe
Eins. Anläuft Cha Bum, herrlich die Flank' in die
Fluten der Zeit! Schon steht Cha Bum wieder nah
Dem Elfmeter, lauert des Zuspiels, hilft
Hinten aus. Schneisen schlägt er in Spielfeldmitte,
Schleusen öffnet sein schneller Fuß: Sammelnd der
Gegenwart hohes Vergang'nes, einend die Künste
Grabowskis mit denen des Pfaff, Kressens gedenkend
Und eingedenk Sztanis. Fußball berückend - und
Rührend selbst Toni, den treuedlen Zeugwart, der
Dir, Cha, im Air-Bus von Braunschweig nach
Frankfurt die Wange gar küßte; so stand's in der "Rundschau" . . .
Geh' unter, HSV! Trunken dämmerte die
Seele selbst dir (3 : 2)!
Ja, in den Ozean all deiner Tricks will ich mich
Stürzen, Bum, sturztrunken einfallen laut in die
Chöre des Jubels, Sohn einer fußballträumenden
Mutter. Anbeten will ich - gleich dir, der du
Betest vor Spielbeginn und auch während des
Kampfs "ständig vertieft bist im Gebet", wie
Wieder die "Rundschau" weiß. Anbeten will ich,
Singen dein Lob all mein Lebtag und
Endlich, wenn's gut geht, warte nur balde,
Berückt in Verzückung unendlicher Schöne vergeh'n - - -
Nur, Bum, daß du, folgt man einem Bericht in
der FAZ, nach deiner Aktiven-Laufbahn Deutsche
Predigend zu Gott bekehren willst, das, Bum,
Muß ja wohl nicht sein.
차붐의 위엄."차범근 찬가"
태고적부터
남성다움과 고결함이
찬란했던 곳.
용맹스런 한국이여
그대가 차붐을 우리에게 보냈도다
환희의 음악이여 더 크게 울려라.
차붐. 자네를 오랫동안 사랑하리
바다와 같은 당신의 발재간속으로
나는 빠져들고 싶다
관중들의 우레 같은 함성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은 울려 퍼진다
축구를 태몽으로 잉태된 아들이여
나는 그대를 찬미하리라
내 평생 동안
그대를 칭송하는 노래를 하리
더불어 프랑크푸르트 역에 12개 기둥으로 프랑크푸르트 팀내 최고 레전드 선수들 사진과 간략한 인적사항을 새긴 게 있는데 거기에서도 차범근이 들어가 있다.
78/79 전반기 : X
78/79 후반기 : X
79/80 전반기 : WK-1(외국인)
79/80 후반기 : IK-5(외국인)
80/81 전반기 : K-4(외국인)
80/81 후반기 : K-7(외국인)
81/82 전반기 : K-7(외국인)
81/82 후반기 : K-6(외국인)
82/83 전반기 : IK-2(외국인)
82/83 후반기 : K-2(외국인)
83/84 전반기 : K-3(외국인)
83/84 후반기 : K-5(외국인)
84/85 전반기 : B(외국인)
84/85 후반기 : B(외국인)
85/86 전반기 : IK-2(외국인)
85/86 후반기 : IK-5(외국인)
86/87 전반기 : X
86/87 후반기 : B(외국인)
87/88 전반기 : B(외국인)
87/88 후반기 : K-12(외국인)
88/89 전반기 : X
88/89 후반기 : K-8(수비형 미드필더)
분데스리가 팬사이트인 분데스매니아의 어떤 유저가 구해온 차범근의 키커#s-6 랑리스테. WK(월드 클래스) 1번에 IK(인터네셔널 클래스) 4번, K(리그에서 경쟁력 있는 수준) 9회, B(주목할 만한 수준) 4회.
결론적으로 손흥민, 파울리노 알칸타라와[63] 더불어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불린다.[64]
6.1. 축구인으로서의 평가
'''황제'''라는 별명[65] 이 붙을 정도의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 (비유럽권 선수이면서 리그에서 가장 파괴적인 공격수인 것)
선수로서 유럽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점과 감독으로서의 성과는 미적지근했다는 점은 제쳐두고서도, '''축구인'''으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한 바는 실로 엄청나다.
차범근은 독일에서 은퇴한 후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고 코치 자격증을 따 왔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계에서 몹시 희귀한 케이스였다. 물론 외국에서도 얼렁뚱땅 자격증만 따서 감독하는 야메들은 얼마든지 있다. 핵심은 제도권 '''스쿨'''을 거쳤느냐 하는 점이다. 차범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라이선스를 따오면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줬고, 차범근 이후 코치 방법을 몰라 외국 감독이 하는 걸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우고, 그저 가오 잡기만 하던 기존의 지도 관행은 개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업적은 공과가 크게 갈린다.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은 세계 축구의 유행과 발전상에 뒤처졌다는 점이다. 차범근의 축구철학이 '''1970년대 분데스리가 스타일'''을 숭상하기 때문에, 감독을 맡았던 수원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재임기간 동안 꼬박꼬박 트로피는 따줬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사실 이 시기 수원 팀 자체는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차범근 해임 이후 K리그의 빅5 추세를 본다면 귀네슈-빙가다-최용수로 이어지는 '''무공해 서울''', 김정남-김호곤으로 이어지는 '''철퇴 울산''', 최강희가 구축한 '''닥공 전북''', 파리아스-황선홍으로 이어지는 '''스틸타카 포항'''은 모두 '''고유한 팀 컬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원은 '''뻥축구'''라는 조롱을 길게 받았다.[66] 과거 김호 감독 시절의 수원이 발레리 니폼니시의 부천SK와 더불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를 운용하며 포백 시스템과 존 디펜스 도입 등 선진축구로 팬들의 찬사를 샀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명백한 퇴보다.
또한 프런트에서 우수한 선수들을 사주면 그만큼 성적을 내줬기 때문에 정작 팀의 근간이 되는 유스가 황폐화 되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 서울과 포항 두 팀에서 유스 출신들이 하나 둘 주전을 꿰차며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고, 2012~13년 포항의 유스 출신 영건들이 패스축구로 수원을 털어버리며 '승점자판기'라 조롱하는 광경을 거듭 목격한 수원 팬들 입장에선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
그 때문에 'K리그 수원 감독 맡지 말고 유소년 축구에만 몰입하셨더라면 두고두고 존경받으며 욕 먹을 일이 없으실텐데' 하고 탄식하는 축구 팬들이 많다.
하지만 프로팀, 대표팀 감독으로 상당히 앞서가는 면모를 보인 것도 있다.
- 첫째, 국가대표팀에서 처음으로 4백 수비를 시도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K리그에서 김호 감독과 조광래 코치[67] 가 이끄는 수원 삼성과 발레리 니폼니시의 부천 유공 등이 4백을 시도해 가고 있었지만 아직 한국 축구계는 내려앉은 스위퍼가 자리잡는 3백이 주류였다. 특히 대표팀에서 3백을 놓기 어려웠던 것은 '홍명보' 때문이다. 홍명보는 3백에 최적화된 선수로, 4백 시스템의 센터백으론 대단히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때문에 히딩크도 부임 초기 4백을 실험하다가 결국 3백으로 돌아갔으며, 결국 한국 국대에 4백이 정착된 건 홍명보가 은퇴한 이후이다.[68] 이는 단순히 수비수의 숫자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포메이션 전체의 압축 정도를 좌우한다.
- 둘째, 일찌감치 체력 집중 트레이닝을 강조했다.
- 셋째, 선·후배 관계는 중요하지만 경기장에서는 형&선배 호칭을 빼라 했고, 기자회견 시간을 정해놓고 언론의 무차별 인터뷰를 차단하는 등 여러모로 서구형에 가까운 팀 운영을 보였다.
- 넷째, 대표팀 감독으로 지원파트를 중요시해서 비디오감독관[69] 을 포함한 대규모 지원스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여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며, 위의 사항등이 개선되었고 그것은 4강이라는 성적으로 증명되었다. 즉, 비디오 감독관, 피지컬 트레이닝, 평등한 선·후배 관계 등 '''히딩크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던 요소들 대부분이 차범근이 먼저 이야기한 것'''인데, 2002년 전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 2002년 이전까지 한국 축구계가 그만큼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이야기다.
7. 기록
7.1. 대회 기록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9~1983)
-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3~1989)
- UEFA컵: 1987-88
7.2. 개인 수상
- KFA 베스트 XI: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70]
- KFA 최우수 선수: 1973 #
-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최우수 선수: 1976 춘계 #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79-80, 1985-86 ##
- 빌트 선정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79-80
- 구에린 스포르티보 미래의 팀: 1980 (후보)
- UNICEF 세계 올스타 (후보): 1980 ##
- 서독 아벤트포스트 올해의 선수: 1986[71] #
- IFFHS 아시아 세기의 선수: 1999 #
- IFFHS 세기의 선수 (60위): 2000 #
- KFA 명예의 전당: 2005 #
- AFC 황금 공로상: 2010
- 골닷컴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3위: 2010 #
- 베스트일레븐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XI: 2010[72] #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 XI: 2013 #
-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2017 #
7.3. 통산 기록
7.3.1. 클럽
7.3.2. 국가대표
8. 사건사고
8.1. 차범근 축구교실 고발 논란
차범근 축구교실의 비리에 대한 전 직원의 폭로로 논란이 생겼다.
2016년 7월 17일 MBC 시사매거진 2580의 보도에 따르면 차범근 축구교실은 서울시로부터 한강 부지를 싼값에 임차하여 운영 중임에도 서울시에서 정한 기준보다 높은 수강료를 받아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있으며, 적발 이후에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소년 선수 후원용으로 무료로 제공받은 축구용품을 수강생들에게 유료로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해당 직원은 "10년 동안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일하며 상가 월세 관리부터 잔심부름까지 맡아 왔다. 그런데 부당한 이유로 퇴직금도 못 받고 해고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7월 19일 사단법인 차범근 축구교실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대호(담당변호사 박동균)는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 보도한 것이다. 제보자(노 코치)와 방송국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보도자료 전문을 올린 기사
이 보도자료에서 축구교실 측의 대리인은 노 코치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노 코치가 차범근 일가의 재산을 일부 횡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강습료 문제에 대해서는 일부 인정하고 행정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축구용품을 유상으로 판매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이나 도의적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2018년 11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판사 박종택)는 차범근 축구교실 전 코치 노모씨가 축구교실과 차범근 등을 상대로 낸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노씨에게 33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다만 법원은 노씨가 차범근 가족이 소유한 건물 3곳의 관리를 맡은 것에 대한 보수 1억원을 청구한 것에 대해선 "월 30만원씩 상가관리비 명목으로 지급했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차범근 축구교실은 노씨를 횡령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으나, 노씨의 횡령 혐의에 대해서는 "횡령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또한 재판부는 노씨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노씨의 게시글 내용이 허위라는 점에 대해 원고(축구교실)의 구체적인 주장이나 입증이 없다"며 청구를 기각했으며, 노씨의 주장을 보도한 시사매거진의 방송 내용에 대해서도 "제보 내용이 전체적으로 진실에 해당하고, 공공의 이해에 관련된 사항임이 분명하다"라고 판시했다. 기사 1 기사 2
9. 차범근에 대한 말, 말, 말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미하엘 발락, 2002년 한일월드컵 독일팀 입국 당시 인터뷰
'''“우리가 풀지 못한 주요 문제는 차붐이었다. 차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알렉스 퍼거슨, 1979년 에버딘 감독 당시 프랑크푸르트와 UEFA컵 1라운드 경기 패배 후
'''“당신에게서 사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올리버 칸, 2004년 월드컵 예선 대비 친선경기 차 방한 후 차범근을 만나서 한 말
'''”나는 차붐을 존경한다. 어릴 적 차붐을 보고 자랐고, 나도 그 선수처럼 되고 싶었다.”'''
'''“방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국의 발전과 우호증진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 차붐부터 만나고 싶다.”'''
2002년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
'''“내가 차붐과 같은 공격수와 붙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나도 어느 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 만큼은 아니다.”'''
'''“퍼펙트라는 말이 어울리는 공격수였다. 슛이 좋은 데다 스피드가 폭발적이었다. 첫 대결 이후로도 나를 상대로 많은 골을 넣었다. 내가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를 상대로도 골을 안 먹었는데, 차붐은 도저히 못 당하겠더라. 만약 차범근이 지금도 현역이었다면 1억 유로를 이적료로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팀에 차붐같은 선수가 있다면...”'''
'''“결승전 당시 차붐은 최고의 선수였다.”'''
'''“차범근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인 건 분명하다. 그는 나의 자만을 깨우쳐줬다.”'''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뛰던 시절 한국인 선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선수가 바로 당시 최고의 선수였던 붐근차였다.”'''
'''“난 차붐을 낳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독일인이라면 어김없이 독일 대표팀에 넣고 싶다.”'''
'''“차붐은 진정으로 축구를 할 줄 알고 즐길 줄 안다.”'''
'''“차붐은 나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영웅이다.”'''
'''“승부차기까지 가서 이겨 더욱 기뻤죠. 차붐은 매우 중요한 선수였어요.”'''
'''“차붐은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엄청난 스타입니다. 그는 리그를 주름잡았죠”'''
'''“내가 그의 출장기록을 넘어섰다고 해서 내가 그를 절대 뛰어넘은건 아니다.”'''
10. 여담
- 현역 때도 유명했지만, 차범근의 허벅지 둘레는 무려 28인치.[75] 웬만한 남자 허리둘레 수준으로, 차범근의 엄청난 주력과 힘은 여기서 나왔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또한 한국 축구계에서 역대급 피지컬을 자랑하는 아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국가대표 선수가 될 때까지도 어떤 신체능력으로도 차범근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76] 심지어 2014년에도 매일 2시간씩 러닝과 웨이트를 거르지 않고 소화 중이며, 한 번은 차두리가 같이 운동하다가 먼저 손들고 올라온 일이 있었다고(...)... 현역 당시 그의 허벅지 모음. 그야말로 펄떡거리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허벅지 근육을 볼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차범근은 위 인터뷰를 한 2014년 당시엔 만 61세, 환갑을 넘긴 나이라는 거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손자/손녀들 재롱 보며 환갑잔치할 연세인데, 실로 후덜덜하지 않을 수 없다.
- 여타 운동선수와는 달리 일찌감치 광고 출연이 많았다. 이미 독일 진출 전이었던 1970년대 후반, 남양유업의 요구르트 광고에 나왔던 것을 비롯해 1980년대에는 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엘 제약의 광고에도 자주 나왔다. 2000년대 들어 SK텔링크 00700 CF에 고정 출연하며 김선아와 함께 포스를 뿜어내었다. 원래 파트너였던 싸이는 병역비리에 걸려서 하차. 명언은 "국제전화 비싼 줄 알았지? 아니야!!"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한창일 땐 신문선과 나란히 해설계의 거성으로 활동했다.[77][78] 2006 FIFA 월드컵 독일 때는 차두리도 같이 해설을 하면서 부자가 같이 해설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조별 예선 최종전에서 스위스의 2번째 골이 들어간 상황에 대해 차두리가 심판 판정을 문제삼으며 "이건 사기입니다."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중계석을 비춘 화면에서 차범근이 차두리를 노려보면서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한게 밝혀지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뿐만 아니라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전 거스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 감독이라고 비난받을 무렵, 그를 지지한 몇 안 되는 축구인이기도 하다.[79] 다만, 수원의 성적이 부진할 땐 감독 때려치우고 해설이나 하라고 욕을 먹었다.
-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녀 차하나(1978년~). 그리고...
>아나운서 : 아들을 낳는다면 축구를 시키겠느냐고 그러는데요...
>차범근 : 공교롭게도 제가 지금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원하면 축구를 시키고...
>
>1970년대 KBS의 '어린이 만세'에 출연해서 당시 영상
그리고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장남 차두리(1980년 ~ ), 차남 차세찌(1986년 ~ ). 장녀는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막내아들은 해병대를 전역 후(2009년 입대. 병1103기로, 1사단 7연대 3대대에 입대했으며 7연대 1대대 현관에도 차범근의 싸인볼이 있었다.) 형과 아버지와 함께 간때문이야 광고에 출연하였다. 딸은 결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80] 가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차범근으로선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두리가 결혼할 때 기자회견에서 손자가 태어나면 자신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축구선수로 키워보고 싶다고 밝혔다. 자신이 바빠서 아들 두리를 제대로 봐주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다고. 2010년 11월 29일 차범근의 소셜 네트워크에 내년 5월에 태어날 차두리의 둘째가 아들이라는 소식이 올라왔다. 링크 네티즌들이 예상하는 아이 이름은 차바인, 차쯔바(독일어로 2는 zwei(쯔바이)) 등등이었는데, 정작 한 달 늦은 6월 말에 태어난 둘째 아이의 실제 이름은 '차아일(Ail)'. 독일어가 아닌 웨일즈어로 '2'라는 뜻의 이름으로, 많은 네티즌들의 허를 찔렀다.[81] 어쨌거나 많은 이들은 벌써부터 "2030년 월드컵 국대 원톱"으로 단정짓는 중. 자녀 이름을 하나, 둘(두리), 셋(세찌)으로 짓는 비범함을 보였다.
- 베타맥스 VCR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영상(51~55초 부분)을 보면 차범근이 화질이 정말 좋다는 것을 알리는 명대사("화질이 정말 깨끗하군요")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 기자들과 악연이 많다. 1980년대 초반에는 기자들이 독일까지 가서 "양주를 내놓으라, 대접 잘해라." 이딴 무개념 쓰레기 짓거리를 해서 정나미가 떨어진 차범근은 문전박대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한국에서 신문으로 "차범근 독일에서 무개념으로 군다." 이렇게 왜곡을 하는 기사를 써재꼈다. 이런 일로 아버지가 속상해하던 걸 보던 아들 차두리도 커서 기자들을 꺼리며 갈등이 많았다. (원래 차두리는 축구 전문 언론인을 꿈꾸었었다.) 덕분에 김병현을 옹호하다가 그런 기자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
- 동년배의 다른 스타들과 비교했을 때 겸손한 사람이다. 인터뷰를 해도 옛날 얘기를 한두 문장 이상으로 이어서 하는 일이 없고, 해설할 때도 그 흔한 현역 시절 에피소드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이런 자기 자랑을 자제하는 것에는 아쉬운 측면도 있는데 당장 선수 경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분데스리가 커리어에 대한 문서화 작업이 굉장히 부족한 상황에서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구술사도 전무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팬들이 그의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축구팬들도 차붐, 차붐하고 그가 분데스리가에서 유명했다더라 하는 정도만 알지, 어떤 플레이를 보여줬으며 어떤 선수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니 젊은 축구팬들에게도 해외에 나가 있는 수많은 현역 축구선수들의 선조뻘로만 다가오지, 예컨대 박찬호나 박지성처럼 차범근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통 이쯤 되면 야구의 선동열 같은 사례처럼 전성기 시절의 커리어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나올 법도 하지만, 이미 여러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특히 1970년대 독일의 선수 출신 축구인들이 전 세계의 주요 축구 지도자로 나선 이후,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 해설자로 한번 나갔다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사실관계 뿐이다. 대단한 과거가 있다고 짐작만 할 뿐, 디테일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주전 수비수로 출전 중인 아들 차두리에 대해서 해설 중에는 말을 아꼈지만 경기 종료 뒤에는 우리 두리 잘하잖아~~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셨다고 한다. 링크.
- 독실한 개신교 장로회 신자이고[83] , 여러 번 자신의 신앙에 대해 간증을 했는데, 종교 문제 때문에 구설이 오른 적이 있다. 1997년 월드컵 예선 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골을 넣으면 기도를 드려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도올 김용옥이 신문 기고로 이를 비판했고, 이후에 차범근도 반박 기고를 하여 키배가 벌어진 적이 있다. 또한 선수 기용에서도 종교가 개입한다는 의혹도 유포되곤 했다. 예를 들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본선 첫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최용수 대신 김도훈을 출전시킨 것이 최용수가 불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소문이 돌았고, 부적을 사용하는 고정운을 잘 기용하지 않는 것도 종교 문제라고 회자되었던 것.[* 실제로는 반대로 김도훈이 불교, 최용수가 개신교이며, 만약 진짜로 종교 때문에 최용수를 기피했다면 최종예선에서 줄곧 최용수를 기용했을 턱이 없다. 실제 최용수의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것은 이후 경기에서 출전한 최용수의 폼으로 쉽게 알 수 있다. 고정운 또한 잘 내보내다가 일본전에서 선제골을 허용한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낙마한 것이지 그 전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기용했다. 참고로 고정운도 김도훈처럼 불교. 이 외에도 당시 대표팀에는 서정원, 최영일, 홍명보, 하석주, 이동국 등 불교계 선수가 여럿 있었다[8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원수라 할 수 있는 통일교 계열의 K리그 구단 천안 일화 천마가 성남으로 연고를 옮기려 할때 성남 기독교계가 반발하자 차범근은 신문기고로 "축구와 종교는 상관없다."고 한 적이 있다.[85]
- 2010년에 나온 차두리 로봇설과 관련하여, 차두리 로봇 설계도를 알려달라는 팬들의 장난스런 요청에 로보트...그거 일급비밀이야. 많이 알면 다친다고!!! 로보트 아빠는 상관없지만 로보트 엄마는 비밀로 부치고 싶어해. 이해해줘. 로보트 가족 중에는 엄마 힘이 젤 세다고!!!라고 답하며 축구 실력뿐 아니라 유머감각도 레전드급임을 과시했다. 그보다 며칠 전, 차두리가 로봇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부자가 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듯하다.
- 감독직 사임 후, SBS에서 배성재 아나운서[86] 와 함께 국가대표 축구 경기 해설자로 활동 중이며, 평가는 굉장히 좋다. 선수 출신답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경기 내적인 내용들을 잘 짚어주며, 감정적인 애국 해설을 자제하고, 경기의 흐름과 풀어나갈 방향을 거론하는 방식. 보다 보면 후배이며, 제자들인 선수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게 보인다.[87] 2011년 2월 1일, 박지성이 은퇴한 것에 대해, 축구 유망주들이 유년기에 훈련을 너무 많이 하는 관행을 고치려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며 인터넷 상에 글을 올린 게 화제가 되었다. 기사.
- 선수로서는 이견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선수들 중 가장 명예로운 커리어를 보냈지만, 지도자로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대회 도중 경질된 사건과 그 이후 승부조작 드립을 쳤다가 5년간 자격정지(이후 3년으로 하향)를 먹은 뒤 중국 리그를 전전했던 아픔이 있는 사람이다. 참고로 차범근이 경질당하게 된 네덜란드 전에서 상대팀의 수장은 다름 아닌 그 거스 히딩크였다. 그러나 차범근은 히딩크에게 매우 우호적인데, 자신이 불명예스럽게 해임되고 자격정지까지 먹으면서 사실상 한국 축구계에서 매장당한 와중 고려대학교 축구 선수였던 아들 차두리마저 세간의 눈총을 사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히딩크가 차두리를 대표팀에 전격적으로 발탁하고 월드컵 본선에서까지 기용하면서 신경써줬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히딩크호가 2001년에 프랑스와 체코에 5:0 으로 내리 깨지면서 히딩크마저 오대영으로 통하며 숱한 비난을 받던 와중에도 이용수 당시 대표팀 기술위원장과 더불어 히딩크를 옹호해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차범근이었으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직전의 SBS 특집 방송에서는 차범근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김에 히딩크를 직접 만났는데,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마냥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는가 싶더니만[88] 히딩크의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 감독 시절 얘기가 나오자마자 "저를 참 힘들게하셨죠."라고 한 방을 날렸다(...). 물론 이 말을 들은 히딩크는 어쩔줄 몰라하며 미안하다는 말로 사과했고, 나중에는 서로 그 때를 얘기하면서 쩔쩔매기도...
- 반면 월드컵 커리어는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하나 뿐이었고, 이 때의 조편성마저 전전 대회 우승팀인 아르헨티나와 직전 대회 우승팀인 이탈리아가 포함되는 등 대진운이 지지리도 안 좋았던지라 큰 활약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 소중한 날의 꿈에 캐스팅 되신 듯 하다. 직접 보면 안다.
- 피파 온라인 3에도 등장했다. 유럽리그 레전드(팀명은 'EL') 멤버 중 한 명이다. 다른 선수들은 울리 슈틸리케, 히바우두 같은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초기 오픈빨을 빼고 거품이라고 가격이 폭락한 선수들이 많음에도 차범근은 만인이 인정받는 성능으로 초기 고가격대를 그대로 유지[89] 하며 우뚝 서고있다. 일명 개떡같이 줘도 찰떡같이 골을 넣는다고 할 정도로 성능이 아주 출중하다.
- 2013년 10월 17일부터 다음에서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은 칼럼으로 유명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끝난 후로는 비정기적으로 기고한다. 링크.
- 한때 딸 차하나의 독일인 친구 아버지를 마중하러 김포공항에 나갔다가 당시 김포공항 경찰대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주민등록증을 안 가져와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90] 당시 국민적 스타인 차범근을 그 전경대원이 몰랐을 리는 없고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 한국 선수로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레전드라는 점에서 현 시대의 레전드인 박지성과 같이 언급되거나 비교되는 일이 잦은 편이다. 당연히 현역 시절 남긴 실적과 역량을 비교하자면 차범근이 우위. 유럽 정상급 리그에서 중위권 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로 통산 98골을 넣으며 UEFA컵 우승을 이끈 차범근과, 세계 정상권 팀에서 로테이션이었던 박지성은 클래스 차이가 있다. 또한 박지성은 '차범근 유소년 교실' 세대의 첫 주자이자 '차범근 축구상'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 1998년 국가대표 감독일 때는 서정원의 벤피카 진출에 대해서도 불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경향신문에는 "입단을 구걸하러 가서 무엇 하겠습니까?"고 서정원이 속고 있다고 인터뷰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축구협회에 이적동의서를 발급하지 않아서 벤피카로 가서 연습경기까지 뛰던 서정원은 해외 진출이 무산되었다. 이외 수원 시절 국내로 유턴했던 안정환, 이천수와 불화가 있었는데 이 둘은 본인들 탓이 더 컸던지라 차범근에 대해선 별 말이 없었다. 선수 시절 얽힌 일 때문에 최강희 감독과는 지금도 사이가 별로 안 좋다.[91] 하지만 서정원의 경우에는 차범근 감독과 같이 월드컵 본선에 갔으며 수원 삼성 시절에도 2004년에 함께 리그 우승을 일궈냈으며 서정원이 감독되고 처음으로 우승컵을 얻었던 2016년 FA컵 우승 시상식에서도 서정원을 꼬옥 안아주었다. 거기다 서정원은 차두리와도 웃으면서 잘 지낸다. 아마 서정원이 아니라 다른 선수에게 벤피카 오퍼가 왔더라도 똑같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서정원은 프로 의식이 높은 선수. 결론은 아주 잠깐 있었던 해프닝. 실제로 서로 사이도 좋다.
- 이임생은 김호 감독 시절 대표팀에 소집돼서 훈련 중에 고연전이 열려서 무단이탈한 탓에 그 후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않았는데 차범근이 국가대표 감독일 때 다시 발탁했다. 이때 같은 고려대 선, 후배라서 다시 기용한 게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는데 이임생은 부천 르네상스의 핵심 수비수였으며 벨기에전 붕대 투혼과 수원 삼성에서의 수석코치로 우승까지 함께 한 실적이 있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쓸 만해서 썼다. 그리고 차범근은 국가대표 감독일 때 장대일도 발탁해 홍명보 대타라는 중임까지 맡겼는데 장대일은 고려대 출신이 아니다.
- 부자가 함께 대표팀에 발탁되어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사례인 것은 맞지만 최초는 아니다. 최초의 부자 국가대표는 김찬기- 김석원 부자로 김찬기는 1960 AFC 아시안컵 한국 우승을 이끌었던 멤버 중 한 명이었고 김석원은 1979년과 1981년에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고 이후에 국가대표에도 발탁되었던 인물. 다만 워낙 옛날 일이고 차범근 - 차두리 부자의 무게감이 엄청난지라 현재의 젊은 세대는 차범근 부자가 최초의 사례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 당대를 같이 보낸 선수들 중에서 차붐이 존경을 표했던 선수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파울 브라이트너. 2013년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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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데스리가 베스트 11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한 단계, 즉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등이 서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욱이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정열과 패기였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었던 곳에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의 오해와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습니다.[92]
- 상당한 공처가이기도 하다. 것도 늘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아내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로 말이다. 다만 이렇게 공처가가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데 독일 진출 당시 차범근은 도착 직후 제대로 된 환대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슐테 조 감독은 상당히 냉담한 반응만을 보였었고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기 전까지 대우가 형편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아내인 오은미는 상당히 곱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억척같이 뒷바라지하면서 차범근의 영양 관리를 도왔기 때문.[93] 또한 아내인 오은미는 남편인 차범근이 축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도록 축구 이외의 모든 것을 전담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차범근이 버는 모든 수입의 관리 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의 매니지먼트, 심지어는 차범근이 쓰는 글 대부분의 대필까지도 해주고 있다는 건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이다.[94]
-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땄었다. 당시 결승 상대가 북한이었는데, 120분의 혈투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해 공동 금메달을 받았다.[96]
- > 누구도 막지 못한 단 한명의 공격수에게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이 한 해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대한축구협회의 협회장이 바뀌고 내부 임원이 대대적으로 갈리면서 그동안 대한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었던 차범근이 한 자리 맡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어떤 구체적인 자리에 선임된 것은 없었지만, 브라질 월드컵 예선 바레인전에 신임 축협회장 정몽규와 나란히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 TV에 잡혔다. 축구협회 임원진을 태운 전용기에 같이 동석하여 관람을 하고 왔다고 한다. 이로서 소문은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에서 그에게 어떤 직책을 내릴지 주목된다. 하지만 2014년 10월이 지나도록 차범근에게 어떤 직책이 주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그냥 축구협회가 그간 껄끄러웠던 차범근과 화해만 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중. 그러나 이후 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는 차범근 역사상 축구 관련 행정가로 처음 맡은 자리.
- 2014년 중 런닝맨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박지성 자선경기에 교체 출전하여 25년 만의 경기 출전을 했다! 그의 라이브 경기를 본 올드팬들도, 라이브 경기를 보지 못한 현 세대의 팬들, 그리고 수많은 축빠들이 한 마음이 되어 차붐의 활약을 기대하며 동점골을 넣기를 바랐으나 인도네시아 올스타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뛰어서 그다지 많은 기회를 받지는 못했다. 애당초 뛴 시간이 10여 분 남짓이었고 기대한 슈팅은 나오지 못했지만, 좌우 사이드를 가리지 않고 뛰고 중앙에서 킬 패스도 뿌리는 등 현역 시절 말기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깝게 뛰며 클래스는 영원한 것을 보여주었다. 중간에 백 힐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해서 웃음을 주기도 하였다.
- 차두리의 은퇴식에서 전반 42분 차두리가 교체되어 나올 때 라커룸에서 차두리를 맞이하며 "이제 차범근 아들로 태어난 거 후회 안 하지?"라는 말을 했다. '차붐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평생을 짓눌려 살아온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느껴지는 말이다.
- 유럽에서 뛰면서 골대 바로 앞에서의 결정력 문제로 고생하셨다고 말했고, 어릴 때부터 축구를 경험해야 이러한 유럽과의 차이를 극복할수 있다며 이 때문에 차범근 축구교실을 설립했다고 말했다. 한국 축구의 종특이였던 골대 앞에서 걷어내던 슈팅이 국대나 K리그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 차붐은 별명을 넘어 칭호처럼 불리웠는데, 일단은 그의 이름 때문이다. 차범근의 로마자 표기는 'BUM KUN CHA'인데, 독일 사람들이 CHA가 성씨인 것은 알았지만 BUM KUN을 이어서 이름이라 생각하지는 못하고 KUN 을 middle name으로 생각해서 생략해 버렸다. 한국처럼 성씨를 앞에 두니 CHA BUM이기에 독일식으로 읽으면 '차붐'이 된다. 영어로는 bum이 엉덩이를 뜻하는 속어라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독일어의 bum은 대포 소리등이 쾅! 하는 의성어이기 때문에 골을 뻥뻥 터트리면서 활약을 하자 널리 쓰이게 되었다.
- 화성시에서 서부로 일부 구간을 차범근로로 명명하려 했으나 논란이 일자 차범근 본인이 사양해 마무리되었다. 상세 내용은 화성시 차범근로 명명 및 취소 논란 참고.
- 2017년 8월 7일, 분데스리가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 원투펀치 282회 3부 마지막에 Q: 차범근과 비교 대상이 될 현역 선수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받고 왠지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했다. 계속 포지션이 달라서 누구를 특정할 수 없다며 말을 피하다가, 현역 시절 같은 포지션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케빈 키건을 비교하면서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공격수라는 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루메니게만큼은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장지현 해설위원의 의견으로 종합하면 "득점력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화려한 플레이를 하면서도 팬들을 즐겁게 해준 최고 레벨의 선수"라고 평가했고 한준희 해설위원은 "다재다능한 공격수로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루메니게, 케빈 키건에 비견되는 선수다."라고 평가했다.
- 친문 성향인 듯 하다. 18대 대선 당시, 책 <운명>과 함께 찍힌 사진을 올리기도 하고, 자신의 블로그에 문재인, 손석희, 이창동을 좋아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차범근의 정치 성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인데, 서독 진출을 타진할 당시 박정희 정부와도 마찰이 좀 있었고,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두환의 독재 정치에 대한 소식으로 인해 독일 내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져 안타까워한 적이 많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다른 유명인들이 정치 성향에 따라 안티가 많아지는 것과는 달리, 차범근은 인품 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평가를 받아온지라 안티가 거의 없다.
- 2017년에는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칼럼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98] 평창동에 거주하고 계신다고 밝혔다. 배성재 아나운서와는 아버지와 아들과 비슷한 관계고,[99] 박찬호와도 골프 치고 같이 집에서 장어구이 구워먹는 사이이신 듯. 칼럼[100]
- 카스 맥주 광고에 나와서 질 거라는 생각을 뒤집어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을 했는데... 진짜로 뒤집어버렸다!
>차범근: 저는 우리 선수들이 잘할거라 생각합니다.
>캐스터: 아 그런데 상대편이 너무 강해서.
>차범근: 바로 그 생각을 뒤집어야 합니다. 2002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해보기 전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죠. 포기하면 이미 승패는 결정납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뒤집어야 승리를 얻을 수 있죠. 이길 수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안정환: 뒤집어버려.
>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카스 광고 30s 버전 (해당 광고 영상)
- 자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있을 때, 월드컵 중도 해고에 두고두고 가족 전체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의 비난을 받은 경력 때문인지, 신태용 감독 및 일부 선수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평소에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임에도 언론사에서 분노라고 표현할 정도. 차범근의 메시지 "선수들의 용기, 밖에서 꺾지 말아라" 장현수·조현우 악플에 분노한 차범근…“선수들 독일보다 언어폭력에 겁 먹어”[101][102] 손석희 사장과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고, 착잡해하면서 신태용 감독의 유임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103]
- 2018년 9월에 열리는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에 문화 대표단 일원으로 방북하였다.
- 2018년 11월 3일 전 소속팀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해외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함께 임명된 5명의 레전드들 중에는 제이 제이 오코차도 있는데, 이 다섯 명이 함께 셀카를 찍은 사진 또한 공개되었다. 중국의 양첸은 먼저 잡힌 일정 때문에 불참.
- 2019년 11월 독일 정부로부터 대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차범근은 외국인이라서 주한독일대사관에서 수여식이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