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택

 


이회택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이회택의 수상 이력





[image] 올해의 감독상
1987년

1988년

1989년
이차만
(대우 로얄즈)

이회택
(포항제철 아톰즈)

김정남
(유공 코끼리)
1991년

1992년

1993년
비츠 케이
(대우 로얄즈)

이회택
(포항제철 아톰즈)

박종환
(일화 천마)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image]
이름
이회택
李會擇 | Lee Hoe-Taik
출생
1946년 10월 11일 (77세) /
대한민국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1]
국적
대한민국
신체
167cm
직업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축구경영인
소속
선수
대한석탄공사
해병대(군복무)
양지축구단
대한중석(1969~1972)
포항제철 아톰즈(1973~1978)
감독
한양대학교(1983~1985)
포항제철 아톰즈(1987~1992)
대한민국 대표팀 (1988~1990)
전남 드래곤즈(1998~2003)
국가대표
82경기 21골(대한민국)
AFC 아시안컵 준우승 감독
쩡쉐린(1984)(1988)바프티스타(1992)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시절
4. 기술위원장 시절
5.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행정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전남 드래곤즈 감독을,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2. 선수 시절


이북에서 조부모와 함께 월남해서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부친은 한국 전쟁 때 의용군으로 참가한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하며 모친은 재가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부친과는 남북 통일축구 대회 때 만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이회택은 근성과 독기가 있는 캐릭터였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기계체조를 했다고 하나, 유년기부터 공 차는 걸 좋아했던 이회택은[2] 기계체조를 때려치우고 또래 애들과 김포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축구부 비스무리하던 걸 하던 고등학교 형들과 활동하다가[3] 김포농고에 들어가고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고 축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출을 하는 등 집안과 갈등을 빚다 고2가 되고 본격적으로 축구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하게 된다. 한양공업고등학교의 문을 두드려보나 전국적으로 명문인 학교였고 지방에서 5, 60명 가량이 몰려와서 테스트를 받던 와중 제대로 된 기본기가 없던 이회택은 스피드만 인정받다 열흘 정도 후 쫓겨나게 된다. 다시 한 달쯤 뒤 영등포공업고등학교의 부름을 받고 그 해 6월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데뷔무대에서 2골을 뽑아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리고 부정선수였던[4] 이회택은 그 약점을 노린 축구명문인 동북고등학교의 스카우트를 받고 2학년에서 1학년으로 학년을 하나 내린 채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이 시기의 이회택과 동북고는 전국대회가 열리면 반 정도는 우승했다고 한다. 이회택은 훗날 본인에게는 천부적인 스피드, 체력, 순발력 등이 있었기 때문에 축구를 늦게 시작했어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1965년 동북고 3학년 20살로 청소년대표로 데뷔한다. 여기서 성공적인 청소년대표 생활을 보내면서 국가대표 물망에도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이회택을 잡기 위해 당시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가 각축전을 벌였다고 한다. 성균관대는 동북고에서 이회택을 가르친 박병석을 영입하면서 이회택을 입학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본래 연세대가 가고 싶었던 이회택은 5월에 성균관대를 자퇴하게 된다.
이후 1년만 뛴다는 조건으로 석탄공사에서 뛰게 된다. 이 시기인 66년 8월 므르데카컵 3, 4위전에서 인도에게 패하자 대표팀은 이회택을 등용한다. 67년 초 무렵 이회택은 다니고 싶어하던 연대에 합격해 이미 연대 선수들과 훈련하며 입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북한이 월드컵 8강에 올랐기에 67년 2월 육해공군 3군 소속 선수를 대상으로 양지 축구단이 창설되게 된다. 이회택은 성균관대를 자퇴하면서 입영 대상자가 되었기에 양지의 감독을 맡게 된 최정민이 이회택을 선택하며 연대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던 이회택을 중앙정보부에서 끌고가면서 양지팀 선수가 되게 된다. 이회택은 육군 공군 해병대 중에서 가장 복무 일수가 짧은 해병대를 선택하여 양지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회택은 양지팀 당시 딱히 기초군사훈련도 받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대표팀 데뷔하고 석탄공사 시절 몇 달간은 대표팀 성적도 그렇고 별로 안 좋았지만 양지팀이었던 1967년 메르데카컵에서 에이스로 활약하고 아시아 올스타에 뽑히는 등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당시 급료도 계장급인 2만원씩이나 받던 이회택은, 말하자면 63년 18살에 고등학교 1학년 축구선수로 시작해 67년 22살 나이에 아시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회택은 이미 이 시기부터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다. 이춘풍, 풍운아, 의리의 사나이 등의 별명을 달고 다니면서 직설적인 언행을 하기로 유명했으며 기행도 상당했다. 이미 20살 고3 시절부터 축구 하나만을 보던 생활에서 벗어났다고 증언하는 이회택이지만 이 시기부터 축구 반 노는 것 반으로 놀아제꼈다고 한다.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그 당시 대표팀이라면 축구는 물론 술 노름 싸움 등 뭐든지 1등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5] 또, 본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방탕하게 놀아도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몸을 다시 만들면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그러고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사실상의 국가대표팀인 양지에서 자기가 막내급이었는데도 축구를 잘해서 심하면 10살 이상씩 차이 나는 선배들이 귀여워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통에 또래들과 어울리며 축구하는 대신 나쁜 것을 많이 배웠다고. 돈도 돈이고 소속도 중앙 정보부 산하의 양지 소속이었기 때문에 무서운 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도 청소년 대표에 뽑히자, 국가대표에 뽑히자, 국가대표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자, 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자였는데 너무 빨리 그걸 다 해버렸고 동기부여를 따로 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 환경도 없어서 허무했다고 한다.[6]
아무튼 이렇게 살다 제대를 앞둔 이회택은 계약금조로 300만원을 받고 외환은행에 입단하기로 결정했다.[7] 그런데 연세대와 한양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자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이회택의 마음이 변한다. 그러나 이미 선후배들과 어울리면서 이회택은 150만원을 물쓰듯 써버린지라 외환은행으로 가야 할 처지였으나 한양대에서 150만원을 주기로 하면서 1970년 한양대에 입학하고 1974년 졸업을 맞이한다. 1972년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회택에게 당시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었던 한홍기가 찾아와 1973년에 포철 축구단이 창단되고 자기는 포철 초대 감독이 될 것인데 박태준이 직접 지명했으니 포철에 입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마음이 움직인 이회택은 포철에 입단하기로 하여 창단멤버가 된다. 박태준과도 좋은 관계를 맺은 이회택은 어지러운 고등학교, 대학교 사정과는 달리 부상으로 은퇴할 때까지 포항에 남게 된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A매치 82경기에서 21골을 넣으며 활약했다.[8] 만 스무 살의 나이에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따는 등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흔히 호사가 축구팬들이 꼽는 대한민국 축구 간판 공격수의 계보에도 최정민 다음, 차범근 이전의 대표 공격수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다.[9]
별명은 '아시아의 표범'으로 빠른 발과 뛰어난 가속력 및 순발력을 바탕으로 168이라는 작은키를 커버하며 굉장히 열정적이다 못해 전투적인 축구를 했다고 한다. 키가 작아도 탄탄한 육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체력과 힘을 과시하는 타입이었다고 한다.[10] 본인의 주장으로는 골에 관련된 여러 가지 감각과 판단력, 위치선정도 좋았다고 한다. 순발력, 가속, 체력 등을 타고났다고 증언했으며 등지는 플레이도 자신있었다고.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당시 자기관리를 못했던 것을 크게 후회한다고 한다. 항상 마음 먹고 열심히만 했으면 우승했다고 하는데 부모도 안 계시고 하다 보니 양지에 들어가고 68년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한다. 본인 증언으로도 그때부터 국가대표에서는 그저 운 좋게 포지션에 선수가 없어서 뛰었을 뿐이라고.
본인의 술회대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11] 70년대 이후에는 대표팀에서의 비중도 한 살 차이 고등학교 후배 박이천에게 많이 넘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천부적인 재능으로 인해서 올드 팬들이나 선수들의 기억 속 임팩트로는 크고 많이 남아 있으나 전반적인 선수 시절은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여담으로 선수 시절에 독일 분데스리가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SL 벤피카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유럽 무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도 모르고 해서 굳이 이적하진 않았다고 한다. 펠레의 산토스와의 경기에서도 득점을 기록한 적이 있다고 하며 에우제비오의 벤피카와의 경기에서도 득점을 했다고 한다.[12] 2020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위에서 언급한대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 유럽에 진출했어도 실패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2.1. 플레이 스타일


지금 현재의 선수 스타일로 따지자면 황희찬과 비슷하다. 168cm의 작은 키에 탄탄한 육체를 가졌다. 별명이 '아시아의 표범'이였다. 이 작은 키를 빠른 발과 순발력 및 뛰어난 가속력으로 커버했다. 굉장히 전투적인 스타일이였다고 한다. 전투적이다 보니 엄청난 체력과 힘을 과시했다고 한다. 골에 관련된 여러 감각과 위치선정 판단력 등이 좋았으며 순발력 체력 가속력도 자신 있었으며 등지는 플레이도 자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건 어린 나이에 일찍 성공하다보니 자기관리를 못했던 것이 한이라고 한다. 황희찬과 차이점이라면 골을 잘 넣었다는 것이다. 현재 황희찬의 피지컬은 유럽에서도 통하지만 마무리가 아쉽고 판단력이 안 좋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만약에 이회택이 좀 더 늦게 태어났다면 유럽에서 활약할 수 있었을텐데, 독일의 묀헨글라트바흐라든가 포르투갈의 벤피카에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에서도 탐났던 재능인 건 확실한 듯 하다. 본인도 재능 면에서는 최고였다고 한다.

3. 지도자 시절


41세에 선수시절에도 몸담았던 포항제철의 감독을 맡았으니 당시 기준으로도 제법 빨리 감독으로 데뷔한 셈이다. 그런데 감독 데뷔 시즌에 팀을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김주성, 정해원 등이 이끌었던 대우 로얄즈에 우승은 내주었지만 대단한 성과였고, 이듬해에는 프로축구 우승까지 달성했다! 이 시즌의 우승으로 인해 이회택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게 될 국가대표팀 사령탑까지 겸하게 된다.[13]
1990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이회택 감독은 1차예선, 최종예선 통틀어서 11전 9승 2무 무패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다. 예선에서 보여준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터라 세 번째 출전하는 월드컵 본선에 대해 기대가 엄청났으나. 결국 조별리그에서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에 속절없이 털리며 3전 3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월드컵 도전을 끝맺는다.
사실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포스가 워낙 압도적이었던지라 외신들도 한국을 다크호스로 많이 꼽았다. 특히 긴머리를 휘날리는 '삼손' 김주성은 주목해야할 선수로 꼽히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탈탈탈 털리며 오히려 아시아와 세계축구간의 격차만 확인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소위 '아시아의 맹주'라며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던 전성기라면 전성기 시절.
이회택 본인은 이것에 대해 당시 스포츠학자들이 1주일 전에만 가도 시차적응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데이터를 내세우면서 주장을 하는 통에 달리 할 말이 없었고 협회도 1주일 전에 가도 괜찮다니까 그냥 1주일 전에 이탈리아에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회택은 1주일 더 일찍 가서 친선 경기도 좀 하고 컨디션 조정도 더 잘하고 그랬으면 16강은 몰라도 훨씬 좋은 경기를 했을텐데 데이터에 밀려서 그러지 못했던 것이 지도자 생활 최대의 한으로 남는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록 심판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판정으로 윤덕여가 퇴장당해 패배했지만, 마지막 우루과이전에서야 컨디션이 올라와서 우루과이와는 어느 정도 대등한 경기를 했던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정보전에서 무력해서 상대방이 무슨 축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세계무대의 전술과 동떨어져 있었는데 압박축구를 접해보고 대응이 곤란했던 점 등등이 아쉬웠다고 한다.
여담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주역이었던 정용환, 박경훈, 최순호, 변병주, 김주성부터 이영진, 황보관, 최인영 등 화려한 멤버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회택은 이때 한국 축구가 10년을 먹고 살 커다란 재산을 남겨줬다. 바로 황선홍홍명보를 대표팀에 부른 것. 당시 두 사람은 애송이도 아니고 그냥 듣보잡이나 다름없던 터라 엄청난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포항 시절의 업적도 그렇고 선수 보는 눈으로는 사실상 허정무 이상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소속팀 포항제철을 1992년 프로축구 우승으로 이끈 것을 마지막으로 클럽팀 감독직에서도 사임하고 야인의 세월을 보내다. 1998년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갑자기 K리그에 다시 돌아온다.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빈자리를 메꾼 것. 그러나 리그 준우승과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을 일궈낸 전임 허정무 감독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고, 리그컵과 FA컵 준우승 한 차례만을 찍고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이회택 본인은 감독생활에 대해 자신은 별로 감독과는 맞지 않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냥 했다고 말한다. 남을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었고 1년마다 선수들을 정리하고 그래야 하는데 다 제자들인데 그런 일을 하는 게 적성에 안 맞았다고. 전남에서 감독 복귀한 것도 그냥 경제적인 이유라고 말한다.
이렇듯 감독직에 나름대로 초연한 것도 그렇고 선수시절 유명했던 성깔과는 달리 감독 시절에는 비교적 덕장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본인 입장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젊었을 시절 성깔따라 옛날 감독들에게 대들었던 것이 마음에 남아서 그렇다고 한다. 특히 본인의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인 이란전에서 전반 45분 끝나고 교체당하자, 3년만의 국가대표 복귀였기도 하고 의욕이 앞서 있었던지라 당시 감독이던 최정민에게 대들었는데[14]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교체가 맞았었고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서 여러모로 후회가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감독할 때는 선수들이 대들어도 업보려니 하는 마음으로 감독직을 했다고.

4. 기술위원장 시절


이회택은 전남 감독직을 내놓은 이후로는 주로 대한축구협회에 몸담아 행정가로 일했다. 조 본프레레 감독 재임기에 기술위원장을 맡았으며[15], 2008년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는 동안 다시 기술위원장직을 맡아 월드컵 지역예선 무패통과와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 달성에 조력자 역할을 했다.
이후 허정무 감독이 계약연장을 거부하자 축구협회는 후임감독직을 맡을 인물을 물색하는데 이회택은 당시만 해도 축협 주류에 대한 반대파의 대표인사로 꼽히던 조광래를 추천한다. 당시 회장이던 조중연은 틈만 나면 자신을 디스했던 조광래에게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기는 데 탐탁치 않았다고 전해지나 기술위원장의 추천이니 묵살할 수도 없고, 축구계 주류-비주류의 화합을 추진하는 차원에서 통크게 이회택의 제안을 수락해 조광래호가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거창하게 출발했던 조광래호의 말로는 2011년 아시다시피... 이 때 이회택은 기술위원장으로서의 업무수행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는데, 자신이 품어 준 셈인 축구계 후배 조광래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디스한 것이다.
조광래의 말인즉 기술위원장이 특정 선수를 대표팀에 포함시키라며 본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 이에 대해 이회택 기술위원장은 압력을 행사한 적은 없고 선수를 추천하는 통상의 업무를 행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압력조였는지 제안조였는지는 알 턱이 없으나 대다수의 여론은 이회택 쪽을 향하고 있다.
아무래도 해당 포지션인 오른쪽 풀백 자리에서 잘해주는 선수를 뽑을 생각은 않고 K리그 정상급 중미J리그에서 어중간한 활약을 보이던 윙포워드를 포변시킬 생각만 하던 조광래의 과거 행태를 감안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듯. 많은 축구팬들은 "내가 기술위원장이라도 보다보다 답답해서 누구누구 좀 써봐라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는 조광래 항목에서도 각주로 언급되고 있지만, 올림픽 대표팀과의 선수 기용 문제로 바로 이회택과 한판 하고 언론에 까댔을 정도의 인물정작 외압 문제에 관해 짤린 뒤에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기 자리를 지킬려고 묵인했다가 짤리니까 저런다. 혹은 당시 대단치 않게 받아들인 걸 뒤끝 작렬하느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느냐는 것.
무엇보다 조광래는 이회택이 축구계의 반목을 일소하고 대화합하는 차원에서 끌어안은 인물이다. 애초에 국가대표 감독직으로 추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악연 때문에 조광래를 고까워하던 조중연 회장에 대해 조광래를 꾸준히 쉴드쳐주던 인물이 이회택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회택이 기술위원장이 아니었더라면 조광래는 평생 축구협회 반대파로 낙인찍혀 국가대표 감독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렇게 나름 호의를 베풀고 챙겨준 인물이 자신을 공개적으로 까내린 데 대해 이회택은 심정적으로 상심이 컸다고 전해진다. 결국 조광래가 경질되기 전에 먼저 책임을 지고 기술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16]
그동안 유지하던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직함도 반납하고 요새는 고향 김포시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는 김원일이 그의 축구교실을 거쳤다고 한다.
2014년 7월 21일, 지도자를 대상으로 하는 축구인노조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여담으로 전 항목에서는 이미 기술위원장 및 부회장에서 사퇴했음에도라고 되어 있었으나 이회택의 사퇴는 이번 공금횡령건이 발각되어 사퇴한 것이 아니라 2011년도에 남아공월드컵에 대한 책임으로 사퇴결의를 받아 사퇴한 것이다. 홍명보, 허정무, 황보관과 같이 계속 이미 사퇴한 사람 사퇴하라고(...)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4년마다 축구보는 거 인증하지 말고 소식 좀 들으면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
물론 황보관이야 경우 사퇴하지 않고 임원명단에서 직원명단으로 이름을 옮겨 WOW팀 팀장겸 기술교육실장을 하고 있으니 사퇴의 필요성이 있는 것도 맞고 비판받아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이회택 보고도 사퇴하라는 여론이 높았던 것에 대해 좀 소식 좀 알고 비판하라는 얘기에 대해, 이회택 보고 사퇴하라는 얘기는 이회택이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니 그런 비판들이 나오는 것이며 그에 대해 4년마다 축구 보지 말라는 얘기가 이회택 두둔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웃긴 얘기다. 상식적으로 알았으면 사퇴가 아니라 적폐 청산이라거나 그냥 물러가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을 터이다.
9월 14일 배임혐의로 기소됐다.

5. 기타


2005년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최초 헌액된 7인 중 한 명이다. 나머지 6명은 김용식, 김화집, 홍덕영, 차범근, 정몽준, 거스 히딩크.
선수시절 말레이시아에서 경기를 갖는데 코너킥을 차러 갔더니 자신이 서 있는 옆으로 유리병이 날아왔다고 한다. 이에 발끈해서 코너킥을 골대 쪽이 아니라 관중석으로 향해, 그것도 캐논슛을 내지르고 퇴장당해 경기장에서 나갔던 적이 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선수를 팼다는 얘기도 있다. 효창운동장에서의 경기였는데 1:1 수비를 붙여서 경기 흐름이고 뭐고 그냥 자기만 따라다니니까 짜증나서 심판 안 보는 틈을 타서 대놓고 팬 다음 좀 떨어져서 다니니까 득점을 기록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외에도 축구판 더럽다고 머리 밀고 절간에 들어갔다거나, 석유 장사를 시작했다가 망하고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한다든가 감독과 자주 다퉜다든가 등등 여러 희한한 기행을 벌이곤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보통 이러면 경기력이 떨어져야 하는데 타고난 몸이 좋아서 그러지는 않았다고. 77년 국가대표 은퇴할 때도, 오랜만에 뽑히는 바람에 전날밤 긴장해서 잠을 설쳐 컨디션이 안 좋아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해 교체당하자 감독인 최정민 앞에서 축구화를 바닥에 내려치고 은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 이동국이 이회택 조카라서 빽으로 대표팀에 뽑힌다는 설이 퍼진 적이 있는데 당연히 개소리다. 참고로 이동국은 본프레레 감독 시절 회장님께서 감독을 불러다가 친히 이동국을 지목하면서 빼라고 했을 정도로 외압의 피해자면 피해자지 수혜자는 아니다.
이렇듯 이회택은 본인의 불같은 성깔로 인해 나이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인터뷰를 시원시원하게 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언론에서 물어보는 것도 있어서 특히 스트라이커 평가는 좀 많이 한 편이다. 황선홍은 본인이 충격 발탁을 한 선수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힘과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기술이 탁월했다고 말한다. 김은중은 재능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못 컸다고 평가한다. 정조국은 나름대로 자질은 있지만 근성과 순발력이 부족하다고 하며, 김동현은 힘은 있지만 기술이 모자란다고. 박주영은 축구지능, 기술, 경기운영 능력을 겸비한 그 재능은 분명히 남들과 다르고 탁월하지만 정말 최고의 천재라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이정협은 기술은 없지만 오프 더 볼과 침투 타이밍은 아는 선수라고 말한다. 이동국은 슈팅력이 탁월하고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근성이 부족해서 재능을 다 피우지 못했으며 그 결과로 2002년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는데, 국가대표 선수는 궤도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본다. 황의조는 2018년 재능이 터지면서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회택은 자신의 뒤를 잇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로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 - 이동국을 꼽는다.
이산가족으로 부모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90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통일축구대회 당시 선수단 고문 자격으로 동행해 부친 이용진과 무려 40년만에 극적인 상봉을 이뤄 국민들의 눈시울을 적신 바 있다.
사위는 지금은 은퇴한 농구선수 윤영필이다. 중학생인 외손주가 축구부 소속으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조용필과의 인연도 아주 유명한 이야기.

[1] 출생 당시에는 김포군 김포읍 사우리.[2] 본인의 회상에 따르면 부친의 농장에 유니폼 같은 옷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선수였던 것 같다고 한다.[3] 당시에는 본격적으로 선수가 되려고 축구하는 축구부와 그냥 생활체육하는 축구부가 있었는데 아마 생활체육하던 축구부를 이회택이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4] 이회택의 증언으로는 군복무를 마치고 와서 고등학교에서 축구선수로 뛰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며 부정선수였던 것이 딱히 특별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학적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시기라 선수들이 이 학교 저 학교 떠돌아다니기 일쑤였으며 학교에서 선수 더 하라고 잡아놓은 고등학교 4, 5학년들도 수두룩했다고 한다.[5] 술은 몸에서 안 받아줘서 안 한 게 천만다행이라고.[6] 아시아 최고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지 실제로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대표팀이 비교적 자주 부딪치는 동남아시아와 극동아시아 쪽과의 경기에서 이회택이 그렇게 실감했을 수는 있겠으나 서아시아와 그렇게 본격적으로 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회택이 그렇게 느낀 것은 너무 일렀다.[7] 그 당시 물가로는 집 한 채 정도의 가격의 거금이었다고 한다.[8] 경기기록이 다 구비되지 않은 것도 있고 이 시기 주인 잃은 골이 꽤 있기도 하니 분명히 몇 골 정도 넣기는 더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 예를 들어 2진급과 붙었다거나 제대로 된 국대가 아니라 어느 정도 대강 선발된 팀이라거나 클럽팀과의 경기라거나 해서 당시 A매치 취급을 받았지만 인정되지 않은 경기들이 꽤 있다. 산토스나 벤피카와의 경기에서도 국가대표팀으로 득점을 기록한 이회택이지만 공식 a매치 기록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9] 스트라이커 계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것이 이회택의 주요 포지션은 스트라이커가 아닌 세컨드 스트라이커라 보는 것이 맞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2선에서 다른 공격수들에게 어시스트나 키 패스를 넣어주는 것에 능했고 사실상 박창선보다도 이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플레이메이커였다. 차범근 또한 분데스리가에선 스트라이커였지만 국가대표에선 윙어로 뛰었다.[10] 2013년에 72년 국대가 모여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 멤버중에서는 이회택이 가장 선배격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차범근과 비슷할 정도로 어깨빨이 장난 아니었다.[11] 대표팀에 들어왔다 나갔다 한 시기도 있고 본인 인터뷰에서도 방탕하게 사느라 전성기 2, 3년을 제외하면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한다.[12] 이회택은 펠레와 마라도나 중에서는 펠레가 더 낫다고 한다.[13] 당시에는 국가대표팀이 전임감독 체제가 아니었기에 프로축구 우승팀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겸했다.[14] 소문으로는 축구화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난리를 피웠다고 하나 본인 증언으로는 교체 지시를 받고 그냥 흙묻은 축구화를 바닥에 세게 몇 번 털었다고 한다.[15] 독일 월드컵 지역예선 부진의 책임을 지고 본프레레 감독보다 한 발 앞서 사퇴를 표명했다.[16] 이 사퇴 결정 자체가 본인이 밀어붙인 조광래 선임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자인하는 셈이기 때문에 조광래의 명줄은 이 때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