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덕영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축구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광복 후 한국 축구의 1세대로 활약한 원로이며,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한국의 국제 경기 첫 승에 일조했다. 1954 FIFA 월드컵에서는 2경기 16실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1] 대표팀 내에서 가장 활약한 선수로 인정받았고 우리나라 골키퍼 계보의 시조로서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2]
2. 생애
함흥 출신으로 8.15 광복 후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으며, 1948 런던 올림픽에서 조선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당시 조선의 주전 골키퍼는 따로 있었는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대신 뛴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그냥 구경만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주전 골키퍼로 발탁되는 바람에 굉장히 무섭고 떨렸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1라운드였던 16강전에서 멕시코와 맞붙었는데, 결과는 한국이 5:3으로 승리했다. 멕시코 입장에선 상당한 코리아 쇼크라고 볼 수 있겠다. 독립한 지 3년도 안 된 나라의 축구 국가대표가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에게 승리했으니 엄청난 국위선양을 한 셈이다.[3]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얼떨결에 골문을 지키게 된 홍덕영 골키퍼는 한국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
그러나 8강전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대패하면서 그의 첫 국제 대회는 막을 내렸다.[4] 이 대패 기록은 70년이 넘게 지난 현재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실점 및 최다 스코어 차 패배 기록인데, 참고로 이 시기의 스웨덴은 그레노리 트리오가[5] 이끄는 황금 세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에서 기록한 슈팅은 무려 '''48개'''로 홍덕영 골키퍼는 수 많은 슈팅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12골이나 내주었다.[6] 이후 대승을 거두고 4강에 진출한 스웨덴 황금 세대는 자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한다.
2.1.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그 뒤, 1954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일본과 맞붙었는데, 당시에는 8.15 광복 직후였고 당연하게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매우 커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놈들이 한국 땅을 밟는 것을 두 눈 뜨고 못 본다"라고 하며 일본대표팀의 입국을 반대했다. 당시 분위기는 몹시 살벌하여, 소문이 퍼지자 입국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원정 경기를 2경기 치르기로 했는데, 최근과는 달리 굉장히 살벌한 분위기가 되었다.[7]
그렇게 치러진 최초의 한일전의 결과는 한국의 5:1 대승. 전반전에 일본에게 선제골을 내주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한국 대표팀 선수들을 조롱했으나 선수들은 이에 주눅들지 않고 내리 5골을 꽂아 넣으며 역전승, 일본을 떡실신시켜 버린다. 홍덕영 골키퍼는 당시 우리보다 축구 인프라가 훨씬 발달되어 있던 일본을 상대로 한국 응원단도 없는 원정 경기에서 90분 내내 1실점밖에 허용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 주면서 최후방을 든든하게 지키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원정 2차전에서 2:2로 비기며 한국은 일본을 꺾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해외에 가게된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항공편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당시에 비행기를 타려면 20여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월드컵에 불참하게 될 위기를 겪었다. 남은 비행기 표도 얼마 없어서 선수들은 표를 모으는데 최선을 다했고 잉글랜드 출신 신혼부부가 티켓 두 장을 양보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8] 다행히 선수단은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타는데 성공했지만 46시간의 비행 이후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는 1차전 경기로부터 겨우 10시간 전이었고 선수들은 현지 환경이나 시차에 대한 적응조차 못한채 최악의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치뤄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유니폼 제작업소가 선수들 유니폼의 등번호를 넣치 않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걸 뒤늦게 확인한 선수들은 그 부족한 휴식 시간을 또 쪼개어 대회 관계자로부터 천으로 된 숫자를 구하고 유니폼에 박는 수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급하게 치루게 된 1차전의 상대는 하필 당대를 넘어 역대 최고의 축구 팀 중 하나로 평가를 받는 헝가리의 매직 마자르였다. 1952년 올림픽 축구의 챔피언이자 1954년 월드컵 전까지 28경기 무패행진 중이었으며 특히 바로 직전 평가전에서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7:1 대승을 거둔 우승후보 0순위 팀이었다. 그 선수진은 페렌츠 푸스카스, 산도르 코츠시스, 난도르 히데구티, 요세프 보직 등 올림픽에서 만난 스웨덴의 그레노리 트리오를 능가하는 네임드들이 주를 이루었다.
결국 헝가리전의 결과는 0:9 패배였다. 후반전 도중에 무려 4명의 선수들이 탈진하거나 쥐가 나서 쓰러지는 바람에 고작 '''7명'''이 경기를 마무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9][10] 당시 홍덕영 골키퍼는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들을 일방적으로 받는 대단한 투혼을 보였기에,[11]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그의 활약에 감동하여 사인을 받아 가거나 한국 대표팀 숙소에 선물을 놔두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2차전 터키전에서도 0:7로 패배하며 조기에 짐을 싸 귀국하게 되었다. 사실 터키는 당시 한국이 꼭 그렇게 크게 질 상대가 아니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1961년에 가진 터키 원정 친선경기에서도 0:1로 패배했던 걸 봐도 당시 한국이 터키에게 이렇게 크게 질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에서 세계 최강 헝가리까지 무리하게 상대한 한국의 상황이라면 이해 못 할 결과는 아니다.[12]
3. 그 후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옛날에는 동남아시아가 지금과는 달리 아시아에서 축구를 잘하던 편이었고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이니 은메달을 따낸 것도 그 당시에 매우 선전한 것이다.
1957년에 선수 생활을 접고 심판으로서 10여년 간 활동했다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자신이 선수로서 활약했던 고려대 감독을 맡아 활약했고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서울은행의 감독직을 맡아 활약했다. 1985년부터 이듬해인 1986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말년엔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발가락 절단 수술까지 하는 고생을 하다가 병세 악화로 2005년 9월 13일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그래도 2002년 한일 월드컵때 노환임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 신화를 달성하는 맹활약을 지켜본 그는 "후배들이 원을 풀어줘 고맙다."는 말을 남겼고,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2005년에는 스위스 월드컵 당시 감독이었던 김용식 감독, 후배들인 이회택, 차범근, 공로 부문의 김화집, 거스 히딩크, 정몽준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7인 중 한 명으로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으니, 이렇게나마 오랫동안 응어리진 월드컵에서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그에게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반사신경을 바탕으로 슈퍼세이브를 기록하던 전형적인 선방형 골키퍼이다. 그 외에 PK선방도 꽤 잘하는 편이다. 단점은 키가 작아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래도 기막힌 위치선정으로 단점을 어느정도 상쇄했다.
5. 관련 문서
[1] 안타깝게도 이는 역대 월드컵 한 대회 최다 실점 기록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 홍덕영 선수의 실력을 폄하할 수는 없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후술.[2] 우리나라의 골키퍼 자리는 경쟁이 강한 다른 포지션들에 비해 뚜렷하게 세대를 교체하고 있다. 메이저 대회 (월드컵, 아시안컵, 성인 올림픽, 성인 아시안 게임)를 2회 이상 주전으로 출전한 우리나라 골키퍼들을 모아보면 홍덕영 (3회) - 함흥철 (6회) - 이세연 (3회) - 조병득 (4회) - 최인영 (4회) - 김병지 (3회) - 이운재 (5회) - 정성룡 (3회)으로 이어지며 여기에 언급되지 못한 선수들은 메이저 대회 주전 경험이 1회 이하인 골키퍼들이다.[3] 다만, 북중미 강호이긴 했으나 멕시코는 그 당시 월드컵에 나오면 그야말로 동네북 신세였다. 1930 월드컵에서 13위 꼴찌였고 당시 런던 올림픽 이후로도 연이어 꼴찌 신세였다가 1958 월드컵에서 겨우 비겨 승점 1점을 얻었다. 월드컵 2라운드를 넘어선 게 한국과 마찬가지로 1970 자국 월드컵 때였다. 그리고 올림픽에서는 멕시코가 이상하게도 한국을 단 1번도 못 이기고 있다. 멕시코가 2012 올림픽에서 사상 첫 남자축구 금메달을 받을때조차도 한국에게 0-0으로 비겼고 한국과 올림픽팀 성적은 1948년 이후로 4무 3패로 압도적으로 밀려있다. 가장 최근 경기였던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권창훈에 골을 허용하며 0:1로 패했다.[4] 저 당시 스웨덴도 저런 나라한테 '''고작 12골밖에''' 못넣었냐(...)고 욕을 먹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메이저 대회에서 자책골을 넣거나 PK 실축하는 선수들은 어김없이 살해 협박을 받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중남미 지역 국가인 멕시코는 과연 어땠을지...[5] 군나르 노르달,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6] 한국 축구 최악의 경기라 평가 받는 마르세유의 비극에서 네덜란드의 기록이 슈팅 27개, 유효 슈팅 17개로 김병지가 이 경기에서 5실점이나 하고도 팬들에게 그의 인생 경기였다고 평가 받고 있다. 홍덕영은 이에 2배 가까운 슈팅 수를 맞이한 것.[7] 게다가 당시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일본까지 가서 축구보러 응원할 만한 여유가 되는 사람이 있었겠는가? 웬만큼 잘 산다는 부유층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1948년 올림픽이나 1954년 월드컵 본선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이 역시 일반적인 원정 경기 이상으로 엄청난 악조건에서 치러진 경기였음은 틀림없다.[8] 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우여곡절은 이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9] 당시 축구 규정은 골키퍼 외에 선수를 교체할 수 없었다.[10] 선수교체 규정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11] 특히 푸스카스의 슈팅 파워가 크게 충격적이었는지 2005년 인터뷰에서도 푸스카스의 슛이 골대를 맞을 때의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국내 팬들에게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에 홍덕영 선수의 가슴이 멍들었다고 와전되었는데 (수정하기 전 이 글에는 아예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 팩트는 헝가리전이 아니라 올림픽 스웨덴전이었다고 한다.[12] 컨디션만 좋았어도 월드컵 역사상 첫골은 이때 기록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