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식(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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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이라도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 출전하기에 앞서 선수들을 불러 전의를 다지며 한 명언.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활약했던 1세대 중에서도 최고 원로.
흔히 축구 영웅을 떠올리면 외국의 펠레,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디 스테파노, 한국 축구에서는 차범근, 박지성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축구로 사랑을 받았던 축구인. 축구밖에 몰랐던 진정 축구를 사랑했던 축구인.''' 그가 바로 김용식 선생이다. 축구의 인프라가 전혀 없던 한국에서 실질적으로 축구가 기틀을 잡게 한 한국 축구의 원로이자 전설.
2. 어린 시절
일제 식민지 시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 의식을 지녔던 김익두 목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13세에 경성으로 옮기면서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를 바랐지만 김용식은 공부를 싫어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길을 걸었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 김용식은 YMCA에서 공부와 축구를 병행했고, 경신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1928년 11월 경신학교 재학 시절에 개최된 제9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실업전수학교팀을 8대 0으로 크게 이기는 데 큰 몫을 함으로써 축구선수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항일 시위였던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을 당한 그는 1년여를 숨어지낸 뒤 1930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보연전과 경평전을 숱하게 치르면서 많은 무용담을 남겼다.
그 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고, 그로 인해 소속팀이 우승하게 됨으로써 국제무대에 출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국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일본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3. 선수 생활
당시 우리나라에서 김용식의 명성은 대단했다. 1936년 당시 마라톤에 손기정이 있었다면 축구에는 김용식이 있다고 할 만했을 정도였다. 본래 실력으로 베를린 올림픽 대표 자리를 꿰찼고[3] 일본 대표팀은 스웨덴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비록 바로 다음 경기인 8강전에서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를 만나 8:0으로 대패하긴 했지만 김용식은 이 두 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나서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덕분에 김용식은 와세다 대학팀에 속하게 되었지만, 차별대우로 인해 김용식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체육 시스템을 모조리 파괴했다. 27세의 나이로 이제 축구 선수로 정점에 오른 김용식은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신문사 책상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미국인 선교사에게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록 사회부 소속이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축구 경기를 관람했고 혼자 공을 다루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언제나 마음 속의 본업은 축구였다. 언제든 축구를 위해 달려갈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던 1937년, 일제는 보성전문학교 올스타를 꾸려서 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4강전에서 일제가 내심 바랬던 대로 보성 올스타는 와세다 대학과 맞붙는다. 한때 김용식이 포함되었을 정도인 와세다 대학은 국대를 12명이나 보유한 실질적인 일본 국가대표였고 보성 올스타는 일제의 거듭된 억압으로 축구를 그만둔 사람들도 가득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35년 경성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인 36년 보성전문학교가 다시 준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 크게 일제의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제는 일본 제일팀이 조선팀을 뭉개기를 바랬다. 보성전문학교 팀은 분전 끝에 연장전이 끝날 때까지 2:2였으나 제비뽑기로 와세다 대학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의 야바위였다. 심판은 보성전문학교 팀에게 제비를 먼저 뽑도록 종용했고 김용식이 뽑아든 제비에는 敗가 적혀 있었으나 와세다가 뽑아든 제비에도 敗가 적혀 있었다. 즉 두 제비 모두 勝은 없고 敗만 있기 때문에 보성에게 먼저 뽑게 시킨 다음 발표하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대표적 선수인 김용식의 등장 이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축구에서 만큼은 이겨보이며 실력을 증명해 보였지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선수들을 대표로 받아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김용식의 등장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김용식의 실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대표로 발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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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에 아버지가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아 다시 고향 신천으로 내려갔고 김용식은 경성축구단을 나와 평양축구단으로 소속을 옮겼다. 1945년 해방 이후에야 김용식은 다시 서울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김용식은 이영민 감독[4] 과 함께 1948년 런던 올림픽에 플레잉 코치 자격으로 출전함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국제 대회에 참가하였다. 1948년 올림픽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으며 기세를 올렸지만 다음 상대인 스웨덴에 12:0으로 대패하였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공격편대인 그레놀리 트리오를 막아내지 못했던 것. 그레놀리 트리오는 우리나라 골문에 7골을 폭격하였고 우리나라 올림픽 팀은 그렇게 탈락하였다.
1952년에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를 하였고 감독 생활을 하면서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최정민을 발탁해내기도 하였다. 1954년에는 최정민, 민병대 등을 앞세워 감독으로 스위스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다.[5] 애초에 세계의 벽이 높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용식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하지만 조편성에 너무나도 운이 없었던 대한민국. 당시는 물론 역대 월드컵을 따져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최강팀인 '매직 마자르' 헝가리를 만나 0:9로 대패하였다. 그리고 다음 터키와의 경기에서 진이 빠진 대한민국은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고 역시나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점수만 보면 실망스러울 경기였지만, 사실 한국대표팀의 저 결과는 그야말로 투혼을 불태운 결과였다. 그럴만한 게 당시 대표팀은 제대로 된 비행기도 타지 못 하고 화물기를 얻어타 구석에 처박혀 겨우 스위스로 와서 제대로 연습도 못하고 경기에 임했다! 이러다 보니 외국기자들은 '한 20:0으로 헝가리가 이기겠지?' 이랬고 실제로도 당시 기록영상만 봐도 외국기자들이 경기 도중 드러누워 잠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구' 이랬던 것이다. 되려 나중에 "겨우 9-0으로 이겼어?" 라며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헝가리는 이탈리아나 잉글랜드 같은 당대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7골씩을 때려박고 안드로메다로 보낸 전력이 있던 말 그대로 공포의 팀이었다. 별명이 괜히 '매직 마자르'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표팀이 한 자릿수 실점으로 막은 건 엄청나게 선전한 셈이었다.[6][7]
그 이후에도 김용식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양지축구단, 할렐루야 등의 축구팀 등에서 감독을 맡아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며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1951년 FIFA 국제심판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1985년, 향년 74세에 지병으로 타계한 후, 체육 훈장 맹호장이 추서됐으며, 이후 2005년에는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홍덕영, 이회택, 차범근, 김화집, 거스 히딩크, 정몽준 등과 함께 헌액되었다.
4. 생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출생의 배경도 있고 해서 그는 성실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경신고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채금석 선생과 술, 담배, 도박, 여자 등 축구에 도움이 안 될 것들은 일절 멀리하고 40대까지 선수로 뛸 것이라는 약속을 지켰을 정도였고,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떠나는 배에서 우연히 '축구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구절을 읽고 그를 지키기 위해 '1만일 훈련 계획'을 세우고 그를 결국 지켜내는 '''근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한 틈만 나면 외국에서 나오는 축구 관련 전문서적을 구하여 탐독할 정도로 공부하는 축구인이기도 했다.
김용식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김용식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칼럼을 참조 바람. ###
5. 수상
5.1. 개인
- 체육훈장 맹호장
- 2006년 대한민국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최초의 7인
6. 관련 문서
[1] 정확한 포지션은 센터 하프 (중앙 하프백)로 현재의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역할이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본디 김용식뿐만 아니라 김영근도 선발됐으나 차별대우에 불만을 표출하며 대표팀을 뛰쳐나갔다. 사실 진짜 실력으로 따지면 두 명도 적다고 국내에서 논란과 비판이 거셌고, 실제로 여운형 같은 사람도 조선인 축구선수들이 차별받았다고 분개하면서 김용식과 김영근에게 보이콧을 권유하기까지 했다.[4] 한국 야구계의 전설인 대타자 이영민 맞다. 이영민은 야구와 축구를 같이 병행해 선수생활을 했으며, 김용식과 같이 축구선수로 활약했었다.[5] 다만 '최초의 월드컵 16강'을 이룬 감독은 아니다. 지역예선을 통과한 후 본선 16강부터 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16강이 부각된 대회는 1982년 월드컵부터 해당.[6] 여담으로 스위스에선 한국에 대하여 여러 사정이 방송 보도 되었고, 현지인들이 온갖 생활용품을 전해주었으며 홍덕영 골키퍼는 현지인들이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정말로 20골을 먹혀도 될 경기를 선전했다며.[7] 저당시에는 골키퍼를 제외하고 선수교체를 할수 없었는데 선수교체제도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