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레오 로코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7년에 AC 밀란 감독을 맡았다.
AC 밀란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오늘날까지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99년에 AC 밀란 역대 감독 중 최고의 감독을 선정하는 투표에서, 팬들은 압박 축구의 창시자 아리고 사키,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휩쓸었던 파비오 카펠로 등을 제치고 로코를 최고의 감독으로 뽑았다. 그 만큼 그가 AC 밀란에서 이뤄낸 업적은 실로 대단했다. 또한 로코는 카테나치오의 창시자로서 이탈리아 축구계가 추구할 방향을 제시해 축구 전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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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티나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의 로코
네레오 로코는 1912년 5월 20일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민으로 살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후 트리에스테가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면서 국적이 이탈리아로 변경되었다. 로코는 지역 축구팀인 트리에스티나의 경기를 줄곧 관람하곤 했고 이내 축구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27년 친구 Piero Pasini의 추천에 힘입어 트리에스티나 유스팀에 입단했다.
로코는 1929년 10월 6일 토리노와의 경기 때 출장함으로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1:0 패배였다. 이후 그는 윙어로서 1930-31 시즌부터 1936-37 시즌까지 8시즌을 치루며 232경기에 출전해 66골을 기록했다. 그후 1937년에 나폴리로 이적한 로코는 1037년 9월 12일 리그 개막전에서 볼로냐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뤘고 11월 14일에 제노아를 상대로 데뷔골을 기록해 무승부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이후 로코는 나폴리에서 1940년까지 3년간 활약하며 52경기 7골을 기록했다.
이후 로코는 1940년에 당시 세리에B 소속이었던 파도바로 이적해 1942년까지 47경기 14골을 기록했고 1942년엔 그의 고향 팀이며 세리에C 클럽인 94° Reparto Distretto Trieste로 이적해 한 시즌을 소화했다. 그후 그는 또다른 트리에스테 지역 팀인 Libertas Trieste에서 한 시즌을 치뤘고 1944년 파도바로 이적해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다가 1945년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한편 로코는 국가대표로서 1934년 딱 한 경기를 뛰었다.
3. 감독 경력
3.1. 초창기
1947년, 로코는 트리에스티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진가를 훌륭히 보여줬다. 그가 부임한 첫 시즌인 1947-48 시즌, 트리에스티나는 놀라운 선전을 보이며 세리에 A 2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 세리에A 2위는 현재까지 트리에스티나 역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남아 있다. 그후 로코는 다음 2시즌에 2연속 8위를 기록했다가 보드진과 갈등을 빛어 감독직에서 물러나 1950년 세리에B 클럽인 트레비소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트레비소에서 3시즌 동안 활동하다가 1953년 다시 트리에스티나로 복귀했다. 그러나 홈에서 AC 밀란에게 6:0 참패를 당한 뒤 경질되고 말았다.
3.2. 파도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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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티나에서 경질된 지 불과 며칠 후, 로코는 세리에B에서 하부리그로 강등될 위기에 몰려 있던 파도바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성공한 후 다음 시즌에 세리에 A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파도바는 평범한 지역 군소팀에 불과했고 선수들도 평범한 재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런 팀을 이끌고 세리에 A에서 놀라운 선전을 선보였고 1957-58 시즌엔 유벤투스, 피오렌티나에 이어 리그 3위를 기록해 이탈리아 축구 팬들을 경악시켰다.
파도바는 그들이 보여준 투쟁심과 피지컬을 앞세운 승부욕으로 인해 '기갑군단'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로코는 이 기갑군단을 이끌고 평범했던 파도바를 무시할 수 없는 강팀으로 육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주목한 이탈리아 축구 협회는 로코에게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참여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로코는 이탈리아 축구 팀을 이끌고 8강전에서 우승후보 브라질을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준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와 1:1 무승부를 거둔 후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그후 로코는 대표팀을 떠났고 두 번 다시 대표팀을 맡지 않았다.
3.3. AC 밀란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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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네레오 로코, 지아니 리베라,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1961년, 로코는 AC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때부터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아갔다. 우선 첫 시즌인 1961-62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해 수쿠데토를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해 웸블리에서 벤피카와 격돌했다. 이 시기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승전을 치르기 위해 웸블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로코는 선수들이 부담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자 로코는 "무서운 사람은 버스에서 내리지 않아도 상관없다!"라고 외치고는 자리에 앉아 과장된 몸짓으로 덜덜 떠는 흉내를 냈다. 이걸 본 선수들은 폭소를 터트렸고 자연스레 긴장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로코의 이러한 리더쉽에 힘입은 AC 밀란은 벤피카를 2:1로 격파하고 구단 역사상, 그리고 이탈리아 축구 클럽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 우승컵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이후 로코는 AC 밀란에서 1963년까지 활동하다가 느닷없이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세리에B에서 허덕이고 있던 토리노로 부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깜짝 놀란 AC 밀란 보드진이 만류했지만, 그는 "아직 토리노와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지만 구두로 약속했다. 용기있는 남자로서 내 약속을 지킬 것이다"며 이를 뿌리치고 기어이 토리노 감독으로 부임했다.
3.4. 토리노 시절
잘 나가던 AC밀란에서 느닷없이 세리에B에서 고생하던 토리노로 이적한 로코는 부임 첫 시즌에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켰고 1964-65 시즌에 세리에 A 3위를 기록, 세리에 팬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후 로코는 토리노에서 1967년까지 감독으로 활동했고 1966-67 시즌에는 기술 디렉터를 병행하기도 했다. 그러던 1967년, 로코는 AC 밀란 보드진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이고 밀라노로 복귀했다.
3.5. AC 밀란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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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AC 밀란은 로코가 갑자기 토리노로 떠난 뒤 부진에 빠져 중위권을 전전했고 그들의 최대 라이벌인 인터 밀란은 1964년과 1965년에 유러피언 우승컵을 획득하는 등 잘 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소네리로 복귀한 로코는 부임 첫 시즌인 1967-68 시즌에 곧바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1968-69 시즌에 요한 크루이프의 아약스를 4:1로 격파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유로피언컵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1968년과 1973년에 유로파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고 1969년에 인터콘티넨탈 컵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렇듯 잘 나가던 로코는 1974년 2월 AC 밀란을 떠났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급료가 그동안의 활약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며 보드진과 갈등을 빛은 끝에 사임을 선택한 것이다.
3.6. 말년
AC 밀란을 떠난 로코는 1년간 휴식을 취하다가 1974년 피오렌티나 감독으로 부임해 한 시즌을 맡았다. (이때 그는 '제2의 리베라'로 각광받게 될 잔카를로 안토뇨니를 발굴했다.) 이후 피오렌티나 감독직을 사임하고 은퇴 준비를 하던 로코는 AC 밀란이 1976-77 시즌에 성적 부진으로 인해 강등 위기에 직면하자 1977년 시즌 도중에 로소네리로 복귀했다. 이후 그는 밀란의 강등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코파 이탈라이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후 그는 팀을 떠나 축구 감독으로서의 인생을 완전히 은퇴했다. 그후 로코는 1978년 12월 AC 밀란이 유로파 컵에서 맨체스터 시티와 맞붙은 경기를 보러 맨시티의 홈구장 메인 로드로 갔는데 한파로 인해 기관지염에 걸리고 말았고 이것이 악화되는 바람에 1979년 2월 20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고향인 트리에스테에서 숨을 거두었다.
4. 전술 스타일 : 카테나치오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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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레오 로코 감독의 1-3-3-3 시스템
로코는 카테나치오의 창시자로 축구 전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최후방에 리베로를 두는 전술 자체는 이미 1940년대 말 쥐세페 비아니 감독에 의해 고안되었으나, 이건 그냥 개념만 미약하게 제시된 것이었고 카테나치오의 확실한 틀을 만들어낸 이는 바로 로코였다. 로코는 리베로를 두고 수비수 3명을 배치한 후 수비수 3명 앞에 미드필더 한 명을 배치해 상대팀의 공격 차단 및 볼 전개를 도맡는, 일명 1-3-3-3 전술을 도입했다. 이렇듯 수비수 3명과 미드필더 한 명이 수비에 가담하게 되면서, 로코의 팀은 리베로 앞에 수비수 4명이 포진하게 되었고 상대는 그 만큼 골 넣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하지만 로코의 카테나치오는 단순히 수비지향적인 것이 아니었다. 트리에스티나에서 리그 2위를 달성할 때나 파도바에서 3위를 달성할 때는 선수들의 기량보다는 수비에 전념한 것은 분명햇지만, AC 밀란 때는 달랐다. 전방의 3톱이 상대의 골망을 노렸는데, 그 중 조세 알타피니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였다. 그리고 AC 밀란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1963년 발롱도르 수상자인 지아니 리베라가 전방의 3톱을 보조하면서 공격하는 시스템이었기에 상대는 역습을 당할 시 속절없이 당해 대량 실점을 허용하곤 했다. 이 덕분에 AC 밀란은 수비적인 포메이션을 취함에도 대량 득점을 기록할 수 있엇고 1961-62 시즌 리그 우승 당시 83골을 기록 압도적인 리그 최다 득점팀(2위 인터 밀란은 59골)에 등극했다. 이렇듯 그의 전술은 수비력 강화를 위해 공격력을 약화시키지 않고 수비와 공격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는 매우 효율적인 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각종 대회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고 카테나치오의 개념을 완성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5. 수상
5.1. 클럽
세리에 A 우승 : 1961-62 시즌, 1967-6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컵 우승 : 1972년, 1973년, 1977년
유러피언 컵 우승 : 1963년, 1969년
유로파 위너스 컵 우승 : 1968년, 1973년
인터콘티넨탈 컵 우승 : 1969년
5.2. 개인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 2012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