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고 사키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전 감독.[2] 2001년에 파르마 FC 감독을 맡았다.'''"이탈리안 르네상스의 핵(master of the italian renaissance)"'''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빗장수비의 창시자 엘레니오 에레라[3] , 토탈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와 더불어 현대축구의 근간을 세운 감독으로서, 사키이즘(압박축구)를 창시한 현대축구의 아버지이자,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명장이다.
2. 사키이즘
지금은 당연시되는 지역방어와 압박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사키는 이 생소한 개념들을 축구 전술에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으로 정착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2006년 잉글랜드의 정론지 더 타임즈에서는 역대 최고의 감독 순위에서 1위를 미헬스, 2위에는 맨유의 전설적인 감독 중 한명인 맷 버즈비, 4위에는 알렉스 퍼거슨, 5위에는 빌 샹클리, 6위 밥 페이즐리, 7위 브라이언 클러프, 10위 아르센 벵거를 선정하고 아리고 사키를 고작 11위에 선정하면서 종사자, 전문가, 축구팬들에게 찌라시라는 온갖 경멸스러운 비판을 당했다.[4]
사키이즘의 가장 큰 쾌거는 리누스 미헬스가 제창한 토탈 풋볼을 더욱 효율적으로 완성한 데에 있다. 리누스 미헬스가 제창한 토탈 풋볼이 말 그대로 '토탈' 그 자체였기 때문에 상상도 못하는 훈련량을 부담했다면 사키이즘은 각각의 포메이션을 3선 혹은 4선으로 나눠서 각각의 선수가 그 지역을 커버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밀란 제너레이션과 마라도나가 이끄는 SSC 나폴리가 붙었고, 마라도나가 나폴리 진영에서 공을 잡은 경우를 상정해보자.
- 1차적으로 전방의 판바스턴-도나도니-굴리트-콜롬보가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 그런데 마라도나가 이 압박을 뚫어내고 밀란의 왼쪽 진영으로 파고든다면, 2차로 도나도니-안첼로티-굴리트-레이카르트가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 그런데 또 마라도나가 그것을 뚫고 밀란의 왼쪽 진영으로 들어간다면, 3차로 안첼로티-레이카르트-말디니가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거기다 뼛속까지 토탈인인 굴리트까지 압박에 가담할 수 있다.
- 그런데 마라도나가 이것마저 뚫고 밀란의 후방 중앙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레이카르트/안첼로티-말디니-바레시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코스타쿠르타까지 가담하여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물론 뼛속까지 토탈인 굴리트는 여기에 또 낄 수도 있다.
위에서는 수비적인 압박만 언급했지만 밀란 제너레이션은 공격적 압박에도 역대인 팀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지금의 전성기의 바르샤도 첼시도 될 수 있는 전술적인 페러다임을 제시한 것이 지금의 사키이즘이다.
3. 감독 경력
'''"이탈리안 르네상스의 지배자(master of the Italian renaissance)"'''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사람들은 종종 결과만 중요하다고 하면서, 미래에 남는 건 커리어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사람의 기억에 남는 것은, 축구의 위대함을 찾아 나설 때 얻어지는 느낌이다. '''가령, 비록 파비오 카펠로의 AC 밀란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우리는 아리고 사키의 AC 밀란을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3.1. 세리에 C1, 세리에 B
감독으로 성공했던 그도 원래는 축구선수를 꿈꾸었으나, 19살이 되던 해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축구선수로서는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았다. 세리에 D의 작은팀 수비수로 뛰면서 낮에는 구두 세일즈맨을, 밤에는 전술공부를 하며 불과 26세에 고향의 아마추어팀 바라카 루고에서 첫 감독 생활을 하지만 베테랑 선수들과의 마찰로 오래 머물진 못한다.
이후 AC 벨라리아, AC 체세나를 거쳐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6] 의 리미니 칼초에서 첫 프로 감독직을 맡게 되나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이후 피오렌티나의 유스 감독직으로 활동하다 1년만에 다시 리미니 칼초로 돌아와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며 당시 3부 리그의 파르마 FC의 러브콜을 받는다. 파르마의 감독직을 수락하며 팀을 세리에 B승격으로 이끌고, 당시 명문가 부활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공격적인 선수영입을 하며 강팀으로 재도약하던 전통의 명문 AC 밀란을 코파 이탈리아 예선과 16강전에서 각각 1:0으로 이기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결국 간발의 차로 세리에 A 승격에 실패하지만 코파 이탈리아의 경기를 보고 그에게 반한 AC 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아마추어 풋내기에 불과하던 그를 당시 밀란 감독인 스웨덴 삼총사이자 밀란의 전설이였던 닐스 리드홀름을 경질해가면서 감독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3.2. AC 밀란
[image]
하지만 언론들은 사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구두팔이에 불과한 아마추어 감독이 하루아침에 명문팀 감독이 된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였고 언론은 매일같이 비선수 출신에 불과한 구두팔이에 그가 영입한 검증 안된 젊은 선수들을 까면서 그를 조롱[7] 했지만 사키는 오히려 "기수(騎手)가 되기 위해서 말(馬)이 될 필요는 없다."라고 응수하며 자신이 영입한 안첼로티, 판바스턴, 굴리트 등과 함께 '''부임 첫해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며 언론들을 전부 데꿀멍시킨다.
1988/89 시즌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합류하면서 훗날 전설로 회자되는 '''오렌지 삼총사'''를 완성하고, 기존의 필리포 갈리, 마우로 타소티, 로베르토 도나도니, 프랑코 바레시 등의 활약과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알베리고 에바니,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등 유스출신 선수들의 포텐이 빵빵 터져주면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고, 사키의 전술이 버무려져 세리에 A 우승과 동시에 '''20년만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견인한다. 부임기간 4년동안 리그 우승 1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UEFA 슈퍼컵 2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1회, 도요타컵(클럽월드컵 전신) 2회 등을 견인하며 유럽을 호령한다.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직 제의를 수락하고 밀란 감독직을 파비오 카펠로에게 넘겨주고 사임한다. 1996년 이탈리아 감독직을 사임한 뒤 후임 감독이었던 파비오 카펠로에 이어 다시 AC 밀란에 복귀하게 되지만 리그 11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한 시즌만에 사임한다. 다음 시즌인 1997/98 시즌에 카펠로가 다시 사키의 후임으로 밀란에 복귀하지만 카펠로 역시 리그 10위를 기록하며 한시즌만에 사임하게 된다.
3.3.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image]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1994 미국 월드컵 기간 중 로베르토 바조와 망중한을 보내는 사키'''[8] .
다만,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생각보다 저조한 편이다. 게다가 까다로운 성격과 독단적인 팀 운영방식으로 여러 선수들과 마찰을 빚어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9]
UEFA 유로 1992 조별예선에서 세간의 평가와 달리 소련에게 밀려 조별예선에서 광탈한다. 사실 이때 이탈리아는 사키가 감독을 맡았을 당시 이미 유로 본선 진출조차도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후 절차부심하여 참가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AC 밀란 수비진을 통째로 뽑아오는 등 만전을 가하지만, 이번에는 공격진이 골을 넣지 못해 골골대다가 와일드카드를 획득한 끝에 가까스로 조별 예선을 통과하고 이후 로베르토 바조가 끝없는 영웅 플레이로 팀을 결승전까지 인도한다.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지만, 영웅이였던 바조가 실축함으로써 준우승에 그친다.[10]
직후 야심차게 준비한 UEFA 유로 1996에서 또다시 독일, 체코 등에게 밀려 조별예선 광탈을 함으로써 국가대표 감독 생활도 막을 내린다.
3.4. 그 이후
상술한 것처럼 유로 96이후 AC 밀란의 감독에 다시 부임하지만, 리그를 11위로 마치며 사퇴한다. 이후 라리가 무대로 발을 돌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하지만 성적이 부진하여 시즌 도중에 경질되었다. 2001년 잠시 파르마 FC의 감독직을 역임했고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 2004년 레알 마드리드 CF의 기술 고문으로 한 시즌간 재직했다.
2007년 11월, 핌 베어벡 사임 후 공석이 된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직을 두고 대한축구협회에서 사키에게 제안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나 사키는 "더 이상 감독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며 명시적으로 거절했다고 한다.[11]
4. 기타 행적
사키가 남긴 발자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상기했다시피 현대 축구 모든 팀의 전술, 특히 2000년대 후반 당대 최강의 팀이였던 FC 바르셀로나마저 기본 틀은 사키의 전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키의 제자로 꼽히는 감독으로는 [12] [13] , 프랑크 레이카르트, 마르코 판바스턴, 루드 굴리트, 카를로 안첼로티, 로베르토 도나도니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무패우승 당시 아르센 벵거의 아스날이 사용한 4-4-2는 사키이즘의 극대화로 평가받는다.
K리그 클래식에서 대표적인 패스 축구를 구사하는 포항 스틸러스를 두고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 빗대 스틸타카가 부르는 팬들이 많은데, 엄밀이 말하자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포항은 자체적으로 '''스틸러스 웨이'''라는 방침을 고수하는데, 이것 중 하나가 백패스 금지로 대변되는 빠른 공격전개이다.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패스를 돌리기보다 볼 소유권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공격적으로 전방으로 배급하고, 뺏기면 압박을 해서 소유권을 되찾아온다. 이런 포항의 축구철학은 사키의 사키이즘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F조에서 벌어진 대한민국과 독일의 최종전을 시청한 후 "(대한민국 대표팀은) 투지와 결정력에서 승리할 자격이 충분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기사
5. 논란
- 인종차별 관련 논란이 있다. 제일 호되게 당한 케이스가 "이태리 국대에 너무 흑인이 많다"라는 소리를 한 것이였는데 당연히 주변에서 많은 비판을 했고 거상 에이전트 미노 라이올라는 "이런 인간들 때문에 세리에가 이 모양이야…. 이런 말 볼 때마다 부끄러워 죽겠어"라면서 사키를 깠고 심지어 제프 블라터마저 사키를 대차게 깠다….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다보니 아리고 사키도 변명을 했는데 그 변명이라는게 "나 코치였을 때 흑인 선수 많이 썼다. 그러니까 나 인종차별주의자 아님. 난 그저 우리 나라 국대에 흑인 선수가 너무 많아서 우리 나라 국대의 아이덴티티가 흐려지는게 걱정되었을 뿐"이라는 발언이어서 오히려 욕을 더 바가지로 먹었다. #
6. 기록
- 파르마 (1985/86 - 1986/87, 2001)
- 세리에 C1: 1985/86
- AC 밀란 (1987/88 - 1990/91, 1996/97)
-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1991 - 1996)
- 1994 FIFA 월드컵 준우승
[1] 2012년 수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3등급 사령관 Commendatore 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2] 2007년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당시 "감독으로 돌아갈 뜻이 없다"는 발언을 하며 제안을 거절했다고 하며(기사), 이게 사실이라면 명시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기간으로 봐도 19년동안 감독직을 안 맡는 거 보면 은퇴가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3] 카테나치오의 완성자로 인터 밀란에서 유러피언컵 2연패, 세리에 A 우승 등을 이끌며 당대 최강의 팀으로 조련하였다.[4] top 10에 들어간 미헬스, 78년 오렌지 군단을 이끌고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4국에서 우승컵을 휩쓴 에른스트 하펠, 매직 마자르를 조련하고 지휘한 벨라 구트만, 최고 명문 레알 마드리드의 초석을 다진 미겔 무뇨스를 제외하면 감독들은 잉글랜드 출신이거나 잉글랜드 디비전, EPL 역사에 족적을 남긴 감독들이다.[5] 레알 마드리드와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공격수로, 주제 무리뉴가 레알 감독 시절 권력 다툼을 하다 페레즈에게 팽당한 그 레알의 단장 발다노가 맞다. 하단을 보면 알겠지만 사키 시절 밀란의 우승 기록은 카펠로 시절의 밀란보다 우승 기록이 더 적다.[6] 흔히 세리에 C1이라 한다.[7] 네덜란드 리그에서 날라다닌 판바스턴이나 굴리트나 그때 당시엔 의문부호가 붙었다. 같이 영입된 안첼로티는 20대 후반이었다.[8] 각각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선수이지만, 둘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다.[9] 대표적인 선수로는 로베르토 바조, 주세페 베르고미, 주세페 시뇨리 등이 있다.[10] 바조는 승부차기 실축 때문에 영웅에서 역적으로 추락해 이탈리아 팬들에게 제대로 욕을 얻어먹는다. 바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황선홍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 그야말로 영웅에서 역적으로 추락해서 은퇴할 때까지 오만가지 욕을 얻어먹었다. 본인은 발롱도르를 수상했지만, 이후 신예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에게 밀려 유벤투스 FC를 떠나고 방랑생활을 거듭한다.[11] 어떤 기사에서는 '감독직 제의는 큰 영광이지만 감독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12] 결코 허언이 아닌 것이 현재 감독들의 전술 베이스는 위에서 상기했다시피 사키의 4-4-2 전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퍼거슨의 경우 사키의 등장 이전부터 에버딘으로 마법을 부리고 있던 사람이라 사실 이 목록에 넣긴 좀 억지스럽다. 거기다가 사키보다 나이도 더 많다.[13] 이탈리아 국가대표 출신에다 밀란의 스타출신이였던 카펠로는 어느순간 갑툭튀한 사키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후에도 서로 헐뜯는 등 견원지간 사이. 게다가 카펠로를 사키의 제자로 보고있는 세간의 평과 달리 카펠로는 사키의 제자가 아니다. 밀란 감독도 비록 감독 대행이었지만 카펠로가 먼저 맡았고, 외국에선 사제관계에 나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지만 나이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