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C 나폴리

 




[image]
'''SSC 나폴리'''
'''S.S.C. Napoli'''
'''정식 명칭'''
Societa Sportiva Calcio Napoli S.p.A.
'''별칭'''
Partenopei (파르테노페이), '''Gli Azzurri (하늘색)''', Ciucciarelli (작은 당나귀)
'''창단'''
1904년 (Naples Foot-Ball Club)
1926년[1] 8월 1일 (AC Napoli)
'''소속 리그'''
이탈리아 세리에 A (Serie A)
'''연고지'''
[image] 캄파니아 [image] 나폴리
'''홈 구장'''
스타디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Stadio Diego Armando Maradona, 60,240명 수용)[2]
'''라이벌'''
'''유벤투스 FC'''[3][4]
'''AS 로마 - 데르비 델 솔레(Derby del Sole)[5]'''
'''팔레르모 - 데르비 델레 두에 시칠레(Derby delle Due Sicilie)'''
'''구단주'''
팔마우로 S.r.l
'''회장'''
아우렐리오 데 라우렌티스(Aurelio De Laurentiis)[6]
'''감독'''
[image] 젠나로 가투소 (Gennaro Gattuso)
'''주장'''
[image] 로렌초 인시녜 (Lorenzo Insigne)
'''부주장'''
[image] 칼리두 쿨리발리 (Kalidou Koulibaly)
'''공식 홈페이지 및 소셜 미디어'''

'''한국 팬카페'''

'''우승 기록'''
'''세리에 A'''
(2회)
1986-87, 1989-90
'''세리에 B'''
(2회)
1945-46, 1949-50
'''세리에 C1''' (1회)
2005-06
'''코파 이탈리아'''
(6회)
1961-62, 1975-76, 1986-87, 2011-12, 2013-14, 2019-2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회)
1990, 2014
'''UEFA 유로파 리그'''
(1회)
1988-89
'''클럽 기록'''
'''영구결번'''
'''10'''
'''세리에 A 득점왕
(3회)
'''
87/88 -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 15골
12/13 - 에딘손 카바니(Edinson Cavani) - 29골
15/16 - 곤살로 이과인(Gonzalo Higuaín) - 36골[7]
'''최다 출장'''
마렉 함식 (Marek Hamšík) - 520경기
'''최다 득점'''
드리스 메르텐스 (Dries Mertens) - 130골
'''최고 이적료 영입'''
빅토르 오시멘 (Victor James Osimhen)
(2020년, from LOSC 릴, 7000만 유로)
'''최고 이적료 방출'''
곤살로 이과인 (Gonzalo Gerardo Higuaín)
(2016년, to 유벤투스 FC, 9000만 유로)

'''2020-21 시즌 유니폼'''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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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AWAY'''
'''THIRD'''
'''GK HOME'''
'''GK AWAY'''
'''메인 스폰서'''
'''유니폼 메이커'''



[image]
'''CAMPIONE D' COPPA ITALIA
2019-20 코파 이탈리아 챔피언
'''

1. 개요
2. 클럽의 역사
2.1. 1980년대
2.2. 1990년대~2000년대
2.3. 2010년대
2.3.1. 근래 성적
3. 홈 경기장
4. 2020-21 시즌 선수명단
5. 역대 주장 명단
6. 역대 감독 명단
9. 영구결번
10. 전술
10.1. 삼각편대 시절
10.3. 사리 시절
10.5. 가투소 시절
11. 기타


1. 개요


이탈리아 나폴리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프로 축구 클럽.
소시에타 스포르티바 칼치오 나폴리: (Società Sportiva Calcio Napoli Sp), 일반적으로 S.S.C. 나폴리라고 불린다. AS 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대표하는 클럽이다. 1904년에 이탈리아 남부리그의 한팀에서 출발했으며, 1926년 당시 구단주였던 조르조 아스카렐리에 의해 AC 나폴리라는 이름으로 출발하게 된다. 하지만 아스카렐리는 1930년에 35세의 나이에 복막염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홈구장에 붙여 기렸다. 하지만, 그 조르조 아스카렐리 구장은 2차 대전 때 폭격을 맞고 파괴되었고, 1959년부터 지금의 홈 구장인 스타디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8]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4년, 어쏘시아치오네 칼치오 나폴리에서 소시에타 스포르티바 칼치오 나폴리(S.S.C. 나폴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2. 클럽의 역사


전성기 시절은 세 번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처음은 디노 조프, 조세 알타피니, 오마르 시보리 등이 포진한 1960년대, 두번째는 마라도나로 대표되는 1980년대[9], 그리고 데 라우렌티스가 클럽을 부활 시킨 이후 카바니, 함식, 라베찌의 삼각편대에서 메르텐스, 카예혼, 인시녜로 이어지는 삼각편대의 시절까지인 현재이다.

2.1. 1980년대


1980년 초반까지만 해도 나폴리는 루드 크롤을 위시하여 4위에 오르는 등 리그에서 꽤 경쟁력있는 팀이었으나, 1984년 승점 1점차로 겨우 강등을 모면하는 등 성적이 상당히 떨어졌다. 팀의 핵심인 크롤의 노쇠화가 원인이었는데, 결국 1984년 6월 30일 나폴리는 당시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FC 바르셀로나로부터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했다. 또 치로 페라라, 살바토레 바그니 등의 가세로 점차 강력한 스쿼드를 구축하게 되었다.
세리에 데뷔시즌에 전체 평점 1위를 기록하며 놀라운 기량을 보여준 마라도나였지만 팀의 성적은 8위에 그쳤다. 다음 시즌인 1985-86시즌에는 비앙키 감독이 새로 부임하고 공격수 지오르다노와 골키퍼 가렐라, 리베로 레니카 등을 영입하며 보강을 마친 나폴리는 3위의 성적을 기록하였고, 1986-87시즌에는 페르난도 데 나폴리 등을 영입하며 더욱 스쿼드의 질을 향상시켰다. 결국 이러한 스쿼드 강화는 효과를 보았고, '''1987년 5월 역사적인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10] 이 트로피의 주인공은 단연 디에고 마라도나였고, 미셸 플라티니, 마르코 판바스턴, 로타어 마테우스, 지쿠 등을 제치고 리그 최고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나폴리 인들에게 단순히 축구 선수가 아닌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다.
1988-89 시즌에는 지난 시즌 리그 준우승 자격으로 출전한 UEFA 컵에서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을 차례로 꺾은 뒤 결승에서 독일의 VfB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첫 유럽 무대 타이틀'''을 획득한다. 이듬해 나폴리는 전설적인 감독 아리고 사키가 이끌고 오렌지 삼총사를 보유한 AC 밀란을 승점 2점차로 따돌리며 또다시 '''스쿠데토'''를 차지한다. 이 시기에는 리그 16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 오른 마라도나도 대단했지만 브라질 대표팀의 카레카와 중원에는 페르난도 데 나폴리, 수비에는 치로 페라라 등 걸출한 팀 동료들의 지원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2.2. 1990년대~2000년대


그러나 1991년 AS 바리와의 경기 이후 실시된 도핑 테스트에서 마라도나가 코카인 양성반응을 보였고 15개월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91-92 시즌을 마라도나 없이 치루게 된 나폴리는 지안프랑코 졸라의 활약으로 4위에 올랐으나 결국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떠나게 된다. 마라도나가 떠난 나폴리는 더 이상 우승을 바라볼만한 전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고 중위권 정도의 성적에 머무르게 된다. 여기에 나폴리의 펠라이노 회장이 정치권과 관련된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나폴리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빚을 갚기 위해 나폴리는 지안프랑코 졸라, 파비오 칸나바로, 치로 페라라 등 주요 선수들을 내다 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폴리는 1997-98 시즌 단 2승만을 거두며 승점 14점 최하위의 순위로 강등을 당하고 만다.
2년 뒤 나폴리는 다시 세리에 A에 승격하는데 성공하지만 공동 구단주 조르지오 코르벨리가 승격을 이끈 왈테르 노벨리노 감독을 자르고 즈데넥 제만 감독을 선임하면서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제만은 단 6경기만에 경질되었고 그 중 단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다. 이후 에밀리아노 몬도니코 감독을 선임했으나 다시 강등되고 만다. 2002년 구단주 코르벨리가 미디어 스캔들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결국 2004년 8월 7900만 유로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선고받는다.[11] 팀은 세리에 C로 떨어졌으며 숨통이 끊긴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암울한 상황에도 한줄기 빛은 있다고, 유명 영화제작자[12]이자 나폴리의 오랜팬이었던[13] 아우렐리오 데 라우렌티스가 3400만 유로에 나폴리를 인수하면서 대대적인 개혁과 투자가 시작된다. 그는 팬들에게 5년 이내에 나폴리를 1부 리그에 올려놓고, 그후 5년내에는 나폴리를 우승경쟁 다투는 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팬들은 이에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운집하며 화답했고, 세리에 C 최대 관중 동원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첫 약속을 3년 만에 달성시켰는데, 2007년 팀을 다시 1부 리그로 복귀시켰다.[14] 승격 직후 나폴리는 어렵사리 두 명의 선수를 데려온다. 팬들은 이에 반발하며 구단 사무실 앞에서 시위까지 벌였으나, 이 날 데려온 마렉 함식에세키엘 라베찌는 나폴리의 핵심 선수로 성장하면서 팀을 이끌어갔다. 2009-10 시즌에는 나폴리에서 태어난 파비오 콸리아렐라를 영입했으나 2010-11 시즌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유벤투스로 이적시키면서 팬들의 원성을 샀다. 엘프스보르그와의 유로파 경기에서 이적이 확정된 콸리아렐라가 벤치에 앉아 있었고, 대체자로 데려온 에딘손 카바니가 경기에서 뛰었는데, 이 날 카바니는 멀티골을 넣으며 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꿔버렸다. 카바니는 2010-11 시즌 총 33골을 넣으며 함식과 더불어 세리에 올해의 팀에 선정되며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거듭났다.

2.3. 2010년대


성공적이었던 2010-11 시즌을 마치고 나폴리는 끊임없이 이적설이 나돌던 함식, 라베찌, 카바니를 지키는데 성공하고, 우디네세에서 검증된 미드필더 괴칸 인러를 영입해 미들진 보강을 이뤄냈다. 또 블레림 제마일리, 마리오 산타나 등 즉시전력감 선수들을 영입, 얇았던 스쿼드를 보강했으며 인테르에서 고란 판데프를 임대영입했다.
2011-12 시즌은 챔피언스 리그에서 나폴리라는 이름을 각인 시킨 시즌이었다. 죽음의 조[15]에 속했지만 맨시티를 탈락시키면서 3승 2무 1패로 16강에 당당히 진출했다. 이어진 16강 1차전 첼시와의 경기에서 파올로 칸나바로의 실수로 마타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라베찌의 동점골과 카바니의 역전골에 이어 라베찌가 쐐기골을 넣으며 3:1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2차전에선 연장전까지 가서 4:1로 패하면서 첼시에게 8강행을 넘겨줬다. 그러나 이 당시 나폴리의 돌풍같은 활약은 많은 해외축구팬들에게 나폴리라는 클럽의 가능성을 유럽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16] 반면 리그에서는 작년같은 포스가 나오지 않아서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바깥에서 헤매다가 5위로 마무리하면서 다음 시즌은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나마 25년만에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하면서 1990년 스쿠데토 이후 무려 22년만에 무관에서 벗어났다. 무엇보다 리그 무패 우승을 거두고 코파 이탈리아도 무패행진을 달리며 더블을 노리려던 유벤투스를 상대로 2:0으로 이긴 승리라서 그 의미가 더 컸다.
이후 나폴리는 2012-13 시즌 준우승, 2013-14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 등 꾸준히 성적을 거두며 세리에 A의 강호로 다시금 자리잡았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시즌별 링크 참조.
최근 나폴리의 특징 중 하나라면 뛰어난 공격수들이 이곳을 많이 거쳐간다는 점이다. 파비오 콸리아렐라[17]에딘손 카바니[18]곤살로 이과인 [19]드리스 메르텐스[20]의 계보로 이어져내려오고 있으며 본래 공격수 생산공장으로 유명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대한 세리에의 답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상황.

2.3.1. 근래 성적


'''※ 각 시즌별 상세 내용은 표의 시즌별 링크 참조.'''
'''시즌'''
'''세리에 A'''
'''유럽 대항전'''
'''코파 이탈리아'''
'''기타'''
'''감독'''
'''2007-08'''
8위
-
16강
-
에도아르도 레야
'''2008-09'''
12위
UEFA컵 1라운드
8강
-
에도아르도 레야 - 로베르토 도나도니
'''2009-10'''
6위
-
16강
-
로베르토 도나도니 - 왈테르 마짜리
'''2010-11'''
3위
UEL 32강
8강
-
왈테르 마짜리
'''2011-12'''
5위
UCL 16강
'''우승'''
-
왈테르 마짜리
'''2012-13'''
2위
UEL 32강
16강
-
왈테르 마짜리
'''2013-14'''
3위
UCL 조별 리그/UEL 16강
'''우승'''
-
라파엘 베니테스
'''2014-15'''
5위
UCL 플레이오프/UEL 4강
4강
'''수페르코파 우승'''
라파엘 베니테스
'''2015-16'''
2위
UEL 32강
8강
-
마우리치오 사리
'''2016-17'''
3위
UCL 16강
4강
-
마우리치오 사리
'''2017-18'''
2위
UCL 조별 리그/UEL 32강
8강
-
마우리치오 사리
'''2018-19'''
2위
UCL 조별 리그/UEL 8강
8강
-
카를로 안첼로티
'''2019-20'''
7위
UCL 16강
'''우승'''
-
카를로 안첼로티 - 젠나로 가투소

3. 홈 경기장


''' '''

4. 2020-21 시즌 선수명단




5. 역대 주장 명단


SSC 나폴리/역대 주장 문서 참조.

6. 역대 감독 명단


SSC 나폴리/역대 감독 문서 참조.

7. 기록과 통계


SSC 나폴리/기록과 통계 문서 참조.

8. 유니폼


SSC 나폴리/유니폼 문서 참조.

9. 영구결번


[image]
'''SSC 나폴리 영구결번 '''
'''No. 10 디에고 마라도나 '''
전설적인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의 등번호 10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10. 전술


나폴리가 신흥 강팀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왈테르 마짜리 감독 부임시절 이후이다.
나폴리의 전술적 특징은 일반적인 세리에 팀과는 달리 윙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템포가 매우 빠르고, 수비보다 공격에 치중하여 매우 화끈한 경기가 많다는 것이다.
마짜리 시절에는 다소 빈약한 수비진 클래스 탓에 미들과 공격진까지 몽땅 수비에 투입한 후, 일단 상대의 공을 빼앗으면 삼지창이 우루루 적진으로 몰려가고 수비진에서 공을 뻥뻥 차다가 한두번씩 얻어걸리는 잉글랜드식 뻥축구를 구사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예술적인 역습장면들이 여럿 연출되다 보니 전체 경기는 지루한데 하이라이트만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팀이었다.
베니테즈 시절에는 카예혼과 메르텐스, 이과인을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윙어전술을 탑재하기 시작한다. 수비진과 미들진의 클래스는 그대로였으나 이 시기에 리그 탑급 윙어가 세명이나 들어오는 바람에 활발한 측면공격을 선보였다. 덕분에 화끈한 공격력은 세리에 정상급으로 평가받았으나 윙 전술을 활용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허약한 미들진과 수비진이 마짜리 시절에 비해 도드라졌다. 이 때문에 헌신적이고 활동량이 많은 카예혼이 중용받았다.
사리 감독은 베니테즈가 레알감독으로 떠난 후 그의 유산과 본인의 장점을 잘 조합하여 나폴리를 완성도 높은 팀으로 변모시켰다. 베니테즈 시절에는 많은 이적료 지출로 선수단 이름값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뛰어난 개개인의 능력에 비해 조직력이나 유기적인 움직임은 다소 부족했다는 평이 많았다. 사리 감독은 베니테즈 시절에 영입되었던 선수들의 장점을 살리는데 매우 뛰어난 역량을 보였고, 부족한 부분은 히사이, 알랑 등 저렴한 알짜 선수들을 영입하여 확실히 보완하였다. 특히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던 수비를 대폭 개선시켰는데, 단순히 수비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닌 유기적인 압박전술로 공격력은 그대로 살리고 실점률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는 사리 감독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다. 부임 첫 해에 나폴리 역대 최다승점과 챔피언스 리그 진출티켓 두마리 토끼를 잡은 사리 감독은 비록 이과인이 떠났지만 그 돈으로 , 지엘린스키, , , 막시모비치 등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즉시전력감 유망주들을 영입하였다. 나폴리는 비선수 출신 사리 감독의 훌륭한 전술적 역량에 두껍고 젊은 스쿼드가 합쳐져 전망이 매우 밝은 팀이 되었다.
안첼로티 감독은 전임 사리 감독에 비해 로테이션을 적절히 가동하며 많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공수에서 에이스라 할 수 있는 인시녜와 쿨리발리의 폼을 망쳐놓았으며, 안첼로티가 데려온 선수인 로사노도 구단 역사상 최대 이적료를 주고 데려왔으나 망했다. 선수단 장악에도 실패하여 구단주와 선수단 간 갈등을 초래했으며, 전술적으로 아무런 세부전술도 없었다. 이러한 안첼로티의 삽질로 2019-20 시즌 나폴리는 리그 우승을 노리던 팀이었음에도 안첼로티가 경질될 때 중위권에 처박혀 있었다. 한 시즌 반 동안 팀이 야무지게 망했다.

10.1. 삼각편대 시절


왈테르 마짜리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의 전술이다.
나폴리 삼지창으로 유명했던 카바니, 라베찌, 함식이 활약하던 시절이다. 삼지창 이외 선수들의 이름값이나 재능은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머지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은 활동량이 많은 선수들을 활용하였고, 3백을 활용, 수비수 숫자를 보강하는 우주방어를 선보인다. 본진에서 단단히 웅크리고 적의 공격을 방어해 내다가 볼을 탈취하면 그 즉시 삼지창이 달리기 시작한다. 정교한 롱패스와 원터치로 역습템포를 살려주는 함식, 화려하고 폭발적인 드리블로 상대 진영에 돌진하는 라베찌, 치명적인 위치선정과 골결정력을 자랑하는 카바니의 조화가 어우러져 대략 10~15초라는 짧은 시간에 적의 골망을 흔드는 것이 주된 공격패턴이었다. 이러한 전술적인 요인들 덕분에 대외적으로 나폴리의 축구하면 역습축구라는 인식이 빠르게 퍼지게 되었다.
이외에 인러의 뜬금포, 마지오의 빠른 다리를 이용한 뜬금침투 정도가 간간히 나왔지만 삼지창이 나폴리 공격에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이 시절 미드필더[21]와 수비진 퀄리티는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수비에 성공하자마자 삼지창에게 뻥 차주는 경우가 많아서, 이탈리아 내 뻥축팀, EPL팀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0.2. 베니테즈 시절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의 전술이다.
라베찌와 카바니가 거액의 이적료를 안겨주고 이적하였고, 대체자로 영입된 이과인과 카예혼, 유스에서 발탁된 신성 인시녜가 새로운 삼지창이 되었다. 이전 삼지창과 다른 점은 선수 뿐만이 아니라 함식이 부진하여 원조 삼지창의 일원으로서 제몫을 해주지 못한 부분이다. 베니테즈는 함식을 4-2-3-1의 2선 꼭지점 부분으로 활용하였으나 그런 고정된 위치에서는 함식의 넓은 활동량을 살릴 수 없었으며, 유일한 약점이 탈압박이었던 함식에겐 힘든 시기가 되었다. 이러한 단점이 더욱 부각된건 수니가의 부상 이후인데 부상전에는 함식의 부족한 탈압박 능력을 수니가의 적극적인 오버래핑과 수니가 인시녜 함식으로 이어지는 좌측에서의 연계로 극복했다. 그러나 부상 후 3백용인 아르메로와 메스토가 나오면서 이러한 모습은 사라졌고 함식의 단점은 더욱 부각되었다.
이 시기의 나폴리는 외국인 감독을 선임한 팀 답게 다른 세리에팀들과는 다른 축구를 구사했는데, 바로 윙어들의 무덤으로 유명한 세리에에서 윙어들을 활용한 공격을 주 득점루트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클래스 있는 윙어인 메르텐스와 카예혼을 영입하였고, 여기에 로컬보이인 인시녜가 가세하면서 양쪽 날개의 화력이 막강해졌다. 메르텐스와 인시녜는 둘 다 테크니컬하면서도 스피드가 빨랐기 때문에 인사이드형, 클래식형 어느쪽으로든 자유자재로 상대방의 측면을 공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메르텐스와 인시녜의 드리블 돌파와 카예혼의 침투 및 득점전략, 이과인에게 어떻게든 공을 주면 이과인이 알아서 해결하는 식의 무대포 전략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쏠쏠하게 득점루트로 사용되던 인러의 중거리슛과 함식의 침투득점, 마지오의 개돌은 자제되었고, 나폴리의 득점루트는 매우 단조로워졌다. 그러나 당시 2선 윙어들을 필두로 하여 카예혼-이과인-인시녜(메르텐스)가 펼치는 화력쇼는 당시 세리에 최고의 화력으로 손꼽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잘 정비된 윙어 전술에 비해 중앙에서의 빌드업은 생각보다 형편 없었는데, 베니테즈 초기 부임부터 거의 중원은 내주고 시작했다 싶을 정도로 빌드업에 제대로 된 규칙이 없었다. 마짜리 시절부터 함께해왔던 인러, 제마일리, 베라미는 전부 넓은 활동량이 장점이 되던 선수로써 패스줄기를 이어주는데 최적화된 선수가 아니었고, 이후 영입된 데 구즈만이나 다비드 로페즈는 아마추어적인 수준의 전진패스도 선보이지 못할만큼 기량이 미달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중에 조르지뉴라는 훌륭한 패서를 영입했음에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이처럼 콱막힌 3선은 결국 앞선 기술처럼 압박에 고전하던 2선 꼭지점 함식의 부담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덕분에 중앙을 이용한 공격전개는 베니테즈시절 큰 재미를 보지 못했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된다. 거기다가 14-15시즌에는 중앙 미드필더 중에 포백보호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완수하던 베라미까지 대체자원없이 보내버리면서 중앙에서 수비와 공격 모두 엄청난 문제를 겪게된다.
수비는 강한 압박을 활용하였으나 기본적인 포백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며, 또한 풀백과 센터백 퀄리티가 매우 낮아 카밀로 수니가의 부상 이후로는 센터백 구성과 풀백 구성에 상당한 골머리를 앓았다. 수비진영에서의 잦은 실수가 있었으며, 레이나의 미친듯한 선방으로 실점률은 의외로 낮았으나, 이 시절 나폴리의 수비는 화려한 공격진과 비교하여 헌 누더기 그 자체였다. 굴람과 쿨리발리의 영입 전까지 나폴리의 수비고민은 고질적으로 이어졌다.
물론 베니테즈 시절 나폴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로테이션 전술이었다. 이미 발렌시아-리버풀 시절부터 로테이션 성애자로 평가받던 그였지만, 시즌이 진행될 수록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로테이션 집착을 보였고, 나중에는 덕분에 중요선수들과의 마찰도 일어나곤했다. 이 부분은 베니테즈 시절이 팬들에게 비난받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며, 이해하기 힘든 선수기용으로 많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0.3. 사리 시절


마우리치오 사리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의 전술이다.
비교적 하부리그와 승격팀을 주로 맡아왔기 때문에 부임 전에는 걱정이 앞섰지만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세 시즌간 보여준 사리감독의 축구는 나폴리의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안정적이고 놀라운 축구를 보여줬다. 사리 감독이 부임한 세 시즌간 나폴리는 세리에에서 쉽게 보기 힘든 점유율축구와 화끈한 공격축구를 보여줬으며, 비록 우승컵을 드는데는 실패했지만, 구단 역대 최다 승점을 해마다 갈아치웠고, 화끈한 공격과 재미있는 점유율 축구를 보여주면서 성적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데 성공했다.
나폴리 선수단의 퀄리티가 해를 거듭하며 업그레이드된 면모도 있지만, 사리의 전술은 그 동안 나폴리의 전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한단계의 발전을 이뤄냈다. 특히, 고질적인 빌드업 문제를 대폭적으로 체질개선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동안 나폴리의 빌드업적인 전술은 마짜리 시절을 기반으로 롱패스를 활용하여 빠져나가는 공격수를 이용하여 즉각적인 역습을 수행하거나 중앙의 빌드업은 거의 포기하고 측면 풀백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오버래핑으로 윙어와 연계하여 빌드업하는 과정이 많았는데, 사리감독은 전체적으로 롱패스의 비중을 줄이고, 짧고 간결한 선수간 원투패스를 기본으로 점유율을 늘리는 빌드업으로 나폴리의 공수 전개방식을 새롭게 개편하였다. 개편한 3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앙에서 볼을 점유하는 비율을 대폭 늘렸으며, 키퍼에서부터 공격수까지 전개되는 과정이 거의 짧은 패스를 중심으로 키퍼→센터백→레지스타→메짤라로 차례차례 확실하게 이어지게 하면서 안정적인 볼배급을 가능하게 하였다.
공격적인 측면에서도 첫시즌은 이과인에게 편중되어 있긴 했지만 이과인 이적 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다양한 공격루트를 개발해 냈고, 선수단의 롤도 확실하며 수비도 매우 안정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 오프더볼 움직임이 베니테즈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선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상대 수비를 정신없게 만든다.
우선 가장 주된 공격루트는 왼쪽측면을 통한 돌파 이후 크로스를 하면 오른쪽에서 받아먹는 것이다. 단순한 공격루트이지만 왼쪽 측면이 인시녜, 메르텐스 같은 크랙급 드리블러들이고 오른쪽에서 이 공을 받아먹는 선수가 카예혼, 밀리크 같이 위치선정과 침투가 좋고 골결정력이 치명적인 선수들이다 보니 막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거의 치트키급. 지공상태에서도 역습상태에서도 훌륭한 성공률을 보여주며 특히 수비가 적은 역습상황에서는 상대팀 입장에서 슈팅이 빗나가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사리감독시절 초창기에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굴람이 왼쪽측면에서 완벽한 공격적인 재능을 뽐내는 윙백으로 자리를 잡게되고, 함식-인시녜로 이어지는 왼쪽측면의 원투가 제대로 살아나면서 왼쪽측면의 파괴력이 극강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 왼쪽 측면 돌파 후 오른쪽으로 크로스 후 골을 노리는 전술은 사리감독의 두번째 시즌이 되면서 파훼법이 어느정도 개발되었고, 덕분에 16-17시즌 초창기에는 잘 통하지 않게되어 고전했다. 그러나 제로톱 메르텐스의 활용도가 다방면으로 연구되고, 오른쪽 미드필더인 지엘린스키의 파괴적인 드리블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그 비중이 조금 줄어들고 현재의 나폴리는 더욱 더 다양한 방향에서 공격루트를 살려가고 있는 중이다.
나폴리의 3미들은 각각 주어진 역할이 다르다. 공격형 플레이메이커는 거의 함식 포지션이며 원터치, 롱패스 등으로 역습템포를 그대로 살려준다. 베니테즈 흑역사 시절 이후 본인도 노력을 했는지 볼키핑 면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그야말로 전방 기지의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레지스타는 주로 조르지뉴의 포지션으로, 4백을 보호하고 수비진에서 전달되는 패스를 받아 함식 또는 공격진에 직접 연결하는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중앙에는 주로 알랑, 그리고 이후에 영입된 지엘린스키가 포진하는데, 롱패스를 통한 공격지원을 하는 조르지뉴와는 달리 중앙에서 강렬한 드리블 돌파(소위 개돌)로 수비진을 흐트러트리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중앙에서 마치 전차처럼 공을 몰고 상대진영으로 돌진하기 때문에 보는맛이 있다. 단, 알랑이 출전했을때 약간 수비적인 밸런스를 많이 잡아주는데 비해서 지엘린스키가 출전할 경우엔 공격적인 무게가 더욱 실리는 차이가 있다.
수비진은 알비올, 쿨리발리라는 코어 센터진이 있다. 쿨리발리는 괴물같은 피지컬을 바탕으로 1대1 방어에 능하며, 쿨리발리가 상대 공격진과 싸우러 나가면 알비올이 주변을 커버하면서 쿨리발리를 보조한다. 풀백은 히사이, 굴람인데, 활동량과 신속한 공수전환 능력이 발군인 선수들로, 좌측 플레이메이킹이 기본인 사리감독의 전술하에서 굴람은 거의 최전방까지 전진하며, 히사이의 경우엔 공격적인 오버래핑보다는 전반적인 밸런싱을 맞추는 역할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다. 물론 16-17시즌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히사이를 필두로 오른쪽의 오버래핑도 어느정도 활발해지고 있는편이다.
전체적으로 베니테즈 시절부터 자랑하던 나폴리산 윙어들의 공격진 화력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공격루트를 다변화시켰고, 그동안의 역습축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롱패스의 소위 뻥축구 개념에서 벗어나서 점유율을 기반으로 정교한 압박과 짧은 원투패스를 통해 전개효율성과 수비력을 모두 끌어올려 한두명의 스타플레이어에 더이상 의존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완성도 높은 팀을 만들었다는 평이다.

10.4. 안첼로티 시절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의 전술이다.
2018-19 시즌 초반 안첼로티 감독은 이전 사리 감독 시절의 4-3-3 포메이션을 사용하였다. 조르지뉴가 첼시로 이적하면서 사리 시절 조르지뉴가 맡았던 레지스타 역할을 함식이 맡게 된다. 함식이 패스 전개나 빌드업에서는 더할나위 없었으나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뛰어본 적 없는 선수라 그런지 포백 보호와 같은 수비적 역할에서는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에 안첼로티 감독은 본인의 장기인 4-4-2 포메이션을 사용한다.
안첼로티 감독은 함식과 알랑을 중앙에 투볼란치로 세워 함식과 알랑이 수비적인 역할을 분담하게 하였다. 함식이 혼자서는 수비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점을 보완한 것이다.
3미들의 4-3-3 전술에서 2미들의 4-4-2 전술로 바뀌었으나 왼쪽 측면 미드필더 자리에 중앙 미드필더 성향의 지엘린스키와 파비안 루이스를 기용하고 이들을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중원으로도 적극적으로 들어와 플레이 하도록 하여 2미들을 사용하는 전술 특유의 중원에서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여 사리 시절의 점유율을 가져가는 축구를 그대로 하였다. 여기에 왼쪽 풀백인 후이가 높게 전진하여 사리 시절의 왼쪽 측면에서 주로 공격하는 비대칭 전술도 그대로 사용했다. 주로 공격이 이뤄지는 왼쪽 측면과는 반대로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에는 본래 윙어인 카예혼을 내려 기용하여 측면에서 플레이 하도록 하였고, 오른쪽 풀백은 왼쪽 풀백에 비해 아래 위치에서 플레이 하였다.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오른쪽 풀백 자리에 센터백인 막시모비치를 기용하여 공격 시 왼쪽 풀백이 높게 올라가 왼쪽 측면에서 공격할 때 오른쪽 풀백은 센터백들과 함께 쓰리백을 구축하여 상대 역습 때 충분한 숫자의 수비 숫자를 확보하여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공격진은 인시녜와 메르텐스, 또는 인시녜와 밀리크가 투톱을 이루었는데 특징은 인시녜의 프리롤이다. 인시녜는 프리롤을 맡아 중원으로 내려와서 압박을 풀거나 공격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시즌 도중 겨울에 함식이 중국 리그로 이적하면서 함식의 역할을 파비안 루이스가 맡게 된 것 말고는 후반기에도 전반기의 전술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함식의 이적으로 창의적인 패스가 부족해지고 공격 전개가 단조로워졌을 뿐 아니라 여기에 전반기 프리롤을 맡아 큰 활약을 보여주었던 인시녜가 부진에 빠지면서 전반기에 비해 경기력이 나빠졌다.
2019-20 시즌에는 안첼로티 감독은 4-2-3-1 전술로 시즌을 시작했다. 이전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4-4-2 전술 특유의 공격 패턴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투톱에서 프리롤을 맡았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부진했던 인시녜가 투톱보다는 윙어 포지션에서 뛰어야 본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나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어 4-3-3 전술은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첼로티 감독은 이러한 전술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시즌 전 여름 영입 시장에서 하메스 로드리게스 영입에 실패하면서 No.10 역할을 해줄 공격형 미드필더가 없었으며, 미드필더도 스쿼드에 5명 밖에 없었다. 심지어 한 명은 유스에서 막 올라온 가에타노라서 실제적으로는 4명이 전부인 채로 시즌을 시작했다.
리그 첫 두 경기 피오렌티나전, 유벤투스전에 4-2-3-1 전술을 사용했으나 각각 4득점 3실점, 3득점 4실점 하면서 공격력이 좋아지고 수비적으로 나빠진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두 경기 7득점에 성공했지만 7실점 하면서 안첼로티 감독은 다시 4-4-2 전술로 돌아가게 된다. 대신 인시녜를 투톱보다는 왼쪽 측면 미드필더 위치에 두어 중앙보다는 본인의 위치인 측면에서 뛰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크게 3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첫번째, 4-4-2 전술 특유의 공격 패턴의 단순화이다. 두번째, 안첼로티 감독의 세부 전술 부족이다. 약속된 공격 패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볼 수 없었다. 경기를 본 팬들이 안첼로티가 전술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 포메이션만 짜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느낌이 난다고 할 정도. 대부분 의미 없이 볼만 돌리다가 공격이 끝나는 경우가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플랫형 4-4-2 전술을 사용하며 전방 압박을 한 것이다. 사실 4-4-2 전술이 최근 각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공격 패턴의 단순함 뿐만 아니라 수비적 불안함도 있다. 플랫형 4-4-2에서는 미드필더 두 명이 횡대로 서 있어서 중앙이 한 줄이 되기 때문에 이 곳이 뚫리면 바로 센터백들 앞 넓은 공간이 생기게 된다. 4-3-3 전술에서는 역삼각형 식으로 미드필더진을 배치해 앞의 두 미드필더가 앞에서 수비에 실패해도 수비형 미드필더가 이 공간을 커버하고, 4-2-3-1 전술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수비에 실패해도 투볼란치가 이 공간을 커버한다. 그러나 플랫형 4-4-2 전술에서는 이 공간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AT 마드리드의 시메오네 감독처럼 밀집 수비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첼로티 감독은 강력한 전방 압박을 선택했고 그 결과 역습 상황 시 쿨리발리와 마놀라스라는 빠르고 수비력 좋은 정상급 센터백들이 있음에도 포백 보호가 너무나 되지 않아 상대의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심지어 세부 전술 부족으로 이러한 수비적 불안감을 안으면서까지 강행했던 전방 압박도 엉성했다.
결과적으로 전 시즌 수비적인 안정감을 가져가기 위해 사용했던 4-4-2 포메이션이 수비적 불안감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이는 여름이적시장 내내 메인타겟으로 노리던 하메스영입 실패로 프리시즌 동안 준비하던 4-2-3-1 전술 대신 다시 4-4-2를 사용해야 했고 이후 이카르디 영입마저 실패했다. 그러고 보강해준 선수가 로사노인데 겨울 이적시장에 막대한 지원은 받은 가투소와 비교하며 안첼로티를 무능한 감독으로만 평가하는 태도는 지양해야한다.
이 결과 공격은 단조롭고 효과적이지 않은 의미 없는 점유율만 가져갔으며 상대 역습에 쉽게 당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리그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이에 아우렐리오 데 라우렌티스 구단주가 선수단 합숙을 지시하게 된다. 그러나 합숙 당일날 갑작스럽게 이를 선수단이 거부하며 팀 분위기가 박살이 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리그에서 9경기 연속 무승을 하게 되고 결국 안첼로티는 시즌 도중 경질된다.

10.5. 가투소 시절



11. 기타


  • 와싯의 파스타툰에서는 이 팀 자체가 심슨 가족의 그림체로 묘사되었다.#
  • 챔피언스 리그에서 홈/원정 경기력 편차가 매우 큰 팀 중 하나이다.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스타디오 산 파올로는 열광적인 홈팬들의 응원으로 매우 유명하며, 대표적인 원정팀의 무덤으로 불리운다. 특히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해서, 본인들보다 한수 위로 평가받는 강팀들도 곧잘 잡아낸다. 챔피언스리그 홈성적은 24전 14승 7무 3패이며, 1994년 현 체제의 챔스 개편 이후로는 21전 13승 5무 3패이다. 잉글랜드의 명문인 아스날, 첼시, 맨시티는 물론, 도르트문트와 비야레알도 이 곳에서 패하였다. 유일하게 나폴리 홈에서 비긴 팀은 바이에른 뮌헨이다. 그러나 2016-17시즌 베식타스에게 2-3으로 패함으로써 나폴리의 챔스 홈무패 기록은 깨졌다.
  • 반면 나폴리의 챔피언스 리그 원정성적은 24전 6승 7무 11패로[22] 홈 성적에 비하면 확실히 신통치 않은 편이다. 경기력 편차는 눈으로 보면 더욱 더 실감이 나는데, 홈에서 가패하던 팀한테도 원정 가서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경우가 다반사고, 약팀들한테도 원정에서는 매우 고전하다 어렵게 승점을 따내는 패턴이 많다. 이렇듯 나폴리가 홈극강, 원정막장이다 보니 홈 앤 어웨이로 치러지는 챔스 특성상 상대팀과 홈 원정 1승1패씩 나눠갖는 것은 나폴리에게는 매우 흔한 일이다.

  • 장내 아나운서인 데시벨 벨리니(Decibel Bellini)가 정말 유명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일품이다. 나폴리 팬들 사이에선 웬만한 선수만큼의 인기를 누리는듯 하다.

  • 챔피언스리그 노래가 나올때 팬들이 마지막 부분인 "the champions"를 떼창하는 것이 특징이다.
  • 토트넘과 더불어 팀내 국대주장이 4명으로 많다. 해당 선수는 콜롬비아다비드 오스피나, 알바니아엘세이드 히사이, 세네갈칼리두 쿨리발리, 그리고 코소보아미르 라흐마니가 있다.[23]

[1] 공식적으로는 이 해를 창단연도로 인정한다.[2] 원래는 10만 석이 넘는 초 거대 종합 경기장이었지만 경기장 개보수 이후 현재의 60,240석으로 줄었다. 1층의 시야가 엄청나게 별로라 폐쇄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5만 5천명 정도 수용 가능하다.[3] 사실 유베가 나폴리를 싫어한다기 보다는 나폴리가 일방적으로 유베를 싫어하는 것이 더 크다. 유베와의 라이벌 관계를 따로 지칭하는 말은 없지만, 나폴리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구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80년대 미셸 플라티니디에고 마라도나가 활동한 시기부터 라이벌 의식이 불붙었으며 2010년대에 들어 나폴리의 전력이 강해진 것과 곤살로 이과인의 유벤투스 이적으로 또다시 타올랐다.[4] 단순히 양 클럽 팬들간의 라이벌 의식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 사이의 지역감정이 얽혀있는데, 전통적으로 부유했던 북부 지방 사람들과 빈곤했던 남부 지방 사람간의 갈등은 상당하다.[5] 태양의 더비라는 뜻이다.[6]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제작자 디노 데 라우렌티스의 조카이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요리사 지아다 데 로렌티스의 당숙이기도 하다. SSC 바리의 회장도 겸임하고 있다.[7] 세리에 A 단일시즌 최다골 기록[8] 당시 이름은 스타디오 산 파올로[9] 이때를 최전성기라고 보면 된다. 리그 우승 2번과 코파 이탈리아, UEFA컵 등 굵직한 대회에서 잇따라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10] 1970년 칼리아리 칼초의 스쿠데토를 제외하면 로마 이남 지역에서 스쿠데토를 따낸 팀은 나폴리가 처음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북부 동맹이 정권을 쥐고 있었으며 그들의 남부 지방에 대한 차별 속에서 따낸 나폴리의 스쿠데토는 단순히 축구에서의 성공이 아닌 정치·사회적으로 상징적인 반항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11] 이때 클럽명인 S.S.C.나폴리라는 이름도 사용금지 처분을 받는다.[12]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영화제작사인 필마우로의 소유주[13] 출생지는 로마이지만, 집안이 나폴리 출신[14] 복귀하는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한데, 나폴리는 당시 2위를 달리고 있었고 마지막 경기인 제노아 CFC와 비기기만 해도 자력승격이 가능했다. 제노아 또한 승격을 노리는 팀이었기에 팽팽한 경기가 이어지다가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기고 당시 4위였던 피아첸사가 비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나폴리와 제노아의 스코어는 0-0으로 이대로 끝나면 두 팀 모두 승격할 수 있었다. 팬들은 경기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심판이 간신히 사태를 진정시키고 경기를 속행했지만, 선수들의 유니폼은 경기장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결국 선수들은 근처에 있던 유니폼을 아무것이나 주워입었고 이들은 각각 팀 동료의 유니폼을 입은 채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 경기 이후 나폴리와 제노아 서포터들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5]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시티, 비야레알과 한 조가 되었다.[16] 삼각편대가 유럽에 이름을 알린 것도 이때다.[17] 유벤투스 이적 전만해도 상당한 결정력의 소유자로 기대를 모았으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기복이 심해져 망했으나 18/19시즌 세리에 득점왕을 달성한다.[18] 모두 알다시피 나폴리 시절의 카바니는 리그와 챔스를 가리지않고 상대팀의 멘탈을 탈탈 털어먹던 존재였다. 그러나 카바니 특유의 결정력 자체에 대한 문제는 이때도 어느정도 대두되었던 상황이었고 파리에 와서는 출전시간 부족 + 자신감 결여까지 겹친 탓인지 거의 헬에 가까운 경기력으로 추락했다가 지금은 다시 월드클래스 공격수로 부활했다.[19] 66년만의 세리에 최다득점 기록으로 설명 끝. 15-16시즌 기준으로 그보다 뛰어난 결정력을 보여준 9번은 수아레스 뿐이었다.[20] 본래 윙포워드였으나 밀리크의 십자인대 부상으로 16-17시즌 제로톱으로 나와서 리그에서만 28골을 득점했다.[21] 마렉 함식 제외.[22] 개편 이후로는 21전 5승 6무 10패.[23] 토트넘은 손흥민, 해리 케인, 위고 요리스, 세르주 오리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