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공주(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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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중행적


1. 개요


신의의 등장인물이다. 배우박세영.

2. 작중행적



자객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어 최영은수를 고려로 데려오게 만든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과감하고 단호하며, 자존심이 강하다. 차갑고 냉철하며 때론 공민왕에게 서슴지않고 간할 정도로 대인배 기질이지만, 속은 천상 여자. 실은 공민왕을 사랑해서 결혼까지 이른 거지만, 어찌된 일인지 공민왕은 이를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1] 남편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고, 이제는 애증으로 변했다.[2] 그렇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된다. 사랑 때문에 조국도 배신한다.
3화에서 혼인하기 전의 상황이 잠깐 드러났는데, 맞선을 피하려던 공민왕과 우연히 만났다. 노국공주가 고려말을 쓰자 공민왕은 고려인이라고 오해하고 원나라를 미워해서 원나라 여자와 혼인을 피하려한다는 속마음을 다 드러냈다. 근데 어린 나이에 고려어를 쓰고 고려의 풍습을 알고있는걸로 봐선 그때도 한류가 있은 듯.[3] 보다는, 남편 될 사람을 위해 그 나라 말과 풍습을 다 배웠다는 건 역시 사랑의 힘이다. 4회를 보면, 8년 전에 첫눈에 반해서 그에게 말 한 마디 해보려고 배우기 시작했다고 인증하셨다.
이후로도 몇 번 공민왕을 위해서 자존심도 버리고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만 당하다가, 6회에서는 말도 없이 기철을 찾아가려 잠행을 나가서 또 다시 목숨에 위기가... 다행히 공민왕이 이를 알고 보낸 우달치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여전히 두 분 사이는 골이 깊다. 7회에서는 장빈을 사이에 두고 공민왕과 서먹한 대화를 하다가, 기철에게 가서 자신하고 최영, 의선을 맞바꾸겠다는 폭탄선언으로 제대로 공민왕의 염장을 지르셨다. 이유는 '''나 같은 것'''보다 그들이 전하께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이후 처음으로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하려는 순간, 난입한 조일신에 의해 결국 못하셨다. 망했어요
최영의 역모를 빙자해 궁궐 내까지 사병을 풀어놓은 기철을 보고, 그제서야 그가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여겨왔고, 공민왕은 그런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걸 깨달은 듯 하다. 갇혀버린 남편을 걱정하다가,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기 위해 정면돌파를 결정한 공민왕의 청을 받아들여, 원의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호복을 벗고 고려옷을 입은 모습으로 모든 중신들 앞에 섰다.
이후 남편과의 사이는 그야말로 폭풍전개 결혼한 지 3년 만에(분량으로는 4회 만에), 분위기가 급 무르익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11회에서는 그 공민왕께서, 기철의 협박에 포커페이스를 벗어던지고 친히 곤성전까지 오셔서 손을 나꿔채시고는, 모든 위험이 없어질 때까지 옆에 두겠노라고 강안전까지 데리고 가셨다.[4] 그리고 13회에서 드디어 '''정식으로 공민왕의 마음을 고백받았다'''. 다소 반전인데, 사실 그는 연경에서 만났던 그 고려 여인이 노국공주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몰랐고 나중에 깨달은 듯 한데, 원나라에 대항하겠다는 자기 원리원칙에 너무 얽매여, 차마 사랑이라고까지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3회에서 회상이 노국공주 혼자가 아니라,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서로 교차하는 장면에서 오버랩된 것은 이 것의 복선인 듯. 이후 분위기만 보자면 합방 모드. 이후 서연에 나가는 공민왕을, 그가 선물한 장신구를 착용한 채 조용히 응원하셨다.
19화에서 마침내 태기를 보이며 임신한 것이 알려졌다. 덕흥군이 원나라 사신의 인장을 이용한 편지에 의해 절의 방에 감금된다. 20화에서 독한 수면제가 든 약을 마시고 최영에게 구출되었지만 결국 역사대로 유산하고 말았다.[5]
21화에서 대충이나마 자신의 운명과 그 후의 공민왕이 어떻게 되는지도 눈치챘다. 그래도 유은수가 다시 돌아왔고 어쩌면 역사와 달라질지 모른다.
[1] 2화 대사 中 "귀하신 원나라 공주께서 하필 나 같은 자한테 넘겨지게 돼서 분한 거 압니다. 이제 고국을 떠나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로 끌려가게 생겼으니 반항하고 싶기도 하겠죠."[2] 재밌는 것은 공민왕이나 노국공주나 서로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서로 손뼉이 맞지 않는다는 것. 이쪽도 제대로 된 츤데레의 예.[3] 실제로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 늘어난 인적, 물적 교류때문에, 고려에는 몽골풍(蒙古風)이 있었고, 원나라에는 고려양(高麗樣)이 있는 등, 서로의 풍습이 유행하기도 했다.[4] 6회와는 사뭇 비교되는 장면.[5] 역사에 기록된 것만 보면, 노국공주의 임신은 2번이었다. 첫째는 유산했고, 둘째는 잘 알려진 것처럼 난산으로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