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석괴

 

檀石槐
(137 ~ 181)
1. 개요
2.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선비족의 수령.
용감하고 건장하면서 지략을 가져 부락민들이 모두 경외하고 복종했으며, 금지하는 범을 시행하면서 공정하게 처리해 이를 함부로 어기는 사람이 없었고 추대받아 대인이 되었다. 탄오산, 철구수 사이에 왕정을 건립하고 군사가 강성하자 동, 서부의 대인들이 그에게 귀부했으며, 남쪽으로는 이어진 변경, 북쪽으로는 정령, 동쪽으로는 부여, 서쪽으로는 오손을 공격해 흉노의 옛 지역을 점거했고 그 동서의 길이 4천 여리나 되었다. [1]
156년 가을 7월에는 운중을 공격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한나라를 공격했으며, 한나라에서는 그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해 사신을 파견하고 인수를 가져와서 왕으로 책봉해 화친을 시도했다. 단석괴는 이를 거부하고 한나라를 침입해 더욱 약탈했으며, 영토를 3부로 나누면서 각 부마다 대인을 두어 통치하게 했다.
177년에 한나라에서 하육, 전안, 장민 등을 파견해 도특약시축취와 함께 공격하자 삼부의 대인들에게 각 무리를 거느리고 싸우게 해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으며, 이후에도 한나라를 계속 공격하다가 181년에 사망[2]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화련이 추대되었으나 곧 선비족은 분열하였고 그들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소패2 전투 편에서 이름만 언급된다. 여기저기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던 선비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웠지만[3] 그가 40대에 사망하자 선비족은 구심점을 잃고 다시 흩어진 뒤 크게 3개의 세력으로 쪼개졌다고 나온다.



[1] 유목민족이다보니 후한의 영토와 같은 개념으로 바라보기는 힘들지만, 어찌되었든 단석괴 생전에 선비족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범위로 보면 당시의 후한 전체 영토에 거의 맞먹는 크기이다.[2] 당시 기준으로 적지않게 산 것은 맞지만,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흔히 아는 삼국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10년만 더 살았다면 후세에도 엄청난 인지도를 자랑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큰 인물인 셈.[3] 이 건국 장면은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포스터를 패러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