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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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들의 생활상.
1. 개요
鮮卑(중국어: 鮮卑, 병음: Xiānbēi, 상고한어: 사르페(*S[a]r-pe)[1] ), 중고한어: Sjen-pjie
선비는 내몽골 자치구 동부 그리고 만주지역 분포했던 동호(몽골)계 유목·수렵·목축민에 대한 명칭이다. 선비족의 언어가 어떤 계통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되고있으며 결론이 나지 못했다. 한자 기록에 의하면 동호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흉노의 동쪽에 있어 그들에게 복속되어있다 흉노가 멸망한 후 자립하여 각지로 진출했다. 따라서 동호계인 선비족을 몽골어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튀르크계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 10만 명의 흉노 지배층을 선비족에 남겨 통솔하다 국가를 성립했다고 하여 튀르크계로 보기도 한다. [2] 또한 말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기록을 따라 퉁구스계로 추측하기도 한다.
선비의 어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사서에 나타나는 어원에 대한 설 중 하나는 선비족이 선비산에 숨어들어 살고 있어서 선비라고 불렸다는 설이다. 실제로 선비족이 나타난 선비산은 대흥안령 산맥에 있다. 선비에서 갈라진 오환 역시 대흥안령 남부 오환산에서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다. 또 하나의 설은 원시 투르크어로 벨트, 혁대를 뜻하는 샤르비(Sarbi)에서 나왔다는 것이며 실제로 선비족 유물에도 벨트가 주로 출토되고 있다.
2. 상세
고대에는 진나라(Chin)가, 근세에는 거란(Cathay)이 서양에서 중국을 대표했다면, '''중세 서양에선 '선비'가 중국을 대표했다.''' 타브가치(Tabgach)는 고어로 중국을 말하는 또 다른 단어인데, 그 어원은 선비족의 부족 중 하나인 탁발부(拓跋氏)에서 온 것이다.[3]
선비라는 이름은 동호가 흉노에게 멸망당한 뒤에 살아남은 동호의 일파 중 선비산으로 들어간 무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 알려진 대선비산의 위치는 대흥안령 북부의 알선동이라고 하는데,알선동 동굴에는 선비족 중에서 후일 북위를 창시한 탁발선비의 원거주지를 알려주는 북위시대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이 알선동 비석은 북위가 위세를 떨치던 태무제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알선동 지역에 사는 오락후국에서 사신이 와서 북위 황제들의 선조들이 살던 옛터가 바로 자신들의 거주지라고 말하니, 태무제는 중서시랑 이창 등을 보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축문을 이곳에 세웠던 것이다
다만 대선비산은 지금의 하얼빈 근처에 있는 산의 명칭으로서 고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대선비산(大鮮卑山)이라는 명칭이 청, 만주족이 만주원류고가 쓰여질 때 나타난 명칭으로 보아 후대에 붙여진 이름의 산으로 보인다. 참고로 동호의 다른 일파 중 오환족은 대흥안령 남단의 오환산으로 들어가 살아서 오환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없다.
처음에는 후에 거란족의 근거지가 되는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흉노의 피지배 민족으로 지내다가 흉노가 남북으로 나뉘어졌을때 북흉노가 후한에게 깨지자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후한 말기에는 단석괴의 등장으로 한때 북방 민족을 통일하여 중국을 위협하였으나 단석괴의 사후 선비는 분열하여 그 세력이 빠르게 쇠락하였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같은 동호의 일원이었던 오환족의 세력이 더 강했다. 그러나 오환은 원소에게 복속하였고 원소 사후 원상과 손을 잡고 조조에게 대항하였다.
한편 오환이 멸망한 후[4] 조용히 세력을 기르던 선비는 중국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이 막장테크를 타고 각지의 이민족들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자 선비족도 이때 같이 독립한다.
선비족은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중국으로 남하하여 내몽고 지역에 정착하면서 중국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선비족이 정복왕조인 북조를 세우고 나서는 중국 대륙은 그야말로 중국인이 아닌 선비족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선비족은 중국에 북위와 북연을 세웠는데 선비족의 북위는 서위, 동위를 거쳐 북주, 북제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중국인 한족(漢族)들은 약화되기 시작하여 선비족들이 중국을 철저히 유린하며 중국인 한족(漢族)들은 정복하고 완전히 예속시키는 과정의 정복왕조가 시작되었다. 거란족, 갈족, 튀르크족 등등이 중국을 정복하는 등 중국 대륙은 한족이 아닌 외래 민족들의 터전이 되었다.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갈족도 하북성, 산동성 등으로 남하하여 중국인들을 정복하고 예속시켰다.
선비족은 중국과 만주의 징검다리 지역인 하북성에 있는 한족을 정복하여 화북을 제패하였으며 북주 때는 청나라의 여진족이 한족(漢族)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선비족들도 피지배인 한족들에게 선비족의 풍습과 선비족의 성씨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선비족들이 중원에서 확실한 지배층이 되어가는 과정은 선비족이 북위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까지 선비족의 무천진 8주국 관롱집단들이 중국의 지배자로서, 한족(漢族)들은 피지배민족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선비족 탁발부의 북위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이 이후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선비족들은 그 후 중국인 한족(漢族)들이 세운 중국 남조를 정복하고 북주와 북제로 나뉘어졌다. 그 후 수나라의 양견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되었다. 수나라의 양견은 선비족 우문부가 세운 북주의 외척인 선비족 보육여(普六茹)씨라는 기록이 있다. 그 이유는 북위 때부터 계속 무천진 출신 선비족 8주국 관롱집단이 중국인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선비족의 다얀씨(大野氏, 대야씨)는 북주의 귀족이며 선비족 8주국 관롱 집단의 출신의 당의 이연도 선비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선비족의 북위는 한자라는 문자를 가진 한족(漢族)의 풍습을 수용하는 정책으로 한족 썽씨를 쓰며 한족 문화를 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 한족(漢族)의 최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복된 피지배족 한족(漢族)이 얻을수 있는 높은 직책들은 한정적이였다. 그리고 북주의 우문태 때는 몽골제국과 여진족의 청나라가 피지배민족인 한족(漢族)들에게 했던 정책들처럼 피지배민족인 중국 한족(漢族)들에게 선비족 풍습을 강요하고 선비족의 성씨를 쓰도록 강요했다.
수, 당 이후 만주 서부에 남아있던 선비계 후손들은 거란, 해족, 습족, 실위였으며, 훗날 습족은 해족에 흡수되고, 해족과 남은 일부 습족들, 실위의 대부분은 거란에 점령되었고, 거란은 요나라를 세워 해족과 같이 활동했다. 실위의 일파인 몽올실위는 훗날 몽골족의 조상이 된다.
3. 침투 왕조
오호십육국시대에 북중국을 정복하여 많은 왕조를 세웠다. 이 시대의 유목민 왕조를 침투 왕조라고 부르는데, 후에 등장하는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정복 왕조와는 달리 아직 문화적 기반이 약해서 한족의 문화에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흡수, 동화되었다고 해서 침투 왕조라 하였다. 그리고 이 침투 왕조에서 두드러진 민족이 선비족이었다. 특히 유명한 선비족 왕조로는 모용부(慕容部)의 모용황이 세운 정복국가 전연, 모용수가 세운 후연과 탁발부(拓跋部)가 세우고 균전제를 실시했던 효문제가 집권했던 북위가 있다. 북위는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갈라졌으나 결국 북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점점 한족의 문화를 사용하였고 수나라,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소수 민족들에게는 한족이라 불리며 중국역사에서 소멸한다. 하지만 황실 문화나 개방적인 국가 성향은 당나라까지 이어진다. 당장 수의 황족 양씨와 당의 황족 이씨부터가 한화된 선비족이였으며[5] 북위의 황족 탁발씨, 연의 모용씨, 독고씨, "우문"씨는 북주의 황가인데, 죄다 선비족의 후예라고 보면 되겠다.
고구려-수 전쟁의 우문술 등도 선비족이며 선비족인 수문제는 외척인 우문태의 성을 사용하였다.
모용부에서 갈라져 나온 유목민족 토욕혼(吐谷渾)의 후예 몽구오르인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현존하는 선비계 민족으로 주장된다. 다만 투족은 티베트 계열의 강족(羌族. 삼국지에 이민족으로 등장하는 그 강족)과 혼혈된 민족으로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 티베트화된 민족이다.
4. 부여, 고구려와의 관계
4.1. 주적
국내 역사에는 고구려와 부여에 관련된 기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3세기경 부여를 공격해 꽤 많은 피해를 입혔다. 부여를 공격해서 무려 5만 명을 포로로 끌고가기까지 했다. 특히 전연은 당시 모용황이 고국원왕이 재위 중이던 고구려를 공격해서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키는 동시에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능묘를 파헤쳐 시신을 도굴하고 왕태후와 고국원왕의 왕후 등 왕족들과 백성들을 잡아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6] 이후 계속 수세에 몰리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후신인 후연을 모용희 때에 들어와 밀어내고 요동을 차지하게 된다.[7] 또한 북주의 무제와 전쟁을 치러 온달이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선비족 국가인 수나라, 당나라랑 나라의 존망을 건 대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가 백제를 먹어치운 뒤 고구려도 멸망시키고 신라까지 먹으려 했다가 토번과 거란이 잇따라 세를 불리자 고구려 후예를 중심으로 발해가 일어났다.
4.2.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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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선비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 계열의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다소 멸칭으로써 인식되기 마련이다. 역사 기록상으로는 그럴 수 있는데, 다만 문화사적으로는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
초기 부여와 관련된 유적인 중국 지린성 유수시 노하심촌의 노하심 고분군의 발굴조사 내용을 보면 선비족과의 관련성이 매우 높다. 동북지역, 내몽골자치구 동북쪽에서 발원한 선비[8] 들과 관련된 무덤들의 장법(葬法)상의 특징은 사다리꼴형태의 결구된 목곽묘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또한 피장자의 머리쪽에 동물뼈를 놓는 선비계열 무덤의 장례 풍습이 마찬가지로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나며, 특히 선비족의 아이덴티티를 표상하는 유물─조개로 만든 돈(?), 특유의 그물 형태의 청동 방울 등의 청동 유물 구성, 동물문양의 장식, 꼬아만든 귀걸이 등이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추가적인 해석과 분석을 요하는 부분일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선비족과 초기 부여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봐야하지 마냥 적대적이라고 볼 순 없다.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그러하듯, 위의 밀접한 관계는 중기에 가서도 비슷하다. 위의 서술된 내용과는 다소 상반될 수도 있지만 한국의 삼국시대 무렵에 건국된 선비계열의 몇몇 국가들은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 북위 같은 경우에는 효문제의 문소황후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고구려인 출신이기도 하듯이 고구려와 사이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9] 또 북연을 보더라도 선비족 계열이되 고구려 출신이 황제가 된 혜의제 고운의 케이스도 있는데 북연은 줄곧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특히 탁발선비의 북위에선 고구려의 사신을 남조와 동등하게 접대하고 동방지역의 패권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고구려왕을 정동장군으로 책봉하기도 했다.
고고학적, 문화사적으로도 3~5세기 고구려의 유물들은 선비 계통 또는 선비와 관련된 것들이 매우 많다. 기와의 끝부분 장식인 와당인 권운문 와당과 연화문 와당의 기원을 북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삼연계 유적인 랴오닝성 북표현 라마동 고분군의 출토품들에서도 각종 마구(馬具)의 갖춤새들이 비슷하며, 특히 딸랑거리는 계통의 장식류들, 흔히 보요장식(步搖粧飾)이라고 지칭되는 금공품의 장식들 또한 선비와의 관련성이 돋보이는 것들이다.[10] 소위 삼연계 대장식구(허리띠 장식) 또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유물로써 한반도와 동북지방에 널리 확인된다. 더 많은 사진자료들이 간단히 서술되어 있는 블로그를 참고바람.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무수한 교류관계가 확인되고 있으며, 그 흔적들이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나 그 모체였던 부여의 역사고고학적 이해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보니 단순히 선비는 한국사에서의 주적이었다라고만은 보기 어렵다.
정리하자면 꼭 민족집단의 피아식별이 세부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양분되어 있지 않고 또한 선비와 한반도와 그 북부의 역사상의 국가들이 무수한 인적, 물적 교류가 있어왔다는 것이다.[11] 특히 선비는 아래 항목에 있듯이 다양한 계열로 나뉘어져 있어서 각각 이해관계가 복잡했을 수 있다.[12] 당장 같은 민족일지라도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며, 원래 친했어도 전쟁하여 미워하는 경우가 있어서 "선비= 한국사의 주적들?" 이라는 수식으로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애초에 근대 이래의 만족 개념을 과거에 적용한다는 것도 어폐가 있고[13]
5. 주요 집단
- 모용부(慕容部) -현재 랴오허 유역 - 전연, 후연, 서연, 남연, 토욕혼
- 단부(段部) - 난하 유역 - 금방 분열되어 멸망.
- 우문부(宇文部) - 시라무렌 유역 (흉노+선비) - 북주
- 하란부(賀蘭部) - 오호십육국시대 때 대나라에 복속해 탁발씨의 외척이 되었으며, 대나라가 멸망한 후에 탁발규를 추대해 북위를 건국하게 했다.
- 탁발부(拓跋部) - 음산산맥 동부 일대 (선비+흉노) - 대, 북위(후일 원元씨로 개명.)
- 독발부(禿髮部) - 하서 인근 (선비+흉노+강·저)
- 걸복부(乞伏部 혹은 흘복부로 읽음) - 농서 인근 (칙륵+선비+강·저) - 서진(西秦)
6. 관련 집단
- 녹결부(鹿結部)
- 독고부(獨孤部) - 흉노족(남흉노)을 기반으로 선비족(탁발부)과 동화
- 몰록회부(沒鹿回部)
- 철불부(鐵弗部) - 흉노족(남흉노)을 기반으로 선비족(탁발부)과 동화
- 유연(柔然) - 선비족 탁발부에 부속되어 있다가 이후 분화
- 수나라&당나라 - 중국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만 황실가문과 지배층은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 집단(무천진 관롱집단)에서 출발했다.
7. 소속 인물
선비족이 세운 국가 또는 서진 이후의 선비족 소속 부족 계열은 제외.
- 가비능 - 후한 말 안으로는 선비족을 규합하고, 밖으로는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해서 위나라에 대항하였다.
- 건만(騫曼)
- 곡곡제(斛穀提) - 선비족의 인물. 343년에 후조의 석선의 공격을 받아 대파당해 3만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 괴두(魁頭)
- 구륜(丘倫) - 선비족의 대인. 109년 9월에 무하, 남흉노의 골도후 등과 함께 7천여 기병을 이끌고 오원을 노략질해 고거곡에서 한나라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겨울 11월에 하희, 방웅, 경기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방웅, 경기의 공격으로 흉노의 욱건일축왕이 격파되자 철수했다.
- 궐기(厥機)
- 기지건
- 단석괴 - 선비족을 통일하고 흉노의 옛 영토를 점령하여 서쪽으로는 신장, 동쪽으로는 요동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선비족의 영웅.
- 목환진(木丸津), 소희련(素喜連) - 요동의 선비족 인물. 309년에 요동태수 방본의 습격으로 동이교위 이진이 죽자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여러 현을 공격해 함락했으며, 봉석이 화해를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311년에 모용한의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고 이들의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병합되었다.
- 몰혁간(沒奕干) - 선비족의 인물. 360년 겨울 10월에 독고부와 함게 수만 명의 무리를 인솔해 전진에 항복했다.
- 미가(彌加)
- 보도근
- 부라한(扶羅韓)
- 사말한(沙末汗)
- 설귀니
- 소리(素利)
- 연려양(燕荔陽) - 선비족의 대인. 107년에 한나라의 조정에 와서 조현했고 태후로부터 왕의 인수, 붉은 수레, 삼가(세 필의 말이 끄는 수레) 등을 받았고 이어서 오환교위가 거주하는 영성 아래에 사는 것, 호족과의 무역 개통, 남, 북 양부에 귀부한 인질이 머무는 관사를 건축하는 것이 이루게 하고 선비 부족의 읍락 120부가 각기 인질을 보냈다.
- 연휴(連休) - 요서의 선비족 인물. 117년에 한나라를 공격했다가 오환족의 대인인 어질거의 공격으로 격파되어 1천 3백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 오륜(烏倫) - 선비족의 요서 대인. 120년에 무리들을 이끌고 등준에게 항복했다.
- 육연(育延)
- 육축연(陸逐延) - 선비족의 인물로 308년에 전한에게 항복했다.
- 화련
8. 대중매체에서
- 바람의 나라(게임) - 2차 이상의 몹으로 선비족 맵에서 등장. 위치는 12지신 유적에서 갈수 있는 압록강과 대방성 사이에 있다. 다만 등장하는 몹들의 묘사가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다. 당장에 옷차림이 청나라 무술가, 도가 차림에 무기(!)를 들고 있다. 실제 선비족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게다가 후연은 고구려의 성 중 하나로 있는 것도 오류.
- 근초고왕 -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하던 백제의 왕이고 선비족은 북중국에서 놀았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도 양자간 굵직한 접촉은 없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을 것 같지만 대륙진출 드립 덕분에 등장해주셨다.[14]
- 광개토태왕
- 김용의 무협소설 천룡팔부 - 연나라 황가의 후예 모용박, 모용복 부자가 무림의 고수로 등장한다.
- 각종 무협지 - 모용세가
- 삼국전투기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캐릭터로 등장한다.
- 일반 선비족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가비능 - 울프 호크필드
- 독발수기능 - 릭 스트라우드
- 김진명의 역사소설 고구려 - 고구려와 주로 충돌했던 모용부가 메인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작중에서 문명적이고 숭고하게 그려지는 고구려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야만적이고 잔인하며 호전적인 종족으로 묘사된다. 역사왜곡으로 악명 높은 김진명 아니랄까봐, 모용외와 모용황 등이 저승에서 보면 팔짝 뛸 만한 온갖 엉뚱한 묘사로 가득하다.[15]
[1] 백스터-사가르(Baxter-Sagart) 음운체계에 따른 추정음.[2] 흉노 (匈奴)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정수일)[3] 선비족의 탁발부가 세운 북위(北魏)가 중국을 정복했으며, 북위에서 갈라져나온 북제, 북주(北周)가 훗날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져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기를 정리하고 중국을 통일했다.[4] 단부, 우문부는 오환에 가까웠는데, 남은 오환들은 선비에 흡수되었다.[5] 그래서 돌궐이 당을 타브가치라 불렀다.[6] 시신 및 포로들은 후에 고구려로 돌아오게 된다.[7] 이후 후연은 내부 분열로 인해 모용희가 목숨을 잃고 고구려의 지파인 고운이 왕위에 올라 북연을 건국했다.[8] 예를 들자면 서차구 고분군, 훙륭산 고분군, 완공 고분, 찰뢰락이 고분군(내몽고에 있어서 음차된 표현이다.) 등이 있다.[9] 물론 고구려가 그 시절 강성한 탓도 있을 것이다.[10] 이것이 나중에 또 신라와도 관련이 생긴다. 신라 금관의 장식들이 대표적.[11] 이는 신라-왜(일본) 관계도 비슷하다. 물론 이러한 교류가 민족간 정체성과 이질성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12] 선비라고 묶어서 치기에는 모용, 탁발, 단 등의 여러 지파로 나뉘어있을뿐더러 그나마 연맹왕국의 형태라도 부족들이 함께 움직인 부여와는 달리 정말로 남남이거나 아예 남만도 못한 원수지간인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선비 지파 중 일부는 고구려나 부여에 흡수되기도 했지만 강성 독립세력의 경우는 고구려나 부여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 것이다.[13] 대표적으로 ‘동이족=한민족’이란 인식. 당장 현대 대한민국애서 외국인을 인식할 때 지역이나 대륙, 민족을 엄밀히 나누어보지 않는 판인데, 과거+외국(주로 중국)의 역사책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 하니 어려움은 커진다,[14] 물론 정말 요서경략설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연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설이라 확실한 것이 아니다. 다만 진출설과는 별도로 외교는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드라마와는 달리 크게 접점이 없을 확률이 높은게 근초고왕이 본격적으로 고구려와의 분쟁이 있었을 시기에는 모용부의 전연은 이미 전진에게 망하게 된다.[15] 모용외는 꽤 한성질 하기는 했어도 나름 유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의 소설에서는 본능에 의존하는 야만인 우두머리 정도로 묘사된다. 제법 비범하고 카리스마적인 마초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실제 모용외와는 매우 다르다. 모용황은 한술 더떠서 모용외가 천민 여자를 범하여 얻은 사생아이자 싸이코패스적인 성격의 폭군으로 그려진다. 실제 모용황은 모용외가 단부의 공주와 혼인하여 얻은 적자 출신으로, 그 때문에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 못잖은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