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 맥클레인
1. 소개
'''최후의 단일시즌 30승 투수'''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전성기역시 디트로이트 시절이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5년간 압도적인 임팩트를 보여주었으며 특히 24살이던 1968년에는 '''31승'''을 거두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1969년 이후 여러 구설수에 오르는 등 논란을 자주일으키면서 빠르게 몰락한 투수.
2. 프로 데뷔 전
1944년 일리노이주 마크햄에서 태어난 맥클레인은 시카고의 마운트 카멜 고등학교에서 유격수 겸 투수로 활동했다. 십대 시절 미래 그의 아내이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루 부드로의 딸인 샤린 부드로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야구 외에도 음악적인 재능이 있어 아버지로부터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다.
196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맥클레인은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아마추어 자유계약으로 프로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3. 선수시절
3.1. 전성기 이전
1962년 6월 28일 루키리그에서 할란 스모키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가진 맥클레인은 마이너리그 데뷔전에서 '''16탈삼진 노히트'''를 기록한다. 이후 루키리그에서 고작 두 경기를 치르고 싱글A로 승격한 맥클레인은 4승 7패를 기록했다.
당시 마이너리그에서 1년동안 뛴 선수는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지 않으면 타팀에 드래프트가 되었는데, 그 해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지 못했던 맥클레인은 화이트삭스를 떠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입단한다. 이후 맥클레인은 빠르게 상위리그로 승격하며 1963년 9월 21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맥클레인은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투런 홈런을 치며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룬다. [1] 맥클레인은 데뷔 시즌 2승 1패 방어율 4.29 22탈삼진 16볼넷의 성적을 거두었다.
1964년 다시 트리플A로 강등되어 마이너리그에서 시간을 보내던 맥클레인은 6월 초에 다시 메이저리그로 승격한다. 그는 그 해 4승 5패방어율 4.05 70탈삼진 37볼넷을 기록했다.
3.2. 디트로이트의 간판 투수
1965년부터는 팀 내 주전투수로 자리잡고 그 해 16승 6패 2.61 192탈삼진 62볼넷을 기록하며 팀의 새로운 주축으로 자리잡았다.[2] 다음 해인 1966년에는 20승 14패 방어율 3.92 192탈삼진 104볼넷으로 개인 첫 20승을 거두었고 또한 개인 첫 올스타전에 선발투수로 출장하기도했다. 1967년에는 17승 16패 161탈삼진 73볼넷으로 전년에 비해 부진했으며, 8월 이후에는 아예 승을 거두지 못했다. 또한 당시 디트로이트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보스턴 레드삭스, 미네소타 트윈스와 함께 치열한 리그 우승경쟁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디트로이트는 그날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날 선발투수로 등판한 맥클레인은 그 날역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보스턴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정차부심한 맥클레인은 1968년, 첫 두 경기를 노 디시전으로 끝내고, 다음 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역사적인 시즌을 써내려간다. 5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둔 맥클레인은 그 다음 경기에서 한번 패한뒤, 다음 경기에서 다시 10이닝 완투승을 시작으로 다시 4연승을 달렸다. 그리고 또다시 다음 경기에서 패배한 후 다시 9연승을 달렸다. '''심지어 저 경기 중 7경기가 완투승이었다!''' 7월 중순에는 18승 2패였으며 이후 다시 1패를 거둔 후 7연승을 달렸다. '''이 중 6경기가 완투, 완봉이 3번이었다.''' 이후 처음으로 2연패를 당한 뒤 다시 4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9월 14일, 맥클레인은 디트로이트의 홈 구장인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전국적으로 방송한 경기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4회 레지 잭슨에게 투런홈런을 맞으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이후 디트로이트는 놈 캐시의 홈런으로 3:2로 역전했으나 다시 6회 레지 잭슨에게 역전 홈런을 맞았다. 결국 맥클레인은 9이닝 4실점으로 9회를 마쳤고, 디트로이트는 4:3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9회말 1사 1, 2루에서 동점을 만들어냈고, 계속되는 1, 3루 상황에서 윌리 호튼이 끝내기 안타를 치며 맥클레인은 34년만에,'''2차 세계대전이후 첫 30승 투수가 되었다.'''[3]
하지만 맥클레인은 30승에 그치지 않고 다음경기에서도 완투승을 거두며 31승을 거두었고, 정규시즌을 31승 6패 방어율 1.96 280탈삼진 63볼넷의 성적을 거두었다. 사이 영 상은 만장일치로 수상했으며, 정규시즌 MVP까지 석권했다. 또한 디트로이트는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작년의 한을 푸는데 성공했다.
이후 디트로이트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밥 깁슨을 앞세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었다. 맥클레인은 1차전에 등판해 5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고, 4차전에서도 2.2 이닝 3실점으로 다시 패전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팀이 탈락위기에 놓였던 6차전에서는 9이닝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두었고, 디트로이트는 7차전에서 미키 롤리치의 1실점 완투에 힘입어 세인트루이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1968년의 활약으로 맥클레인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해몬드 오르간 컴퍼니의 보증을 받고 라스베가스에서 뮤지컬에 출연을 하기도 했고, 에드 설리반 쇼, 스티브 알렌 쇼, 조이 비숍 쇼 등의 TV쇼에도 출연하기도 했다.
1969년에도 맥클레인은 지난 시즌이 플루크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24승 9패 방어율 2.80 181탈삼진 67볼넷의 성적을 거두었다. 맥클레인 그 해 23승 11패를 거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마이크 쿠엘라와 함께 공동으로 사이 영 상을 수상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우기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맥클레인이 메이저리그에 한 획을 그을 대투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는 24살에 30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25살까지 2년연속으로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또한 나이도 젊었기 때문에 맥클레인의 앞날은 창창해보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맥클레인의 전성기는 막을 내린다.'''
3.3. 몰락
1970년 시즌 도중 총기 소지 등 여러 혐의에 걸리며 수 차례 출장정지를 당했던 맥클레인은 이로 인해 성적이 수직 하락했고, 결국 1971년 워싱턴 세네터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팀의 약한 타선과 적응 실패로 22패를 당하는 등 털릴대로 털리고 1972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뛰지만 이미 그의 기량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그러는 사이 도박으로 재산마저 탕진하고 말았다. 결국 1972년 시즌 이후 28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4. 관련 문서
[1] 공교롭게도 데뷔전 상대가 시카고 화이트삭스였다.[2] 그가 1965년 거둔 192탈삼진은 그 해 아메리칸리그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3] 그 전 마지막 30승 투수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디지 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