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롤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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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선수. 포지션은 선발투수였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뉴욕 메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활약했으며 디트로이트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투수였다.
롤리치는 1958년 아마추어 자유계약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롤리치는 입단 후 5년동안 마이너리그에서 지내다가 1963년 빅 리그로 콜업이 되어 5월 12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전에서 데뷔전을 치루었고, 그 해 메이저리그에서 5승 9패 ERA 3.55 103삼진으로 루키로선 괜찮은 성적을 냈다. 다음 해인 1964년에는 18승 9패 ERA 3.26, 6완봉 192삼진을 기록하며 디트로이트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1968년, 롤리치는 17승 9패, ERA 3.19 197삼진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특히 8월, 9월에는 2달간 10승을 거두며 맹활약했고, 디트로이트는 그 해 '''31승'''을 기록한 데니 매클레인과 롤리치를 앞세워 2위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12게임 차로 따돌리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23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 그 해 월드시리즈 상대는 다승왕, MVP, 사이 영 상 3관왕에 빛나는 밥 깁슨을 앞세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카디널스의 홈구장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한 롤리치는 9이닝 1실점 9삼진을 잡으며 완투승을 거두며 디트로이트의 디트로이트의 시리즈 첫 승을 이끈다. 이후 롤리치는 디트로이트가 시리즈 스코어 1승 3패로 위기에 처한 5차전에 다시 등판, 1회 부터 카디널스의 강타자 올랜도 세페다에게 투런홈런을 맟는 등 1회에 3실점하는 등 위태로운 출발을 했지만 그 이후 이닝을 모두 무실점으로 막으며 역투를 펼쳤고, 타선이 5점을 내면서 롤리치는 3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팀을 위기에서 구원한다. 이후 6차전에서 디트로이트가 에이스 대니 매클레인의 완투승에 힘입어 13-1로 대승을 거두자 7차전에서 다시 등판, 시리즈에서 롤리치와 함께 2승을 거둔 카디널스의 에이스 밥 깁슨과 대결을 펼쳤다.[1] 경기는 6회까지 아무도 점수를 내지 못하며 팽팽한 투수전으로 진행되었다.[2] 그러나 7회초 카디널스의 중견수 커트 플러드가 짐 노트럽의 평범한 플라이 타구를 놓치며 2타점 3루타로 만들어주자 깁슨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음타자였던 빌 프리한이 노트럽을 불러들이는 1타점 2루타를 기록하며 스코어가 3:0으로 벌어졌다. 이후 9회 초 디트로이트는 깁슨으로부터 1점을 더 뽑아내며 스코어를 4:0으로 벌렸다. 이어진 9회말에서 마이크 섀넌이 롤리치로 부터 솔로홈런을 뽑아냈지만 이미 늦은 뒤였고, 롤리치가 남은 이닝을 깔끔하게 처리하며 경기는 4:1로 종료, 디트로이트는 23년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롤리치는 이 해 월드시리즈에서 3경기에 등판해 27이닝 동안 5실점만을 내주고 3번의 완투승을 거두었고,[3] 월드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 되었다.[4]
이후 롤리치는 1969년 19승 11패 ERA 3.14 271삼진을 거두며 생애 첫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다음 해인 1970년에는 14승 19패 ERA 3.80 230삼진으로 다패왕을 차지하며 주춤한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71년에는 전년도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25승 14패. ERA 2.92 FIP 2.85, 45선발 '''29완투 4완봉, 376이닝''' 308삼진의 성적을 거두며 커리어 하이시즌을 보냈다. 롤리치는 이 해 다승왕을 수상했고 사이 영 상도 노렸지만 바이다 블루가 역대급 시즌을 보내며 사이 영과 MVP를 동시에 석권하는 탓에 수상하지 못했다.롤리치는 이 해 사이 영 상 2위, MVP 5위,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롤리치는 이후 1972년 22승 14패 ERA 2.50 250삼진의 성적으로 사이영 3위, MVP 10위,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73년부터 16승 15패 ERA 3.82로 점차 성적이 하락하기 시작, 1974년에는 '''21패'''로 다패왕을 차지하는 등 좋지않은 모습을 보이다가 1975년을 마지막으로 디트로이트를 떠나 뉴욕 메츠로 이적, 8승 13패 ERA 3.22 FIP 3.14의 성적을 거둔 뒤 시즌 후 은퇴, 이후 디트로이트에서 도넛 가게를 차리는 등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후 1978년 다시 복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2년간 2승 3패의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다.
통산 217승 191패, ERA 3.44 FIP 3.20, 195완투 41완봉, 3638.1이닝 2832삼진.
그가 디트로이트 시절 기록한 2679삼진은 아직도 아메리칸리그 좌완 최다 탈삼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여담으로 롤리치는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어렸을 때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다친 영향으로 좌투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글은 오른손으로 쓴다고.
1. 소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선수. 포지션은 선발투수였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뉴욕 메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활약했으며 디트로이트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투수였다.
2. 선수 시절
롤리치는 1958년 아마추어 자유계약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롤리치는 입단 후 5년동안 마이너리그에서 지내다가 1963년 빅 리그로 콜업이 되어 5월 12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전에서 데뷔전을 치루었고, 그 해 메이저리그에서 5승 9패 ERA 3.55 103삼진으로 루키로선 괜찮은 성적을 냈다. 다음 해인 1964년에는 18승 9패 ERA 3.26, 6완봉 192삼진을 기록하며 디트로이트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1968년, 롤리치는 17승 9패, ERA 3.19 197삼진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특히 8월, 9월에는 2달간 10승을 거두며 맹활약했고, 디트로이트는 그 해 '''31승'''을 기록한 데니 매클레인과 롤리치를 앞세워 2위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12게임 차로 따돌리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23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 그 해 월드시리즈 상대는 다승왕, MVP, 사이 영 상 3관왕에 빛나는 밥 깁슨을 앞세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카디널스의 홈구장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한 롤리치는 9이닝 1실점 9삼진을 잡으며 완투승을 거두며 디트로이트의 디트로이트의 시리즈 첫 승을 이끈다. 이후 롤리치는 디트로이트가 시리즈 스코어 1승 3패로 위기에 처한 5차전에 다시 등판, 1회 부터 카디널스의 강타자 올랜도 세페다에게 투런홈런을 맟는 등 1회에 3실점하는 등 위태로운 출발을 했지만 그 이후 이닝을 모두 무실점으로 막으며 역투를 펼쳤고, 타선이 5점을 내면서 롤리치는 3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팀을 위기에서 구원한다. 이후 6차전에서 디트로이트가 에이스 대니 매클레인의 완투승에 힘입어 13-1로 대승을 거두자 7차전에서 다시 등판, 시리즈에서 롤리치와 함께 2승을 거둔 카디널스의 에이스 밥 깁슨과 대결을 펼쳤다.[1] 경기는 6회까지 아무도 점수를 내지 못하며 팽팽한 투수전으로 진행되었다.[2] 그러나 7회초 카디널스의 중견수 커트 플러드가 짐 노트럽의 평범한 플라이 타구를 놓치며 2타점 3루타로 만들어주자 깁슨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음타자였던 빌 프리한이 노트럽을 불러들이는 1타점 2루타를 기록하며 스코어가 3:0으로 벌어졌다. 이후 9회 초 디트로이트는 깁슨으로부터 1점을 더 뽑아내며 스코어를 4:0으로 벌렸다. 이어진 9회말에서 마이크 섀넌이 롤리치로 부터 솔로홈런을 뽑아냈지만 이미 늦은 뒤였고, 롤리치가 남은 이닝을 깔끔하게 처리하며 경기는 4:1로 종료, 디트로이트는 23년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롤리치는 이 해 월드시리즈에서 3경기에 등판해 27이닝 동안 5실점만을 내주고 3번의 완투승을 거두었고,[3] 월드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 되었다.[4]
이후 롤리치는 1969년 19승 11패 ERA 3.14 271삼진을 거두며 생애 첫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다음 해인 1970년에는 14승 19패 ERA 3.80 230삼진으로 다패왕을 차지하며 주춤한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71년에는 전년도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25승 14패. ERA 2.92 FIP 2.85, 45선발 '''29완투 4완봉, 376이닝''' 308삼진의 성적을 거두며 커리어 하이시즌을 보냈다. 롤리치는 이 해 다승왕을 수상했고 사이 영 상도 노렸지만 바이다 블루가 역대급 시즌을 보내며 사이 영과 MVP를 동시에 석권하는 탓에 수상하지 못했다.롤리치는 이 해 사이 영 상 2위, MVP 5위,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롤리치는 이후 1972년 22승 14패 ERA 2.50 250삼진의 성적으로 사이영 3위, MVP 10위,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73년부터 16승 15패 ERA 3.82로 점차 성적이 하락하기 시작, 1974년에는 '''21패'''로 다패왕을 차지하는 등 좋지않은 모습을 보이다가 1975년을 마지막으로 디트로이트를 떠나 뉴욕 메츠로 이적, 8승 13패 ERA 3.22 FIP 3.14의 성적을 거둔 뒤 시즌 후 은퇴, 이후 디트로이트에서 도넛 가게를 차리는 등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후 1978년 다시 복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2년간 2승 3패의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다.
통산 217승 191패, ERA 3.44 FIP 3.20, 195완투 41완봉, 3638.1이닝 2832삼진.
3. 여담
그가 디트로이트 시절 기록한 2679삼진은 아직도 아메리칸리그 좌완 최다 탈삼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여담으로 롤리치는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어렸을 때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다친 영향으로 좌투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글은 오른손으로 쓴다고.
[1] 참고로 깁슨은 전 시즌 월드시리즈 MVP였다![2] 또한 롤리치는 6회말 '''2개의 견제 아웃을 잡아냈다.'''(!)[3] '''특히 2차전에서는 투런홈런도 쳤다.'''[4] 단일 월드시리즈에서 3번의 완투를 기록한 좌완 투수는 역사 상 롤리치가 최초이며, 그가 거둔 3승은 현재까지 마지막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