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와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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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프랭크 와이즈'''
'''(Dennis Frank Wise)'''
생년월일
1966년 12월 16일
국적
[image] 잉글랜드(England)
출신지
켄싱턴(Kensington), 런던(London)
포지션
미드필더
신장
168cm
유스 경력
사우스햄튼 (1983–1985)
소속 클럽
윔블던 FC (1985~1990)
그레베스타즈 IF 임대 (1985)
'''첼시 FC''' (1990~2001)
레스터 시티 (2001~2002)
밀월 FC (2002~2005)
사우스햄튼 (2005~2006)
코벤트리 시티 (2006)
국가 대표
21경기 1골(잉글랜드)
지도자
밀월 FC 선수 겸 코치 (2003–2005)
사우스햄튼 감독 대행 (2005)
스윈든 타운 감독 (2006)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 (2006–2008)
뉴캐슬 유나이티드 축구 이사 (2008~2009)
'''첼시 FC 역대 주장'''
앤디 타운젠드
(1990~1993)

'''데니스 와이즈'''
'''(1993~2001)'''

마르셀 드사이
(2001~2004)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윔블던 시절
2.2. 첼시 시절 : 첼시의 위대한 캡틴
2.3. 레스터 시티 시절
2.4. 말년
2.5. 국가 대표 경력
3. 감독/스태프 경력
3.1. 스윈든 타운 시절
3.2.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3.3. 뉴캐슬 시절
3.4. 이후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5. 여담


1. 소개


데니스 와이즈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다. 그는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첼시에서 활약했다. 그는 신장은 작았지만 날렵한 움직임과 탁월한 축구 지능, 그리고 왕성한 체력을 발판으로 삼아 첼시가 오랫동안 중상위권 전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줬고 유럽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게 했다. 2004년 이후 로만의 첼시에 익숙한 국내 첼시 팬들에겐 낮선 인물이겠지만,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첼시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 대단했던 그는 감독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업적을 쌓지 못했고 뉴캐슬의 이사로 부임한 후에는 뉴캐슬 팬들로부터 팀을 망친 역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위대한 선수는 위대한 감독이 되기 어렵다는 속설은 그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만 것이다.

2. 선수 경력



2.1. 윔블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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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는 1983년 17살의 나이로 사우스햄튼 유스팀에 입단했다. 그러나 2년 뒤 그를 알아보고 데려온 로리 맥메네미 감독이 경질되자, 그는 팀 내에서 입지가 좁아졌고 결국 1985년 3월 28일에 윔블던으로 이적했다. 당시 윔블던의 감독이었던 데이브 바셋은 와이즈의 진가를 알아봤지만 그에게 풍부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1985년 여름에 스웨덴의 논-리그 클럽인 Grebbestads IF으로 임대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10경기 동안 5골을 넣은 후 1986년 1월에 팀으로 돌아왔다.
이후 와이즈는 반 시즌 동안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이 1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그의 첫번째 1부리그 시즌인 1986-87 시즌, 와이즈는 27경기 동안 4골을 넣었고 팀은 6위를 기록하며 잔류에 성공했다. 그는 곧 팀 동료들과 함께 "크레이지 갱"이란 별칭을 얻었다. 윔블던 선수들은 상대에게 거친 파울을 서슴지 않고 별에 별 반칙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와이즈가 소속된 윔블던은 1988년에 FA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여기에는 와이즈의 공헌이 컸다. 그는 8강전에서 왓포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팀을 4강에 진출시켰고 4강전에선 루튼 타운을 상대로 페널티킥을 넣고 몇 분 후엔 필드골을 기록, 멀티골을 넣으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FA컵 결승전에서, 와이즈는 전력상 절대 우위로 평가받는 리버풀을 상대로 탁월한 경기려을 선보였고 동료 선수인 로우리 산체스에게 결정적인 크로스를 올려 결승골에 견인, 마침내 윔블던이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눈여겨본 첼시는 1990년 6월 3일 와이즈를 16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2.2. 첼시 시절 : '''첼시의 위대한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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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1 시즌, 첼시는 11위를 기록했다. 이때 와이즈는 44경기 13골을 넣으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1991-92 시즌, 윔블던 시절 그의 팀 동료였던 비니 존스가 첼시로 이적했다. 와이즈는 비니 존스가 수비에 전념하며 뒷바라지를 하는 동안 전방으로 치고나가 공격을 이끌며 골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와이즈는 이 시즌에 14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첼시 선수들 중 가장 많은 골기록이었다. 또한 그는 1992년 2월 1일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2:1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승리는 첼시가 1935년 이래 안필드에서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다.
1993년 첼시의 주장이었던 앤디 타운젠트가 팀을 떠나자, 당시 첼시 감독이었던 글랜 호들은 와이즈를 주장으로 임명했다. 이 결정은 글랜 호들이 가장 잘한 결정으로 꼽힌다. 1993-94 시즌, 첼시는 실망스럽게도 14위에 그쳤지만 와이즈는 탁월한 경기력을 선보였고 팀을 24년 만에 FA컵 결승전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첼시는 결승전에서 맨유에게 4: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1994-95 시즌은 와이즈에게 제대로 시련이 닥쳐온 때였다. 1994년 8월 27일, 와이즈는 첼시가 리즈에게 2:0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리그 첫번째 골을 넣었고 첼시는 그의 골에 힘입어 경기를 3:2로 뒤집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1994년 9월 10일, 그는 뉴캐슬과의 경기 도중 심한 욕설을 내뱉는 바람에 퇴장을 당했고 결국 팀은 4:2로 패배했다. 또한 그는 UEFA 컵 위너스컵 1라운드에서 체코의 명문 클럽인 빅토리아 지슈코프(Viktoria Žižkov)를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1골을 기록했지만, 첼시는 4:2로 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1995년 3월에는 런던의 택시 기사를 폭행한 죄로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야 했고 치료비로 965 파운드, 피해보상비로 169 파운드, 그리고 100파운드의 정신피해 보상비를 피해자에게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3개월 감옥형은 나중에 취소되었다.
하지만 그후 와이즈는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드러냈다. 그는 주장으로서 팀을 잘 이끌었고 1997년 FA컵 결승전에서 미들즈브러를 2:0으로 격파하고 첼시에게 팀 창단 이래 2번째 FA 우승컵을 안겼다. 또한 와이즈는 1997-98 시즌에 리그 컵을 우승했고 UEFA 컵 위너스 컵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또한 1998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UEFA 슈퍼컵에서 거스 포옛의 선제골을 지켜내는 데 크게 기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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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UEFA 슈퍼컵 우승 후 지안프랑코 졸라(우)와 함께 기뻐하고 있는 와이즈
와이즈는 1998-99 시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팀을 리그 3위로 이끌어내어 챔피언스리그로 진출시켰다. 다만 와이즈는 이 시기에 컵 위너스 컵에서 레알 마요르카의 수비수 엘나 마첼로의 팔을 물었다는 이유로 3경기 출장정지 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UEFA는 그의 징계를 취소했다. 또한 그는 경기 도중에 온갖 반칙을 저질러 징계를 많이 받는 바람에 겨우 15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다.
1999-2000 시즌은 첼시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는 시기였다.[2] 와이즈는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맞붙은 라트비아의 축구 클럽 소코토 FC를 상대로 홈에서 3:0 승리, 원정에서 0:0 무승부를 이끌어내어 팀을 조별 예선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1999년 10월 20일, 그는 갈라타사라이와의 경기에 교체 투입되었고 첼시의 4번째 골을 기록하며 5:0 대승에 힘을 보탰다. 또한 와이즈는 AC밀란과의 산 시로 원정에서 '''20세기 최고의 골'''로 선정될 정도로 인상적인 골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2월, 그의 성질머리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는 윔블던과의 FA컵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둔 뒤 터널에서 상대팀 선수인 캐니 커닝햄과 언쟁을 벌이고 어깨를 밀어버린 바람에 7500파운드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하지만 와이즈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팀을 다시 한번 FA컵 결승에 진출시켰고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로베르토 디 마테오의 골을 지켜내며 1:0 승리를 거두며 다시 한 번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2000년에 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한 클라우디우 라니에리는 와이즈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와이즈를 로테이션 자원으로 기용했고 2001년 6월 25일에 와이즈를 16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받으며 레스터 시티로 보냈다. 와이즈는 첼시에서 11년간 뛰면서 445경기에 출전하여 76골을 기록했다. 그의 출전 기록은 첼시 역사상 4번째로 많은 횟수였다.

2.3. 레스터 시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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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의 레스터에서의 선수 생활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의 명예는 논란에 휩쓸려 손상되었다. 그는 겨우 17경기에만 출장하여 리버풀 상대로 1골을 넣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2002년 8월 20일 핀란드 투어 도중 팀 동료인 칼럼 데이비슨과 언쟁을 벌이다가 데이비슨의 코와 턱을 박살내는(...) 바람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그해 8월 2일, 레스터는 와이즈가 심각한 위법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그를 방출했다. 이에 와이즈는 FA와 접촉했고 구단의 결정에 대해 항소했다. 풋볼 리그 징계 위원회는 와이즈가 레스터로부터 심한 처벌을 받았다는 입장을 밝히고 그를 즉시 복귀시키고 2주간 밀린 급료를 그에게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구단은 즉각 항소했고 9월 18일 레스터는 와이즈와의 법정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와이즈의 구단 복귀 결정을 취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2.4. 말년


레스터에서 쫓겨난 와이즈는 2002년 9월 24일 밀월과 계약을 맺었고 2003년에 선수 겸 코치로서 일하게 되었다. 밀월은 2004년에 FA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결승전에서 맨유에게 3:0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맨유는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기 때문에, 밀월은 FA컵 준우승팀의 자격으로 UEFA 컵 진출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밀월은 UEFA컵 예선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와이즈는 2004-05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다. 와이즈는 2005년 6월 27일 사우스햄튼과 자유계약을 체결했고 팀에서 12경기를 뛰었다. 그러다가 당시 사우스햄튼 감독이었던 해리 레드냅이 사임하자, 보드진은 그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조치로 끝났고 조지 버리가 새 감독으로 지명되자, 와이즈는 12월 26일에 사우스햄튼을 떠났다. 그후 와이즈는 코벤트리 시티로 2006년 1월 19일에 이적한 후 그곳에서 코치 교육을 받다가 5월 9일에 은퇴를 선언했다.

2.5. 국가 대표 경력


와이즈는 1991년 5월 1일에 터키와의 유로 92 지역 예선전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그는 이 날 경기의 유일한 골을 넣어 잉글랜드의 승리를 이끌었다. 와이즈는 1996년 유로피언 챔피언십의 잉글랜드 최종 명단에 포함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잉글랜드 감독 테리 베너블스는 그를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와이즈는 첼시가 1998 풋볼 리그컵과 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지만, 글랜 호들 잉글랜드 감독은 역시 그를 1998 월드컵 스쿼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렇듯 국대 감독들이 그를 계속 명단에서 제외시킨 까닭은 그의 성질머리때문이었다.
와이즈는 1999년에야 잉글랜드 팀에 합류했다. 그는 2000년 2월 23일 아르헨티나와의 웸블리에서의 친선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였고 팀은 0:0으로 비겼다. 와이즈는 유로 2000을 대비하기 위한 친선경기 4경기에서 3경기에 출전했고 마침내 케빈 키언 감독의 인정을 받고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0년 6월 12일, 그는 유로 조별 예선 1차전에서 스티븐 맥마나만이 교체된 뒤 교체선수로서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이날 포르투갈에게 3:2로 패하고 말았다. 예선 2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다행히 1:0 승리를 거두었고 루마니아와의 3차전에서는 와이즈가 좋은 활약을 선보여 팀의 우세를 이끌었지만 도중에 닉 밤비와 교체되고 말았고 잉글랜드는 3:2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결국 잉글랜드는 조별 예선에서 허무하게 떨어지고 만다.
유로 2000이 끝난 뒤, 와이즈는 프랑스와의 친선 원정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90분을 소화했고 팀은 1:1로 비겼다. 이후 그는 2000년 10월 11일 핀란드와의 월드컵 지역 예선 경기에 출전하여 0:0 무승부라는 결과를 받아든 뒤 더 이상 국가대표로 소집되지 못했다.

3. 감독/스태프 경력



3.1. 스윈든 타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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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2일, 와이즈는 4부리그 팀인 스윈든 타운의 감독으로서 3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첫 7경기에서 6경기를 이기는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팀을 1위로 올렸고 이 공적으로 9월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던 10월 24일, 그는 15경기에서 31 승점을 기록하며 3위를 기록하고 있던 도중 느닷없이 팀을 떠나 리즈 유나이티드로 합류했다.

3.2.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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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와이즈는 그해 9월부터 리즈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에 휩싸여 있었다. 리즈에 새로 부임한 켄 베이츠 회장이 와이즈의 첼시 시절 구단주로 와이즈와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에 스윈든 보드진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와이즈와 그의 수석코치 거스 포옛이 리즈와 협상하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측의 대화는 보상금 문제로 10월 23일에 중단되었고 스윈든은 리즈와 협상하는 것을 불허했다. 이에 리즈가 스윈든에게 더 많은 보상금을 주겠다고 나섰고 이에 스윈든은 10월 24일에 두 사람이 팀을 떠나 리즈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에 두 사람은 곧바로 리즈로 가서 각각 감독과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와이즈는 리즈에 부임한 후 팬들로부터 많은 야유를 받았다. 그는 첼시의 레전드였고 첼시를 싫어하는 리즈 팬들은 그것을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와이즈는 자신이 첼시 선수였던 것은 아무 문제 될 것 없으며 리즈를 프리미어리그로 복귀시키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리즈에서의 감독 데뷔전에선 사우스앤드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내 부진에 휩싸였다. 리즈는 단 한 경기에서 승점을 획득했을 뿐 잔여 경기에서 모조리 패하는 바람에 결국 3부 리그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켄 베이츠 구단주는 와이즈를 경질하라는 주장을 묵살하고 그에게 2007-08 시즌 지휘권을 맡겼다.
리즈는 3부리그에서의 첫 7경기를 모조리 승리하며 완벽하게 출발했지만 2007년 10월 29일 포옛이 느닷없이 토트넘의 수석코치로 부임하는 바람에 팀 분위기가 엉망으로 변했다. 그 대신 수석코치로 부임한 데이브 바셋 전 윔블던 감독(와이즈를 발탁했던 바로 그 감독이다.)은 포옛과는 달리 와이즈와 좋은 파트너십을 보이지 못했고 리즈는 하락세로 접어들고 말았다. 리즈는 박싱 데이에서 1위를 유지했지만 이후 주전 선수들이 혹사 여파로 경기력이 저하되는 바람에 3위로 떨어져서 승격 여부가 불투명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와이즌는 2008년 1월 26일 루튼 타운과의 경기에서 1:1로 비긴 후 이틀 뒤 뉴캐슬로 갑자기 이적했다. 뉴캐슬 측은 와이즈를 축구 이사로 삼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3.3. 뉴캐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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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는 뉴캐슬에서 축구 이사(Football Director)로 부임한 뒤 이적, 스카우팅, 그리고 유소년 육성을 맡았다. 당시 뉴캐슬에 새로 부임한 마이크 애슐리 구단주는 샘 알라다이스를 경질한 뒤 케빈 키건을 감독으로 선임했고, 키건을 최우선적으로 보필할 인물이라며 와이즈를 풋볼 디렉터에 앉혔다.
그러나 와이즈의 풋볼 디렉터 선임은 와이즈와 키건, 뉴캐슬 모두에게 재앙이 되었다. 키건이 팀을 강등에서 구해낸 후, 애슐리 구단주는 뉴캐슬에 유럽식의 구단 운영을 도입해 감독에게는 전략전술과 선수단 관리만을 맡긴 채 선수 이적을 담당하는 별도의 인물을 둬 감독의 권한을 축소시키고자 했다. 감독으로 두 차례의 준우승을 이끌었던 뉴캐슬의 레전드인 데다 오랜 영연방에서의 감독 생활로 감독의 전권 행사에 익숙한 키건이 크게 반발했던 것은 불문가지.
예상대로 키건과 와이즈는 선수 영입 건으로 극심한 대립을 시작했다. 리그에서 검증된 영연방 선수를 원한 키건과 달리, 와이즈는 대륙에서 선수를 수급한 것. 와이즈가 주도하여 영입한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호나스 구티에레스, 나초 곤살레스 등은 모두 라 리가 출신으로, 특히 키건은 와이즈가 '''유투브 영상만 보고''' 영입을 결정한 나초 곤살레스 영입을 결사반대했지만 와이즈는 영입을 강행하였다.[3] 결국 2008-09 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끝나자마자 키건은 자진사임하고 말았고, 나가면서 구단에 £10m 상당의 소송을 걸며 팀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다. 팬들의 지지를 받던 키건을 몰아낸 원흉으로 지목받던 와이즈는 뉴캐슬 팬들의 거센 비난에 시달리다 2009년 4월 사임하였고, 끝없이 표류하던 뉴캐슬은 한 달 뒤 강등당하고 말았다.

3.4. 이후


이후 와이즈는 몇년 간 야인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2011년에 첼시의 이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1년 후, 그는 이사직에서 사임하고 축구계를 완전히 떠났다.

4. 수상



4.1. 클럽


1. 윔블던
FA 컵 우승 : 1988년
2. 첼시
UEFA 위너스컵 우승 : 1998년
UEFA 슈퍼컵 우승 : 1998년
FA컵 우승 : 1997년, 2000년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 2000년
3. 밀월
FA컵 결승전 진출 : 2004년

4.2. 개인


첼시 올해의 선수 수상 : 1997-98 시즌, 1999-2000 시즌
앨런 헤데커 트로피 수상 : 1998년

5. 여담


앞서, 서술되었듯 플레이 스타일 만큼이나 성격 또한 굉장히 거칠며 터프가이(?)인데 '''첼시의 레전드 수비수이자 주장''' 이었던 존 테리를 갱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존 테리가 데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 보너스를 지급 받았는데 바로 명품 차를 구입하여 훈련장으로 끌고 오자 와이즈가 멱살을 움켜쥐고는 “네가 뭐라도 되냐?” 라며 당장 차 갖다팔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겁 먹은 존 테리는 바로 차를 환불했다고 한다. - 당시 주장이던 와이즈 딴에는 재능도 남다른 유망주가 어린 나이에 겉멋 들까봐 따끔하게 훈계를 하긴 했어도 나중에는 테리를 친 동생마냥 옆에서 많이 챙겨주었다고 한다. 존 테리 역시 와이즈의 그 말 한마디에 자신의 선수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며 인터뷰에서 감사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1] 재밌게도 2017-2018시즌까지 첼시가 대륙대회에서 거둔 우승은 이 시절의 컵 위너스 컵, 11-12시즌의 UCL우승, 12-13시즌과 18-19시즌의 유로파리그 우승 이렇게 딱 4개 뿐인데, UEFA 슈퍼컵을 우승한 것은 1998년이 유일하다.[2] 첼시가 자국 1부리그를 처음 우승한 1955년에는 리그 챔피언으로 초청받았지만 프랑스 놈들이 만든 그런 듣보잡 대회를 출전하는 것은 축구 종주국의 위상을 깎는 것이니 출전하지 말라는 FA의 권고에 따라 불참을 선언한 이력이 있다..[3] 콜로치니와 호나스가 장기적으로 팀에 크게 기여한 것과 달리, 와이즈가 밀어붙인 나초 곤살레스는 뉴캐슬에서 단 두 경기만 출장한 채 원 소속팀 발렌시아 CF로 돌아갔고, 발렌시아에서도 한 경기도 뛰지 못한 끝에 결국 고국 우루과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