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안 예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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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도리안 예이츠 (Dorian Yates)
'''출생'''
1962년 4월 19일
'''국적'''
영국 [image]
'''신장'''
178cm
'''체중'''
110~125kg (대회)
132~141kg (오프시즌)[1]
'''미스터 올림피아'''
6회
1. 개요
2. 커리어
3. 트레이닝 스타일


1. 개요


'''The Shadow'''
1990년대를 지배했던 전설적인 보디빌더. 미스터 올림피아 6회 수상자이다. [2] 이러한 대단한 수상 경력뿐만 아니라 그가 가져온 보디빌딩계의 변화나 트레이닝 스타일의 영향력으로 보디빌딩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다.

2. 커리어


영국 출신의 보디빌더로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보냈으며 13세 때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렸을 때 방황을 많이 해서 소년원을 갔다 오기도 할 만큼 문제아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원 이후로 정신을 차리고 18세에 보디빌딩에 입문, 트레이닝 시작 5년 만에 브리티시 챔피언쉽을 우승하면서 아마추어 무대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후 1990년 나이트 오브 챔피언스[3]에서 2위로 수상하면서 프로 데뷔를 하게 된다. 이듬해인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 커리어를 쌓아 같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올림피아 대회에 입성, 당시 챔피언이던 리 헤이니가 역대 최다인 8번째 우승 기록을 쌓는 것에 밀렸지만 첫 대회를 2위로 마쳤다. 리 헤이니가 은퇴한 1992년 마침내 올림피아 1위로 우승하면서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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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짜 도리안 예이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1993년의 두 번째 올림피아 우승이었다. 위 사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1년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벌크업을 한 것. 특히 그를 상징하는 '어마어마한 등'이 이 때부터 시작됐다. 물론 약물[4]의 도움을 받았겠으나 정상급 보디빌더가 1년 사이 저 정도 벌크업을 이룸은 굉장한 것이었고, 당연히 이런 '괴물'이 돼서 돌아온 도리안 예이츠는 보디빌딩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예이츠가 선보인 '거대함'은 보디빌딩계에 변화를 가져와 이전의 그리스 조각상 같은 체형이 주류이던 무대가 흡사 헐크를 보는 듯한 괴물 같은 거대한 체형으로 가득한 무대로 바뀌었다. 6-70년대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90, 00년대 로니 콜먼을 비교하면 콜먼이 10cm나 신장이 작음에도 대회 무게는 30kg이 더 나갔다.[5]
1994년에는 훈련 도중 그를 커리어 내내 괴롭히는 이두근 부상을 당한다.[6] 그러나 부상을 극복하고 3연속 올림피아 타이틀을 지켜내며 이후 1997년까지 무려 6회 연속 올림피아의 왕좌를 지켜 역대 최고의 보디빌더로 손 꼽힐 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이두근 부상과 1997년 대회를 앞두고 당한 삼두근 부상으로 1997년 올림피아 수상 후 은퇴를 결정했다.[7] 35세라는 보디빌더로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했지만 선수 시절 6회 올림피아 포함 프로 무대 우승 기록 총 15번을 거두었다.
6번의 미스터 올림피아 챔피언이 되는 동안 그에게 팬들이 붙여준 별명은 '''The Shadow'''이다. 그는 대회가 끝나면 상금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가 훈련에만 매진했는데 인터뷰도 하지 않았고 스폰서도 거절했다. 그림자처럼 사라져서 운동에만 몰두하다 시합 당일에 엄청난 모습으로 모든 경쟁자를 압도하는 모습에 그런 별명이 생긴것이다.

그의 최근(2019년) 근황, 스테로이드의 영향으로 나이가 들어서 인지 전성기에 비해 엄청나게 근육이 빠졌다.

3. 트레이닝 스타일


커리어도 커리어지만 그의 독특한 운동법 또한 보디빌딩 역사에 그의 이름을 새기게 된 요인이다. 이러한 운동법들은 그가 창시자는 아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정상에 오른 선수는 예이츠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고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고강도 훈련(High Intensity Training)으로, 최대한 무거운 중량을 6-8회 횟수로 세트를 끝낸 뒤, 짧은 시간의 휴식 후 다음 세트로 돌입하는 방식이다. 또한 선피로 훈련(Pre-exhaust Training)이라 불리는 방식을 활용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적인 트레이닝이 쌩쌩한 상태에서 고중량 복합 운동 후 고립 운동으로 이어지는 구성인 반면, 이 훈련법은 고립 운동 후 복합 운동으로 넘어가 목표 부위를 공략하는 반대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머신 운동같이 타겟 부위의 집중이 더 용이한 기구를 사용하여 미리 공략한 뒤 고중량 프리웨이트로 넘어가 이미 지친 근육의 자극을 최대화시키는 식.
이외에도 그가 애용한 예이츠 로우라 불리는 바벨 로우의 변형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등운동에 자리하는 운동이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빠른 은퇴로 이어진 이두근 부상이 바로 이 예이츠 로우 도중 당한 부상이다.[8]

[1] 오프시즌과 대회 시기 때 체중 편차가 굉장히 심한데 이는 그가 어마어마한 강도의 다이어트를 수행하고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그는 6주 전에 자신의 바디프로필을 공개하곤 했는데 대다수의 전문가와 팬들은 과하게 다이어트를 진행하지 않고 엄청난 사이즈를 장착한 이때 모습으로 대회에 나오기를 바랬다.[2] 8회 리 헤이니, 로니 콜먼, 7회 아놀드 슈워제네거, 필 히스에 이어 2020년기준 역대 4위다.[3] 現 뉴욕 프로[4]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성장호르몬인슐린을 투여하는 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팔룸보이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5]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아놀드는 현대 보디빌딩이 아름다운 체형이 아닌, 그저 사이즈 경쟁이나 하는 대회로 전락했다며 까기도 했었다. 특히 이러한 변화의 원천인 약물의 발전이 역효과로 선수들의 내장 근육까지 키워 배를 튀어나오게 하는데, 체형의 아름다움을 크게 해치는 요소라고 비판했다.[6] 이 때문에 이후 등이 역대 최고란 말을 듣는 선수이면서도 등 운동의 필수 보조근인 이두근이 최대 약점이 되었다. 조금 더 설명하면 그는 바벨 로우를 역그립으로 하기를 즐겼는데, 당연하게도 이두에 부담이 간다. 거기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광활한 광배근을 위해 어마어마한 중량을 쳐댔으니..[7] 하지만 이 때 수상은 순전히 도리안 예이츠라는 이름빨로 우승한 것이라 판정 논란이 끓이지 않았다. 팔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해서 몸의 벌크가 빠져 보이고, 무엇보다 오른팔 이두근 삼두근 부상과 약물 사용의 부작용인지 스캇 스타이너 마냥 근육이 녹아내려 오른팔이 흉할 정도로 꺼졌다. 이때 마지막 우승을 놓고 다퉜던 '나세르 엘 손바티'가 오히려 엄청난 사이즈를 영광스럽게 여겼던 도리안 예이츠를 압도하였으므로 관객들은 당연히 손바티가 올림피아에서 우승하리라 예상했으나, 이해할 수 없는 판정으로 2위에 그치고 말았다. 평론가들은 오른팔이 흉할 정도로 파여버린 도리안 예이츠의 97년 대회를 총평하며 탑 5에 든 것도 편파 판정이라고 가열차게 깠다. 단 손바티는 고학력자에 박식한 이미지와 달리 인터뷰도 매번 성의 없고 무례하게 하기 일쑤에다 여성을 특히 깔보고 다른 빌더들한테도 까칠한 태도로 일관해 올림피아 수뇌부에 단단히 찍힌 탓도 있다. 뭐 2019년에도 예이츠는 잘 살고 손바티는 사이즈의 욕심이 지나쳐 경구제 스테로이드 옥시를 통으로 복용하다 쓰러져 신장 투석을 받는 신세가 된 후 1년 뒤인 2013년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얄궂은 일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97년 올림피아 이후 주최측이 도리안 예이츠에게 은퇴를 권유했다고 한다.[8] 운동 자체가 특별히 위험성이 높다기보다는 부상 당시 예이츠처럼 언더핸드 그립으로 고중량을 칠 때 이두근이 크게 개입할 경우, 커다란 근육인 등이나 다룰 중량을 작은 근육인 이두근이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 것. 얼터너티브 그립 데드리프트에서도 무심코 팔을 사용하다가 언더그립 쪽 이두근에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