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슈테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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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6월 30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모라비아 돔슈테트(현재의 돔마소프)에서 맞붙은 전투. 오스트리아군이 대규모 수송부대를 이끌던 프로이센군을 급습해 승리를 거뒀고, 올로모우츠를 포위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보급을 받을 길이 요원해지자 모라비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2. 배경


1757년 12월 로스바흐 전투로이텐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협공당할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겨울 동안 휴식을 취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8년 봄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반 프로이센 연맹의 주동세력인 오스트리아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 뒤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전쟁에서 이탈하게 해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동력을 상실하기를 희망했다. 다만 1756년에는 보헤미아를 침공한데 반해, 이번 공세는 모라비아로 향했다. 1758년 5월,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모라비아의 수도 올로모우츠를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적을 가볍게 격파한 뒤 올로모우츠를 포위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콜린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오스트리아 구원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로스바흐와 로이텐에서 잇달아 대승을 거둔 것에 자신만만해져 있었기에 오히려 구원군이 와서 회전을 벌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로이텐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임한 로트링겐 공자 카를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에 오른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의도대로 따라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 콜린 전투의 영웅은 프로이센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소규모 기습전을 벌여 적을 소모시키기로 했다. 이때문에 프로이센군은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물자가 부족해졌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급물자 운송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해 단숨에 보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6월 21일 빌헬름 폰 모젤 대령의 지휘하에 조직된 대형 보급 수송대는 코젤과 나이세의 요새에서 출발했다. 이 수송대는 약 4,000대의 마차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818대는 탄약을 수송했다. 모젤 대령은 이 대규모 수송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9천여 명의 보병대와 1,100명의 기병대를 이끌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치텐 백작 한스 요아힘에게 추가 병력을 이끌고 이들과 합세할 것을 지시했다.
6월 26일, 모젤 대령은 계획대로 트로파우를 빠져나가 올로우모츠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섰다. 그가 이끄는 수송부대의 행렬은 45km에 달했다. 트로파우에서 올로모우츠로 호송하는 데 보통 6일 정도가 걸렸지만 도로 사정이 안 좋아서 행군 속도가 지연되었다. 한편 다운 백작은 이 대규모 수송부대를 전해듣자마자 이들을 격파하지 않으면 요새 함락을 피할 수 없으며 전황이 프로이센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요제프 폰 지스코비츠 장군에게 이들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모라비아의 패권을 둘러싼 양군의 충돌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6월 28일 아침,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은 오베르-군데르스도르프와 운터-군데르스도르프에 이르러 숲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후 그는 당시 그가 이끌고 있는 부대는 4개 보병대대, 1개의 용기병 연대, 1개의 후사르 연대, 소규모 포병부대 및 모라비아 수비대로, 총 6천 명이었다. 그는 지스코비츠 장군의 군대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당시 숲을 헤메고 있어서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게다가 치텐 백작이 이끄는 2만 명의 프로이센군이 근처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라우돈 남작은 단독으로 적과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6월 28일 낮에 군트라모비스로 진군하던 모젤의 수송대는 라우돈 남작의 오스트리아군에게 기습당했다. 라우돈 남작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후 적에게 사격을 가하며 분전했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단 후퇴했다. 모젤은 그들을 추격하려 했지만 기병 전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곧 중단한 뒤 하루종일 흩어진 보급마차들을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후 모젤은 뉴도르플 마을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치텐 백작의 지원 부대와 합세했다. 하지만 6월 29일에도 프로이센 수송대의 마차 절반이 아직 뉴도르플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텐 백작과 모젤은 수송부대를 재조립하는 데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야 했다.
1758년 6월 30일 아침, 지스코비츠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6천명이 돔슈테트에 도착했다. 그는 돔슈테트의 도로 양 측면에 우거진 숲에 병력을 배치한 후 직접 프로이센 호송부대를 정찰했다. 그무렵 치텐 백작은 마침내 호송부대를 모두 집결시킨 뒤 올로모우츠로 향한 여정을 재개했다. 오전 8시, 프로이센 수송부대의 선봉부대(후사르 190명, 기병 220명, 다수의 보병대)가 출발했다. 그 후 치텐과 모젤은 그들을 따라 돔슈테트로 진군했다. 수송대는 호위병들이 양쪽으로 진군하는 가운데 고갯길로 들어섰다.
오전 9시, 프로이센군 수송부대가 행진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지스코비츠 장군은 우익에 근위 보병대, 좌익에 할러 보병대, 그리고 중앙에 경기병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기병대는 최우익에 배치되었고 좌익 앞에 할러 보병대의 야전포병대가 배치되었다. 여기에 두 개의 숲 사이에 2개의 중포와 2개의 경포가 설치되었다. 크로코우 소령 휘하의 프로이센 보급부대 선봉대는 이런 준비를 한 오스트리아군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400대의 마차와 함께 돔슈테트 고개를 통과했다. 이때 지스코비츠의 군단이 갑자기 도로 남쪽의 숲이 우거진 고지에 나타나서 그들을 공격했다. 선봉대는 급히 적의 공세를 뿌리치고 재빨리 고개를 넘어서 고개 출입구의 안전한 지점에서 멈추고 치텐 백작의 본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현장에 도착한 치텐 백작은 대포알에 박힌 마차 잔해더미를 발견하고 적이 고개에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에 치텐 백작은 공세를 개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카를로비츠 장군 휘하의 근위 보병대대 및 절반의 테펠 보병 대대, 그리고 푸트카머 장군의 후사르 200명을 우익부대로 편성하고 오스트리아군 좌익부대와 맞붙게 했다. 그리고 남은 테펠 보병 대대와 기병대에게 최북단 산림지대를 공격하게 했으며, 400명의 치텐 후사르 기병대와 베르너 후사르 기병대에게 선봉부대에게 접근하게 했다.
처음에 프로이센 우익부대의 공격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숲속으로 침투하여 바라스딘 그렌저 기병대를 격퇴했다. 이때 비가 많이 와서 머스켓 총이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양측 병사들은 육탄전을 벌였다. 점차 오스트리아군 좌익부대는 총을 버리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적을 밀어낸 프로이센 우익부대는 재편성하려 했으나 갑자기 좌측면에서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역습을 받았다. 노우엔도르프 대령이 이끄는 이들 기병대는 적 보병대를 유린했고, 프로이센 척탄병들은 후방으로 피신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보급 마차로부터 분리되었다.
이에 치텐 백작은 돔슈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들을 수습한 뒤 라드 소령에게 이들의 지휘권을 위임한 뒤 좌익을 향해 말을 몰았다. 한편 프로이센군 좌익부대를 지휘한 라이히만 소령은 최북단 숲지대에서 오스트리아 기병대와 척탄병들의 합동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치텐 백작은 좌익으로 와서 이런 상황을 확인한 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보급 마차들이 있는 곳으로 병력을 철수시킨 뒤 마차들을 요새화하여 적의 공세로부터 최대한 버티기로 했다.
오전 11시 30분, 돔슈테트 방향에서 전투의 소음이 점점 커지는 걸 들은 라우돈 남작은 그의 군단과 함께 베른에서 출발했다. 그는 나르다시 후사르 부대와 비르켄펠트 후사르부대를 이끌고 뉴도르플 남서부로 진군해 치텐 백작의 군대를 향해 접근했다. 정오 무렵 돔슈테트에 도착한 라우돈 남작은 요새화된 수송 마차의 양측면을 경비하는 적 기병대를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기병대가 먼저 출격했고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적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요새화된 마차 호위를 맡은 푸트카머 소장의 기병대는 마차 앞에 반원형으로 군대를 배치하고 몰려오는 적과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
얼마 후, 라우돈 남작의 우익부대는 북동쪽으로 가로질러 지스코비츠 장군의 좌익부대와 연결되었다. 치텐 백작의 군단은 이제 주요 프로이센 군대와 격리되었고, 돔슈테트에도 닿지 못한 도로에 고정되어 있던 마차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포획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북, 서, 남쪽에서 요새화된 마차를 향해 진격했다. 사방에서 날아온 대포알들이 마차들과 충돌했고, 화약을 실은 마차 몇대가 폭발하면서 프로이센군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마차 운반인들은 마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트로파우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치텐 백작은 이에 맞서 슈메타우 기병대와 후사르 부대를 라우돈 남작의 좌익부대에게 보냈으나 이들의 공격은 곧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의해 격퇴되었고, 곧 라우돈 남작이 파견한 기병대에게 쫓겨 트로파우 쪽으로 퇴각했다.
한편 '요새'를 방어하는 프로이센 보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격전 끝에 '요새'에 침투하여 프로이센 보병대를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했다. 이때 치텐 백작 휘하에 있던 기병대가 오스트리아군의 훼방을 뚫고 퇴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치텐 백작에게는 오직 한 가지 선택지만 남아있었다. 즉, 보급부대를 버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트로파우 쪽으로 퇴각하는 것이었다. 치텐 백작이 곧 병사들을 수습해 퇴각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추격에 나섰으나 병사들이 지칠대로 지친데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더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곧 돌아왔다.
이렇게 치텐 백작은 전장을 떠났지만 몇 개의 프로이센 보병 대대는 여전히 돔슈테트 근처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스코비츠 장군은 그들을 향해 좌익부대를 투입했다. 프로이센군은 곧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고 대부분 살해당하거나 붙잡혔으며, 소수의 병사들만이 돔슈테트를 간신히 탈출하여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보급부대는 이제 파괴되어 오스트리아군의 먹잇감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3천대 이상의 마차를 포획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차들은 손상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라우돈 남작은 운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탄약을 폭파시킨 후 저녁에 군대를 베른으로 이동시켰다.
한편 안톤 폰 크로코우 소령 휘하의 프로이센 선봉 보급부대는 적의 공세로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온 프로이센 잔여병력과 250대의 마차를 이끌고 올루모우츠에 마침내 도착했다. 이리하여 프로이센의 대규모 수송부대가 운송할 예정이었던 마차 4,000대 중 250대 만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5. 결과


돔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58명의 장교와 2,328명의 병사가 죽거나 실종되었고 12개의 대포를 상실했으며 3천대 이상의 호송 마차를 상실했다. 또한 푸트카머 소장은 4명의 참모, 36명의 부사관, 1,450명의 부하들과 함께 포로 신세가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600명에 불과했다. 이 참담한 결과를 전해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깊은 충격에 빠졌고, 결국 올로모우츠 공성전을 중단하고 보헤미아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의 모라비아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