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바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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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11월 5일 작센 선제후령의 로스바흐 근교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의 압승으로 끝난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이 빛을 발휘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배경
1757년 6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아를 침공해 프라하를 포위했다가 프라하를 구하고자 달려온 적과 맞붙어 콜린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 포위를 풀고 작센으로 퇴각했고, 10만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며 슐레지엔 탈환에 나섰다. 여기에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으며, 프랑스군은 독일 서부의 하노버 공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다. 하노버 공국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지원병 파견을 요청했지만, 제코가 석자였던 대왕은 거절했고 오히려 하노버에 파견했던 일부 병력마저 귀환시켜야 했다.
이렇게되자 하노버 공국군은 브라운슈바이크, 헤센, 카셀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군의 공세를 피해 후방으로 후퇴했고,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7월 3일 엠덴을 함락하고 15일에는 카셀을 공략했으며 7월 16일에는 베저 강을 도하했다. 7월 25일, 하노버-브라운슈바이크-헤센-카셀 연합군은 하스텐벡에서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군 6만을 상대하는 연합군의 규모는 3만 5천에 불과했으며, 상대적으로 헐거운 좌익이 프랑스군에게 돌파당하는 바람에 결국 패퇴했다. 이 하스텐벡 전투에서 패한 하노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고, 프로이센은 하노버가 뚫리게 되면 본국이 프랑스군에게 노출될 위기에 몰렸다.
설상가상으로, 1757년 8월 75,000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을 전격 침공했다. 이에 동프로이센에 주둔한 프로이센군 2만 5천명이 그로스-야거스도르프에서 도하중이던 러시아군을 습격했으나 수적으로 너무 열세했던 터라 결국 패퇴했다.(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 뒤이어 9월 7일에는 26,000명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이 13,000명에 불과한 프로이센군을 모이에서 격파했다.(모이 전투) 이제 프로이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에게 삼면에서 협공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갑자기 본국으로 회군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군 총사령관 스테판 표드로비치 아프락신이 본래 조심스런 성격이라 겨울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대군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주둔시키는 걸 기피했다는 설, 이 시기부터 병세가 완연했던 옐리자베타 여제가 붕어한 후 차기 황제가 될 표트르 황태자의 친프로이센 성향을 고려했다는 설, 원정군 내부에 천연두가 돌아서 원정이 힘들었다는 설 등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한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러시아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여전히 강성한 상황이었고 프로이센군은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되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떻게든 전황을 뒤집을 결정적인 전투가 필요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향해 진군하기로 마음먹었다. 8월 31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의 드레스덴에서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보급마차까지 버려가며 군장을 획기적으로 줄인 후 13일 동안 170마일(270km)을 주파한다. 그러다가 9월 15일 작센 서부의 고타 마을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분견대를 잇달아 파견해 연합군을 도발했다. 하지만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쉽게 도발에 응하지 않고 소규모 병력만 파견해 프로이센의 분견대와 접전을 벌이면서 상대의 전의를 파악했다.
이렇게 프로이센군과 동맹군이 대치하고 있던 10월 16일, 오스트리아 별동대가 베를린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본대를 작센에 남겨두고 급히 일부 병력을 이끌고 베를린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 별동대를 역습해 10월 31일까지 추격전을 벌인 끝에 잘레 강 너머로 내쫓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11월 3일에 작센에 돌아와 본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그 사이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이 합류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2만 2천 명으로 4만 1천에 달하는 연합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러나 그는 수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전황을 뒤집기 위해 회전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
- 총사령관: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 요제프 프리드리히
- 프랑스군 사령관: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
- 병력: 프랑스군 30,200명, 오스트리아군 10,900명
- 대포: 프랑스군 33문, 오스트리아군 12문
3.2.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대왕
- 병력: 22,000명
- 대포: 79문
4. 전투 경과
4.1. 최초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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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11월 5일 아침, 프로이센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지휘하에 왼쪽에는 로스바흐, 오른쪽에는 베드라를 낀 능선에 배치되었다. 한편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은 11월 4일에 왼쪽에는 뮈첼른, 오른쪽에는 브란데로다를 낀 능선에 주둔했다. 연합군의 초소는 프로이센군의 진영을 전부 살필 수 있었으며 수적으로도 거의 2배에 달했기에 누가 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 요제프 프리드리히는 당장 공세를 감행하려 했지만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은 굳이 오스트리아를 위해 프랑스 장병들을 대거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핑계를 대며 즉각적인 공세를 거부했다. 이때문에 연합군은 11월 5일까지 진영을 철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비즈 공이 마침내 전투에 응하기로 하자, 요제프 프리드리히 빌헬름 장군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수립했다. 먼저 프로이센군의 좌익 근처인 제우츠펠트로 진군해 라이할트스베르벤을 오른쪽에 두고 페트스타트를 왼쪽에 둔 상태로 북쪽을 향해 전투 대형을 펼친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과 정면에서 맞붙는 사이, 프랑스군이 적의 측면 근처를 따라 진군해 프로이센군의 좌익을 공격한다. 이러한 작전에 따라 연합군이 이동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스바흐의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적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는 처음에는 적이 아군의 보급창고가 있는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정찰을 위해 파견되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가우디 장군은 적의 종대가 제우츠펠트로부터 동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적의 목표가 남쪽이 아니라는 것을 알렸다. 이후 적의 기병과 보병대가 페트스타트 근교에 나타난 것을 확인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이 아군의 측면을 공략하기 위해 이동 중이라는 걸 확인했다. 이에 그는 적을 유인하기 위한 비상한 전술을 전개한다.
4.2. 프로이센군의 '후퇴'와 연합군의 추격
11월 5일 정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군에 주둔지를 철거하고 보병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 전투 대형을 재편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와 함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의 기병대를 파견해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의 이동을 방해하게 했다. 적이 이동하는 걸 목격한 요제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연합군이 측면과 후방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 후퇴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추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로이센 기병대가 연합군의 이동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데다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호흡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의 진군 속도는 매우 더뎠고 대열이 매우 흐트러졌다. 그러는 사이, 프로이센군은 불과 30분만에 주둔지를 철거하고 빠른 속도로 이동해 로스바흐 인근에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주력군으로 하여금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는 연합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했다.
4.3. 함정에 걸린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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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군이 이미 로스바흐 인근에서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연합군은 오후 3시 즈음 전장에 도착했으나 미처 전투 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프로이센군의 대포 세례에 직면했다. 뒤이어 프로이센 보병대가 일제 사격을 개시해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때 연합군의 숫자는 비록 적보다 훨씬 많았지만 워낙 급박하게 달려온 터라 대열이 흐트러져 있었고 미처 전투 대형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어서 통제가 쉽게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프로이센 주력 부대는 연합군의 좌익 측면으로 비스듬하게 진군해 기습 공격을 가했다. 이 갑작스런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던 연합군은 경악했고, 좌익은 순식간에 궤멸되었다. 얼마 후, 자이틀리츠의 기병대가 동맹군의 우익을 급습해 순식간에 패주시켰다.
이런 상항에서, 프랑스군은 급한 대로 하나, 또는 두개로 구성된 전열을 짜서 자신들을 몰아붙이는 적과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의 대포가 그런 그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이로 인해 동맹군의 진형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연합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전열을 짜기 위해 무의미한 시도를 했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한 터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투가 한 시간 30분 즈음 진행되었을 때, 연합군은 궤주하기 시작했다. 수비즈 공과 요제프 프리드리히 빌헬름 장군은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남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후방으로 도피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15분 동안 아직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적 잔여 부대 소탕전을 벌였다.
5. 결과
로스바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의 사상자는 5천 명이었으며 포로 역시 5천여 명에 달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의 피해는 500여 명에 불과했다. 이 패배로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프랑스군에게 전 국토가 짓밟힐 위기에 몰렸던 하노버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뒤 2주 후인 1757년 11월 28일 오스트리아군이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브레슬라우 전투)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스바흐 전투의 피로를 풀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서둘러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였고 12월 5일에 로이텐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