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폰 지스코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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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제프 폰 지스코비츠(독일어: Joseph von Siskowitz, 1719년 7월 2일 ~ 1783년 12월 28일)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2. 일생
2.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요제프 폰 지스코비츠는 1719년 7월 2일 합스부르크 가문 치하 헝가리 왕국의 세게드(Szeged)시에서 부유한 시의원이였던 시슈코비치 언드라시(Siskovics András)와 셔러치 마리어(Saracs Mária) 부부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헝가리어로 시슈코비치 요제프(Siskovics József)이다. 요제프는 그 집안의 막내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초기인 1741년, 요제프는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해 새로 조직된 할러 보병대에 가담했다. 그러던 1742년 5월 말 라이프 대대에 가담한 그는 코시체, 레보차, 프레쇼프를 거쳐 디오세크에 주둔했다. 그해 7월 라이프 대대는 페테르베르딘으로 진군하던 중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병사들은 제복을 찢고 머스킷 총을 파괴했으며 장교들을 마구 사살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을 이끌던 카토치 대위가 살해되었고, 반란군은 시바하르자를 지나치며 주변 마을들을 약탈했다.
당시 인근에는 정규군이 없었기 때문에 안드라시 백작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이들과 맞붙어 격파했지만, 백작은 그 과정에서 전사했다. 이후 150명의 반군들이 군사재판에 끌려가 다수가 처형되고 나머지는 다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라이프 대대는 신병들과 함께 재조직되었고 토마스 폰 파프 중위가 이들을 이끌고 페테르베르딘에 도착했다. 당시 요제프의 이름은 이 라이프 대대에 속한 에타트 부대의 대위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번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1744년 봄, 할러 보병 2개 대대가 바이에른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그들은 10월 5일까지 진군을 계속해 치멜리스의 진영에 도착했다. 이후 1745년, 요제프가 복무하는 대대는 빈으로 파견되었다가 8월에 니콜라우스 요제프 에스테르하지의 군단에 배속되어 예게른도르프까지 진군했다. 예스테르하지의 군단이 프로이센군에게 격퇴되어 퇴각할 때, 할러 대대는 퇴로를 엄호했다. 이후 1745년 12월 15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휴전 협약이 체결된 후, 할러 대대는 페트르베르딘을 향해 진군했다. 이 당시 시스코비츠가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2월 19일에 소령으로 진급한 걸 보면 모종의 공적을 세운 듯하다.
할러 보병대는 페테르베르딘으로 진군하던 중 네덜란드 방면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새로운 명령을 접수했다. 이에 할러 대대는 1746년 4월 중순에 하셀트로 진군해 바트야니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10월 7일, 할러 보병대는 리에주와 후타인 사이의 자르 강 부근에 주둔해 적과 맞서 싸우면서 3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하는 피헤를 입었다. 이후 그들은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마스트레히트로 퇴각했다. 1747년 7월 2일 라우펠트 전투에 투입된 할러 보병대는 또다시 패전을 면치 못하고 마스트레히트로 퇴각했다가 11월에 프랑스-플랑드르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뫼즈강으로 보내졌다.
1748년, 할러 대대는 바티야니 장군의 군단에 배속되었다.이후 그들은 프랑스군의 플랑드르 침공에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10월에 보헤미아로 철수해 프라하 수비를 맡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막을 내렸고, 요제프는 1750년 12월 31에 소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753년 1월 15일, 요제프는 에르처조그 칼 보병대로 배속되었고 1756년 3월 15일 오스트리아 귀족으로 인정받아 남작 칭호를 수여받았다.
2.2. 7년 전쟁
1757년 6월 18일 콜린 전투에 참가한 요제프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군의 다섯 번에 걸친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 아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적의 마지막 공격 때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의 연대와 함께 해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처음으로 패배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요제프 휘하의 에르처조그 칼 보병대 전원에게 1인당 20듀카트 상당의 포상금을 지불했고 요제프를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11월 22일, 요제프는 브레슬라우 전투에 참가해 여단 하나를 지휘하여 아군의 승리에 다시 한 번 기여했다.
1758년 초 72개 척탄병 부대를 9개 대대로 결집시킨 척탄병 군단이 창설되었다. 요제프는 이 군단의 전반적인 지휘를 맡았고 돔슈테트 전투에서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과 함께 보급마차 4천대를 인솔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을 습격해 보급마차를 모조리 파괴함으로써 모라비아를 침략하여 모라비아의 수도 올로모우츠를 포위했던 프로이센군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후 그는 7월 6일에 호헨무트로 진군했지만 7월 1일부터 쏟아지는 비 때문에 많은 도로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면서 식량 배급을 전혀 받지 못하는 난관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병사들을 수습해 라우돈 남작과 합세했고, 이후 초르진에 집결한 척탄병 대대를 이끌고 보로흐라드크로 진군했다. 이후 그는 돔슈테트 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8월 1일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758년 10월 7일,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휘하 오스트리아군은 호크키르히로 진군했고 뒤이어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이 호크키르히 서쪽에 진을 쳤다. 10월 14일 새벽,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을 기습 공격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요제프는 호크키르히 전방에 배치된 프로이센 기지들을 습격해 호크키르히 공동묘지에서 격렬한 격투를 벌이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그는 겨울에야 회복되어 아르나우의 국경 경비를 담당한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1759년 다시 척탄병 부대의 지휘권을 맡은 그는 11월 20일 막센 전투에서 활약해 핀크 장군 휘하 프로이센군 14,000명이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후 요제프는 지난 2년간의 활약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했다.
1760년, 요제프는 총참모장에 임명되어 다운 백작에게 신임을 잃은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를 대신했다. 아울러 그는 1759년 레이시가 창설했던 예거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후 7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운 원수의 참모관으로 활동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전쟁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1764년에는 트란실베니아에서 군사-정치 위원회에 근무하면서 트란실바니아 총독 아돌프 니콜라스 폰 부커우를 보좌했고, 부커우가 1764년 5월 1일에 사망한 후에는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를 보좌했다. 당시 부커우와 하디크는 그렌저 경기병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헝가리 내 소수민족이었던 세케이인들을 제국의 통치에 귀속시키려 했다. 그러자 그동안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던 그들은 격렬하게 반발해 1763년 겨울 반란을 일으켰다. 지스코비츠는 이들을 억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스코비츠는 병사들에게 무장한 반란군만 제압하고 가급적 사로잡아 군사 재판에 넘기라고 지시했지만, 병사들은 1764년 1월 7일 세케이군의 진영을 습격했을 때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4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에 많은 세케이인들은 근처의 몰다비아로 도피했다.
2.3. 이후의 경력
1765년 10월 15일, 요제프는 마리아 테레지아 지휘관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1767년 1월 25일, 그는 오스트리아군 대장에 진급했고 1769년에 국경 일대의 수비군 총감독관으로 이명되어 그렌저 연대의 재편성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쟁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빈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1775년 10월 13일, 그는 그렌저 연대의 재편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갈리시아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779년 4월 30일, 요제프는 보헤미아의 군사령관이 되어 프라하에 자리를 잡았고 1783년 12월 28일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