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회

 

1. 후한말의 인물
2. 촉한의 인물


1. 후한말의 인물



童恢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자는 한종(漢宗). 동중옥[1]의 아들.
낭야 고막 사람으로 어릴 때 주군의 관리가 되었으며, 사도 양사가 동회가 청렴하고 공평하게 법을 집행한다고 해서 벽소되었다. 양사가 면직되자 속관은 사표를 내고 떠났지만 동회는 양사의 탄핵에 대해 소송했으며, 양사의 탄핵이 멈추면서 속관이 양사에게 돌아가고 동회는 지팡이를 짚고 떠났으므로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겼다.
삼공부에 벽소되었다가 불기령이 되었으며, 민간에서 호랑이에게 해를 당하자 호랑이 2마리를 생포했으며, 동회는 법에 따르면 살인한 자는 죽는다면서 만일 살인한 자라면 마땅히 머리를 숙이고 죄를 자복할 것이고, 스스로 생각해서 아니라면 마땅히 큰소리치며 원통하다고 할 것이라고 했다.
호랑이 한 마리가 머리를 숙이며 눈을 감는 얼굴에 두려워하는 것 같으므로 곧 죽였으며, 한 마리는 동회를 보고 으르렁거리자 놓아주고 이에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칭송했다. 청주에서 동회는 우수한 치적을 올렸으며, 동회는 단양태수에 올랐다가 갑자기 병사했다.

2. 촉한의 인물


董恢
생몰년도 미상
양양사람으로 자는 휴서(休緒), 동윤전과 동윤전 주석 양양기에 행적이 전한다.
동윤은 일찍이 상서령 비의, 중전군(中典軍) 호제(胡濟) 등과 함께 밖으로 나가 연회를 열어 즐기기로 했었다. 나갈 수레가 이미 준비되었으므로 낭중인 양양 사람 동회(董恢)가 동윤에게 인사를 하여 경의를 표했다. 동회는 나이가 어리고 관직이 낮았는데, 동윤이 나가는 것을 멈추고 그를 접대하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며 떠날 것을 청했지만, 동윤은 허락하지 않고 말했다.
"본래 내가 나온 목적은 좋아하는 선비들과 환담하기 위해서였소. 지금 그대는 벌써 자신을 굽히고 쌓아놓은 것을 말하려고 했소. 이 말을 버렸으니 그 연회에 가는 것은 적합하지 못한 일이오. "
그리고 말을 수레에서 풀도록 명령했다. 비의 등도 수레를 멈추고 가지 않았다. 동윤이 정직함을 지키고 아래 선비들에게 겸허하게 대하는 것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유비가 입촉을 한 뒤에, 선신중랑(宣信中郎)에 임명되어 비의(費禕)의 부사가 되어 오나라에 함께 갔다. 손권이 잔치를 베풀었다. 손권은 술에 대취해 비의에게 물었다.
“양의(楊儀)와 위연(魏延)은 양떼나 몰아야 할 더벅머리 소인배들이오. 비록 새가 울고 개가 짖는 알량한 재주로 한번 시무에 도움이 되었다지만 이미 임무를 맡은 지 오래되어 세력이 가볍지 않게 되었소. 만약 하루아침에 제갈량이 없어진다면 그들 사이에서 반드시 화란이 일 것이오. 제군은 어리석게도 이를 미리 방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소. 이를 어찌 후손에게 정권을 물려줄 올바른 책모라 할 수 있겠소?”
비의가 몹시 놀라 즉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사방을 둘러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동회가 얼른 비의를 주시하며 말했다.
"'양의위연이 협력하지 않는 것은 사적인 분노에서 기인된 것일 뿐으로 경포(黥布)와 한신(韓信)처럼 그들의 마음을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방금 강적을 소탕해 천하를 통일하려는데 공업을 달성하려면 재능 있는 자를 널리 임용해야만 합니다. 만약 후환을 예방하기 위해 이들을 임용하지 않으면 이는 오히려 장래에 대비하려다가 풍파를 일으켜 배를 부수게 되는 것이므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라고 신속히 대답하십시오."
손권은 이를 보고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제갈량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동회의 말을 옳게 여겼다. 동회가 오나라에서 돌아온 지 삼일이 못 돼서 그를 불러 승상부속(丞相府屬)으로 삼았다. 동회는 나중에 승진해 파군태수(巴郡太守)가 되었다.
배송지가 양양기를 동윤전에 인용하고 살펴보고는『한진춘추漢晉春秋』 또한 이러한 말이 실려있지만, 동회(董恢)가 가르쳐준 바를 이르고 있지 않고, 말 또한 조금 다르니, 이 두 서(二書) 모두 습착치에서 나왔으나 이처럼 동일하지 않다고 했다. 또 (동윤전) 본전(本傳)에서 이르길, "동회의 나이가 어려 관직이 미미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만약 이미 승상부(丞相府)에 속해있었고, 나아가서는 파군태수(巴郡太守)에 이르렀던 즉, 관직이 미미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습착치의 말은 의심스럽게 되어 살펴보지 않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자치통감도 비의가 손권의 말에 대답한 것은 동회의 조언이 덕분이 아니라 비의 스스로의 말이었다고 적고 있다.

[1] 童仲玉, 기근이 일어나자 재산으로 이를 구제했으며, 고향 사람 100명이 살아남았고 동중옥은 일찍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