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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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한나라 한고제(漢高帝) 시대의 장군이자, 왕. '''최고의 지휘관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불세출의 명장(名將)'''으로, 본래 하찮은 시정잡배에 지나지 않았지만 뒤늦게 유방(劉邦)에게 합류하여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한(漢)의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백전백승의 천재 전략가로서 무수한 전공을 세워 제(齊)왕과 초(楚)왕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 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임으로써,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농부들도 나라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농사를 그치고 쟁기를 내버린 채 아름다운 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귀를 기울여 명령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사기(史記)》 회음후 열전(淮陰侯列傳)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 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이끌고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하여 기반을 마련하였고, 팽성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 속에서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3만의 별동대로 시작하여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6국을 멸망시켜 한(漢)나라의 유방이 초(楚)나라의 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 명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유방과 여후의 견제와 본인의 처세 문제가 겹치면서, 천수를 누린 장량과 소하와는 달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으며, '토사구팽'이라는 고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1]
그는 많은 표현과 말들을 만들어냈는데,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고 훗날 용서하고 선정을 베풀어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고, 또 아낙네로부터 받은 작은 은혜를 잊지 않고 후에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으며, 소하가 유방에게 그를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다. 또한 유방과의 대화에서 후세에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으며,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었다. 한편 병법의 최악의 수이자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전략적 전술 혹은 결사적 각오라는 의미로 재탄생시켰으며, 훗날 항우와의 마지막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을 나오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군주를 위해 큰 공을 쌓았으나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버려지는 토사구팽(兎死狗烹)까지.
2. 출신: 한의 왕족?
한신의 출생[2] 에 관해서 한(韓)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한신의 출생지인 회음현은 서주와 회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전국 시대 '''초나라'''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역사 소설 등을 쓰는 와중에 '''한신과 동명이인이었던 한왕 신'''이 이 한신으로 혼동되어 한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묘사하는 작가도 있었고, 이 영향으로 한신이 한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모두 그저 "한신은 회음현 사람이다."라고만 적혀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절대 한(韓)나라와 관련이 없다.
3. 생애
4. 평가
한신에겐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역경이 찾아왔으나 스스로 본인의 능력이 천하제일임을 알고 버티며 끝내 천하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야심과 그릇이 능력에 미치지 못해 기회가 왔을 때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기회를 움켜쥐지 못하고 남의 밑에 머무르기로 했으면서 남의 처우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치기 어린 어리광을 부리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어리광을 부린 끝에 점차 대우가 박해졌으나 그리될 일이었음을 모르고 자신의 능력대로만 대우받고 싶어 하다 일을 그르쳤다. 미래를 위해 가랑이 사이를 기던 인내심이 반만 남아있었더라도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4.1. 군사적 능력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 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임으로써,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신은 '''역대 최고의 군사지휘관 중 한 명'''[3] 으로서 그 화려한 군사적 재능으로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항우를 무너뜨리고 유방에게 천하통일의 위업을 안겨주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팽성대전의 참패 이후, 열악한 상황 속에서 제대로 된 정예병조차 아닌 오합지졸의 단 3만 병력을 이끌고 시작하여 수 년 만에 여섯 개의 나라를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 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고,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전투란 전투는 모조리 이겼다.''''''용병술로는 한신을 따라갈 이가 없소.'''
유방(劉邦)
기록상의 전공(戰功)과 초한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살펴보면 한신은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도 흔히 찾을 수 없는 '''전설적인 명장'''이다. 잡병 3만으로 시작해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6국(六國)을 멸망시키고, 당시 중국의 지배자였던 항우[4] 를 참살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점만 하더라도 한신의 군사적 능력과 전공 및 업적에 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그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왕(齊王)이 되었을 때는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시작했던 한신의 군세가 유방과 항우의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용저를 참살한 이후에는 그 항우조차 두려워하며 한신을 회유하기 위해 사신으로 무섭을 보냈을 정도이니 한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한신의 진가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모든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 예로 적장 진여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상황에 맞는 전술을 사용해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를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전략적 배수진' 의 정의를 만들어 낸 정형 전투, 정보 수집을 통해 적군의 동향을 읽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안읍 전투, 지형지물과 부하 지휘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제(齊)와 초(楚) 두 나라의 연합군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초한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유수 전투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비하는 쪽보다 공격하는 쪽이, 요새에서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쪽보다 고된 행군으로 피로가 누적된 쪽이 더 불리한 것은 당연한데, 한신은 그런 전략적 불리함을 모두 극복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
물론, 이렇게 한신이 상대한 적들이 비록 국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도, 실상은 초한쟁패기에 전국시대 열국의 후예들이나 군벌들이 항우의 후원을 받아 급조한 정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후에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보다 동원력이 떨어지고 국가 체제가 미비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 한신이 상대한 군사의 질이나 적의 수준이 아주 높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의 질이 낮은 것은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병력의 수에서 매우 크게 밀리는 데다 힘든 원정으로 지친 한신 쪽이 훨씬 더 불리하였다.
즉, 열악한 조건에서 시작했지만 한쪽은 추풍낙엽으로 당하는 역할이었던 것에 비해, 한쪽은 '''무패의 군단이 되어 천하를 평정하는 역할'''이었다면 이는 지휘관의 능력 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고 아낙네에게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무능한 사내로 평가받았고[5] , 항우의 군단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의 대장군이 되기 전에는 제대로 군사 한번 다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인데,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타고난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야전지휘관으로서의 활약만 엄청난 게 아니라, 이좌거의 조언을 듣고 연나라를 항복시키는 등 전략적인 식견도 출중했다.
4.2. 정치적 능력
한신은 장군 즉 군대를 통솔하는 영역에서는 좋은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왕이나 신하로서 보여준 행태는 부족함이 많았고 그중에서 인간관계를 다스리는 부분, 특히 '''처세술에 관해서는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어느 날 한신이 번쾌의 집에 들렀을 때 번쾌는 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마중했다가 다시 배웅을 하며 자신을 신이라 칭하며 말했다. 「대왕께서 소신의 집에 왕림하셨으니 참으로 광영(光榮)입니다.」
한신이 번쾌의 집을 나서며 스스로를 비웃으며 혼자말로 말했다. 「내가 살아서 번쾌 같은 사람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구나!」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이는 한신의 처세술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당시 한신은 반란 혐의로 초왕 작위를 잃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감정적, 정치적으로 여러 문제를 일으켜 놓고, 정작 자립할 수 있을 때는 딱히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감정으로 판단했다. 항우가 보낸 무섭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항우는 나를 형편없이 대했으나, 유방은 나를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었다."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한신은 '''역이기를 죽게 만들고, 유방에게 왕위를 요구한 상태였다.'''[6] 어쩌면 자신의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는 항우와의 연대를 개인적인 인연으로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한신의 병력은 유방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항우는 몰라도 유방을 적으로 돌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항우와의 결전 이후에 한신의 병력은 유방이 적으로 돌아선 순간 그대로 항복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애시당초 항우가 믿을 만한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7]
그렇다고 한신이 인정 없고 냉혹한 인물인 건 아니었다. 충분한 기반과 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괴철의 반란 제안을 거절한 것 하며, 자신을 찾아온 종리말을 내치지 않고 숨겨준 일, 일개 패전국의 신하에 불과한 이좌거를 스승으로 모시고 거듭 예를 표하며 자문을 구한 일 등, 한신은 분명 여러 면에서 의리있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의리와 겸손한 태도가 자신의 공이 쌓여 갈수록 높아져 간 교만함과 안일함 때문에 끝까지 가지 못했던 것뿐. 괴철의 말에 넘어가 동료인 역이기를 죽게 한 것도 그렇고, 상하관계가 명확하긴 했어도 한때 같은 전선에서 싸웠던 전우 관영을 두고 "내가 저 따위 놈이랑 어떻게 동급이란 말이냐"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으며, 자신의 보전을 위해 종리말을 죽게 했고,[8] 죽기 직전에 괴철이 자신에게 반란을 사주했다는 사실까지 불어버려서 괴철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이는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을 도우려 한 사람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유방이 이성왕을 숙청하는 등 공신들을 견제하는 작업을 했고, 종종 소하 같은 최측근들까지 의심하는 면모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과 한신을 동일하게 묶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한신은 단순히 유방에게만 밉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밉보인 인물이었다. 한신 숙청에 관련된 인선만 봐도''' 한고제가 견제하고, 여후가 제거하고, 소하가 협력했으며, 장량이 그 소하에게 상을 줄 것을 청하는 것으로 이 결단을 지지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한신은 그 당시 최고 실세 전원에게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유방의 신하들 중 그 누구도 한신을 옹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신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고제에게 한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신이 번쾌를 불쾌하게 여긴 이유도 설명할 여지는 있다. 그전까지는 가만히 있더니 회음후로 강등된 다음에야 자신에게 대왕 운운하며 너스레를 떠니 한신 입장에선 심사가 꼬일 만도 한 것. 그리고 한신과 번쾌 사이에는 분명한 격차가 있었는데, 한신은 전군 총사령관에서 시작해 아예 북부 전역을 혼자서 담당한 방면군 사령관으로 공을 세워 왕위에 앉았고, 번쾌는 유방 직속의 최전방 지휘관에서 시작해 제후의 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한신의 한탄은 단순히 번쾌를 모욕할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입지가 그만큼 낮아졌음을 분하게 여긴 것이다.[9]
한편 한신 본인의 처세술은 엉망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밖의 다른 정치적인 능력들은 앞서 말했듯 전반적으로 평균정도라고 옹호하는 입장도 있는데 이 부분도 논란이 있다. 물론 장수로써는 조나라 정벌 당시 부하 장수들이나 군사들 입장에선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던 배수진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점과 급하게 긁어 모은 오합지졸 군사들로 대, 조, 연, 제, 4개의 나라를 평정했다는 점에서 그의 통솔력과 선동 능력을 알 수 있지만. 왕으로써의 면모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자신이 엄청난 무리수를 둬가며 제나라를 정복한 탓에 제나라에서는 엄청난 반란과 제나라 잔당들이 준동했고 그 결과 초한전쟁이 끝날때까지 조참 등 상당수의 병력을 제나라의 묶어둬서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초왕이 된 이후에는 전 중국이 전쟁수습으로 백성을 위무할 때 자기 혼자만 무슨꿍꿍이인지 항우의 잔당들을 모으고 군대를 동원하면서 반발을 사다가 결국 초나라 사람의 밀고로 왕작위를 잃는다.
단, 위의 말도 반론이 가능하다. 첫번째, 왕의 통치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것이다. 왕의 자리에 있는 시간은 제나라, 초나라 왕의 기간은 2년 남짓이며, 심지어 제나라 초나라 왕을 이동까지 포함했으니, 선정이고 악정이고 영향을 미치기에는 매우 적었다. 즉, 최소한 한신이 왕의 노릇을 5년이상 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다. 또한, 항우의 내용에서도 나오고, 고제의 내용에서도 나오듯이, 항우의 막장 살인행위때문에 고제가 별도의 일을 안해도 민심을 얻었고, 고제의 직속 부하였었던 한신 역시도 그 후광의 덕을 봤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리고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직속으로 모으는 능력도 상당히 모자란 편이었다. 조, 위, 연, 제나라를 무찌를 정도의 공을 세웠다면, 그 밑에도 사람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을 심복으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게 고제이다. 고제는 형식상 초나라의 밑에서 성장했지만, 원정 도중에 장량, 역이기, 관영 등을 직속수하로 얻었으나[10] , 한신은 그런 점이 괴철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에피소드에 나오지 않았다. 또한,괴철마저도 괴철이 스스로 한신에게 붙은것이지, 한신이 고용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보면 더더욱.. 또한, 위에서 나오듯 종리말에게 너 죽어달라고 말하는거 자체가 상황판단도 문제지만, 인망이 없을 만하다는 예시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종리말을 어설프게 껴안아서 본인의 왕 자리까지 뺏긴것을 보면...[11]
또한, 제후왕 자리, 그것도 이렇게나 특별한 위상과 의미를 가진 왕위를 한신은 내세울 명분상의 타이틀(혈통)이나 현실적인 타이틀(독립 군벌)도 없이 손에 넣었다. 그것도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적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니 단순한 질투 이상의 악감정이 안 들 수 없는 상황인데, 번쾌의 일화에서 보듯이 한신은 시종일관 공신들을 무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신뢰할 근거도 없지(항우/촉에서 도주, 감투에 연연하는 성격), 의리도 없지(역이기/종리말 사건), 책임감도 없지(제나라 침공), 염치도 없지(가왕 요청 사건), 충성심도 없지(고릉 전투 늑장사건), 싸가지도 없지(번쾌 사건, 다다익선 사건 등).''' 고조와 공신들이 한신을 잠재적 반란분자로 취급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공신들이 입을 모아 (상관인 한신이 아닌) 조참을 최고 공신으로 추천한 것이나[12] , 한신의 모반 의혹에 일치단결하여 즉결처분을 주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끝내 한신은 그 누구에게도 신뢰 얻기는 커녕 미움만 샀다. 그리고 이 사단의 원인에 한신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거지가 매우 큰 지분을 차지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한신이 지휘한 부하들의 면모를 보면 당장 한신과 함께 전장을 뛰었던 조참부터가 유방이 봉기할 때부터 함께 한 원년멤버 중 하나였으며 유방의 부하들은 한신의 군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한신이 지휘하던 것과는 별개로 군대는 끝까지 유방의 통제 하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한신은 과거 전국시대 제후들과 같은 기반이 있었던 인물도 아니었기에 유방이 준 군대가 없으면 기반 자체가 날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정황을 보면 한신이 독립해서 제3의 세력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봐야 할 지도. 그런 면에서 보면 한신의 행적을 보는 유방과 그 휘하 신하들은 '한신 저놈이 우리가 다 죽는 것만 기다리고 있네?'라고 판단할만 했다. 유방이 직접 뜨기만 하면 군대가 몇만이건 수십만이건 전부 통째로 빼앗기는데 대놓고 싸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건 한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방의 위기 상황마다 어떻게든 항우가 유방을 죽여주길 빌면서 군사를 안 내놓고 버틴거라고 볼 수도 있다. 적어도 항우와 싸우며 유방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긴 신하들은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유방의 목숨과 자기 이익 사이에서 계산기를 튕긴 시점에서 유방 측이 몰살당하지 않는 한 숙청이 예약된 것이다. 한신이 사망한 상황도 조정 신하들이 여후를 뒷배로 삼아 단체로 한신을 모살한 것에 가깝고.
한편 한신은 지위에 심각하게 집착하는 행태도 보였는데 흔히 한나라의 대장이 되기 전에 벼슬에 실망해 도망가는 행보 때문에 한신이 낮은 벼슬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면면을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선 한신이 항우에게 처음 받은 벼슬은 낭중인데, 유방이 한왕으로 임명될 때 자신이 개털 시절에도 같이 다니던 번쾌, 하후영에게 주었던 직책도 낭중이었다. 관영 같은 경우는 목숨을 건 전투를 몇 번이나 치르며 관중까지 유방을 따라간 뒤에야 겨우 낭중이 되었다. 그리고 한신은 한나라에서 치속도위(治粟都尉) 벼슬을 받고 실망하여 탈영했는데, 도위(都尉)는 항우에게 항복하고 신안대학살에 살아남아 적왕이 되는 동예가 진나라 시절 받은 벼슬이었다. 그 외에도 유방이 수천의 별동대를 이끄는 역상에게 도위직을 주는 등 결코 낮은 벼슬이 아니다. 물론 앞사람들과 실권이 같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직위를 유방과 만난 지 겨우 몇 주만에 받았는데도 그 자리가 낮다고 도망쳐 버린다.[13] 이렇게 보면 한신이 왜 번쾌의 면전에서 그딴 소리를 했는지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소인배의 모습이 섞였다."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모습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그나마, 한신에게 변명을 해 주자면, 한신에게는 신하로 삼을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거의 없었는데, 기껏해야 괴철과 이좌거 등 일부 참모진이 전부고 부장급 인물들도 대부분 유방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물들에 지휘관급은 조참, 관영 등 유방의 최측근인 사람들 뿐이었다. 사실상 한신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이들이 합류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 와중에 이좌거도 유방의 지시로 산둥성 일대에 둔전을 개척하는 임무로 빠진 뒤 그곳에서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고제는 한신의 그나마 도와줄 사람까지도 빼낼 정도로 눈이 좋았고, 한신의 태도를 교정해 줄 조언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기껏 있다 간 괴철은 바람만 넣고 갔으니 사람 복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또한, 잠자다가 고제에게 황당한 방식으로 군사를 빼앗겼을 때도 남겨진 병사들은 그렇다 치고 같이 뒤통수를 맞은(...) 장이조차 별다른 말이 없었을 정도이니 유방의 장악력이 엄청 높았을 수도 있고,[14] 항우와의 결전 이후에도 한신의 병력은 유방이 적으로 돌아선 순간 그대로 항복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니 한신으로서는 답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애초에 사람들에게 정말 엄청난 충성을 받았던 인물들과 비교했을 때 실제로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어이없게 세력을 빼앗기며 몰락한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신의 태도가 이해가 간다. 유방의 구원 요청을 거절한 것도 한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방이 그대로 고인이 되는 게 최선의 방법이 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까놓고 유방의 권위 없이는 병사들을 따르게 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한신과 비교해도 만만찮게 의심에 시달린 소하가 위기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결국 버텨낸 것과 비교되는 부분.
사실 변명에서 나온 것처럼 한신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왜 군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만 했는지는 미스터리이긴 하다. 결국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귀신같은 능력을 보여준 한신이 이토록 정세 판단에 어둡고 무능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 부분. 영웅들도 사람이다 보니 모든 면에서 완벽하거나 평균 이상일 수가 없어서 은근히 이런 유형의 영웅들이 많긴 하다.[15]
결론적으로 한신은 군공이 쌓여갈수록 자신의 능력을 믿고 교만해져 갔으며, 군사적 재능에 비해 정치적으로 사람부릴 줄 모르며, 처세술의 부재로 인해 서서히 주변 사람들의 인망을 잃어갔다. 능력 하나만으로 한의 대장군이 되어 왕의 자리까지 오른 그가 그 능력 때문에 토사구팽당해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점은 항우와 매우 비슷하다. 시작점만 다를뿐이고, 다른 의미로 잘난 척하는 대가를 받은게 아닐까?
4.3. 주변인과 후대인의 평론
- 유방의 평가
- 사마천의 평가
- 사마광의 평가
- 이맹현(李孟賢)의 평가
- 안처성(安處誠)의 평가
- 주희, 유희춘(柳希春)의 평가
- 조선 효종의 평가
- 조선 순조의 평가
- 대만 역사학자 보양(栢楊)의 평가
5. 이야깃거리
- 한신이 왕이 되어 다스렸었던 제나라와 초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진나라 바로 다음가는 국력을 자랑했던 강국들로, 다른 전국시대의 나라들과 달리 그 위상이 특별했다. 물론, 이 당시의 제와 초는 진나라에 의해서 통일되고 다시 여러 군웅이 나눠먹었던 초한쟁패기를 겪은 다음의 국가이니 과거 전국시대만큼의 국토나 국력을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 6국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는 데다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혔던 나라의 왕위를 받았다는 것은 전국시대와 초한쟁패기를 겪은 당시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 한때 유방의 주군이었고, 유방에게 항우를 토벌할 최고의 대의명분을 제공해 준 초의제는 본래 '초회왕'이었다. 그리고 항우의 시해로 인해 끊어졌던 초왕의 지위를 한신이 받았으니, 이는 형식적으로 초의제의 자리를 한신이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 밖에도 고조 유방과 그의 측근들, 한신 자신도 초나라 출신이었고, 최대의 적수였던 항우의 나라였던 만큼 정서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 중국 역사에서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뛰어난 장군을 칭송하면서 "그 옛날 한신과 같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