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연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3. 제갈량 사후, 내분을 부르다
2.4. 장수로서
3. 연의
4. 기타
4.1. 팬덤
5. 미디어 믹스


'''魏延
위연
'''
위연석소상
'''작위'''
도정후(都亭侯) → 남정후(南鄭侯)
'''최종직위'''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겸 가절(假節)
'''성씨'''
(魏)
''''''
(延)
''''''
문장(文長)
'''생몰기간'''
?년 ~ 234년
'''고향'''
형주 의양군(義陽郡)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0px;margin-top:-6px;margin-bottom:-16px"
<:><tablewidth=100%><tablebgcolor=#008000> 촉한(유비→유선) ||<(><bgcolor=#fff> {{{-1 아문장군(牙門將軍)
독한중(督漢中) 겸 한중태수(漢中太守) 겸 진원장군(鎭遠將軍)
진북장군(鎭北將軍)
진북장군(鎭北將軍) 겸 독전부(督前部) 영 승상사마(領 丞相司馬) 겸 양주자사(涼州刺史)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겸 가절(假節)

}}}}}}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는 문장(文長)이며 형주 북부 신야 의양 사람으로 등애, 등지와 동향이다.
진수정사 삼국지에서는 용맹하고 사졸을 잘 양성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지만, 동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해 분란을 조장한 위험인물로 기록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부터 옛 주인을 배반하고 '반골의 상'으로서 제갈량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름대로 버프를 받은 캐릭터가 되었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위연은 본래 유비의 부곡(部曲)이었다. 부곡이 노예나 노비와 같이 천한 출신이라는 의미라서 천민에서 출세한 인물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부곡이 그런 의미가 된 건 남북조시대부터이고 삼국지시대 부곡은 사병을 뜻한다. 물론, 일개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으므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건 맞다. 개천에서 용난다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입촉한 이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아문장군에 오르고, 장비를 제치고[1] 한중방면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 이 결정은 대소관료들은 물론이고 장비 자신도 스스로가 임명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파격적인 인사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유비가 두말 않고 공식석상에서 위연에게 '이 중임을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위연은 "대왕을 위해 10만의 병사를 조련할 것이며, 적들이 공격해오면 대왕을 위해 그들을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며 막힘없이 척척 대답하여 좌중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그 뒤로 인사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위연이 한중을 완전히 책임지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는데, 이 시기 한중은 한중 공방전 직후로 사실상 유비의 본대가 주둔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위연에 대한 폄하가 될 수는 없다. 한중의 중요성은 이 시기에도 분명했고, 위연의 역할은 매우 컸기 때문이다. 다만 후일 유비가 죽은 이후, 제갈량이 북벌을 하기 이전까지는 위연이 한중을 거의 책임지고 있었으나, 최소한 유비가 살아있는 동안엔 위연의 판단이 작용할 여지는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장비의 파서태수 임명도 달리 봐야한다는 시각도 있다.
즉, 유비가 위연을 독한중으로 뽑은 것은 위연의 역할을 최전방 사령관으로 제한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독한중은 유비 생전엔 그의 휘하에서 유비가 정한 전략대로만 최전선인 한중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고, 파서태수는 여차하면 다른 전선으로 뛰어갈 수 있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한중을 책임지는 책임자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유비의 직속으로서 실제로 그 역할의 범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또 장비는 서주에서 조표와 불화하여 서주를 잃은 적이 있던 만큼 최전방에 진득하게 진수하게 두는 것을 무리라고 판단했을 공산도 있다.
여기까지 위연의 모습은 '유비의 직속 부하'로서 유비의 눈에 띄어서 유비가 키워주는 대로 착착 계급이 올라가면서 중임도 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21년에는 진북장군에 제수되었고, 223년에는 도정후의 작위에 올랐다.

2.2. 제갈량의 북벌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자 다시 위연을 독전부(督前部), 영(領) 승상사마(丞相司馬),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삼았다. 유비 사후에는 북벌에 나선 제갈량을 수행하는 동안, 한신의 고사를 따라, 제갈량에게 1만의 군사를 청하여 자신의 군대가 제갈량의 본대와 동관에서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2] 하지만 매번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제갈량을 겁쟁이라고 말하며 한탄했다고 한다.[3] 그러나 제갈량은 오히려 232년에 위연과 유염이 불화하자 유염을 질책하고 성도로 보내기까지 했다. 적어도 연의처럼 제갈량이 위연을 반골의 상으로 생각했다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촉서 양의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양의의 재간을 아끼고 위연의 용맹함에 의지하니 두 사람이 화목하지 못함을 늘 한스럽게 여기며 차마 어느 한쪽을 폐하지 못했다고 한다.[4]
229년까지 연달아 촉군의 도전을 받은 조진의 주도로 230년에 반격을 실시, 세 갈래 길로 공격해 왔으나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아무것도 못 해보고 퇴각한다. 그 직후 위연은 제갈량의 명을 받고 오의와 함께 강중으로 출진해 비요, 곽회 등의 군사를 대파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 공로로 전군사 정서대장군에 올랐으며 남정후에 봉해졌다. 후일 곽회가 관중지역을 총괄하면서 촉한의 북벌을 순조롭게 상대했다는 것을 보면, 곽회를 격파한 위연의 군사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5]
231년에 이루어진 4차 북벌 때 제갈량은 농서로 진출하여, 상규의 보리를 두고 위군과 대치하다 노성에서 한차례 접전을 펼친다. 《한진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제갈량의 명을 받은 위연이 오반, 고상과 함께 출진하여 사마의가 지휘하는 위군을 격파하고 3천의 수급을 얻는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의 결과인지, 4차 북벌에서 사마의를 격파한 후 위연은 가절에서 사지절로 받은 권한이 늘었다. 이엄을 탄핵하는 표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 전투의 결과는 《진서》 〈선제기〉와 《한진춘추》가 각기 전하는 바가 다른데, 《진서》 〈선제기〉는 위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기술한 반면 《한진춘추》에는 촉군이 이겼다고 기록되었다. 같은 사건에 대해 두 사료가 정반대의 결론을 지니고 있는데, 《삼국지》, 《위략》, 《한표전》, 《화양국지》, 《한진춘추》 등이 모두 《진서》 선제기의 기록을 따르지 않고 있고 중화민국 시대 여러 자료를 인용해 《진서》에 주석을 단 《진서각주(晉書斠注, 1928년)》 130권을 지은 오사감(吳士鑑), 유승간(劉承幹) 같은 사가들도 서문에서부터 제갈량이 패한건 가정에서 밖에 없다고 하고 있고 왕명성, 임국찬 등의 역사학자들의 각주를 《진서》에 인용해 〈선제기〉의 기록을 비판하고 있으며 4차 북벌의 전후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한진춘추》의 기록이 맞다고 보인다.[6] 《진서》와 《한진춘추》를 취합한 사마광의 《자치통감》도 승패 부분은 《한진춘추》를 따랐다.
이 전투 이후 사마의는 공세적인 전략을 삼가고 수세적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언제나 기발한 전략을 과감하게 추진하여 실패한 적이 없는 사마의가 촉한군을 꺼리는 것으로 보아, 제갈량과 위연의 조합이 당대 최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팔진법을 완성한 촉한군을 야전에서 이겨낼 수 있는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북벌에 종군한 왕평(이후의 하평)이라든가 오반, 고상, 장억, 요화 같은 장수들의 활약 역시 있었지만.

2.3. 제갈량 사후, 내분을 부르다


234년, 5차 북벌 중 위독해진 제갈량은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를 불러 자신이 죽고 난 후 철군할 것을 명했고, 위연에겐 후군을 맡아 추격하는 위나라의 군대를 요격하는 임무를 맡겼다.[7] 한중으로의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임시로 지휘권을 인계받은 양의는 즉시 위연에게 비의를 보내 제갈량의 군령을 전달하도록 하고, 나머지 장수들에게는 함구령을 내려 제갈량의 죽음을 떠들고 다니지 않도록 조치했다. 이런 조치를 보면 제갈량은 자신의 사후 최대한 신속하고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군령을 받은 위연은 벌컥 화를 내며 비의에게 고함을 쳤다.

승상이 비록 죽었다고 하나 나는 건재하오. 승상부의 가까운 관속들은 바로 시신을 모시고 돌아가서 장사를 지내야 할 것이나, 나는 당연히 직접 여러 부대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해야 할 것이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대업을 그만둘 수 있겠소? 또한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이기에 양의의 부림을 받는 부하가 되어 후미를 끊는 장수 노릇이나 하란 말이오!

위연전

품계기준으로 따진다면, 정서대장군인 위연이 양의나 비의보다 지위가 높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총사령관 다음가는 위연이 군권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수 작전은 제갈량이 죽음에 앞서 입안했으며, 양의와 비의는 그 실행을 대신하는 입장이었다. 즉, 위연은 군인으로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승상 제갈량(통수권자)의 명령에 꼬장을 부리며 항명한 셈이다.
제갈량도 이를 짐작했는지, 위연에게 뒤를 끊게 하고 강유에게 그 다음에 있게 하며 혹 위연이 명을 따르지 않더라도 군이 곧바로 출발하도록 했다. 제갈량은 혹시나 위연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 싶은데, 불행히도 제갈량의 그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제갈량이 우려하던 사태가 그대로 발생한 것이다. 본인의 군사적 재능과 지위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선 남들을 업신여기는 오만함, 양의에 대한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린 위연은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새로운 군령을 써서 발표할 작정을 했다. 말인즉 양의를 비롯한 승상부의 관리들은 제갈량의 시신을 모시고 돌아가되, 장수와 병사들은 그대로 두어 자신의 지휘를 받도록 한 뒤 위군과 싸우겠다는 내용이었다.
비의는 반쯤 억류된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어 자신의 손으로 그런 명령서를 작성하고, 위연과 더불어 문서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사태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비의는 설득을 포기하고 차선책을 실행하고자 했다. 위연이 독단적으로 군대를 틀어쥘 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해진 이상, 제갈량이 미리 지시한 대로 추격 저지는 강유에게 맡긴 뒤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에 비의는 우선 급한 대로 위연을 속여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응당 그대를 위하여 돌아가서 양장사(長史, 양의)를 이해시키겠소. 장사는 문관이라 군사(軍事)를 잘 모를 테니, 반드시 그대의 말을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오.

 
즉 비의 쪽에서 위연이 새로 작성한 군령을 양의에게 통보하고 설득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위연이 비의를 풀어주지 않을 건 물론이고, 수틀릴 경우 그 자리에서 양의에 대한 경고라며 비의를 죽일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비의를 보내고 얼마 안 지나 도로 잡아들이려고 했으니 비의의 기지가 그를 구한 셈이다. 아무리 멋대로 굴려고 마음먹은 위연도 나름대로는 명분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몰라도 기꺼이 비의를 보내주었고, 덕분에 비의는 무사히 도망쳐 촉군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낚였다고 느꼈는지 위연은 그를 추격하게 했지만 이미 달아나는데 성공한 비의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척후가 비의를 잡지 못한 대신 본대를 비롯한 여러 부대가 이미 제갈량의 군령에 따라 차례대로 한중을 향한 귀로에 오르고 있음을 포착하여 위연에게 보고했다.
이미 상황은 제갈량이 지시한 대로 강유가 후미를 맡아 재기넘치는 군사 운용으로 사마의의 추격을 뿌리친 뒤였다. 비의를 놓친 데다 강유, 왕평, 양의 등 제갈량의 명을 받은 장수들의 신속한 행동으로 선수를 빼앗긴 위연은 격노하였고, 여기서 정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른다. 본대보다 한 발 먼저 직속부대를 이끌고 남하해서 촉으로 돌아간 다음, 야곡의 남쪽 입구를 장악하고 '''아군의 퇴로가 되는 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불태워버려'''[8] 촉군 본대 7~8만을 적지에 묶어두는 사이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연의 등에서는 제갈량이 위연을 죽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이기에 위연이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도 제갈량에 대한 복수라는 말이 나온 적도 있지만, 오히려 정사에서는 제갈량은 어떻게든 위연을 감싸주며 그의 능력을 아꼈다. 그럼에도 위연은 기어이 반기를 들었으니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다. 본대의 퇴로를 끊은 후, 위연은 양의가 반역을 저질렀다고 모함하는 표까지 올렸다. 이것은 사실상 내란(內亂)을 획책한 것에 가깝다. 비슷한 시각, 조금 늦게 촉으로 진입한 촉군 본대는 위연이 이미 먼저 물러난 데다 아군 본대가 한중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양의는 즉시 위연이 반역했다는 표문을 조정에 올렸으며,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양의와 위연이 각각 반역했다는 상반된 내용의 표문이 동시에 올라오게 되었다.
 
실시간 연락이 없던 시대라 먼 곳에서는 상황을 알 리가 없으니 혼란이 일어날수도 있었지만, 황제 유선과 유부장사(留府長史)로 있던 장완, 시중 동윤(董允) 등은 논의 끝에 실제 위험인물은 위연이라고 정확하게 추측했다. 이에 따라 장완이 즉각 진압을 위해 성도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모아 출정했다. 제갈량이 미리 조정에도 뭔가 조치를 취해둔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신속한 대응이었다.[9] 한편 '''위연은 먼저 도착해 잔도를 태운 후 남곡구를 점거하고 군사들을 보내 양의가 이끄는 군대를 역격했다''', 길을 막는 걸로도 모자라 잔도를 태워 아군을 고립시킨 것도 엄청난 문제인데 이젠 대놓고 촉한 본군을 공격하는 반역을 자행한 것. 양의 등은 왕평을 앞에 세워 위연을 막았다. 왕평은 위연의 군대를 만나자 바로 크게 외치며 위연의 군대를 꾸짖었다.

돌아가신 (제갈)공(公)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거늘, 너희들은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왕평이 이렇게 꾸짖고 사리를 들어 감히 승상을 거역하는 점과 위연의 잘못을 들어 설득하자, 직전까지 잔도를 불태우고 팀킬까지 수행하던 위연의 병사들이 제갈량을 떠올리고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 명을 받들지 않으니 군이 모두 달아났다.[10] 사졸 육성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위연의 직속부대가 아무리 살기 위해서라도 순식간에 직속상관을 버리고 흩어졌다는 점에서 위연의 능력과 인간성이 얼마나 별개인지 짐작 가능하다. 물론 거기다 당시 상황은 직속부대가 보기에도 위연이 너무 막나가고 있었기에 애초에 회의감이 팽배해있었는데 왕평의 정확한 지적으로 그게 폭발한 것이기도 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손발이 잘려 완전히 고립된 위연은 아들과 함께 한중으로 달아나다가 마대의 군대에게 주살되며 최후를 맞았다.
거기다 양의가 직접 나서서, 위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그의 삼족을 모조리 잡아다가 죽이는 족형(族刑)을 행했다. 그리고는 잘려져 보내진 위연의 머리를 짓밟으며,

이 하찮은 종놈아! 이래도 나쁜 짓을 할 수 있겠느냐!

라고 외쳤다고 하니, 그도 결국 찌질하기 짝이 없는 성품을 다 숨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자칫 내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위연의 난은 이렇게 조기에 진압되었으며, 양의가 지휘한 본대는 장완과 함께 무사히 촉한 영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여담으로 양의도 위연과 똑같은 착각에 단단히 빠져있던 장본인이라 위연을 제거하면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으로 여겼으나, 생각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비의에게 한탄하며, "차라리 승상이 사망했을 당시에 그냥 위씨[11]를 따르는 게 나을 뻔 했다."고 말하며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렸고, 이 위험발언으로 결국 양의도 실각당해 지방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거기서도 정신 못 차리고 비방을 일삼다가 그게 알려져 잡혀오게 되자 자결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능력은 우수했지만 성격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두 사람이 중재자였던 제갈량 사후에 충돌해 자멸해버린 것이다. 전쟁도 아니고 내분으로 우수한 인재 둘을 잃어버렸으니, 이미 제갈량을 떠나보낸 촉에게는 커다란 손해였다.
삼국지연의는 이 사건을 위연의 반란으로 기술했지만 실제 위연의 본심이 정말로 촉한 조정에 반역을 일으키려던 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일단 사료에서 반란이 언급되는 부분은 양의와 위연의 서로 고발을 제외하면 없기도 하고 당초 장완은 이 소식을 듣고 숙위(宿衛)하는 여러 영(營)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부난(赴難-국난을 구하기 위해 달려감)했는데 수십 리를 가다 위연이 죽어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의심"이었을 뿐 확정한 것은 아니었고, 위연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를 되돌린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시점에서 위연이 정말 촉에 반역하려 했다면 위나라로 도망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들들과 도망한 곳도 생전 유비가 그에게 보직을 맡겼던 한중이었다. 삼국지 저자인 진수 역시 위연의 막장 인간관계와 양의와의 불화, 그리고 제갈량의 뒤를 잇는다는 기대감이 깨진 결과물일 뿐, 반란의 의도는 없었다고 지적한다.[12]
그러나 본인이 정말 반역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위연이 저지른 행위가 나라에 큰 해를 끼칠수 있는 너무나 위험천만한 짓이었다는 점, 위연의 3족을 멸했다는 기록을 보건대,[13][14] 적어도 이런 행위로 인해 반역자 취급까진 아니어도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받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양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렸던 것이다.
진수도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의 평에서 위연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중략) 魏延以勇略任, (중략) 覽其擧措, 跡其規矩, 招禍取咎, 無不自己也
위연은 용략으로 임명되었다, (중략)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며 예법을 되짚어 보건대 화를 부르고 허물을 취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한마디로 처형당한 것은 모두 위연의 자업자득이라는 얘기다. 또한 그 이전에도 위연전의 본문에서 그가 양의와 불화했음을 꼬집으며 운신의 결점을 지적했다. 비록 진수가 위연이 진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건 아닐 거라고 변호해줬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위연의 처신은 차마 감싸주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延旣善養士卒, 勇猛過人, 又性矜高, 當時皆避下之. 唯楊儀不假借延, 延以爲至忿, 有如水火.
위연은 사졸을 잘 양성하고, 다른 이들보다 용맹하고, 성정이 교만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하고 양보했다. 오직 양의만이 위연에게 가차없어''', 위연이 노하니, 마치 물과 불 같았다.
다만 진수는 위연전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평한다.
원래 위연의 뜻은 북쪽으로 위나라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고 남쪽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다만 양의 등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평소 제장들의 의견이 서로 같지 않았는데, 시론(時論)이 필히 자신이 제갈량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길 바란 것이다. 본 뜻이 이와 같았으니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진수의 평에 따르면 결국 제갈량 이후 그 후임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자부심이 위연에게 화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양의도 비슷한 생각으로 자멸했던 걸 생각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일종의 동족혐오였을 수도 있겠다.
위연은 성정이 거셌고 다른 이들과 불화했는데 이는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으로서 큰 결점으로 작용했고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따라서 위연에 대한 진수의 인물평은 매우 박하다. 그리고 이는 위연 뿐 아니라 같이 묶인 유봉, 팽양, 요립, 이엄, 양의, 유염 등도 모두 마찬가지. 이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으나 바르지 못한 처신과 행실로 인해 말로가 비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재미있는 일이지만, 진수의 평가에서도 나오듯이 의외로 사후 위연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이 제법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15] 현대에 이르러서도 위연은 권력 다툼의 희생양에 불과할 뿐이며 그를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이 많다. 이런 의견을 가진 이 중 하나가 중국의 근대사학자 여사면인데 그는 '위연의 북벌(위 토벌) 의지는 비교적 굳건한 것이었다. 오로지 제갈량이 죽을 날만 바라보며, 전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제갈량이 죽고 위연이 병권을 장악했다면, 장완이나 비의같은 사람은 따르지 않았을 것이나, 그 성패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위연의 죽음은 촉한의 일대 손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위연이 나라를 뒤집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까지 하지는 않았고, 병사들이 다 흩어진 다음에도 위나라에 항복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사실 제갈량이 죽은 직후부터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위연을 단순히 희생당한 인물로만 보는 것도 지나친 미화에 가깝다. 우선 제갈량의 군령을 거부하고 군권을 장악하여 위군과 싸우려 했던 점은 좋게 포장해주면 장수로서의 기개와 용기를 높이 살 만한 점은 될 수 있어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현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아무리 불만스러웠더라도 엄연히 최고사령관인 제갈량이 죽기 직전 내린 명령을 전면에서 거부하고 무시하며 탈영해 팀킬을 시도한 시점에서 이미 위연은 어리석은 파멸에 스스로 발을 디뎠다. 위연이 철수를 충실히 따르고 이행했다면 인성은 몰라도 지위와 경력, 능력은 인정받던 인물인만큼 좋은 인상을 받고 계속 촉 군부의 중핵으로서 활약할 수 있었겠지만 그저 철수가 불만스럽고 앙숙인 양의가 유언을 들은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철수 대행자 역할을 하자 후계자 자리를 빼앗겼다는 착각에 빠져 팀킬을 저지르려고 했으니 실로 어리석다.
 
이런 면에서 여사면과 달리 자치통감의 음주를 단 호삼성은 위연의 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위연이 비록 반역할 뜻을 갖고 있지는 않았어도 그에게 보정(輔政)을 맡겼다면 촉한의 멸망을 재촉했을 것이다.

위연에게는 잔인한 말이 되겠지만, 그가 자기 멋대로 군령을 어기고 아군의 퇴로를 끊어 타지에서 촉군 본대를 대위기에 몰아넣은 것으로 부족해 거짓 모함서를 조정에 올려 내란을 유도해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으려고 작정한 그 순간부터 그의 죽음은 비록 그 자신에게는 지극히 억울한 비운이었을지 몰라도 촉한에 있어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16]
제갈량은 북벌을 완수하지는 못하더라도 삼국 중 가장 약한 촉한을 영원토록 지켜내는 것이 1차적 목표였다. 유선의 항복 사례를 보면 당시 국가라는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을 정도로 약했기 때문에 위연이 군대를 주동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즐긴다면 어떤 변고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북벌 때 위연이 활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거만하고 인간 관계가 개판인 위연이 군부 1인자로서 제대로 군을 통송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제갈량 사후 자기가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는 착각에 혼자 빡쳐서 내분까지 일으킨 장본인이다. 따라서 제갈량은 자기 사후에도 촉한 국가가 보전이 된다면 오나라와 함께 위나라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고 촉이 최대한 변고없이 버텨낸다면 설령 100년 후에라도 위나라에서 변고가 발생 했을 때 촉한이 북벌이라는 숙원을 이룩할 기회가 만들어질지 모를 일인 것이다.[17] 그리하여 과유불급이라는 소신으로 사후에는 위연보다 강유, 비의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촉나라 멸망시기가 위나라와 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18] 제갈량의 선택은 적중했다고 본다.

2.4. 장수로서


연의의 영향인지 돌격형 맹장으로 곧잘 묘사되나, 용략(勇略 - 용기와 지혜를 두루 갖춤)으로 임명되었다는 진수의 평처럼 지용을 겸비한 장수다. 부곡의 낮은 신분으로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장군이 된 인물로 난세 덕분에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은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배경이 그의 유별난 성격과 관련 있을 수도 있는데, 밑바닥에서 시작해 자신의 능력만으로 고위직에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들은 자부심과 고집이 남다른 경우가 많다.[19][20]
위연의 가장 큰 공으로는 230년 오의와 함께 양계에서 곽회와 비요를 격파한 일, 231년 노성에서 고상, 오반과 함께 사마의군을 대파한 일이 꼽힌다. 양계전투는 촉군이 위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였고, 이로 인해 정서대장군에 후작까지 받는다. 어지간히도 큰 공으로 여겨진 듯하다. 제갈량의 생전 촉군이 위를 상대로 얻은 승리라면 강중전투와 노성전투를 들 수 있는데, 이 두 전투도 모두 위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애초에 인재보는 눈이 남달랐던 유비가 '''그 장비를 제쳐두고''' 중임을 맡겼을 정도이니 능력면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21][22]
또한 사졸을 잘 양성했다(旣善養士卒)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전투에서만 활약한 것이 아니라 한중 방면의 군대를 양성하는 업무에도 능했다. 제갈량의 북벌 시절 촉이 보여준 강성한 전력에서, 위연의 사병들이 정예부대로 활동했던 것도 무관하지 않다고 할수 있다.
또한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할 때도 선봉으로 숙장인 위연, 오일(오의) 등이 추천되었다는 것을 봐도 나라의 내외적으로 능력은 인정받았던듯 하다.
그러나 전략적인 식견은 매우 부족했던 걸로 보인다. 위략 등지에서 언급되는 일명 자오곡 계책을 보면 전략의 현실적인 성공 가능성을 꼼꼼히 검토하지 않고 그저 자기 직감과 운에만 의존하는 입스타나 할 법한 의견 제시를 하고 있으니 수십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수의 식견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여기에 군인으로서의 '''충성심'''과 관료로서의 마음가짐 부분은 낙제점이다. 나관중이 (위연의 능력을 극찬하면서도) 괜히 위연을 반골이라고 깐 것이 아닌 것이, 통수권자가 죽든 말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행태만 봐도 엄청난 위험인물이었다. 당장 자오도 떡밥 이야기가 나온 일화에서 상관인 제갈량에게 대놓고 겁쟁이라며 폭언하는 등 상관모독을 저지른 위연이 자멸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로 오히려 제갈량이 넘어가줘서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는 목숨을 부지하고 전공을 세웠지만 그 제갈량이 사망한 순간 위연을 감싸줄 사람이 더는 없어지고 말았다. 오나라 초대 황제 손권도 그를 소인배로 보았다.[23]
동료들과의 관계 역시 막장이었는데, 아무리 평소 양의와 사이가 나빴다지만 말다툼이 격할 땐 칼을 들고 위협할 정도였다. 양의와의 사이만 나쁜 것도 아니고, 평소 다른 장수들과도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위연은 촉한에서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고, 그나마 제갈량이 중재해서[24] 군의 2인자 자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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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 짤방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를 패러디한 위연이다.
생김새는 관우와 비슷하게 나오는데 얼굴이 대춧빛, 신장이 구척으로 묘사된다. 성격이 오만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연의에서는 수혜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피해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평면적인 인물들과 차별화되는 이른바 '''반골의 상'''으로 인하여, 고전소설 답지않게 세심하게 복선을 깔고 묘사에 신경을 많이 쓴 입체적인 캐릭터다. 2세대 촉장들은 오호대장군과 그 후손들에 밀려 묻혀버린 케이스가 많은데, 조조를 활로 쏴서 이빨 몇 개를 부러뜨리고 낙마시킨 뒤 목을 베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휘하장수들의 반격으로 물러나는 장면도 있고, 일기토 전력도 꽤 화려한 버프를 받았다. 왕쌍을 베어버리는 등, 전반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인물.
정사에서는 본래 유비의 부곡 출신이었다는 것과는 달리, 왠지 '''다른 진영에 있는데 뜬금없이 엄청난 유비빠''' 짓을 반복하면서 상당히 인상적인 등장을 반복한다.
유표 사후 유비가 백성들을 이끌고 형주성 앞에 도달했을 때 유종군의 일원으로 첫 등장한다. 이때 채모와 싸우며 유비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하나 실패한다. 유비는 갈 길이 급하고 형주성을 놓고 싸우고 싶지 않아 장판파 쪽으로 도망가버리고, 위연은 유비를 따라가려고 하니 뒤쳐저벼렸고 반란을 일으킨 만큼 형주에 남을 수도 없어서, 남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선택한다.
여기서 장사태수 한현의 수하로 있다가, 유비가 형남 4군 평정에 나서자 관우황충의 대결이 벌어진다. 한현이 황충을 오해하여 처형하려 하자, 의로운 장군을 죽이려는 처사에 분개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한현을 죽이고 유비에게 투항한다.
관우군이 겨우 500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장사 함락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분명 위연이었다. 이렇게, 환대를 받으며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듯 했는데, 별안간 제갈량에게 "반골의 상이 있다."며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제갈량은 위연의 불충불의한 배신행각(형주에 대한), 그리고 관상을 보니 훗날 반드시 반역을 꾀할 상이니,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비의 만류로 살아난다. 이는 범증유비(전한)의 일화를 합친 것으로 보인다.[25]
아무튼, 유비군의 일원이 되어서 입촉과 한중 공방전 때 공을 세우고 오호대장군 다음 가는 위치가 된다. 하지만 공격적이고 전공 욕심이 강해서 냉포와 싸울 때 황충과 공을 놓고 살짝 마찰을 빚기도 했고, 가맹관 전투 때는 마대의 계략에 말려 부상을 입었다. 또 제갈량이 자오곡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걸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래도 후기의 필두 명장으로 대접받아 공적도 많이 세운다.
삼국지연의 가정본에 달린 주석에는 제갈량이 상방곡에서 계획적으로 위연도 사마의 부자와 함께 죽이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연히 나관중이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가 덧붙인 이야기에 불과하기에 모종강본에서는 당연히 그런 묘사를 무시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키려고 북두칠성에 기도를 하는 가운데, 위군이 습격해오자 장막에 들어오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헐레벌떡 들어갔다가 그만 기도를 망쳐버린다. 제갈량은 의식이 실패했음을 알고 안타까움에 한탄하며, 다른 촉장들은 위연을 죽여버리자고 분노하는데 제갈량은 결국 위연이 들어온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며 위연을 용서해준다. 제갈량 사후, 퇴각을 하다가 정사와 비슷하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마대를 끌어들여서 일을 꾸민다.
최후도 굉장히 극적한데, 제갈량은 죽기 전 "위연이 모반하거든 열어보라."며 지령이 담긴 주머니를 양의에게 남겼다. 양의는 반란을 일으킨 위연을 만나러 가서, 주머니에 든 지령대로 위연에게 '''"누가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세 번만 말하면 군권을 위연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위연은 코웃음을 치며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소리치자, 제갈량의 밀명을 받고 위연의 부하인 척 위장잠입했던 마대가 '''"내가 너를 죽이겠다!"'''라며 득달같이 달려와서 목을 베어버렸다.
원래 반란을 일으킨 수장은 삼족을 멸해야 하나 유선은 역도인 위연의 과거 공을 보아 그를 장례지내주었는데, 급박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충절을 보아 사후 대접을 후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오나라 군주 손권도 위연이 용맹하지만 마음은 바르지 못하다고 깐다.
여담으로 일기토로 '''사마의'''에게 패한 적이 있다. 물론 진짜 실력으로 패했다기보다는, 호로곡 전투 이전 사마의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일기토를 건 뒤 달아난 것이지만, 연의상에선 문관의 이미지로 나온 사마의가 일기토에 직접 응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게다가 사마의는 '''후반부 촉나라 무력 원탑'''인 위연이 거짓패배해서 도망가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추격하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마의는 자신의 무예에 자신이 있었던 걸까? 결국 결론은 이하 둘 중 하나로 귀결되는데: 1. 위연은 일기토로 사마의를 해치울 자신이 없어서 제갈량의 계책을 집행했으며 위연이 사마의에게 패배해도 납득이 갈 정도로 사마의의 무력이 높았거나 2. 사마의가 무력 허접인데 위연은 상바보라서 쉽게 사마의를 해치울 기회를 버렸고, 사마의도 상바보라서 너무 뻔한 유인책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전자든 후자든 둘다 말이 안된다. 하여 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삼국지 매체에서 일기토 부분을 삭제한다. 현대에서 굳혀진 문관 사마의의 이미지도 크고, 창작임을 감안해도 사마의의 일기토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4. 기타


의외로 위연, 오의, 왕평, 장억, 마충 등 후세대 장수들이 이전 세대보다 뒤떨어진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다 날려먹어서 쪽수가 후달린 것뿐이지. 오히려 후반기 장수들이 전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생의 대부분을 유비따라 고난의 행군하며 보낸 관장조보다 뛰어났다.[26] 반골의 상이란 캐릭터성과 촉장 2세대 이후는 평가가 안 좋지만, 나관중의 버프 덕분에 무력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인지도도 높은 편이다.
현재 중국에서도 위연의 평가는 그럭저럭 좋으며, 위연묘와 위연 사당까지도 만들어져 있다. 연의에서도 제갈량의 북벌 당시 가장 용맹을 보여주는 이는 위연으로 묘사된다. 다만 반역자의 이미지가 강한 건 본토인 중국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저지른 짓을 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하지만 근래에는 정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정사에서는 반란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지면서 재평가받는 중. 이 과정에서 "반란이 아니다 → 잘못이 없었다" 는 식의 논리로 위연을 충신으로 포장, 제갈량이 위연의 계책을 따랐으면 북벌은 성공했을거라는 식의 위연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 두 사람의 대립 문제에서 양의가 일방적인 나쁜 놈이라고 매도, 정사와 연의를 짬뽕하여 제갈량을 "애꿎은 위연을 반역분자로 모는 악덕상사"로 까는 등 문제점들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설은 단순히 삼덕들 사이에서만 돌아다니는게 아니라 일부 창작물에서까지도 채용하고 있다.[27] 심지어 자칭 삼잘알이라고 떠드는 영상 제작자나 블로거들이 제갈량이 위연을 탄압했다느니, 제대로 쓰지 못해 망쳤다느니 같은 소리를 사실인양 떠드는 내용을 버젓이 올려대고 있다. 그러나 진위여부도 불분명한 자오곡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걸 위연빠 및 제갈량 안티들이 왜곡하고 확대해석해서 그렇지, 정사에서 제갈량은 위연을 탄압한 일이 없고, 오히려 두텁게 대우해줬다. 위연이 거듭 승진을 하던 시기는 바로 제갈량의 북벌기였으며, 평소에 인망이 없어서 유염 등과도 갈등이 생기며 불화를 만들자 제갈량은 위연의 편을 들어서 유염을 질책했다. 제갈량 사후에 위연이 내분을 일으킨 것도 어떻게 보면, 제갈량의 중재가 없는 촉한에서 위연의 편이 될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양의와 위연이 서로 상대편을 반역분자로 내몰았을 때, 촉한의 대신들은 모두 양의를 옹호했으니...[28]
20세기 들어서 마오쩌둥은 군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상쿤을 "그는 위연이다!" 라고 하면서 숙청을 했고, 양상쿤은 실각했다가 덩샤오핑때 돌아와서 실권이 없는 국가주석을 맡는다. 여담이지만 덩샤오핑은 자신에게 버금갔던 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상쿤을 엄청나게 견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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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의 신둥현에 있는 위연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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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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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의 상

4.1. 팬덤


삼국지의 경우 삼국지연의라는 걸출한 고전의 영향으로 24사 중에서 유독 아이돌 팬덤화된 경향이 강한데, 위연 역시 심각한 빠와 까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빠질로는 한때 파성넷 등에서 "반평생 중원을 떠돌다 주공을 만났고 이제야 그를 위해 죽는다. 미망이 있고 여한이 있겠느냐만은, 다만 허도의 흙을 주공의 토봉에 뿌리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일 뿐이다."라는 위연의 유언이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원래부터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는데, 꼬꼬마들이 사실 확인을 옳게 안하고 여기저기 퍼서 올리고 해서 네이버가 원조네, DC가 원조네...하는 일들이 있었다.
물론 사서에는 그런 말 없다. "반평생 중원을 떠돌다."라는 문구부터가 위연이 유비의 부곡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영 이상하다. 삼국지연의의 위연이나 할 법한 소리. 또한 저 거짓 유언을 작성했다는 인물은 나중에 자신이 만들고 조작했다는 걸 실토하면서도 "위연 정도면 저런 유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어울리잖아."라는 식으로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고 한다.
여러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지용을 겸비한 우수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큰 실적으로 인하여, 앞세대의 무장들에 뒤지지 않는 전공을 남긴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위연을 옹호하는 것이 너무나 지나쳐서, 위연이 살아있던 시대에 훌륭한 여건을 만들어준 촉군의 상황을 지나치게 무시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위연도 그러한 자만심과 통찰안의 부족으로 반역을 저질렀음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위연이 반역자로 몰려서 저평가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졌던 공훈에 대한 자부심에 대한 비판도 반드시 곁들여져야할 것이다. 위연이 너무나 저평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위연빠들이 대표적으로 무시하는 분야가 전략과 보급에 대한 통찰인데, 위연에게 그러한 상황을 제공해준 동료들에게 보인 행위와 경멸하고 욕하는 짓거리 등을 보면, 도저히 훌륭한 군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반면 까들은 위연의 군공마저 물고 늘어지며, 유비와 제갈량을 따라다니며 '''주워 먹었다'''는 식의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양계전투는 위연의 대표적인 공인데, 이것을 제갈량이 위연이 이길 판을 짜줬기 때문에 위연이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양계 전투는 제갈량이 적절한 시기에 그 임무에 맞는 위연과 오의를 파견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니만큼 이 전투에 대한 1차적인 공은 일선에서 군을 지휘한 위연과 오의에게 돌아가야 한다. 후주전에서는 '이 해, 위연이 양계에서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했다(是歲, 魏延破魏雍州刺史郭淮於陽谿)'며 오의의 이름마저 살짝 빼고 위연을 그 주체로 삼고 있는 만큼 위연이 양계에서의 승전의 공이 없다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논리다.[29] 또한 위연전의 '사졸을 잘 양성했다(旣善養士卒)'등의 기록으로 알수 있듯이, 북벌 당시 촉군의 강성함에서 위연의 정예부대도 일익을 담당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위연에게 전권이 있었다면 북벌에 성공했을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바둑판을 움직이는 능력(전략)과 바둑알로서의 견고함(전술)을 동일시하는 오류만 봐도 위연빠들이 '''군사능력'''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도 보듯이, 제갈량은 위연 같은 정예부대를 공격부대로서, 나머지 병력들은 다른 전선이나 후방을 견제하는 병력으로서 썼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위전쟁에서 촉의 전략이 성공하면 위연도 성공했지만, 판을 짜던 제갈량의 전략이 어긋나면 위연도 막혔다'는 것이다. 두 결과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생각이라는 소리다.
결국 위연은 '''우수한 능력과 막장의 처세'''를 가진 장단점이 모두 큰 인물이었고, 결국 그 단점으로 인해 국가적인 위험을 몰고 왔다. 뛰어난 재능과 전공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불화하여 끝내 자신도 비극에 휘말렸기 때문에, 사서에도 그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의 마지막 실책 하나가 그 이전의 공들을 모두 덮어버리고도 흘러 넘치기 때문이다.

5. 미디어 믹스



[1] 장비는 자타공인 유비 군영 내 3인자에다가 관우랑 함께 당대 최고의 무장이였다. 그를 제쳤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진다.[2] 이것이 훗날 자오곡 대책으로 알려지게 되는 떡밥이 되지만, 후술하듯 통상적으로 알려진 자오곡 계책과 진수의 본전에 나오는 위연의 제안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3] 위의 자오곡 대책과 다르게 정확히는 위연은 개전하기 전에 사천분지를 통과해 서안을 치려고 했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런 와중 북벌이 꼬이게되자 나오게 되었다.[4] 화양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둘 중 어느 하나를 편들지 않고 이들이 화목하지 않은 걸 한스럽게 여겨 감척론(甘戚論)이라는 글까지 지어 두 사람을 깨우쳐 보게 하려 했으나 둘은 그러지 못하였다 한다.[5] 다만 그렇다고 곽회에게 패한 강유를 예로 들며 강유보다 위연이 우월하다고 평하기는 조금 힘든 게, 두 경우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위연은 제갈량 및 촉 본국의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 있던 반면, 강유는 지원을 받지 못하며 철저히 아웃복싱 위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위연 역시 강유처럼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그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6] 〈선제기〉의 기록에 의할 시, 촉군의 손실은 1만에 달한다는데, 이 시기 군의 규모나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 기록을 볼 때 1만이 죽어나갈 정도면 촉군은 더 버틸 것도 없이 와해되거나 익주로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이후에도 사마의는 지키기를 계속하고, 촉군은 적지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가 이엄의 태업으로 인한 군량 부족으로 퇴각하고, 그 와중에 장합은 무리한 추격을 강요받고 전사한다.[7] 한편 위략은 본전과는 다른 기록을 전하는데 제갈량이 위연 등에게 '내가 죽은 후에 삼갈뿐 다시는 (북벌하러) 오지 마라'고 말했고 위연에게 은밀히 장례를 맡겼는데 위연이 이를 숨겨 포구에서 발상했다. 이때 사이가 좋지 않은 양의가 위연을 습격해 위연은 싸우지도 않고 패주하여 추격해 온 군대에 죽었다는 것이다. 배송지는 이를 두고 이는 적국에서 전해 들은 말로 보이니, 본전(本傳, 즉 위연전)과 더불어 다투어서 살필 수 없다고 했으며 자치통감도 본전의 서술을 따른다.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이 제갈량의 유언을 위연만 들은게 아닌데 이후에도 촉한은 북벌을 계속한다. 따라서 위략에 나온 제갈량의 유언이나 내용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8] 잔도는 지금도 관광명소로서 존재하는데, 사진이든 직접 가봤든 본 사람이라면 그 아찔한 절벽을 지나갈 유일한 길을 없애버린 위연의 행동이 얼마나 머저리 같은지 알 것이다. 무한도전 해외극한알바/비판 항목 '정형돈-하하' 단락에서도 잔도 보수를 시킨 것이 무지하게 욕을 먹은 이유가 왜 있는지 잘 나와있다. 야곡 루트를 불살라버린 덕에 그쪽 루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덤.[9] 화양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이미 자신의 사후 장완을 재상으로 삼으시라 유선에게 건의를 해둔 상황이었다. 즉 위연이고 양의고 간에 문제를 일으킬 거 같으면 어떻게 하라는 사전 지시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제갈량이 죽기 전에 유선의 명으로 이복이 이미 군중에 다녀오기도 했고.[10] 여예전에 보면 제갈량 사후 달아났던 병사들이 군대에 가기 싫어 호적위조를 하다가 여예에게 적발되어 시정되는데 위연이 이끌던 군세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이 병사들일 가능성이 있다.[11] 이 위씨가 조위를 지칭하는지, 위연을 지칭하는지 논쟁이 있는데, 삼국지 팬덤에서는 전자에 가능성을 좀 더 둔다. 위연을 지칭했다기에는 그의 삼족까지 죽여대면서 고인능욕까지 해댄 양의가 높은 자리에 못 올랐다며 느닷없이 위연을 따를 것 그랬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은 개연성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12] 위연의 속내가 무엇이었든 위연은 제갈량의 후계자 자리는 당연히 내 차지라는 설레발이 전부였지 위에 투항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투항한다면 자기가 지금 누리는 지위를 비롯한 대부분을 버리고 위로 가야하는데, 생년은 불분명하나 이 무렵이면 중장년 나이대일 그가 얼마 전까지 싸우던 적국에 투항한다는 판단을 최우선으로 할 리가 없다. 물론 제갈량의 후임이 자기라는 착각은 제대로 김칫국 마시는 일이었지만.[13] 허나 3족을 멸한 건 양의의 사적제재일 가능성도 있다. 양의가 독단으로 그런 짓을 했다면 추궁받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는데, 당시에는 양의와 위연이 서로를 반역이라고 상소했고, 대신들은 양의를 편들었던 상황이다. 따라서 위연이 반역을 일으켰다고 거의 기정사실로 만든 상황에서 양의가 사적제재를 가했고, 설령 멸족 조치가 죄에 비해 과분했다는 게 사후에 밝혀졌어도 촉한 전체가 동참한 거나 마찬가지인지라 양의를 추궁할 수도 없고, 위연 또한 완전히 결백한 것도 아닌 데다 인간관계도 좋지 않았으니 굳이 그 가족의 억울함을 신경쓸 사람도 없었다. 현대적인 법치주의로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14]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 영향도 없었을 리는 없다. 당장 양의가 위연의 난을 진압했음에도 크게 상을 받지 못한 것도 물론 이미 제갈량이 장완을 후계자로 삼은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한 것을 책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15] 다만 양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지 계한보신찬에서 위연은 강직하고 용맹하며, 어려움에 임하여 명령을 받아 외적을 막아 싸우고 국경을 지켰다. 그러나 협력하지도 않았고, 조화를 이루지도 않았으며, 절개를 잊고 반란의 뜻을 언급했다. 그래서 최후의 행동은 증오를 받았고, 최초의 공적은 아낌을 받았는데, 이것은 실재로 그의 본성이었다라며 반란자라고 언급한다.[16] 따지고보면 반란 의도가 없는데 팀킬 시도를 한 것은 오히려 더더욱 위험하다. 자기가 원하는 거 안 들어준다고 수틀려서 같이 망하자고 트롤링하는 공대 내부의 적을 놔두는 것이 나을까, 빨리 처리하는 것이 나을까.[17] 실제로 제갈량 사후에도 촉은 어떻게든 위와의 싸움을 해나갔다. 장완의 병사, 비의의 암살, 암군 유선과 그에게 붙은 황호와 마막 등의 막장이 이어져서 문제였지만.[18] 그것도 사실 조위 후반기는 이미 사마씨가 모든 권력을 장악했던만큼 실질적으로는 위가 촉보다 먼저 무너진 상태였다.[19]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촉에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관우다. 이쪽도 성격이 만만찮았는데, 특히 좋은 배경을 갖춘 상류층 인사들(서주의 부호 가문 출신인 미방, 형주의 명사인 반준과의 대립이 대표적인 예시다.)과 마찰이 심했다. 장비가 아니라서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흔히 알려진 불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장비는 능력과 인품이 있는 사람들은 신분이나 지위고하 막론하고 우대했다. 단, 밑줄에 언급되지만 관우의 군인으로서 충성심은 위연과 비교하는 것이 관우에 대한 실례이며, 관우가 자부심이 너무 강해 오만했지만 위연과 양의처럼 대놓고 내부의 불화를 일으키거나 마찰을 일으키는 성격도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가 오만한 태도를 주로 보였던 건 타 세력인 위나 오지 촉이 아니고, 미방에 경우 오나라 기록에서 진작부터 내통했다는 점과 군령을 위반한 죄를 저질렀다. 황충과 같은 대열인 사방장군에 오르자 그의 활약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자기랑 같은 동렬에 올랐다며 불평했지만 비시가 점잖게 타이르자 납득하는 면모와 부하들을 아끼는 면모를 보여줬다.[20] 또한 공손찬도 보잘것 없는 위치에서 하북의 강자가 된 점이나 사대부를 기피했다는 점에서 위연과 비슷한 기질이 있었다.[21] 유비는 법정이나 양의(양의는 유비 시절 좌천되었으나 하필 유비가 어떻게 해서든 품고 가려 노력하던 유파와 마찰을 빚은 탓이지 단순히 성격탓이라고 보긴 힘들다.) 같은 사례처럼 능력만 있다면 성격이 모나도 가급적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장비는 능력있는 사람은 출신이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우대했다.[22] 물론 당시 조조는 이미 한중에 대해 손을 놓은 상태였고 익주 내부의 일이 더욱 중요했다. 당장 한중전에서만 해도 반란이 일어나고 이민족들에 대한 방비도 필요했다. 실제 지도를 보면 파가 지형상으로 익주의 중간에 위치하며 장비를 파중에 주둔시켜 익주내에서 일이 터졌을 때 가장 발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한것이기 때문에 '장비를 제쳤다'라는 말은 옳지 않을 수 있다. 물론 한중도 주요거점이기 때문에 위연정도의 무장을 남겨놓은 것은 옳은 행동이다 .[23] 양양기 동윤전에서 나온다. 이를 채택한 연의에서도 손권은 촉의 사신과 대화 때 위연 이야기만 듣고도 용맹하지만 마음은 바르지 못하다고 디스했다. 물론 그 손권도 인성이 더 지저분했던 반장을 잘도 중용했고, 사실 오나라 장수들을 보면 위연에게 뭐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인성 나쁜 장군들이 많다.(다만, 손권은 반장의 능력은 인정해도 인성에서 학을 뗐는지 우장군에 임명하고도 그 이상의 관직은 주지 않았으며, 반장 사후 그의 아들 반평을 행실 불량이라는 이유로 당시 촌구석이던 회계로 쫓아냈다.)[24] 사실은 위연의 편을 많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위연과 더불어 촉의 왕따 양대 산맥인 양의조차도 비의와는 그럭저럭이었으나 위연은 전혀 아니었으니 인재 한 명이 아까운 상태인 제갈량으로서는 위연을 써먹으려면 일단은 그를 감싸줄 수밖에 없었다.[25] 범증은 유방의 관상이 제왕의 상이라며 한사코 죽이려고 했고, 유비는 왕으로 임명될 때 난데없이 아버지한테서 '네가 반란의 상이라던데.'라는 얘기를 들어서 식겁하고 거듭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한다. 유비는 진짜로 반란했지만.[26] 그런데 반대로 전과라는 측면에서 좀 더 두드러졌다는 걸로 후반기에 활약한 후세대들이 관장조보다 무조건 뛰어난 장수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 역시 섣부른 판단이다. 이 1세대 장수들은 대부분 유비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았고, 촉이 멸망할 때 기록들 대부분이 유실된지라 이들의 공적이나 활약상에 대한 것들을 그나마 남은 기록이나 위나 오의 기록과 교차검증을 해야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저런 부실한 기록들에서도 관우와 장비는 위와 오도 인정한 당대 최강의 장수들로 평가받았고, 마초는 유비,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하던 군벌, 황충은 유표 휘하 때 중랑장을 지내면서 기록은 자세하지 않지만 능력과 공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데다가 위의 네임드 장수 하후연을 격파했다. 조운은 모범적인 군인이자 최고사령관의 최측근, 돌격대장으로서 평가받았다.[27] 대표적인 예가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제갈량은 충신이면서도 은근 속내가 시커먼 듯한 내포까지 담고 있긴 하다.[28] 자기 계책 안 들어준다고 군부의 1인자이자 최고대신 제갈량에게 겁쟁이라고 폭언한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다는 건 정말 무례하게는 제갈량 바로 앞에서 저런 소리를 했거나 다른 곳에서 남들 들으라고 외치고 다녔을 것이다. 현대에도 상관을 함부로 모독하는 건 가벼운 죄가 아닌데, 저 시대에 저랬으면 위연은 곧바로 군법에 따라 목이 달아나도 쌌다. 저런 말 듣고도 위연을 중용하고 감싸준 제갈량이 대인배다.[29] 양계의 승전과 가정의 패전을 살펴보면 한쪽은 제대로 된 장수를 선택해 얻은 승리이고, 다른 한쪽은 잘못된 인선이 불러 일으킨 참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요소를 보면, 위연은 분명히 우수한 지휘력을 가진 맹장이었다. 물론, 가정 때는 위연도 위군에게 막혔지만...이건 제갈량의 인선미스와 장합의 탁월한 기동전이 겹친 문제다. 결국 제갈량이 실수하면 위연도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것이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제갈량 스스로도 마속을 처벌하면서 인정했다. 또 제갈량 역시 야전사령관으로서 위연이 필요했다. 이는 제갈량이 위연의 용맹을 아껴 다른 장수와의 불화가 있음에도 위연에게는 처벌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를 중재하기도 하는 등 최대한 배려해주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